2. 소설평점의 유형
평점자는 서로 다른 인생 역정과 예술적 소양, 그리고 비평의 목적을 갖고 있었기에, 그에 따라 소설평점은 서로 다른 평점의 유형을 형성했는데, 이것은 평점의 내용과 사상, 취지 등의 방면에서 소설평점을 귀납하고 분석한 것이다. 중국의 고대 문학비평사에서 소설평점이라는 것은 가장 독특한 비평 군체(群體)로 그 인적 구성도 복잡하고 평점의 목적도 상이한 데다 소설전파의 상업적 경로, 곧 서방의 영향과 통제를 매우 크게 받았다. 그래서 소설평점은 일종의 민간 색채가 농후한 문학 비평 행위였다. 이렇게 농후한 민간 색채는 또 고대 통속소설의 예술 심미적 품위와 서로 일치해서 그로부터 중국 고대문학예술사상 독특한 깃발을 세우게 되었다.
소설평점의 구성에 대해 분석을 하다 보면 전통적인 문학비평가와 비교할 때 소설평점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참여한 것은 매우 적으며, 심지어 대량의 소설평점자의 실제 이름마저도 묻혀버려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소설평점자 역시 그 특수성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직업적인 성격이 명확하게 증강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문학비평가의 대열에서 소설평점자는 직업적인 성격이 가장 강했던 비평 군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고대에 소설평점자들은 대체로 문인이나 서방의 주인, 그리고 소설가 자신이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소설평점자들은 비평의 목적이나 정감 취지, 이론 사상 면에서 모두 아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에 따라 소설평점은 서로 다른 이채를 띠고 풍격이 크게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개괄해서 말하자면 문인의 소설평점은 비교적 개인의 정감을 풀어내는 것을 중시하는데, 그들이 선택한 소설 작품 역시 명확하게 정감을 지향하고 있다. 서방의 주인이나 그 주변의 하층 문인들은 소설평점에서 상업적인 전파를 그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다. 소설과 비교적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인 평점과 소설가 자신의 평점은 평점의 주체적인 정감과 상업적이 전파성을 모두 고려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소설평점본 하나하나를 놓고 보자면, 상황은 비교적 복잡해서 억지로 그 영역을 나눌 수 없으며, 그 가운데 비교적 중복과 교차가 많이 있기 때문에 위에서 나눈 것 역시 그 주체만을 놓고 말한 것일 따름이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구분에 따라 소설평점을 대략 세 가지 기본적인 유형, 곧 ‘서상 형(書商型)’과 ‘문인형’, 그리고 ‘종합형’으로 나누어 서술하겠다.
1) 서상 형(書商型): 소설평점의 상업성
소설평점은 그 인적 구성으로 보자면, 서방 주인과 문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이 부류는 서방과 문인의 공동 참여로 확장된다. 비록 그 발전 과정에 변화가 있고, 인적 구성 역시 날로 복잡해지긴 했지만, 서방 주인의 참여는 여전히 소설평점의 중요한 실마리였기에 서방 주인과 그 주위의 하층 문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소설평점자 가운데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다. 서방은 통속소설의 창작에 참여하는 동시에 평점을 소설 전파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렇듯 창작과 평론을 하나로 연계하는 행위는 명청, 특히 명대의 통속소설 발전사에서 중요한 현상이고, 명청대 통속소설의 예술 상품화의 중요한 징표이기도 하다.
명청대의 소설평점사에서 서방 주인과 그 주위의 하층 문인들이 소설평점에 참여한 데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서방 주인의 직접적인 참여로 그 이름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런 방식은 많이 보이지는 않으며, 필자는 소설평점사에서 위샹더우(余象斗), 샤뤼셴(夏履先), 피겅산팡주런(筆耕山房主人), 위안우야(袁無涯), 루윈룽(陸雲龍) 등 다섯 가지 예만 보았을 뿐이다.
위샹더우(余象斗; 약 1560~1637년)의 자는 원타이(文台)이고 호는 양즈산런(仰止山人)이며, 푸졘(福建) 졘양(建陽) 사람이다. 위 씨는 대대로 책을 찍어내던 집안 출신으로 그 조상들은 송대에 이미 각서(刻書)로 이름을 날렸다. 예더후이(葉德輝)의 《서림청화(書林淸話)》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송대에는 각서가 극성했는데, 민중 지방이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그리고 민중에서도 졘안이 최고였는데, 졘안에서도 위 씨 가문이 최고였다.(夫宋刻書之盛, 首推閩中, 而閩中尤以建安爲最, 建安尤以余氏爲最.)” 명 만력 연간에는 최전성기에 이르렀는데, 위샹더우는 바로 그 때 위 씨 집안 각서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일찍이 그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묘년(만력 19년, 1591년) 가을, 재주가 없어 유가의 업을 폐하였으니[과거 시험 공부를 작파하고], 집안 대대로 서방을 하며 책 상자를 판각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辛卯之秋, 不佞斗始轍儒家業, 家世書坊, 鋟笈爲事.)” 이것으로 그가 일찍이 독서하고 관직을 구했으나 연이은 시험에 급제하지 못해 유가의 길을 접고 각서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특수한 경력이 이후에 통속소설의 창작과 평론, 간행에 종사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으며, 최소한 문화 수양에 있어 그가 이런 일에 종사하게 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곧 그가 일정한 문화적 소양을 갖춘 과거 시험에 급제하지 못한 문인이었기에 위샹더우는 소설을 간행하는 동시에 자기 손으로 소설을 엮어냈던 것이고, 동시에 상업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서방 주인이었기에 일반 독자의 요구에 영합해 비교적 일찍부터 평점을 통속소설의 간행에 끌어들여 소설전파사와 소설 평점사에서 “상평, 중도, 하문”이라는 상업적인 효과가 풍부한 소설 간행의 ‘평림’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서방 주인으로서 위샹더우가 소설 창작과 평론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독특한 상업 문화의 배경에 힘입은 바 크다. 명대의 예성(葉盛)은 《수동일기(水東日記)》 2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서방에서 하는 말로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이 허위로 소설 등의 잡서를 짓되, 남쪽 사람들은 광무왕 리쭤쥐(李左車)나, 차이융(蔡邕), 양원광(楊文廣)에 대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북쪽 사람들은 <칭허 현(淸河縣) 계모대현(繼母大賢) 등과 같은 것을 즐겨 말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今書坊相傳射利之徒僞爲小說雜書, 南人喜談如漢小王廣武, 蔡伯喈邕, 楊六使文廣, 北人喜談如繼母大賢等事甚多.)” 이것으로 당시 서방에서 소설을 각인하는 일이 성행했고, 통속소설을 엮어내는 슝다무(熊大木), 위사오위(余邵魚) 등과 같은 서방주인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방 주인들 가운데 평점을 통속소설에 끌어들인 최초의 인물은 위샹더우로 현존하는 평점본은 《수호전》과 《삼국연의》 ‘평림’과 《춘추열국지전》 세 가지다.
서방 주인의 신분으로 소설을 평점한 또 다른 인물은 샤뤼셴(夏履先)이다. 그는 호를 솽거주런(爽閣主人)이라 하고 명말 항저우(杭州)의 서방 주인이었는데, 생애와 사적은 자세하지 않다. 그가 평점한 소설은 숭정 연간에 간행한 《선진일사(禪眞逸史)》이다. 이 책에는 “칭시다오런 편차, 신신셴뤼 평정(淸溪道人編次, 心心仙侶評訂)”이라 서(署)했다. 칭시다오런은 명말의 팡루하오(方汝浩)로 이 책말고도 소설 《선진후사(禪眞後史)>, 《소매돈륜동도기(掃魅敦倫東渡記)》가 세상에 알려져 있다. 본문 앞에는 <범례> 여덟 칙(則)이 있는데, “고항 솽거주런 리셴 보지(古杭爽閣主人履先甫識)”이라 제하고 그 내용 가운데에는 “솽거주런이 평소 기이한 것을 좋아했는데, 조금 섭렵한 뒤에는 곧 버렸다. 칭시다오런이 이 책을 보여주니, 그것을 읽으매 아이 씨 집안의 배를 먹는 듯 상큼하였으나, 스스로 풀리지 않는 바가 있어 드디어 더불어 다시 순서를 엮고 평을 하고 정정을 해 간행했다(爽閣主人素嗜奇, 稍涉牙後輒棄去. 淸溪道人以此見示, 讀之如啖哀梨, 自不能釋, 遂相與編次評訂付梓)”고 하였다. <범례> 뒤에 도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리셴의 성이 샤(夏)라는 것을 알겠고, 또 이것으로 평자인 ‘신신셴뤼(心心仙侶)’가 곧 서방 주인인 샤뤼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서는 40회로 ‘팔괘’를 서(序)로 삼아 8권으로 나누었고, 각 권은 각각 5회이며 8권의 평점자는 제서(題署)가 하나 같지 않은데, 순서에 따르면, 신신셴뤼(心心仙侶), 비화쥐스(筆花居士), 량후위써우(兩湖漁叟), 옌보댜오투(烟波釣徒),, 쿵구셴성(空谷先生), 댜오룽츠커(雕龍詞客), 슈후원모(綉虎文魔), 멍줴쾅푸(夢覺狂夫)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샤뤼셴의 별호로, 결코 많은 사람이 평정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각 권의 총평 가운데 이미 분명하게 정보가 드러나 있다. 이를테면, ‘건집총평(乾集總評)에서는, “[신신셴뤼]는 성에 차지 않아 비화자이에서 《일사》 건집을 비교하였다.(揪然不樂, 乃于筆花齋較《逸史》乾集)” 이것으로 비화쥐스가 신신셴뤼임을 알 수 있다. 또 8칙의 총평은 일관되게 앞뒤로 서로 이어져 있는데, ’감집 총평(坎集總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일찍이 술잔을 들고 홀로 서재에서 독작을 하며 《일사》를 감집까지 읽었다.(余嘗把一卮, 獨酌小齋, 讀《逸史》至坎集.)” 또 ’간집 총평(艮集)‘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구나. 린다쿵은 ’단란‘으로 호를 삼고, 나는 간집에서 ’감(坎)‘의 오묘함을 얻었다.(旨哉, 林大空之以’澹然‘号也, 吾于艮集而得坎之妙.)” 모두 작품 속의 평점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렇듯 소설 속에 여러 명의 평점자를 드러낸 것이야말로 서방 주인 특유의 상업적 수단인 것이다.
