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릉과 바다링 유람기  

펑위안쥔馮沅君(1900∼1974년)]
위안쥔은 허난 성河南省 탕허 현唐河县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궁란恭兰이었으나 나중에 수란淑兰으로 개명했다. 위안쥔沅君은 필명으로 그밖에도 간뉘스淦女士, 이안易安 다치大琦, 우이吴仪 등의 필명을 썼다. 어려서부터 사서오경과 고전문학 및 시사诗词를 공부했으며, 저명한 철학자 펑유란冯友兰이 오빠이고, 지질학자 펑징란冯景兰이 동생이며, 고전문학 연구가 루칸루陆侃如가 남편이다. 일찍이 진링여자대학金陵女子大学과 푸단대학復旦大学, 중산대학中山大学 우한대학武汉大学, 산둥대학山东大学 등을 거쳐 산둥대학山东大学 부교장副校长을 역임했다. 저서로 단편소설집 『권시卷葹』, 『춘흔春痕』, 『겁염劫焰』 등이 있으며, 나중에 고전문학연구에 종사해 『중국시사』(남편인 루칸루陸侃如와 공저), 『고우해古優解』 등을 집필했다.

내가 명릉明陵과 바다링八達嶺을 유람하고 싶다는 뜻을 품은 것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내가 베이징에 온 이래로 4년 동안 품어 왔던 숙원宿願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곳은 베이징 부근의 유명한 고적古迹이기에 멀리서 조망하고 오르기만 해도 우리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하지만 이곳은 베이징에서 기차로 네 정거장이나 떨어져 있어, 하루에 갔다 올 수 있는 이허위안頤和園이나 위취안산玉泉山, 비윈쓰碧雲寺, 징이위안靜宜園 등과 같은 곳에 비할 수 없다. 그래서 그곳에 다녀오고 싶다는 열망이 내 가슴 속에 4년씩이나 쌓여 있었음에도 나의 목적을 이루기에 적당한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펑위안쥔과 루칸루

마침 올해 중양절은 쌍십절과 겹쳐 절기로도 아름다운 기념일이 되었던 것이다. 예기치 않게 좋은 날들이 한데 어울려 두 개의 휴일이 이어졌기에 여학계연합회女學界聯合會 회장인 쳰錢 군이 교통부와 교섭을 해 무료승차권을 요청하는 바람에 우리 회원들이 두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나는 원래부터 이 두 곳에 대해 우러르는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당연하게도 이번 거사에 대해 백번 천번 찬성을 했다. 일이 되느라고 교섭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우리를 위해 특별히 열차 한 량을 내주었다. 나의 열망이 창졸간에 실현된 것이다.

우리 여행은 9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8일 저녁에 비가 내려 나는 자면서 창밖에 듣는 빗소리와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문득문득 2층으로 전해지는 것을 들었다. 그로 인해 적막하고 처량한 가을비 내리는 밤이 되었다. 그 소리들―바람 소리, 비 소리―은 즉시 내 마음 속에 수많은 실망의 씨앗들을 흩뿌려 놓았다. 심지어 잠결에도 실망에 찬 외침 소리를 낼 정도였다. ‘아! 우리가 명릉과 바다링에 가려는 계획이 틀어질 지도 모르겠구나.’

날이 밝자 나는 몽롱한 가운데 정신이 들었다. 막 옷을 입고 침상에서 내려오니 동학인 쳰융허錢用和 군―여학계연합회 회장―이 그새 문을 밀고 들어왔다. 나는 무슨 ‘굿모닝’이니 하는 인사도 할 틈 없이 불쑥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우리 계획대로 명릉에 가는 거지?”

그녀가 대답했다.

“가긴 왜 안 가? 비는 이미 멈췄는걸!”

나는 당연하게도 그 말을 듣고 심경 상의 변화가 없을 수 없었다. 황망히 같이 가기로 약속한 톈田, 레이雷, 량梁 군 등을 불러 급히 행장을 꾸리고 간단히 아침을 때운 뒤 앞 다투어 시즈먼西直門 역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의 동행은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 시즈먼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8시에 가까웠는데, 15분 쯤 기다려 우리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객차에 올랐다. 우리는 떠들썩한 승객들과 함께 베이징과 이틀간의 작은 이별을 하게 되었다.

