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대 소설평점의 형태
청대 소설평점의 형태는 명대가 남긴 자취를 이어 주로 다음의 두 가지 발전 추세를 보였다. 하나는 진성탄의 소설평점 전통을 계승하고, 평점 형태가 더욱 풍부해졌다. 다른 하나는 명백하게 소설평점의 형태 중 미비에 총평이 가해진 것이 주류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순서에 따라 서술하겠다.
청대의 소설평점은 진성탄의 영향 하에 시작되었다. 진성탄이 터를 닦은 소설평점의 형태는 청대에 간행된 소설, 특히 《삼국연의》와 《금병매》, 《서유기》, 《홍루몽》 등 몇몇 중요한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로부터 평점 형태는 날로 풍부하고 완전무결해졌다.
진성탄 평본 《수호전》은 명 숭정 14년(1641년)에 간행되었는데, 이 때는 명이 망하기 2년 전이었다. 청대에 들어서 진성탄은 다시 《서상기》를 완성하고(청 순치 13년 1656년), 《관화당선비당재자서( 貫華堂選批唐才子書)》(청 순치 17년, 1660년), 《두시해(杜詩解)》(청 순치 17-17년, 1660-1661년), 《천하재자필독서(天下才子必讀書)》(청 순치 18년, 1661년) 등의 평점본을 완성했다. 그러므로 진성탄 평점의 진정한 영향은 청초에 있다. 순식간에 그를 본받는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드디어 소설평점의 일파를 열었다. 그 가운데 특히 강희 시기의 마오 본 《삼국연의》와 장주포 본 《금병매》의 영향은 더욱 컸다. 이 두 평본의 외재적인 형태는 다음과 같다.
(마오 본 《삼국연의》의) 첫머리에는 [“순치 갑진년 가평 음력 초하루 진런루이 성탄 씨 제(順治歲次甲辰嘉平朔日金人瑞聖嘆氏題)”라 서(署)한] <서(序)>가 있고, 다음으로 <범례> 10조가 있고, 그 다음으로 <독법> 26조가 있으며, 본문에는 회전총평(回前總評), 협비가 있다. 평점자는 원 저작에 대해서도 회목을 합병하고 시사(詩詞)를 바꾸고 정절을 늘리고 바꾸고, 문자를 다듬고 윤색하는 등의 작업을 했다.
(장주포 본 《금병매》의) 첫머리에는 <제일기서서(第一奇書序)>가 있고, 다음으로 <제일기서범례(第一奇書凡例)>가 있으며, 다음으로 <잡록(雜錄)>, 다음으로 <주포 한화(竹坡閑話)>, 다음으로 <냉열금침(冷熱金針)>, <《금병매》우의설(《金甁梅》寓意說)>, <고효설(苦孝說)>, <제일기서비음서론(第一奇書非淫書論)>, <제일기서《금병매》취담(第一奇書《金甁梅》趣談)>, <비평제일기서《금병매》독법(批評第一奇書《金甁梅》讀法)> 총 108조가 있다. 본문에는 회전총평(回前總評), 협비(夾批)와 소량의 방비(旁批)가 있다.