이런 상업적 수단은 명말 비겅산팡(筆耕山房)에서 간행한 《의향의질(宜香宜質)》, 《변이차(弁而釵)》, 《추호로(醋葫蘆)》 세 가지 평본 중에서도 체현되었다. 이 세 가지 책의 작자와 평자는 제서(題署)가 일치하지 않는다. 《의향의질》에는 “쭈이시후신웨주런 저, 쳬샤오광푸룽피저 평(醉西湖心月主人著, 且笑廣芙蓉僻者評)”이라 제(題)했고, 《변이차》에는 “쭈이시후신웨주런 저, 나이허톈허허다오런 평(醉西湖心月主人著, 奈何天呵呵道人評)”이라 제(題)했으며, 《추호로》의 제서는 더욱 복잡해서 1권에는 “시쯔후푸츠쟈오주 편, 쳬샤오광푸룽피저 평(西子湖伏雌敎主編, 且笑廣芙蓉僻者評)”이라 제하고, 2권에는 “눙웨주런, 주쭈이산런 동평(弄月主人, 竹醉山人同評)”이라 제하고, 3권에는 “다티유예 평(大堤游冶評)”이라 제하고 4권에는 “눙웨주런, 주쭈이산런 동평(弄月主人, 竹醉山人同評)”이라 제하고 권수(卷首)에는 또 <서(序)>가 있는데, “비겅산방쭈이시후신웨주런 제(筆耕山房醉西湖心月主人題)”라 서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책이 사실은 작자 자신이 짓고 간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른바 쭈이시후신웨주런은 곧 시쯔후푸츠쟈오주이고, 또 서방 주인인 비겅산팡주런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두 책에는 또 작자의 자평(自評)이 있는데, 이것에 의거하면 이렇듯 번다한 평점자는 서방 주인의 수단이기도 한데, 그런 까닭에 이 세 가지 책은 서방 주인인 비겅산팡주런이 스스로 엮고, 스스로 평하고, 스스로 간행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명대의 소설평점 가운데 위에서 말한 세 명의 서방 주인말고도 명말 쑤저우의 각서가(刻書家)인 위안우야(袁無涯)도 일찍 《신준리씨장본충의수호전(新준李氏藏本忠義水滸傳)》의 평정(評定)에 참여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위안 씨가 양딩졘(楊定見)의 “줘우 선생이 비정한 《충의수호전》(卓吾先生所批定《忠義水滸傳》)”을 얻고 “마치 더 없는 보물을 얻은 듯 기뻐하며(欣然如獲至寶)” “세상에 공개하고자 했다(愿公諸世)”고 말했다. 하지만 쉬쯔창(許自昌)의 《저재만록(樗齋漫錄)》 6권의 기록에 의하면, 위안우야, 펑멍룽 등이 일찍이 서로 교열과 대조를 위해 여러 번 주고받았는데, 그 가운데 평정(評定)을 포괄하고 있다.
그 무렵 민(閩) 지방에 이름을 즈(贄)라고 하는 리줘우라는 이가 있어……세상사에 분노하고 증오하였는데, 그 역시도 이 책을 좋아해 장구(章句)마다 비점(批點)을 하였다.……그의 문인이 이것을 가지고 우중(吳中)에 이르니 우중의 명사 위안우야, 펑멍룽이 리 씨의 비점을 몹시도 좋아해 그를 덕망이 높은 이로 떠받들고, 그것을 보고 애호하였기에, 서로 교열과 대조를 위해 여러 번 주고받으며 오류를 삭제하였다.(傾閩有李卓吾名贄者……乃憤世疾時, 亦好此書, 章爲之批, 句爲之點……李有門人, 携至吳中, 吾士人袁無涯, 馮夢龍, 酷嗜李氏之學, 奉爲蓍蔡, 見而愛之, 相與校對再三, 刪削訛謬.).
또 위안중다오의 《유거시록(游居柿錄)》 9권에서는 위안우야가 남긴 “신각탁오비점수호전(新刻卓吾批點水滸傳)”을 얻었는데, 그가 알고 있는 리줘우 비본과는 “약간 증가되었을 따름(稍有增加耳)”이다. 이것으로 위안우야가 《수호전》의 평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윈룽(陸雲龍) 역시 명대 소설평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루윈룽의 자는 위허우(雨侯)이고 호는 추이우거주런(翠娛閣主人)으로 쳰탕(錢塘) 사람으로, 생졸년은 대략 명 만력 14년에서 청 순치 10년(1586~1653년)이다. 루윈룽은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지만 고생을 해가며 끊임없이 공부했고, 명예와 절개를 중시하고 덕행을 쌓았다. 일찍이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숭정 연간 이후에는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끊고 저술에만 전념하면서 각서(刻書)를 운영했다. 각서하는 가게의 이름은 정샤오관(崢宵館)이라 하고, 이곳에서 엮어내고 평정(評定)한 고금의 시문과 명말 소품들은 당대에 매우 높은 명성을 얻었다. 이를테면 《명문귀(明文歸)》, 《황명십륙가소품(皇明十六家小品)》, 《추이우거 평선 중보징 합집(翠娛閣評選鍾伯敬合集)》 등이 그러한데, 그런 까닭에 그는 다른 무엇보다 선문가와 평점가로 ‘명사’가 되었다. 그가 지은 소설로 주요한 것은 《위충현소설척간서(魏忠賢小說斥奸書)》와 《형세언(型世言)》 등이 있다. 전자는 “정샤오관 평정(崢宵館評定)”이라 서(署)했으며, 이것으로 이 책이 루윈룽이 스스로 엮고 스스로 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설평점사에서 서방 주인이 직접 소설의 평점에 참여한 것은 단지 이상의 다섯 예에 지나지 않는다. 청대에 들어온 뒤에는 이런 현상이 이미 드물게 보이는데, 이것으로 소설평점이 명말청초의 단계를 지난 뒤에는 이미 점차 문인들의 손에 넘어갔고, 청 이후에는 문인들의 평점이 분명하게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명대의 소설평점가는 매우 큰 정도로 서방 주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는데, 서방 주인들은 문화 예술상의 소양이 제한적이었기에, 소설을 간행하는 모든 서방 주인들이 소설평점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설평점(주로 명대의 소설평점) 역사에서 서방이 소설평점에 참여하는 가장 통상적인 방식은 그 주변의 하층 문인들을 모아 평점에 종사하게 만들고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 간행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런 방식을 채용한 것은 런서우탕(仁壽堂) 주인인 저우웨쟈오(周曰校)가 간행한 《삼국지통속연의》이다. 이 책의 표지에 있는 ‘지어(識語)’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은 이미 몇 종이 간행되어 나왔는데, 모두 잘못되고 어그러졌다.……어쩌다 고본을 구매해 명사들을 모셔다가 거울에 비추듯 참고하고 재삼 원수를 대하듯 교열을 본 뒤 구두가 필요한 곳에는 권점을 하고 어려운 글자에는 음주(音注)를 달았으며, 지리에는 뜻풀이를 하고 전고는 고증을 하는 한편 빠진 곳은 보충하고 절목에는 그림을 넣었다.(是書也, 刻已數种, 悉皆僞舛, 輒購求古本, 敦請名士按鑒參考, 再三讎校.俾句讀有圈点, 難字有音注, 地里有釋義, 典故有考証, 缺略有增補, 節目有全像)
이것은 명확하게 책 속의 평점이 서방 주인이 “명사들을 모셔다가” 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위샹더우가 ‘평림’ 본 《삼국지》를 간행할 때에도 그 가운데 어떤 평점들은 ‘명사’가 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의 <삼국변(三國辨)> 문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방에서 상재한 《삼국연의》가 어찌 수십가에만 이를까만, 그림이 있는 것은 류 씨나, 정 씨, 슝 씨, 황 씨 네 가지 성바지밖에 없으니, 쭝원탕은 인물이 추레하고 글자 역시 틀린 곳이 있어 오래 가지 못했고, 중더탕의 경우는 그 서판이 빠진 곳도 있고 글자 역시 좋지 않았다. 런허탕의 경우는 비록 지판(紙板)이 새롭긴 했지만 그 안의 내용에서는 인명이나 시사(詩詞)가 일부 제거된 것도 있었다. 다만 아이르탕 것은 그 판이 오류가 없어 선비들이 보고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 판목이 이미 [오랜 사용으로] 뭉개져서 보기에 불편하다. 우리는 명사들을 청해다 비평과 권점을 하여 교정에도 잘못이 없고, 인물이나 글자와 그림 역시 각각 생략되고 추레한 것이 없어 천하의 선비들이 보기에 편하다. 왕림하신 분들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솽펑탕에서 기록하다.(坊間所梓《三國》何止數十家矣, 全像者止劉鄭熊黃四姓. 宗文堂, 人物丑陋, 字亦差訛, 久不行矣. 種德堂, 其書板欠陋, 字亦不好. 仁和堂, 紙板雖新, 內則人名, 詩詞去其一分. 惟愛日堂者, 其板雖無差訛, 士子觀之樂然, 今板已朦, 不便其覽矣. 本堂以請名公批評圈點, 校正無差, 人物, 字畵各無省陋, 以便海內士子覽之. 下顧者可認雙峰堂爲記.)