칙칙 하는 기적 소리와 철커덕 하는 바퀴 소리가 어우러져 자아내는 음파가 우리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소리가 우리를 환송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별하는 자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느꼈던 것은 나의 영혼이 즐거움 속에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길가의 풀은 이미 서리를 맞아 옅은 누런색으로 변했고, 버드나무는 바람이 흔들어대는 통에 쉴 새 없이 열차 창 앞에서 나부끼고 있는 것이 모든 것이 죽어가는 환경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는 손을 뻗어 가지를 한두 개 꺾어보려 했지만, 열차는 비상하게 빨랐다. 이런 속도로 인해 우리가 보고 있는 버드나무는 한군데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뒤로 물러나는 듯이 보였다. 결국 나는 가지를 잡지 못했다.

들판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든 곡식들은 절기가 바뀌어감에 따라 이미 대부분 수확을 끝냈고, 남아 있는 것이라야 늦게 사위어 가는 식물들에 불과했다. 심지어 길가와 밭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들풀들 역시 여리고 푸릇푸릇한 것이 봄, 여름 때와 같은 모습이 없었다. 하지만 널다리와 맑은 시내, 초가집, 대나무 울타리, 푸르고 누른 마을 나무들이 이 쓸쓸한 들판과 어우러져 니짠倪瓚의 추경도秋景圖와 다를 바 없었다.

니짠倪瓒의 추정가수도秋亭嘉树图 복제화

하늘의 날씨는 원래는 그리 맑다고 볼 수 없어서 옅은 구름이 끼어 있고, 먼 곳의 봉우리는 흐릿하니 분명하지 않았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옛사람들이 구름과 산을 이어서 쓴 오묘한 뜻을 깨닫게 되었다. 바깥의 경치가 이렇듯 감정을 북돋우고 눈을 즐겁게 하는 사이 열차 안의 나들이 친구들은 감정이 극히 고조되어 시즈먼에서 난커우南口에 이르는 서너 개나 되는 정거장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 찰나의 순간에 연도의 풍광은 너나 할 것 없이 뇌리 속에 커다란 파도를 일으켰다. 곧 우리는 칭화학교淸華學校의 교사校舍가 산수가 빼어난 곳에 있는 것을 보고 다 같이 말했다.

“우리 학교도 이런 곳으로 이사오면 좋을 텐데.”

먼 산 아래 오목한 곳에 마을 하나가 아련하게 나타났는데, 서양 식 주택 몇 채가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사람들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지는 것으로 난커우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열차가 멈춘 뒤 우리는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칭얼淸爾호텔로 갔다. 이 호텔은 앞뒤로 모두 세 개의 정원이 있지만, 앞에 있는 정원은 유명무실해서 정원이라기보다는 골목이라 하는 게 나았다. 뒤에 있는 하나만 비교적 넓직한데, 중간에는 연못이 하나 있고, 포도 시렁도 있었다.

우리가 호텔 문으로 들어서니 호텔 주인은 응당 취해야 할 태도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곧 우리를 로비로 안내한 뒤 숙박비를 흥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이런 일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그래서 제대로 처리하는 법을 몰라 그저 한 마디도 보태지 않은 채 한쪽 귀퉁이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조용히 문제 해결을 기다렸다. 흥정한 결과 이틀 동안 방 두 칸에 4위안으로 하고 매 끼 밥은 1인당 2마오毛 5펀分으로 정했다. 우리는 학생 신분이라 부귀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조금도 난색을 표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때는 막 10시가 되었는데,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더 음미하기 위해 호텔에 밥을 준비시키지 않고 각자 싸가지고 온 간식을 내어 서로 바꿔먹음으로써 허기를 달랬다. 이런 모습은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사람이 볼 때는 누추하게 느껴지겠지만, 나는 오히려 감정이 통하는 가까운 사람들과 자유롭게 웃고 떠들며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이 정신적으로 자유스럽지 못하고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산해진미를 먹는 것보다 통쾌하고 흔연하며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정신 상태야말로 우리 청년들의 단체생활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먹을 것을 다 먹은 뒤 사람을 불러 나귀를 세내어 명릉 구경을 나섰다.