이 두 가지 평점본은 청대 소설평점의 최고 성취를 대표한다. 평점의 형태에 있어서는 마오 씨가 진성탄 비 《수호전》의 틀거리를 전반적으로 계승해, “진성탄의 필치를 모방해 비(批)했다(一仿聖嘆筆意批之.)”[류팅지(劉廷璣), 《재원잡지(在園雜志)》] 당시 사람들은 그가 진성탄이 평한 책을 본받아 그를 뛰어넘었다고 평했다. 장주포가 평한 《금병매》는 평점의 형태상 마찬가지로 진성탄의 《수호전》 평본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가운데 본문 앞에 둔 문장은 10종이나 증가시켰고, 독법 또한 108조나 늘려 명백하게 진성탄 평본을 뛰어넘었다. 본문의 평점 중에서 장주포는 평하는 대상의 독특한 개성에 근거해 회전총평의 편폭을 늘리고, 본문 중의 협비의 용량을 감소시켰는데,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수호전》은 이미 이루어진 큰 단락이 모두 갖추어진 문장으로 이를테면, 108인은 모두 각자의 전(傳)이 있어 비록 삽입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순서가 분명하기에 진성탄이 그 자구에만 비했던 것이다. 《금병매》의 경우에는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이 부스러기 조각 사이에 감추어져 있어 자구를 분별하는 정도라면 세심한 사람이면 모두 할 수 있지만, 도리어 그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은 잃게 된다.(《水滸傳》是現成大段畢具的文字, 如一百八人各有一傳, 雖有穿揷, 實次第分明, 故聖嘆止批其字句也. 若《金甁》乃隱大段精采於瑣碎之中, 止分別字句, 細心者皆可爲, 而反失其大段精采也.)(장주포, <제일기서범례(第一奇書凡例)>)
진성탄 평점 《수호전》에서 장주포 평점 《금병매》에 이르기까지 소설평점은 형태상 분명하게 다음의 세 단계를 걸었다. 진성탄은 룽위탕(容與堂) 본 《수호전》의 기초 위에 소설평점의 형태적 특성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그 첫 걸음이다. 마오 본 《삼국연의》는 진성탄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걸음이다. 그리고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은 이러한 기초 위에 다시 발전했는데, 고대 소설평점 가운데 그 형태가 가장 완벽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장주포의 《금병매》 평본이 소설평점이 역사연의와 영웅전기에서 인정소설로 나아가는 무게 중심의 전이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평점의 형태로 보자면, 회전총평의 증가와 총평 중의 인물 평론의 대량의 증가가 나타난다. 동시에 장주포는 <잡록>과 <우의설> 이 두 문장을 열거함으로써 《금병매》 인물의 성명과 거처 등에 대해 비교적 많이 분석해 인정소설 평점의 독특한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 보였다. 이러한 특색은 후대의 평점에 자못 큰 영향을 주어 《린란향(林蘭香)》과 《홍루몽》 평점 중에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이 세 번째 걸음이다.
상술한 두 종류의 평본과 형태상 서로 흡사한 것으로 청대에는 왕단이(汪憺漪)가 전평(箋評)한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와 장수선(張書紳)이 평점한 《신설서유기(新說西遊記)》, 왕시롄(王希廉)이 평점한 《신평수상홍루몽전전(新評繡像紅樓夢全傳)》, 장신즈(張新之)가 평점한 《먀오푸쉬안 평 석두기(妙復軒評石頭記)》, 차이위안팡(蔡元放)이 평점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지뤼싼런(寄旅散人)이 평점한 《림란향(林蘭香)》, 무명씨가 평점한 《야수폭언(野叟曝言)》 등이 있다. 이들 평점본은 편폭이 방대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그 평점의 대상 또한 대부분이 고대소설사의 중요한 작품들이었기에 이보다 앞선 룽위탕(容與堂), 위안우야(袁無涯), 진성탄 비본 《수호전》 등과 함께 소설평점사에서 일맥상통하는 중요한 하나의 계열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계열은 명대의 ‘사대기서’와 청대 《홍루몽》 등과 같은 소설 명저의 평점본을 주체로 하여 중국 고대소설전파사에서 심원한 영향을 주었는데,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소설평점은 대부분이 이 계열을 가리킨다.
당연하게도 이렇듯 형태가 완비되고 내용이 풍부한 평점본은 청대에도 사실상 많지 않았다. 소설평점은 개별 소설작품에 대한 감상평이기에, 개별적인 작품에 대해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 평점의 형태가 완비되고 평점의 내용이 풍부한지 여부는 평하는 대상 자체의 특질에 의해 매우 크게 제한을 받았으며, 소설사에서 높은 성가를 올리고 오래도록 전파되었던 작품 역시 필경은 소수에 머물렀다. 동시에 이런 류의 소설평점 본은 항상 문인들이 이를 빌어 자신의 정감과 사상을 표현하는 고질적인 습관을 과도하게 표출하고 있는데, 특히 작품의 주지(主旨)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더욱더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으며, 어떤 것은 작품 자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러한 틀거리는 어느 정도 소설평점의 독자를 오도(誤導)했으며, 때로 평점 문장의 증대 역시 독자가 연속성 있게 작품을 열독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런 까닭에 이렇게 복잡한 평점 형태는 소설평점자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설 간행자와 소설 독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대에는 이런 형식의 평점이 주류의 지위를 점하지 못했다.