이상의 두 가지 언명은 분명하게 광고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서방 주인들의 평점에 대한 중시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명공(名公)’과 ‘명사(名士)’의 평점이 소설의 판로를 확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뒤로 서방 주인들은 통속소설을 간행할 때 ‘평점’으로 서로 호소하며, 이미 두루뭉실하게 ‘명공’이나 ‘명사’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당당하게 당시의 사회 명사들, 특히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인물들을 “청”했다. 이러한 예가 가장 성행했던 것은 만력 중후기에서 명말까지의 단계로 이름을 도용당한 유명 인사들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쳤던 이는 리줘우(李卓吾), 천메이궁(陳眉公), 중보징(鍾伯敬), 탕셴쭈(湯顯祖) 등이었다. 대략적인 통계에 의하면 이 시기에 리줘우 평점이라 제(題)한 소설은 대략 10종 정도고, 중보징 평점이라 제한 것은 7종, 천메이궁 평점으로 제한 것은 4종, 위밍탕(玉茗堂) 평점으로 제한 것은 3종이었다. 나머지는 양성안(楊升庵)과 쉬원창(徐文長)이라 제한 것 역시 몇 종이 있었다. 그들은 소설 속에서 직접 평점자를 드러냈을 뿐 아니라 어떤 서방 주인은 표지의 ‘지어(識語)’에서도 특별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를테면 만력 43년에 간행된 구쑤(姑蘇) 궁사오산(龔紹山) 재본(梓本) 《춘추열국지전(春秋列國志傳)》은 책 이름 앞에 “천메이궁 선생 비평(陳眉公先生批評)””이라는 글자를 올려놓았고, 특별히 ‘지어’에서는 “본 서방에서 새로 펴낸 《춘추열국지전》은 모두 천메이궁이 손수 교열한 것이다(本坊新준《春秋列國志傳批評》, 皆出自陳眉公手閱)”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상 상술한 평점은 대부분 서방이 거짓으로 탁명한 것이다.
명대에는 서방 주인이 때로 장원 급제한 인물에 탁명한 평점으로 손님을 불러모았는데, 이를테면 만력 연간의 주즈판(朱之蕃)이 그러하다. 주즈판은 자가 위안졔(元介)이고 호는 란위(蘭嵎)이며 난징(南京) 상위안(上元) 사람으로, 만력 23년(1595년) 진사가 되었는데, 전시(殿試)에서 일등으로 급제하여 한림원 수찬(修撰)을 제수받고 벼슬이 이부우시랑(吏部右侍郞)과 협리첨사부사(協理詹事府事) 겸 한림원시독학사(翰林院侍讀學士)에 이르렀다. 그가 평한 소설은 만력 연간에 간행된 《삼교개미귀정연의(三敎開迷歸正演義)》로 “쥬화 판징뤄 편차, 란위 주즈판 평정(九華潘鏡若編次, 蘭嵎朱之蕃評訂)”이라 서했다. 그러나 소설 속의 평어를 보면 간략한 미비에 지나지 않아 탁명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또 주즈판은 만력 시기의 서방 가운데 늘상 이름을 도용당했던 명사로 이를테면 위샹더우(余象斗)가 간행한 《사기품수(史記品粹)》에는 “장원 주즈판 휘집, 회원 탕빈인 교정, 한림 황즈칭 동정(狀元朱之蕃匯集, 會元湯賓尹校正, 翰林黃志淸同訂)”이라고 서(署)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허구에 불과하다.
청대에 들어서자 명대의 여러 명사들은 이미 비교적 적게 탁명당했고, 명말청초의 펑멍룽(馮夢龍)이나 진성탄(金聖嘆), 리위(李漁) 등이 서방의 탁명 대상이 되어, “성탄외서(聖嘆外書)”와 같은 글자가 통속소설 간본 중에 항상 출현했다. 당연하게도 청대의 소설평점이 점차 서방 주인에서 문인들의 손으로 넘어감에 따라 청대 이래로 서방에서 탁명하는 현상 역시 천천히 소멸해갔다.
서방에서 탁명한 것은 소설 영역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이것은 명말 서방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명말 희곡가 선쯔진(沈自晋)은 당시 희곡 출판계가 탕셴쭈(湯顯祖)의 평점을 탁명한 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되는 대로 권점을 해 사람들 눈을 호도하고, 멋대로 위밍탕 비평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서방의 수단이다.(那得胡圈亂點涂人目, 漫假批評玉茗堂, 坊間伎倆.)” 쑤스쉐(蘇時學)의 《효산필화(爻山筆話)》에서도 탁명하는 풍조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명대 사람들이 옛사람들의 책을 찍어낼 때, 왕왕 옛사람의 평주를 거짓으로 편찬했으니, 이를테면, 《관자》, 《장자》……등은 모두 당송 제가의 평이 있으니, 그 의도하는 바는 옛 책에는 반드시 이를 빙자해 증보한 것인 양하는 것인데, 점차 경전 역시도 거짓으로 하는 데 이르렀다. 요즘 저자에서 전하는 《쑤스 비 맹자(蘇批孟子)》를 쑤스(蘇軾)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면, 더더욱 웃기는 얘기다.(明人刻古人書, 往往僞撰古人評注, 如《管子》、《莊子》⋯⋯等皆有唐宋諸公評, 意若古書必藉此而增重者, 漸而至于經傳亦僞之, 今市上所傳有《蘇批孟子》, 以爲出于老泉, 尤可哂也.)
서방에서 탁명하는 풍조는 당연하게도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고, 문학 예술이 상업성에 물들어 도드라지게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통속소설의 유포를 촉진시켰는데, 특히 통속소설이 사람들로부터 중시되지 못했던 시대에는 이렇게 명인의 이름을 도용해 평점하는 행위가 어느 정도 통속소설의 사회적 지위를 제고시켰다. 하물며 서방 주인 자체의 문화 수준 역시 끊임없이 제고되었는데, 이를테면 구쑤(姑蘇)의 수중탕(書種堂) 주인 위안우야(袁無涯)와 항저우의 정샤오관(崢宵館) 주인 루윈룽(陸雲龍)은 당시 사회에서 모두 일정한 명성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문화 명사와 각서가(刻書家)가 한 인물에 체현한 것이었기에, 그들이 소설평점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소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비교적 크게 작용했다. 총괄해서 보자면, 명대의 소설평점자는 서방 주인과 그 주변 문인이 주류를 형성하였기에 우리는 이 단계를 “서방이 소설평점을 장악한 단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서상 형(書商型)은 소설평점에서 비중이 비교적 큰 평점 유형으로 실제로는 두 가지 평점자의 평점 작품을 포괄하고 있다. 하나는 당연히도 서방 주인과 그 주변의 하층 문인에게서 나온 평점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상황이 조금 특수한데, 평점자는 문인이지만 그들이 소설을 평점한 것은 그 자신이 정감을 표현할 필요가 있어 그리한 것이 아니라 친구의 부탁을 받거나 서방의 요청을 수락해 간행한 소설을 위해 깃발을 흔들어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비록 서상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평점에는 명백하게 상업적인 전파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 양자는 상업적인 전파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의 추구점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의 평점 유형으로 귀납할 수 있어 잠시 ‘서상 형’으로 부르고자 한다.
서상 형 소설평점에는 다음의 세 가지 주요한 특색을 갖고 있다.
첫째, 서상 형의 소설평점은 평점의 목적상 그 자신의 추구하는 바가 있었는데, 주로 소설의 전파를 촉진하고 보통의 독자가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초창기의 통속소설과 예술적 개성이 서로 일치하는 평점 유형으로 민간성과 대중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런 평점 유형에는 심원한 이론과 사상의 서술이 없었으며 문인 투의 개인의 정감의 발로 역시 아주 드물었는데, 주로 간략한 평론과 수준이 낮고 비루한 주석이 대부분으로 일반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발전 과정일 수도 있다. 명대에는 통속소설의 주요 부류가 역사연의소설이었고, 그 창작자 역시 주로 서방의 주인이나 그 주변의 하층 문인이었다. 그들은 연의라는 말대로 역사를 통속화했다. 이와 상응해서 소설평점 역시 서방의 통제하에 문장의 의미를 통하게 하고, 전고나 주음(注音)을 위주로 하여 일반 독자가 좀더 수월하게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주평(注評)의 문장은 극히 통속적이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는데, 이를테면 만력 연간 싼타이관(三台館) 간본 《전한지전(全漢志傳)》에는 “중보징 선생 평(鍾伯敬先生評)”이라 서(署)했지만, 소설 속의 평점은 자못 간략하고 쉬웠고, 내용 가운데 나오는 명의(名醫) 쑨쭈(孫祖)에 대해 협비에서는 “후당 쑨쓰먀오가 의술에 능했는데, 그 적손이다(後唐孫思邈善醫, 乃其嫡派也)”라고 하였다. “모한자이 신편(墨憨齋新編)”이라는 서명이 있는 《신열국지》 역시 그러한데, 그 평점은 지명과 관명, 그리고 주음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그 중 제1회에서는 “태종백(太宗伯)”을 “지금의 예부상서”라 해석하고, “태재(太宰)”는 “지금의 이부상서”라고 풀이했다. 이런 평주는 의심할 바 없이 일반 독자들의 열독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색은 명대 서상 형 소설평점의 보편적인 상황이었다. 이와 동시에 서상 형의 소설평점 가운데 평론적인 성분이 비록 날로 증강되기는 했지만, 역사 사실에 대한 간략한 평술(評述)에 불과했고, 평점자가 그 가운데 기탁한 정감이나 사상은 매우 적었다. 《양한개국중흥지전(兩漢開國中興志傳)》에서는 샹위(項羽)가 처음 궐기한 것을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컨대, 샹위가 처음 일어났을 때 자제 병사 8천뿐이었으나, 다시 천리마를 만나고 순식간에 장병들이 구름처럼 모여 2, 3년도 되지 않아 왕이 되고 황제를 칭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按項羽初起, 卽有子弟兵八千, 又遇龍駒, 頃刻之間, 軍將雲集, 不二三年, 爲王称帝, 豈非天耶?)[《양한개국중흥지전(兩漢開國中興傳志)》, 만력 을사(万歷乙巳; 1605년) 동월(冬月) 잔슈민(詹秀閩) 간본.] 그 사상은 평범하고 분명해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그래서 명대 소설의 서상 형 평점은 비록 유명 인사에 탁명했지만, 가치 있는 평점은 오히려 미미하다. 청대에 들어선 뒤에는 서상 형 소설평점에 변화가 생겼는데, 주석적인 성격의 문장들이 점차 감소해 차츰 없어졌다. 하지만 소설평점의 평범한 사상 수준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문인의 손에서 나온 평점들이 그 평점의 목적이 공리적이었고, 작품 자체가 평범했기 때문으로, 평점에 사상의 불꽃을 피워 올리기 어려웠으며, 일반적으로 사물의 표면적인 현상만을 논해 간략한 평술에 머물렀다.