우리가 간식을 먹고 있을 때는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나귀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한꺼번에 많이 구하려니 한 번에 다 구할 수가 없어 오후 1시까지 지체한 끝에 동원령을 내려 명릉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나는 평소 말과 같이 큰 동물을 무서워했었는데, 나귀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귀를 타고 명릉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잔뜩 겁을 먹었지만, 나귀에 대한 두려움과 명릉에 가보고 싶다는 소망이 서로 착종된 결과 두려움에게서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두려움이 끝없이 밀려와 비록 억지로 떠밀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긴 하지만 가다가 몇 번이나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들이를 나서게 한 충동심이 나의 용기를 북돋웠지만 과연 나귀 등에 타고 보니 과연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귀가 한번 흔들릴 때마다 내 마음도 흔들려 진땀이 흘렀다.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공손한 자세로 몸을 구부리고 지탱할 밖에. ‘궁즉통窮則通’이라는 말 그대로 나귀를 타고 2리 남짓 가노라니 과연 담이 커졌다. 그때부터 머리를 쳐들고 주변 풍경을 감상하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심지어는 고삐도 잡지 않고 멋대로 가게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방심의 결과에는 실패나 좌절이 뒤따르는 법. 그 자체가 교훈이 된다. 과연 남쪽으로 10여 리 정도 갔을 때 나귀가 길가의 마른 풀을 먹으려고 했는데, 자유롭지 않은 형세 하에 앞발을 땅바닥에 꿇는 통에 나 역시도 이제까지의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신발에 극히 미미한 손상을 입었는데, 친구들이 모두들 와서 말하기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다.

우리가 호텔을 나선 시간은 그리 이르다고 할 수 없었으니 그때는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다. 햇빛이 반대편을 비추어 동쪽 봉우리에 옅은 황색 빛을 띤 형상이 나타났다. 햇빛이 비추지 않은 곳은 오히려 검푸른 잿빛을 띠고 있었다.…… 서리 맞고 잎이 떨어지지 않은 수목들이 산비탈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멀리서 보니 미푸米芾가 돌을 그릴 때 점묘한 것을 방불케 했고, 또 태호석太湖石 위에 검푸른 이끼가 낀 듯했다. 마른 풀로 뒤덮인 오솔길이 구불구불 산 아래까지 이어져 마을을 관통하고 다리를 건너는 우리의 앞길을 인도했다. ‘사방이 산색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한 줄기 석양이 비추고四圍山色中, 一鞭殘照裏’라는 말은 가을 나들이 길의 풍광을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우리 친구들은 모두 내면에 응어리져 있는 즐거운 감정을 바깥으로 분출하느라 나귀 등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는 마을의 꼬마 아이들은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하나, 둘, 셋, 넷 수를 세다가 급기야는 우리를 따라서 자기들의 산가山歌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기 마을 사람들 말고는 낯선 사람들을 자주 보지 못했을 터인데, 우리 같은 여학생 무리는 더더군다나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16, 7리 정도를 돌아돌아 도착한 곳은 커다란 석비방石碑坊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아래서 한번 우러르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대영문大營門을 지나갔다. 전하는 말로는 명나라가 성세盛世를 이루었을 때 백관들이 능을 참배하러 와서는 여기서 모두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두 칸짜리 허물어진 집만 남아 있을 뿐인데, 지붕의 깨진 황금색 기와와 이미 색이 바래고 벗겨진 붉은 담벼락만이 이곳이 그 옛날 황제의 은택을 입었던 곳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대궁문大宮門을 지나면 비루碑樓다. 명칭 그 대로 그 안에 커다란 비가 있는데, 건륭乾隆 어제御製의 명 13릉을 애도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그 위에 새겨져 있는 문장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받은 나의 감상은 흥망성쇠는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건륭이 이 시를 지었을 때만 해도 어찌 알았겠는가? 명릉을 애도했던 자 역시 2백 년 뒤의 자신을 애도하게 될 줄.

비루에서 동북쪽으로 연도에는 석수石獸가 16개 있고, 석인石人이 12개 있으며, 화표華表 두 개도 무성한 풀숲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조각은 아주 정교했다. 석수는 흉악하게 생겼고, 석인의 경우 무신은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문신은 [송대의 문장가인] 어우양슈歐陽修가 의대衣帶를 늘어뜨리고 홀笏을 잡은 채 침착한 태도를 취했다는 말과 부합했다. 확실히 침착해 보였다. 애석한 것은 내려서 구리 낙타를 어루만지면서 그 위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자세히 음미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동북쪽으로 5공교와 7공교―이 두 개의 다리도 지금은 이미 퇴락해 부서졌다―를 지나 돌길을 따라 장릉長陵에 이르렀다. 연도의 풍광을 보면서 ‘정원의 홍시 나뭇잎 드문드문園紅柿葉稀’이라는 구절을 큰 소리로 낭송했다.