청대에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 소설평점 형태는 미비에 총평이 가해진 형식이다. 필자의 간략한 통계에 의하면, 청초에서 청말까지 소설평점 중 미비는 여전히 통상적인 형태로 쓰였고, 총평은 점차 상승하는 추세로, 기본적으로 소설평점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 되었다. 이제 청대의 몇 가지 중요한 시기의 평점 상황을 다음과 같이 예증한다.
순치 연간에는 평점 본이 14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8종이다.
강희 연간에는 평점 본이 35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26종이다.
건륭 연간에는 평점 본이 18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14종이다.
가경 연간에는 평점 본이 11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8종이다.
도광 연간에는 평점 본이 7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4종이다.
광서 연간에는 평점 본이 29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21종이다.
이상의 통계로 소설평점 중 총평이 이미 주요한 형식으로 자리잡았고, 이것이 미비와 함께 소설평점의 주도적인 형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청대의 소설평점을 총괄하면, 그 가운데 총평은 대부분 회전(回前)에서 회말(回末)로 옮겨갔고, 그 비평 분량 역시 상대적으로 감소했으며, 기본적으로는 소설작품에 대한 간략한 사상과 예술 감상평 위주였다.
우리가 미비와 총평이라는 형식을 청대 소설평점의 주체적인 형태로 삼은 것은 소설평점에 나타난 이론 비평의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주로 이런 평점 형태가 제기하고 있는 보편성 때문이다. 미비에 총평을 가하는 형식이 청대 소설평점의 주도적인 형태가 된 것은 대체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중국 고대소설사에서 명대의 ‘사대기서’와 청대 《홍루몽》과 같은 명저 소설들은 봉황의 깃털과 기린의 뿔과 같이 뛰어난 존재들인데,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들은 사상 예술이 상대적으로 평범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진정으로 문인들의 시선을 끌거나 정감상 강렬한 공명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로 인해 작품에 대해 세밀하고 복잡한 감상평에 많은 정력을 기울일 만한 것이 매우 적었고, 그러므로 완비된 평점 형태로 일부 상대적으로 평범한 소설 작품을 평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미비에 총평을 가하는 간략한 평점 형태가 이런 수요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었다. 청초의 재자가인소설이나 의화본소설, 청 중엽 이후의 인정소설과 역사연의소설에서 청말의 서적과 잡지 형식으로 출판된 소설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평점 형식이 채용되었다.
둘째, 소설평점의 흥기와 발전은 그 주요한 목적이 소설을 상업적으로 좀 더 잘 유통시키기 위한 데 있었기 때문이었기에, 평점은 거의 소설을 전파하는 촉매적인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통속소설의 주요 접수 대상은 광대한 민중이었다. 이러한 전파 대상은 소설평점이 주로 세속성과 대중화를 그 전파의 품격으로 삼도록 규정했기에, 간략한 형식과 거칠지만 상대적으로 쉬운 평론이 오히려 일반 독자와 출판상들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고대소설사와 소설평점사에서 나타났던 몇 가지 독특한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고대 소설은 그 분량이 엄청나게 많지만 진정으로 사상과 예술적 가치를 가진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소설평점사 역시 그러하다. 평점은 소설 간본 중에서 극히 보편적으로 나타나는데, 비교적 높은 이론적 가치를 지닌 것은 가련할 정도로 적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의 양과 질 사이의 불균형은 소설과 소설의 광범위한 전파에 영향을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속문학과 속문화가 중국 고대에 이루어낸 독특한 현상이다. 그래서 진성탄에서 장주포에 이르기까지의 소설평점이 문인화의 창조를 체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반해] 이러한 계열의 소설평점은 대중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대중화야말로 고대의 속문학과 속문화가 근본적으로 추구한 것이었기에 미비에 총평을 가한 평점 형태가 드디어 청대 소설평점의 주류가 되었다.
청대의 소설평점 형태의 기본적인 상황은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가장 주요한 방면을 가리킨다. 청대에 소설평점의 형태는 여전히 주의할 만한 문제를 적지 않게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집평(集評)’의 출현이나, 문인들 개개인의 열독 감상평의 부흥이 평점의 형태에 끼친 영향과 소설평점의 평점 등이 그것이다.