둘째, 서상 형의 소설평점은 평하고 있는 소설을 고무하고 소설의 정절을 간략하게 평술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런 류의 평점은 소설의 전파를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구매를 촉진하는 것을 추구하여, 구체적인 평점 중에 찬양하는 말에 인색하지 않다. 장원 주즈판(朱之蕃) 평점이라 탁명한 《삼교개미귀정연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서유기》와 《수호전》은 소설 가운데 우러름을 받는 것들이다. 그러나 《서유기》는 황당한 설에 가까워서 모두 세속적인 이야기다. 《수호전》은 유협들의 일이라 모두 난폭한 행실뿐이다. 세상 인심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꾸며 문득 신으로 화하는 데 있어 어찌 《파미정속연의》를 얻어 그 우열을 비교하지 않는가?(《西游》, 《水滸》皆小說之崇閎者也, 然《西游》近荒唐之說, 而皆流俗之談; 《水滸》游俠之事, 而皆無狀之行. 其于世敎人心, 移風易俗, 俄傾神化, 何居而得與《破迷正俗演義》相軒輊也.[《삼교개미귀정연의(三敎開迷歸正演義)》, 명 만력(萬曆) 연간 바이먼(白門) 완췐러우(萬卷樓) 간본(刊本)]
《삼교개미귀정연의》는 만력 연간 린자오언(林兆恩)과 그 제자 쭝리(宗禮)와 승려 바오광(寶光), 도사 위안링밍(袁灵明)이 삼교성회(三敎盛會)를 일으켜 세 종교를 하나로 합하는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다. 전서(全書)는 신마와 설교, 사회 비평을 잡스럽게 뒤섞어, 내용이 자못 풍부한데, 때로 해학도 있어 그런대로 읽을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평점자가 이것을 《수호전》이나 《서유기》와 비교한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 그 설교적인 측면이 두드러진 것은 더더욱 부당하다. 소설 속에서는 아무 때나 의론이 튀어나오는데, 계속 읽어나갈수록 염증이 일어 이 소설을 성공적인 작품으로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듯 지나치게 과장된 필치는 서상 형 소설평점에서 모두 발견되는 것이다. 솽거주런(爽閣主人) 샤뤼셴(夏履先)의 《선진일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은 비록 일사라고는 하나, 소설 나부랭이와는 크게 다르다. 사건에는 근거가 있고, 말에는 조리가 있으며, 백성들의 교화를 위주로 하면서 사람들 마음을 다잡는다.……곧 역사가로는 둥후(董狐)라 할 수 있고, 진정 문장가로는 쓰마쳰(司馬遷)과 반구(班固)라 하겠다.(是書雖逸史, 而大異小說稗編.事有据, 言有倫, 主持風敎, 范圍人心.⋯⋯乃史氏之董狐, 允詞家之班馬)” 이 책은 “마땅히 《수호전》, 《삼국연의》와 함께 영원히 불후의 명작으로 남을 것이니, 《서유기》와 《금병매》 등은 여기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다.(當與《水滸傳》、《三國演義》幷垂不朽, 《西游》、《金甁梅》等方之劣矣.)”[솽거주런(爽閣主人), <《선진일사》 범례>] 여기에서 과분하게 칭찬하는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곧 문인들 손에서 나온 몇몇 평점 역시 이렇게 상업적으로 고무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청대 강희 연간 뤼슝(呂熊)의 《여선외사(女仙外史)》 평점이다. 이 책에는 60여 명의 평점이 있는데, 그 자체로 농후한 상업적 의미가 있으니, 작품 속의 평점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 감상평은 적고 대부분이 고무하는 것을 평론의 주체로 삼고 있다. 광저우 부(廣州府) 태수 예난톈(葉南田)은 《여선외사》를 특히 찬미했다. “정사와 비슷하며 스스로 사람들 마음에 믿음이 가게 하는 구석이 있어 우주에 영원히 불후의 작품으로 남으리라(與正史相類, 自有孚洽于人心者, 垂諸宇宙而不朽)”[예난톈, <《여선외사》발어(《女仙外史》跋語>, 청 강희 연간 댜오황쉬안(釣璜軒) 간본] 그다지 높지 않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 가치와는 실제로 많은 차이가 있다.
서상 형의 소설평점은 작품의 고취에 온힘을 다 기울였지만, 가치 있는 사상과 예술 방면의 감상평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런 류의 소설평점은 미비의 경우 대부분 두서너 마디의 말로 되는 대로 점평(點評)을 하고 있으며, 협비는 주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회말총비는 해당 회의 정절과 인물에 대한 간략한 평술에 그치고 있다. 어떤 평어는 하나마나 한 것도 있으니, 이를테면 ‘삼종(三從)’을 풀이하면서 “집에 있을 때는 아비를 따르고, 출가하면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在家從父, 出嫁從夫, 夫死從子)”고 하는 등 극히 간단한 내용이 평점 가운데 종종 출현한다. 그리고 어떤 것은 취미가 더욱 낮아서 이를테면, 《금란벌(金蘭筏)》 평점에서는 “구탑상수(勾搭上手)”를 풀이하면서, “언어로 도발해서 춘심이 일게 하는 것을 일러 구탑이라 한다. [남녀] 두 사람이 고개를 맞대고 자는 것을 상수라 한다(言語挑動, 打動春心, 謂之勾搭也 兩人交頸而睡, 謂之上手也.)”로 하였다. 이런 내용은 서상 형 평점의 세속성과 민간성을 충분히 설명해 주는 것이다.
셋째, 서상 형의 소설평점은 평점형태상으로도 자못 특색이 있다. 평점자는 소설의 상업적인 전파를 목적으로 하기에 평점을 판매 촉진 수단으로만 보았다. 따라서 평점에는 그다지 많은 정력을 쏟지 않았고, 형식 역시 비교적 간단했다. 명대에는 서상 형의 소설평점이 미비와 협비 위주였는데, 협비의 평론 성분은 자못 담박했고, 성질은 협주(夾注)와 비슷했다. 청대에 들어선 뒤에는 협주 형식은 점차 소실되고, 서상 형의 평점 형태는 미비와 총평이 주류를 이루었다. 총괄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간이(簡易)한, 심지어 간루(簡陋)한 평점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쳰중수(錢鐘書) 선생이 《관추편(管錐篇)》에서 루윈(陸雲)의 <여형평원서(與兄平原書)>를 논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생각컨대 별다른 뜻없이 글을 짓되 일상적인 말로 담담하게 직서했으면서도 난해한 곳은 왕시즈(王羲之)와 왕셴즈(王獻之) 부자의 여러 《첩》만 못하지 않다. 열에 아홉은 문장을 논했으되, 착안한 바는 크지 않고 말도 많지는 않으니, 그 언어의 기세는 특히 후대의 평점이나 비개와 닮은 바가 있다. 이른바 ‘작업장 비평’이다.(按無意爲文, 家常白直, 費解處不下二王諸《帖》. 什九論文事, 著眼不大, 著語無多, 詞氣殊肖後世之評點或批改, 所謂‘作場或工房中批評’(workshopcriticism)也.)” 이 가운데 “작업장 비평”이라는 말이야말로 이와 같은 ‘서상 형’ 평점과 비슷하다.
이상의 세 가지 특징을 총괄하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서상 형 소설평점이 드러내고 있는 문학비평의 상업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평점 유형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선 서상 형 소설평점은 고대 통속소설 예술이 상품화됨으로써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물로 통속소설의 창작과 상업성이 없다면 서상 형 소설평점 역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런 평점 유형의 출현에도 합리성과 현실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다. 확실히 통속소설의 발아기에는 이것이 통속소설의 전파를 추동했으며, 특히 명 만력 이후 소설의 전파에 끼친 공은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문학 비평의 상업성이 통속소설의 상품화라고 하는 특색과 일치하는 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서상 형 소설평점은 소설로 가장 평범하고 가장 광대한 하층 독자를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이것은 고대 통속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감상 대열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평점 유형이 다루고 있는 측면은 넓고, 이것이 평하고 있는 소설에는 과도한 선택의 제한이 없었기에, 독자와 작품이라는 양 극단을 놓고 말하자면, 서상 형 소설평점은 고대 소설 독자와 작자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평점 유형이었다. 그래서 그 천박한 이론과 비루한 사상 때문에 그것이 갖고 있는 전파 가치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문학 비평이 상업성에 물드는 것은 합리적인 현상은 아니다. 문학 비평은 고상한 정신 활동이어야 하며, 민감하고 예리한 시각과 초월적인 사상, 그리고 재기 발랄한 언어로 창작을 단련하고, 독자를 감화해야 한다. 이런 추구하는 바를 잃으면, 문학 비평은 상업 광고의 효용만 갖게 된다. 서상 형 소설평점은 비평의 상업성을 지나치게 강화하다가 비평 자체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이론적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 존재의 현실적인 합리성이었으면서도 아주 큰 정도로 문학 비평의 본성을 잃어버린 소설평점 유형이 되어버렸다.
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유형 1
2. 소설평점의 유형
평점자는 서로 다른 인생 역정과 예술적 소양, 그리고 비평의 목적을 갖고 있었기에, 그에 따라 소설평점은 서로 다른 평점의 유형을 형성했는데, 이것은 평점의 내용과 사상, 취지 등의 방면에서 소설평점을 귀납하고 분석한 것이다. 중국의 고대 문학비평사에서 소설평점이라는 것은 가장 독특한 비평 군체(群體)로 그 인적 구성도 복잡하고 평점의 목적도 상이한 데다 소설전파의 상업적 경로, 곧 서방의 영향과 통제를 매우 크게 받았다. 그래서 소설평점은 일종의 민간 색채가 농후한 문학 비평 행위였다. 이렇게 농후한 민간 색채는 또 고대 통속소설의 예술 심미적 품위와 서로 일치해서 그로부터 중국 고대문학예술사상 독특한 깃발을 세우게 되었다.
소설평점의 구성에 대해 분석을 하다 보면 전통적인 문학비평가와 비교할 때 소설평점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참여한 것은 매우 적으며, 심지어 대량의 소설평점자의 실제 이름마저도 묻혀버려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소설평점자 역시 그 특수성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직업적인 성격이 명확하게 증강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문학비평가의 대열에서 소설평점자는 직업적인 성격이 가장 강했던 비평 군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고대에 소설평점자들은 대체로 문인이나 서방의 주인, 그리고 소설가 자신이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소설평점자들은 비평의 목적이나 정감 취지, 이론 사상 면에서 모두 아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에 따라 소설평점은 서로 다른 이채를 띠고 풍격이 크게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개괄해서 말하자면 문인의 소설평점은 비교적 개인의 정감을 풀어내는 것을 중시하는데, 그들이 선택한 소설 작품 역시 명확하게 정감을 지향하고 있다. 서방의 주인이나 그 주변의 하층 문인들은 소설평점에서 상업적인 전파를 그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다. 소설과 비교적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인 평점과 소설가 자신의 평점은 평점의 주체적인 정감과 상업적이 전파성을 모두 고려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소설평점본 하나하나를 놓고 보자면, 상황은 비교적 복잡해서 억지로 그 영역을 나눌 수 없으며, 그 가운데 비교적 중복과 교차가 많이 있기 때문에 위에서 나눈 것 역시 그 주체만을 놓고 말한 것일 따름이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구분에 따라 소설평점을 대략 세 가지 기본적인 유형, 곧 ‘서상 형(書商型)’과 ‘문인형’, 그리고 ‘종합형’으로 나누어 서술하겠다.
1) 서상 형(書商型): 소설평점의 상업성
소설평점은 그 인적 구성으로 보자면, 서방 주인과 문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이 부류는 서방과 문인의 공동 참여로 확장된다. 비록 그 발전 과정에 변화가 있고, 인적 구성 역시 날로 복잡해지긴 했지만, 서방 주인의 참여는 여전히 소설평점의 중요한 실마리였기에 서방 주인과 그 주위의 하층 문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소설평점자 가운데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다. 서방은 통속소설의 창작에 참여하는 동시에 평점을 소설 전파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렇듯 창작과 평론을 하나로 연계하는 행위는 명청, 특히 명대의 통속소설 발전사에서 중요한 현상이고, 명청대 통속소설의 예술 상품화의 중요한 징표이기도 하다.
명청대의 소설평점사에서 서방 주인과 그 주위의 하층 문인들이 소설평점에 참여한 데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서방 주인의 직접적인 참여로 그 이름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런 방식은 많이 보이지는 않으며, 필자는 소설평점사에서 위샹더우(余象斗), 샤뤼셴(夏履先), 피겅산팡주런(筆耕山房主人), 위안우야(袁無涯), 루윈룽(陸雲龍) 등 다섯 가지 예만 보았을 뿐이다.
위샹더우(余象斗; 약 1560~1637년)의 자는 원타이(文台)이고 호는 양즈산런(仰止山人)이며, 푸졘(福建) 졘양(建陽) 사람이다. 위 씨는 대대로 책을 찍어내던 집안 출신으로 그 조상들은 송대에 이미 각서(刻書)로 이름을 날렸다. 예더후이(葉德輝)의 《서림청화(書林淸話)》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송대에는 각서가 극성했는데, 민중 지방이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그리고 민중에서도 졘안이 최고였는데, 졘안에서도 위 씨 가문이 최고였다.(夫宋刻書之盛, 首推閩中, 而閩中尤以建安爲最, 建安尤以余氏爲最.)” 명 만력 연간에는 최전성기에 이르렀는데, 위샹더우는 바로 그 때 위 씨 집안 각서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일찍이 그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묘년(만력 19년, 1591년) 가을, 재주가 없어 유가의 업을 폐하였으니[과거 시험 공부를 작파하고], 집안 대대로 서방을 하며 책 상자를 판각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辛卯之秋, 不佞斗始轍儒家業, 家世書坊, 鋟笈爲事.)” 이것으로 그가 일찍이 독서하고 관직을 구했으나 연이은 시험에 급제하지 못해 유가의 길을 접고 각서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특수한 경력이 이후에 통속소설의 창작과 평론, 간행에 종사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으며, 최소한 문화 수양에 있어 그가 이런 일에 종사하게 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곧 그가 일정한 문화적 소양을 갖춘 과거 시험에 급제하지 못한 문인이었기에 위샹더우는 소설을 간행하는 동시에 자기 손으로 소설을 엮어냈던 것이고, 동시에 상업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서방 주인이었기에 일반 독자의 요구에 영합해 비교적 일찍부터 평점을 통속소설의 간행에 끌어들여 소설전파사와 소설 평점사에서 “상평, 중도, 하문”이라는 상업적인 효과가 풍부한 소설 간행의 ‘평림’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서방 주인으로서 위샹더우가 소설 창작과 평론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독특한 상업 문화의 배경에 힘입은 바 크다. 명대의 예성(葉盛)은 《수동일기(水東日記)》 2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서방에서 하는 말로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이 허위로 소설 등의 잡서를 짓되, 남쪽 사람들은 광무왕 리쭤쥐(李左車)나, 차이융(蔡邕), 양원광(楊文廣)에 대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북쪽 사람들은 <칭허 현(淸河縣) 계모대현(繼母大賢) 등과 같은 것을 즐겨 말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今書坊相傳射利之徒僞爲小說雜書, 南人喜談如漢小王廣武, 蔡伯喈邕, 楊六使文廣, 北人喜談如繼母大賢等事甚多.)” 이것으로 당시 서방에서 소설을 각인하는 일이 성행했고, 통속소설을 엮어내는 슝다무(熊大木), 위사오위(余邵魚) 등과 같은 서방주인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방 주인들 가운데 평점을 통속소설에 끌어들인 최초의 인물은 위샹더우로 현존하는 평점본은 《수호전》과 《삼국연의》 ‘평림’과 《춘추열국지전》 세 가지다.
서방 주인의 신분으로 소설을 평점한 또 다른 인물은 샤뤼셴(夏履先)이다. 그는 호를 솽거주런(爽閣主人)이라 하고 명말 항저우(杭州)의 서방 주인이었는데, 생애와 사적은 자세하지 않다. 그가 평점한 소설은 숭정 연간에 간행한 《선진일사(禪眞逸史)》이다. 이 책에는 “칭시다오런 편차, 신신셴뤼 평정(淸溪道人編次, 心心仙侶評訂)”이라 서(署)했다. 칭시다오런은 명말의 팡루하오(方汝浩)로 이 책말고도 소설 《선진후사(禪眞後史)>, 《소매돈륜동도기(掃魅敦倫東渡記)》가 세상에 알려져 있다. 본문 앞에는 <범례> 여덟 칙(則)이 있는데, “고항 솽거주런 리셴 보지(古杭爽閣主人履先甫識)”이라 제하고 그 내용 가운데에는 “솽거주런이 평소 기이한 것을 좋아했는데, 조금 섭렵한 뒤에는 곧 버렸다. 칭시다오런이 이 책을 보여주니, 그것을 읽으매 아이 씨 집안의 배를 먹는 듯 상큼하였으나, 스스로 풀리지 않는 바가 있어 드디어 더불어 다시 순서를 엮고 평을 하고 정정을 해 간행했다(爽閣主人素嗜奇, 稍涉牙後輒棄去. 淸溪道人以此見示, 讀之如啖哀梨, 自不能釋, 遂相與編次評訂付梓)”고 하였다. <범례> 뒤에 도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리셴의 성이 샤(夏)라는 것을 알겠고, 또 이것으로 평자인 ‘신신셴뤼(心心仙侶)’가 곧 서방 주인인 샤뤼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서는 40회로 ‘팔괘’를 서(序)로 삼아 8권으로 나누었고, 각 권은 각각 5회이며 8권의 평점자는 제서(題署)가 하나 같지 않은데, 순서에 따르면, 신신셴뤼(心心仙侶), 비화쥐스(筆花居士), 량후위써우(兩湖漁叟), 옌보댜오투(烟波釣徒),, 쿵구셴성(空谷先生), 댜오룽츠커(雕龍詞客), 슈후원모(綉虎文魔), 멍줴쾅푸(夢覺狂夫)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샤뤼셴의 별호로, 결코 많은 사람이 평정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각 권의 총평 가운데 이미 분명하게 정보가 드러나 있다. 이를테면, ‘건집총평(乾集總評)에서는, “[신신셴뤼]는 성에 차지 않아 비화자이에서 《일사》 건집을 비교하였다.(揪然不樂, 乃于筆花齋較《逸史》乾集)” 이것으로 비화쥐스가 신신셴뤼임을 알 수 있다. 또 8칙의 총평은 일관되게 앞뒤로 서로 이어져 있는데, ’감집 총평(坎集總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일찍이 술잔을 들고 홀로 서재에서 독작을 하며 《일사》를 감집까지 읽었다.(余嘗把一卮, 獨酌小齋, 讀《逸史》至坎集.)” 또 ’간집 총평(艮集)‘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구나. 린다쿵은 ’단란‘으로 호를 삼고, 나는 간집에서 ’감(坎)‘의 오묘함을 얻었다.(旨哉, 林大空之以’澹然‘号也, 吾于艮集而得坎之妙.)” 모두 작품 속의 평점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렇듯 소설 속에 여러 명의 평점자를 드러낸 것이야말로 서방 주인 특유의 상업적 수단인 것이다.