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형태 2
2) 청대 소설평점의 형태
청대 소설평점의 형태는 명대가 남긴 자취를 이어 주로 다음의 두 가지 발전 추세를 보였다. 하나는 진성탄의 소설평점 전통을 계승하고, 평점 형태가 더욱 풍부해졌다. 다른 하나는 명백하게 소설평점의 형태 중 미비에 총평이 가해진 것이 주류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순서에 따라 서술하겠다.
청대의 소설평점은 진성탄의 영향 하에 시작되었다. 진성탄이 터를 닦은 소설평점의 형태는 청대에 간행된 소설, 특히 《삼국연의》와 《금병매》, 《서유기》, 《홍루몽》 등 몇몇 중요한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로부터 평점 형태는 날로 풍부하고 완전무결해졌다.
진성탄 평본 《수호전》은 명 숭정 14년(1641년)에 간행되었는데, 이 때는 명이 망하기 2년 전이었다. 청대에 들어서 진성탄은 다시 《서상기》를 완성하고(청 순치 13년 1656년), 《관화당선비당재자서( 貫華堂選批唐才子書)》(청 순치 17년, 1660년), 《두시해(杜詩解)》(청 순치 17-17년, 1660-1661년), 《천하재자필독서(天下才子必讀書)》(청 순치 18년, 1661년) 등의 평점본을 완성했다. 그러므로 진성탄 평점의 진정한 영향은 청초에 있다. 순식간에 그를 본받는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드디어 소설평점의 일파를 열었다. 그 가운데 특히 강희 시기의 마오 본 《삼국연의》와 장주포 본 《금병매》의 영향은 더욱 컸다. 이 두 평본의 외재적인 형태는 다음과 같다.
(마오 본 《삼국연의》의) 첫머리에는 [“순치 갑진년 가평 음력 초하루 진런루이 성탄 씨 제(順治歲次甲辰嘉平朔日金人瑞聖嘆氏題)”라 서(署)한] <서(序)>가 있고, 다음으로 <범례> 10조가 있고, 그 다음으로 <독법> 26조가 있으며, 본문에는 회전총평(回前總評), 협비가 있다. 평점자는 원 저작에 대해서도 회목을 합병하고 시사(詩詞)를 바꾸고 정절을 늘리고 바꾸고, 문자를 다듬고 윤색하는 등의 작업을 했다.
(장주포 본 《금병매》의) 첫머리에는 <제일기서서(第一奇書序)>가 있고, 다음으로 <제일기서범례(第一奇書凡例)>가 있으며, 다음으로 <잡록(雜錄)>, 다음으로 <주포 한화(竹坡閑話)>, 다음으로 <냉열금침(冷熱金針)>, <《금병매》우의설(《金甁梅》寓意說)>, <고효설(苦孝說)>, <제일기서비음서론(第一奇書非淫書論)>, <제일기서《금병매》취담(第一奇書《金甁梅》趣談)>, <비평제일기서《금병매》독법(批評第一奇書《金甁梅》讀法)> 총 108조가 있다. 본문에는 회전총평(回前總評), 협비(夾批)와 소량의 방비(旁批)가 있다.