이런 상업적 수단은 명말 비겅산팡(筆耕山房)에서 간행한 《의향의질(宜香宜質)》, 《변이차(弁而釵)》, 《추호로(醋葫蘆)》 세 가지 평본 중에서도 체현되었다. 이 세 가지 책의 작자와 평자는 제서(題署)가 일치하지 않는다. 《의향의질》에는 “쭈이시후신웨주런 저, 쳬샤오광푸룽피저 평(醉西湖心月主人著, 且笑廣芙蓉僻者評)”이라 제(題)했고, 《변이차》에는 “쭈이시후신웨주런 저, 나이허톈허허다오런 평(醉西湖心月主人著, 奈何天呵呵道人評)”이라 제(題)했으며, 《추호로》의 제서는 더욱 복잡해서 1권에는 “시쯔후푸츠쟈오주 편, 쳬샤오광푸룽피저 평(西子湖伏雌敎主編, 且笑廣芙蓉僻者評)”이라 제하고, 2권에는 “눙웨주런, 주쭈이산런 동평(弄月主人, 竹醉山人同評)”이라 제하고, 3권에는 “다티유예 평(大堤游冶評)”이라 제하고 4권에는 “눙웨주런, 주쭈이산런 동평(弄月主人, 竹醉山人同評)”이라 제하고 권수(卷首)에는 또 <서(序)>가 있는데, “비겅산방쭈이시후신웨주런 제(筆耕山房醉西湖心月主人題)”라 서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책이 사실은 작자 자신이 짓고 간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른바 쭈이시후신웨주런은 곧 시쯔후푸츠쟈오주이고, 또 서방 주인인 비겅산팡주런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두 책에는 또 작자의 자평(自評)이 있는데, 이것에 의거하면 이렇듯 번다한 평점자는 서방 주인의 수단이기도 한데, 그런 까닭에 이 세 가지 책은 서방 주인인 비겅산팡주런이 스스로 엮고, 스스로 평하고, 스스로 간행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명대의 소설평점 가운데 위에서 말한 세 명의 서방 주인말고도 명말 쑤저우의 각서가(刻書家)인 위안우야(袁無涯)도 일찍 《신준리씨장본충의수호전(新준李氏藏本忠義水滸傳)》의 평정(評定)에 참여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위안 씨가 양딩졘(楊定見)의 “줘우 선생이 비정한 《충의수호전》(卓吾先生所批定《忠義水滸傳》)”을 얻고 “마치 더 없는 보물을 얻은 듯 기뻐하며(欣然如獲至寶)” “세상에 공개하고자 했다(愿公諸世)”고 말했다. 하지만 쉬쯔창(許自昌)의 《저재만록(樗齋漫錄)》 6권의 기록에 의하면, 위안우야, 펑멍룽 등이 일찍이 서로 교열과 대조를 위해 여러 번 주고받았는데, 그 가운데 평정(評定)을 포괄하고 있다.
그 무렵 민(閩) 지방에 이름을 즈(贄)라고 하는 리줘우라는 이가 있어……세상사에 분노하고 증오하였는데, 그 역시도 이 책을 좋아해 장구(章句)마다 비점(批點)을 하였다.……그의 문인이 이것을 가지고 우중(吳中)에 이르니 우중의 명사 위안우야, 펑멍룽이 리 씨의 비점을 몹시도 좋아해 그를 덕망이 높은 이로 떠받들고, 그것을 보고 애호하였기에, 서로 교열과 대조를 위해 여러 번 주고받으며 오류를 삭제하였다.(傾閩有李卓吾名贄者……乃憤世疾時, 亦好此書, 章爲之批, 句爲之點……李有門人, 携至吳中, 吾士人袁無涯, 馮夢龍, 酷嗜李氏之學, 奉爲蓍蔡, 見而愛之, 相與校對再三, 刪削訛謬.).
또 위안중다오의 《유거시록(游居柿錄)》 9권에서는 위안우야가 남긴 “신각탁오비점수호전(新刻卓吾批點水滸傳)”을 얻었는데, 그가 알고 있는 리줘우 비본과는 “약간 증가되었을 따름(稍有增加耳)”이다. 이것으로 위안우야가 《수호전》의 평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윈룽(陸雲龍) 역시 명대 소설평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루윈룽의 자는 위허우(雨侯)이고 호는 추이우거주런(翠娛閣主人)으로 쳰탕(錢塘) 사람으로, 생졸년은 대략 명 만력 14년에서 청 순치 10년(1586~1653년)이다. 루윈룽은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지만 고생을 해가며 끊임없이 공부했고, 명예와 절개를 중시하고 덕행을 쌓았다. 일찍이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숭정 연간 이후에는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끊고 저술에만 전념하면서 각서(刻書)를 운영했다. 각서하는 가게의 이름은 정샤오관(崢宵館)이라 하고, 이곳에서 엮어내고 평정(評定)한 고금의 시문과 명말 소품들은 당대에 매우 높은 명성을 얻었다. 이를테면 《명문귀(明文歸)》, 《황명십륙가소품(皇明十六家小品)》, 《추이우거 평선 중보징 합집(翠娛閣評選鍾伯敬合集)》 등이 그러한데, 그런 까닭에 그는 다른 무엇보다 선문가와 평점가로 ‘명사’가 되었다. 그가 지은 소설로 주요한 것은 《위충현소설척간서(魏忠賢小說斥奸書)》와 《형세언(型世言)》 등이 있다. 전자는 “정샤오관 평정(崢宵館評定)”이라 서(署)했으며, 이것으로 이 책이 루윈룽이 스스로 엮고 스스로 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설평점사에서 서방 주인이 직접 소설의 평점에 참여한 것은 단지 이상의 다섯 예에 지나지 않는다. 청대에 들어온 뒤에는 이런 현상이 이미 드물게 보이는데, 이것으로 소설평점이 명말청초의 단계를 지난 뒤에는 이미 점차 문인들의 손에 넘어갔고, 청 이후에는 문인들의 평점이 분명하게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명대의 소설평점가는 매우 큰 정도로 서방 주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는데, 서방 주인들은 문화 예술상의 소양이 제한적이었기에, 소설을 간행하는 모든 서방 주인들이 소설평점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설평점(주로 명대의 소설평점) 역사에서 서방이 소설평점에 참여하는 가장 통상적인 방식은 그 주변의 하층 문인들을 모아 평점에 종사하게 만들고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 간행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런 방식을 채용한 것은 런서우탕(仁壽堂) 주인인 저우웨쟈오(周曰校)가 간행한 《삼국지통속연의》이다. 이 책의 표지에 있는 ‘지어(識語)’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은 이미 몇 종이 간행되어 나왔는데, 모두 잘못되고 어그러졌다.……어쩌다 고본을 구매해 명사들을 모셔다가 거울에 비추듯 참고하고 재삼 원수를 대하듯 교열을 본 뒤 구두가 필요한 곳에는 권점을 하고 어려운 글자에는 음주(音注)를 달았으며, 지리에는 뜻풀이를 하고 전고는 고증을 하는 한편 빠진 곳은 보충하고 절목에는 그림을 넣었다.(是書也, 刻已數种, 悉皆僞舛, 輒購求古本, 敦請名士按鑒參考, 再三讎校.俾句讀有圈点, 難字有音注, 地里有釋義, 典故有考証, 缺略有增補, 節目有全像)
이것은 명확하게 책 속의 평점이 서방 주인이 “명사들을 모셔다가” 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위샹더우가 ‘평림’ 본 《삼국지》를 간행할 때에도 그 가운데 어떤 평점들은 ‘명사’가 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의 <삼국변(三國辨)> 문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방에서 상재한 《삼국연의》가 어찌 수십가에만 이를까만, 그림이 있는 것은 류 씨나, 정 씨, 슝 씨, 황 씨 네 가지 성바지밖에 없으니, 쭝원탕은 인물이 추레하고 글자 역시 틀린 곳이 있어 오래 가지 못했고, 중더탕의 경우는 그 서판이 빠진 곳도 있고 글자 역시 좋지 않았다. 런허탕의 경우는 비록 지판(紙板)이 새롭긴 했지만 그 안의 내용에서는 인명이나 시사(詩詞)가 일부 제거된 것도 있었다. 다만 아이르탕 것은 그 판이 오류가 없어 선비들이 보고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 판목이 이미 [오랜 사용으로] 뭉개져서 보기에 불편하다. 우리는 명사들을 청해다 비평과 권점을 하여 교정에도 잘못이 없고, 인물이나 글자와 그림 역시 각각 생략되고 추레한 것이 없어 천하의 선비들이 보기에 편하다. 왕림하신 분들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솽펑탕에서 기록하다.(坊間所梓《三國》何止數十家矣, 全像者止劉鄭熊黃四姓. 宗文堂, 人物丑陋, 字亦差訛, 久不行矣. 種德堂, 其書板欠陋, 字亦不好. 仁和堂, 紙板雖新, 內則人名, 詩詞去其一分. 惟愛日堂者, 其板雖無差訛, 士子觀之樂然, 今板已朦, 不便其覽矣. 本堂以請名公批評圈點, 校正無差, 人物, 字畵各無省陋, 以便海內士子覽之. 下顧者可認雙峰堂爲記.)