이 두 가지 평점본은 청대 소설평점의 최고 성취를 대표한다. 평점의 형태에 있어서는 마오 씨가 진성탄 비 《수호전》의 틀거리를 전반적으로 계승해, “진성탄의 필치를 모방해 비(批)했다(一仿聖嘆筆意批之.)”[류팅지(劉廷璣), 《재원잡지(在園雜志)》] 당시 사람들은 그가 진성탄이 평한 책을 본받아 그를 뛰어넘었다고 평했다. 장주포가 평한 《금병매》는 평점의 형태상 마찬가지로 진성탄의 《수호전》 평본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가운데 본문 앞에 둔 문장은 10종이나 증가시켰고, 독법 또한 108조나 늘려 명백하게 진성탄 평본을 뛰어넘었다. 본문의 평점 중에서 장주포는 평하는 대상의 독특한 개성에 근거해 회전총평의 편폭을 늘리고, 본문 중의 협비의 용량을 감소시켰는데,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수호전》은 이미 이루어진 큰 단락이 모두 갖추어진 문장으로 이를테면, 108인은 모두 각자의 전(傳)이 있어 비록 삽입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순서가 분명하기에 진성탄이 그 자구에만 비했던 것이다. 《금병매》의 경우에는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이 부스러기 조각 사이에 감추어져 있어 자구를 분별하는 정도라면 세심한 사람이면 모두 할 수 있지만, 도리어 그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은 잃게 된다.(《水滸傳》是現成大段畢具的文字, 如一百八人各有一傳, 雖有穿揷, 實次第分明, 故聖嘆止批其字句也. 若《金甁》乃隱大段精采於瑣碎之中, 止分別字句, 細心者皆可爲, 而反失其大段精采也.)(장주포, <제일기서범례(第一奇書凡例)>)
진성탄 평점 《수호전》에서 장주포 평점 《금병매》에 이르기까지 소설평점은 형태상 분명하게 다음의 세 단계를 걸었다. 진성탄은 룽위탕(容與堂) 본 《수호전》의 기초 위에 소설평점의 형태적 특성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그 첫 걸음이다. 마오 본 《삼국연의》는 진성탄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걸음이다. 그리고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은 이러한 기초 위에 다시 발전했는데, 고대 소설평점 가운데 그 형태가 가장 완벽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장주포의 《금병매》 평본이 소설평점이 역사연의와 영웅전기에서 인정소설로 나아가는 무게 중심의 전이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평점의 형태로 보자면, 회전총평의 증가와 총평 중의 인물 평론의 대량의 증가가 나타난다. 동시에 장주포는 <잡록>과 <우의설> 이 두 문장을 열거함으로써 《금병매》 인물의 성명과 거처 등에 대해 비교적 많이 분석해 인정소설 평점의 독특한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 보였다. 이러한 특색은 후대의 평점에 자못 큰 영향을 주어 《린란향(林蘭香)》과 《홍루몽》 평점 중에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이 세 번째 걸음이다.
상술한 두 종류의 평본과 형태상 서로 흡사한 것으로 청대에는 왕단이(汪憺漪)가 전평(箋評)한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와 장수선(張書紳)이 평점한 《신설서유기(新說西遊記)》, 왕시롄(王希廉)이 평점한 《신평수상홍루몽전전(新評繡像紅樓夢全傳)》, 장신즈(張新之)가 평점한 《먀오푸쉬안 평 석두기(妙復軒評石頭記)》, 차이위안팡(蔡元放)이 평점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지뤼싼런(寄旅散人)이 평점한 《림란향(林蘭香)》, 무명씨가 평점한 《야수폭언(野叟曝言)》 등이 있다. 이들 평점본은 편폭이 방대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그 평점의 대상 또한 대부분이 고대소설사의 중요한 작품들이었기에 이보다 앞선 룽위탕(容與堂), 위안우야(袁無涯), 진성탄 비본 《수호전》 등과 함께 소설평점사에서 일맥상통하는 중요한 하나의 계열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계열은 명대의 ‘사대기서’와 청대 《홍루몽》 등과 같은 소설 명저의 평점본을 주체로 하여 중국 고대소설전파사에서 심원한 영향을 주었는데,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소설평점은 대부분이 이 계열을 가리킨다.
당연하게도 이렇듯 형태가 완비되고 내용이 풍부한 평점본은 청대에도 사실상 많지 않았다. 소설평점은 개별 소설작품에 대한 감상평이기에, 개별적인 작품에 대해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 평점의 형태가 완비되고 평점의 내용이 풍부한지 여부는 평하는 대상 자체의 특질에 의해 매우 크게 제한을 받았으며, 소설사에서 높은 성가를 올리고 오래도록 전파되었던 작품 역시 필경은 소수에 머물렀다. 동시에 이런 류의 소설평점 본은 항상 문인들이 이를 빌어 자신의 정감과 사상을 표현하는 고질적인 습관을 과도하게 표출하고 있는데, 특히 작품의 주지(主旨)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더욱더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으며, 어떤 것은 작품 자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러한 틀거리는 어느 정도 소설평점의 독자를 오도(誤導)했으며, 때로 평점 문장의 증대 역시 독자가 연속성 있게 작품을 열독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런 까닭에 이렇게 복잡한 평점 형태는 소설평점자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설 간행자와 소설 독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대에는 이런 형식의 평점이 주류의 지위를 점하지 못했다.