이상의 두 가지 언명은 분명하게 광고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서방 주인들의 평점에 대한 중시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명공(名公)’과 ‘명사(名士)’의 평점이 소설의 판로를 확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뒤로 서방 주인들은 통속소설을 간행할 때 ‘평점’으로 서로 호소하며, 이미 두루뭉실하게 ‘명공’이나 ‘명사’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당당하게 당시의 사회 명사들, 특히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인물들을 “청”했다. 이러한 예가 가장 성행했던 것은 만력 중후기에서 명말까지의 단계로 이름을 도용당한 유명 인사들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쳤던 이는 리줘우(李卓吾), 천메이궁(陳眉公), 중보징(鍾伯敬), 탕셴쭈(湯顯祖) 등이었다. 대략적인 통계에 의하면 이 시기에 리줘우 평점이라 제(題)한 소설은 대략 10종 정도고, 중보징 평점이라 제한 것은 7종, 천메이궁 평점으로 제한 것은 4종, 위밍탕(玉茗堂) 평점으로 제한 것은 3종이었다. 나머지는 양성안(楊升庵)과 쉬원창(徐文長)이라 제한 것 역시 몇 종이 있었다. 그들은 소설 속에서 직접 평점자를 드러냈을 뿐 아니라 어떤 서방 주인은 표지의 ‘지어(識語)’에서도 특별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를테면 만력 43년에 간행된 구쑤(姑蘇) 궁사오산(龔紹山) 재본(梓本) 《춘추열국지전(春秋列國志傳)》은 책 이름 앞에 “천메이궁 선생 비평(陳眉公先生批評)””이라는 글자를 올려놓았고, 특별히 ‘지어’에서는 “본 서방에서 새로 펴낸 《춘추열국지전》은 모두 천메이궁이 손수 교열한 것이다(本坊新준《春秋列國志傳批評》, 皆出自陳眉公手閱)”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상 상술한 평점은 대부분 서방이 거짓으로 탁명한 것이다.
명대에는 서방 주인이 때로 장원 급제한 인물에 탁명한 평점으로 손님을 불러모았는데, 이를테면 만력 연간의 주즈판(朱之蕃)이 그러하다. 주즈판은 자가 위안졔(元介)이고 호는 란위(蘭嵎)이며 난징(南京) 상위안(上元) 사람으로, 만력 23년(1595년) 진사가 되었는데, 전시(殿試)에서 일등으로 급제하여 한림원 수찬(修撰)을 제수받고 벼슬이 이부우시랑(吏部右侍郞)과 협리첨사부사(協理詹事府事) 겸 한림원시독학사(翰林院侍讀學士)에 이르렀다. 그가 평한 소설은 만력 연간에 간행된 《삼교개미귀정연의(三敎開迷歸正演義)》로 “쥬화 판징뤄 편차, 란위 주즈판 평정(九華潘鏡若編次, 蘭嵎朱之蕃評訂)”이라 서했다. 그러나 소설 속의 평어를 보면 간략한 미비에 지나지 않아 탁명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또 주즈판은 만력 시기의 서방 가운데 늘상 이름을 도용당했던 명사로 이를테면 위샹더우(余象斗)가 간행한 《사기품수(史記品粹)》에는 “장원 주즈판 휘집, 회원 탕빈인 교정, 한림 황즈칭 동정(狀元朱之蕃匯集, 會元湯賓尹校正, 翰林黃志淸同訂)”이라고 서(署)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허구에 불과하다.
청대에 들어서자 명대의 여러 명사들은 이미 비교적 적게 탁명당했고, 명말청초의 펑멍룽(馮夢龍)이나 진성탄(金聖嘆), 리위(李漁) 등이 서방의 탁명 대상이 되어, “성탄외서(聖嘆外書)”와 같은 글자가 통속소설 간본 중에 항상 출현했다. 당연하게도 청대의 소설평점이 점차 서방 주인에서 문인들의 손으로 넘어감에 따라 청대 이래로 서방에서 탁명하는 현상 역시 천천히 소멸해갔다.
서방에서 탁명한 것은 소설 영역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이것은 명말 서방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명말 희곡가 선쯔진(沈自晋)은 당시 희곡 출판계가 탕셴쭈(湯顯祖)의 평점을 탁명한 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되는 대로 권점을 해 사람들 눈을 호도하고, 멋대로 위밍탕 비평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서방의 수단이다.(那得胡圈亂點涂人目, 漫假批評玉茗堂, 坊間伎倆.)” 쑤스쉐(蘇時學)의 《효산필화(爻山筆話)》에서도 탁명하는 풍조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명대 사람들이 옛사람들의 책을 찍어낼 때, 왕왕 옛사람의 평주를 거짓으로 편찬했으니, 이를테면, 《관자》, 《장자》……등은 모두 당송 제가의 평이 있으니, 그 의도하는 바는 옛 책에는 반드시 이를 빙자해 증보한 것인 양하는 것인데, 점차 경전 역시도 거짓으로 하는 데 이르렀다. 요즘 저자에서 전하는 《쑤스 비 맹자(蘇批孟子)》를 쑤스(蘇軾)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면, 더더욱 웃기는 얘기다.(明人刻古人書, 往往僞撰古人評注, 如《管子》、《莊子》⋯⋯等皆有唐宋諸公評, 意若古書必藉此而增重者, 漸而至于經傳亦僞之, 今市上所傳有《蘇批孟子》, 以爲出于老泉, 尤可哂也.)
서방에서 탁명하는 풍조는 당연하게도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고, 문학 예술이 상업성에 물들어 도드라지게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통속소설의 유포를 촉진시켰는데, 특히 통속소설이 사람들로부터 중시되지 못했던 시대에는 이렇게 명인의 이름을 도용해 평점하는 행위가 어느 정도 통속소설의 사회적 지위를 제고시켰다. 하물며 서방 주인 자체의 문화 수준 역시 끊임없이 제고되었는데, 이를테면 구쑤(姑蘇)의 수중탕(書種堂) 주인 위안우야(袁無涯)와 항저우의 정샤오관(崢宵館) 주인 루윈룽(陸雲龍)은 당시 사회에서 모두 일정한 명성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문화 명사와 각서가(刻書家)가 한 인물에 체현한 것이었기에, 그들이 소설평점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소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비교적 크게 작용했다. 총괄해서 보자면, 명대의 소설평점자는 서방 주인과 그 주변 문인이 주류를 형성하였기에 우리는 이 단계를 “서방이 소설평점을 장악한 단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서상 형(書商型)은 소설평점에서 비중이 비교적 큰 평점 유형으로 실제로는 두 가지 평점자의 평점 작품을 포괄하고 있다. 하나는 당연히도 서방 주인과 그 주변의 하층 문인에게서 나온 평점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상황이 조금 특수한데, 평점자는 문인이지만 그들이 소설을 평점한 것은 그 자신이 정감을 표현할 필요가 있어 그리한 것이 아니라 친구의 부탁을 받거나 서방의 요청을 수락해 간행한 소설을 위해 깃발을 흔들어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비록 서상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평점에는 명백하게 상업적인 전파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 양자는 상업적인 전파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의 추구점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의 평점 유형으로 귀납할 수 있어 잠시 ‘서상 형’으로 부르고자 한다.
서상 형 소설평점에는 다음의 세 가지 주요한 특색을 갖고 있다.
첫째, 서상 형의 소설평점은 평점의 목적상 그 자신의 추구하는 바가 있었는데, 주로 소설의 전파를 촉진하고 보통의 독자가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초창기의 통속소설과 예술적 개성이 서로 일치하는 평점 유형으로 민간성과 대중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런 평점 유형에는 심원한 이론과 사상의 서술이 없었으며 문인 투의 개인의 정감의 발로 역시 아주 드물었는데, 주로 간략한 평론과 수준이 낮고 비루한 주석이 대부분으로 일반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발전 과정일 수도 있다. 명대에는 통속소설의 주요 부류가 역사연의소설이었고, 그 창작자 역시 주로 서방의 주인이나 그 주변의 하층 문인이었다. 그들은 연의라는 말대로 역사를 통속화했다. 이와 상응해서 소설평점 역시 서방의 통제하에 문장의 의미를 통하게 하고, 전고나 주음(注音)을 위주로 하여 일반 독자가 좀더 수월하게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주평(注評)의 문장은 극히 통속적이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는데, 이를테면 만력 연간 싼타이관(三台館) 간본 《전한지전(全漢志傳)》에는 “중보징 선생 평(鍾伯敬先生評)”이라 서(署)했지만, 소설 속의 평점은 자못 간략하고 쉬웠고, 내용 가운데 나오는 명의(名醫) 쑨쭈(孫祖)에 대해 협비에서는 “후당 쑨쓰먀오가 의술에 능했는데, 그 적손이다(後唐孫思邈善醫, 乃其嫡派也)”라고 하였다. “모한자이 신편(墨憨齋新編)”이라는 서명이 있는 《신열국지》 역시 그러한데, 그 평점은 지명과 관명, 그리고 주음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그 중 제1회에서는 “태종백(太宗伯)”을 “지금의 예부상서”라 해석하고, “태재(太宰)”는 “지금의 이부상서”라고 풀이했다. 이런 평주는 의심할 바 없이 일반 독자들의 열독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색은 명대 서상 형 소설평점의 보편적인 상황이었다. 이와 동시에 서상 형의 소설평점 가운데 평론적인 성분이 비록 날로 증강되기는 했지만, 역사 사실에 대한 간략한 평술(評述)에 불과했고, 평점자가 그 가운데 기탁한 정감이나 사상은 매우 적었다. 《양한개국중흥지전(兩漢開國中興志傳)》에서는 샹위(項羽)가 처음 궐기한 것을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컨대, 샹위가 처음 일어났을 때 자제 병사 8천뿐이었으나, 다시 천리마를 만나고 순식간에 장병들이 구름처럼 모여 2, 3년도 되지 않아 왕이 되고 황제를 칭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按項羽初起, 卽有子弟兵八千, 又遇龍駒, 頃刻之間, 軍將雲集, 不二三年, 爲王称帝, 豈非天耶?)[《양한개국중흥지전(兩漢開國中興傳志)》, 만력 을사(万歷乙巳; 1605년) 동월(冬月) 잔슈민(詹秀閩) 간본.] 그 사상은 평범하고 분명해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그래서 명대 소설의 서상 형 평점은 비록 유명 인사에 탁명했지만, 가치 있는 평점은 오히려 미미하다. 청대에 들어선 뒤에는 서상 형 소설평점에 변화가 생겼는데, 주석적인 성격의 문장들이 점차 감소해 차츰 없어졌다. 하지만 소설평점의 평범한 사상 수준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문인의 손에서 나온 평점들이 그 평점의 목적이 공리적이었고, 작품 자체가 평범했기 때문으로, 평점에 사상의 불꽃을 피워 올리기 어려웠으며, 일반적으로 사물의 표면적인 현상만을 논해 간략한 평술에 머물렀다.