청대에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 소설평점 형태는 미비에 총평이 가해진 형식이다. 필자의 간략한 통계에 의하면, 청초에서 청말까지 소설평점 중 미비는 여전히 통상적인 형태로 쓰였고, 총평은 점차 상승하는 추세로, 기본적으로 소설평점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 되었다. 이제 청대의 몇 가지 중요한 시기의 평점 상황을 다음과 같이 예증한다.
순치 연간에는 평점 본이 14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8종이다.
강희 연간에는 평점 본이 35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26종이다.
건륭 연간에는 평점 본이 18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14종이다.
가경 연간에는 평점 본이 11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8종이다.
도광 연간에는 평점 본이 7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4종이다.
광서 연간에는 평점 본이 29종 나왔는데, 그 중 총평이 있는 것은 21종이다.
이상의 통계로 소설평점 중 총평이 이미 주요한 형식으로 자리잡았고, 이것이 미비와 함께 소설평점의 주도적인 형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청대의 소설평점을 총괄하면, 그 가운데 총평은 대부분 회전(回前)에서 회말(回末)로 옮겨갔고, 그 비평 분량 역시 상대적으로 감소했으며, 기본적으로는 소설작품에 대한 간략한 사상과 예술 감상평 위주였다.
우리가 미비와 총평이라는 형식을 청대 소설평점의 주체적인 형태로 삼은 것은 소설평점에 나타난 이론 비평의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주로 이런 평점 형태가 제기하고 있는 보편성 때문이다. 미비에 총평을 가하는 형식이 청대 소설평점의 주도적인 형태가 된 것은 대체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중국 고대소설사에서 명대의 ‘사대기서’와 청대 《홍루몽》과 같은 명저 소설들은 봉황의 깃털과 기린의 뿔과 같이 뛰어난 존재들인데,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들은 사상 예술이 상대적으로 평범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진정으로 문인들의 시선을 끌거나 정감상 강렬한 공명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로 인해 작품에 대해 세밀하고 복잡한 감상평에 많은 정력을 기울일 만한 것이 매우 적었고, 그러므로 완비된 평점 형태로 일부 상대적으로 평범한 소설 작품을 평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미비에 총평을 가하는 간략한 평점 형태가 이런 수요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었다. 청초의 재자가인소설이나 의화본소설, 청 중엽 이후의 인정소설과 역사연의소설에서 청말의 서적과 잡지 형식으로 출판된 소설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평점 형식이 채용되었다.
둘째, 소설평점의 흥기와 발전은 그 주요한 목적이 소설을 상업적으로 좀 더 잘 유통시키기 위한 데 있었기 때문이었기에, 평점은 거의 소설을 전파하는 촉매적인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통속소설의 주요 접수 대상은 광대한 민중이었다. 이러한 전파 대상은 소설평점이 주로 세속성과 대중화를 그 전파의 품격으로 삼도록 규정했기에, 간략한 형식과 거칠지만 상대적으로 쉬운 평론이 오히려 일반 독자와 출판상들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고대소설사와 소설평점사에서 나타났던 몇 가지 독특한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고대 소설은 그 분량이 엄청나게 많지만 진정으로 사상과 예술적 가치를 가진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소설평점사 역시 그러하다. 평점은 소설 간본 중에서 극히 보편적으로 나타나는데, 비교적 높은 이론적 가치를 지닌 것은 가련할 정도로 적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의 양과 질 사이의 불균형은 소설과 소설의 광범위한 전파에 영향을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속문학과 속문화가 중국 고대에 이루어낸 독특한 현상이다. 그래서 진성탄에서 장주포에 이르기까지의 소설평점이 문인화의 창조를 체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반해] 이러한 계열의 소설평점은 대중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대중화야말로 고대의 속문학과 속문화가 근본적으로 추구한 것이었기에 미비에 총평을 가한 평점 형태가 드디어 청대 소설평점의 주류가 되었다.
청대의 소설평점 형태의 기본적인 상황은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가장 주요한 방면을 가리킨다. 청대에 소설평점의 형태는 여전히 주의할 만한 문제를 적지 않게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집평(集評)’의 출현이나, 문인들 개개인의 열독 감상평의 부흥이 평점의 형태에 끼친 영향과 소설평점의 평점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