둘째, 서상 형의 소설평점은 평하고 있는 소설을 고무하고 소설의 정절을 간략하게 평술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런 류의 평점은 소설의 전파를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구매를 촉진하는 것을 추구하여, 구체적인 평점 중에 찬양하는 말에 인색하지 않다. 장원 주즈판(朱之蕃) 평점이라 탁명한 《삼교개미귀정연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서유기》와 《수호전》은 소설 가운데 우러름을 받는 것들이다. 그러나 《서유기》는 황당한 설에 가까워서 모두 세속적인 이야기다. 《수호전》은 유협들의 일이라 모두 난폭한 행실뿐이다. 세상 인심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꾸며 문득 신으로 화하는 데 있어 어찌 《파미정속연의》를 얻어 그 우열을 비교하지 않는가?(《西游》, 《水滸》皆小說之崇閎者也, 然《西游》近荒唐之說, 而皆流俗之談; 《水滸》游俠之事, 而皆無狀之行. 其于世敎人心, 移風易俗, 俄傾神化, 何居而得與《破迷正俗演義》相軒輊也.[《삼교개미귀정연의(三敎開迷歸正演義)》, 명 만력(萬曆) 연간 바이먼(白門) 완췐러우(萬卷樓) 간본(刊本)]
《삼교개미귀정연의》는 만력 연간 린자오언(林兆恩)과 그 제자 쭝리(宗禮)와 승려 바오광(寶光), 도사 위안링밍(袁灵明)이 삼교성회(三敎盛會)를 일으켜 세 종교를 하나로 합하는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다. 전서(全書)는 신마와 설교, 사회 비평을 잡스럽게 뒤섞어, 내용이 자못 풍부한데, 때로 해학도 있어 그런대로 읽을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평점자가 이것을 《수호전》이나 《서유기》와 비교한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 그 설교적인 측면이 두드러진 것은 더더욱 부당하다. 소설 속에서는 아무 때나 의론이 튀어나오는데, 계속 읽어나갈수록 염증이 일어 이 소설을 성공적인 작품으로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듯 지나치게 과장된 필치는 서상 형 소설평점에서 모두 발견되는 것이다. 솽거주런(爽閣主人) 샤뤼셴(夏履先)의 《선진일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은 비록 일사라고는 하나, 소설 나부랭이와는 크게 다르다. 사건에는 근거가 있고, 말에는 조리가 있으며, 백성들의 교화를 위주로 하면서 사람들 마음을 다잡는다.……곧 역사가로는 둥후(董狐)라 할 수 있고, 진정 문장가로는 쓰마쳰(司馬遷)과 반구(班固)라 하겠다.(是書雖逸史, 而大異小說稗編.事有据, 言有倫, 主持風敎, 范圍人心.⋯⋯乃史氏之董狐, 允詞家之班馬)” 이 책은 “마땅히 《수호전》, 《삼국연의》와 함께 영원히 불후의 명작으로 남을 것이니, 《서유기》와 《금병매》 등은 여기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다.(當與《水滸傳》、《三國演義》幷垂不朽, 《西游》、《金甁梅》等方之劣矣.)”[솽거주런(爽閣主人), <《선진일사》 범례>] 여기에서 과분하게 칭찬하는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곧 문인들 손에서 나온 몇몇 평점 역시 이렇게 상업적으로 고무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청대 강희 연간 뤼슝(呂熊)의 《여선외사(女仙外史)》 평점이다. 이 책에는 60여 명의 평점이 있는데, 그 자체로 농후한 상업적 의미가 있으니, 작품 속의 평점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 감상평은 적고 대부분이 고무하는 것을 평론의 주체로 삼고 있다. 광저우 부(廣州府) 태수 예난톈(葉南田)은 《여선외사》를 특히 찬미했다. “정사와 비슷하며 스스로 사람들 마음에 믿음이 가게 하는 구석이 있어 우주에 영원히 불후의 작품으로 남으리라(與正史相類, 自有孚洽于人心者, 垂諸宇宙而不朽)”[예난톈, <《여선외사》발어(《女仙外史》跋語>, 청 강희 연간 댜오황쉬안(釣璜軒) 간본] 그다지 높지 않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 가치와는 실제로 많은 차이가 있다.
서상 형의 소설평점은 작품의 고취에 온힘을 다 기울였지만, 가치 있는 사상과 예술 방면의 감상평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런 류의 소설평점은 미비의 경우 대부분 두서너 마디의 말로 되는 대로 점평(點評)을 하고 있으며, 협비는 주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회말총비는 해당 회의 정절과 인물에 대한 간략한 평술에 그치고 있다. 어떤 평어는 하나마나 한 것도 있으니, 이를테면 ‘삼종(三從)’을 풀이하면서 “집에 있을 때는 아비를 따르고, 출가하면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在家從父, 出嫁從夫, 夫死從子)”고 하는 등 극히 간단한 내용이 평점 가운데 종종 출현한다. 그리고 어떤 것은 취미가 더욱 낮아서 이를테면, 《금란벌(金蘭筏)》 평점에서는 “구탑상수(勾搭上手)”를 풀이하면서, “언어로 도발해서 춘심이 일게 하는 것을 일러 구탑이라 한다. [남녀] 두 사람이 고개를 맞대고 자는 것을 상수라 한다(言語挑動, 打動春心, 謂之勾搭也 兩人交頸而睡, 謂之上手也.)”로 하였다. 이런 내용은 서상 형 평점의 세속성과 민간성을 충분히 설명해 주는 것이다.
셋째, 서상 형의 소설평점은 평점형태상으로도 자못 특색이 있다. 평점자는 소설의 상업적인 전파를 목적으로 하기에 평점을 판매 촉진 수단으로만 보았다. 따라서 평점에는 그다지 많은 정력을 쏟지 않았고, 형식 역시 비교적 간단했다. 명대에는 서상 형의 소설평점이 미비와 협비 위주였는데, 협비의 평론 성분은 자못 담박했고, 성질은 협주(夾注)와 비슷했다. 청대에 들어선 뒤에는 협주 형식은 점차 소실되고, 서상 형의 평점 형태는 미비와 총평이 주류를 이루었다. 총괄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간이(簡易)한, 심지어 간루(簡陋)한 평점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쳰중수(錢鐘書) 선생이 《관추편(管錐篇)》에서 루윈(陸雲)의 <여형평원서(與兄平原書)>를 논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생각컨대 별다른 뜻없이 글을 짓되 일상적인 말로 담담하게 직서했으면서도 난해한 곳은 왕시즈(王羲之)와 왕셴즈(王獻之) 부자의 여러 《첩》만 못하지 않다. 열에 아홉은 문장을 논했으되, 착안한 바는 크지 않고 말도 많지는 않으니, 그 언어의 기세는 특히 후대의 평점이나 비개와 닮은 바가 있다. 이른바 ‘작업장 비평’이다.(按無意爲文, 家常白直, 費解處不下二王諸《帖》. 什九論文事, 著眼不大, 著語無多, 詞氣殊肖後世之評點或批改, 所謂‘作場或工房中批評’(workshopcriticism)也.)” 이 가운데 “작업장 비평”이라는 말이야말로 이와 같은 ‘서상 형’ 평점과 비슷하다.
이상의 세 가지 특징을 총괄하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서상 형 소설평점이 드러내고 있는 문학비평의 상업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평점 유형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선 서상 형 소설평점은 고대 통속소설 예술이 상품화됨으로써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물로 통속소설의 창작과 상업성이 없다면 서상 형 소설평점 역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런 평점 유형의 출현에도 합리성과 현실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다. 확실히 통속소설의 발아기에는 이것이 통속소설의 전파를 추동했으며, 특히 명 만력 이후 소설의 전파에 끼친 공은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문학 비평의 상업성이 통속소설의 상품화라고 하는 특색과 일치하는 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서상 형 소설평점은 소설로 가장 평범하고 가장 광대한 하층 독자를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이것은 고대 통속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감상 대열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평점 유형이 다루고 있는 측면은 넓고, 이것이 평하고 있는 소설에는 과도한 선택의 제한이 없었기에, 독자와 작품이라는 양 극단을 놓고 말하자면, 서상 형 소설평점은 고대 소설 독자와 작자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평점 유형이었다. 그래서 그 천박한 이론과 비루한 사상 때문에 그것이 갖고 있는 전파 가치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문학 비평이 상업성에 물드는 것은 합리적인 현상은 아니다. 문학 비평은 고상한 정신 활동이어야 하며, 민감하고 예리한 시각과 초월적인 사상, 그리고 재기 발랄한 언어로 창작을 단련하고, 독자를 감화해야 한다. 이런 추구하는 바를 잃으면, 문학 비평은 상업 광고의 효용만 갖게 된다. 서상 형 소설평점은 비평의 상업성을 지나치게 강화하다가 비평 자체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이론적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 존재의 현실적인 합리성이었으면서도 아주 큰 정도로 문학 비평의 본성을 잃어버린 소설평점 유형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