장릉은 명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능묘이다. 이 능의 전면은 궁전 식의 건축으로 2층의 정원과 절반 쯤 부서진 돌계단과 섬돌이 있었는데, 그 위에 새겨진 용 무늬를 희미하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대전의 누런 기와는 이미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고, 그 안에는 붉은 색의 굵은 기둥이 있는데, 네 벽과 처참하면서도 음침한 어둠 속에 보좌 등 조전朝殿에 마땅히 있어야 할 집기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보좌 중간에 영락 황제의 패위가 하나 더 있는 것 말고는 삼전三殿과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은 자에 대해 살아 있는 사람을 이용하는 식의 이런 건축 의식은 아마도 공자 선생의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듯 섬기며, 없는 이 섬기기를 있는 이 섬기 듯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한다는 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전의 뒷면은 영락제의 능묘로 바라보니 작은 산과 같은데 그 작은 산 위에는 가지가 서로 교차되어 있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나무의 뿌리 부근에는 까마귀와 참새 등의 배설물과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인 것을, 하필이면 이렇듯 수많은 인력을 들이고 유용한 땅을 점거한단 말인가.……중략.

장릉

우리가 장릉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시 반이 된 시점이었다. 나귀 몰이꾼은 우리에게 여기서는 30분 정도만 머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른 시간이 아니었고 다시 사릉思陵 에 갔다 오면 우리가 여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밤이 우리보다 앞서 찾아올 것이었다. 어둠 속에 나귀를 타고 산길을 가는 것은 아주 위험했다. 하지만 우리가 나귀를 타고 길을 가는 수준도 제각각이었기에 능에 도착하는 시간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우리 가운데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이미 다 돌아본 뒤에도 나머지 사람들을 15분 정도 기다려야 했기에 4시 반이 되어서야 우리는 장릉을 떠날 수 있었다.

음력 9월 초라 해가 이미 점점 짧아진데다 날씨마저 음울한데 하늘엔 회색 구름이 가득 드리워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네 시 남짓 되었음에도 이미 황혼이 내려앉았고, 멀리서 다가선 숲도 차츰차츰 또렷한 모습에서 어둡고 담담한 색깔로 변해갔다. 나귀가 길을 가며 뚜벅뚜벅 걷는 발굽 소리도 올 때보다 촉급하게 들렸다. 여기에 더해 사방의 황량한 풍경―사릉은 현재는 지키는 사람도 없이 전각의 문이 잠겨져 있어 오랫동안 찾아오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게 장릉과 비교할 수 없었다―은 우리에게 더욱 쓸쓸한 인상을 남겼다. 하늬바람 옛 길에 불어와 나그네 애간장을 끊노니 사릉을 나온 뒤 하늘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사릉은 현재도 외부에 공개되고 있지 않다.

원근의 숲은 이미 깊은 어둠 속에 잠겨 모습을 감추었고, 우리와 같이 온 동행들 역시 점점 그 모습들이 흐릿해졌다. 거리가 조금 먼 곳은 서로 보이지 않게 되어 노래를 불러 피차간에 호응을 했다. 하지만 조금 멀리 떨어진 경우는 말은 들리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앞선 이는 멀리 가버렸다. 뒤에 처진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가운데 ‘앞에 있는 옛 사람 보이지 않고 뒤에 오고 있는 이도 보이지 않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암중모색하면서 때로는 높고 때로는 낮게 등불 빛이 있는 난커우를 향해 다가갔다. 불빛이 환해지더니 기차가 증기를 내뿜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인생의 종결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불과하거늘 하물며 길 가는 것임에랴!

사릉은 황제의 묘라고 하기엔 규모가 작다. 아마도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능묘라 그런 듯하다.

난커우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9시가 가까웠다. 모든 상점들은 대부분 팔려고 내놓은 물품들을 모두 거두어들였고,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그저 꺼질 듯 말 듯 한 등불을 문 밖이나 실내에 걸어놓거나 창문 위로 창백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깊은 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나그네를 기다리는 듯했다. 여관에 도달한 뒤 여관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2마오 5펀짜리 한 끼 밥을 먹었다. 그리고 침구를 정리하고는 잠이 들었다.

……중략

10일 8시에 일어나 소세를 마치고 나니 바람이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유람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기에 바깥에 찬바람이 쌩쌩 불건 말건 원래 정해 놓은 계획을 뒤집을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을 먹고 15분 쯤 뒤에 우리는 10시 12분에 출발하는 칭룽챠오靑龍橋(바다링八達嶺에 가려면 여기서 내려야 한다) 행 열차에 앉아 있었다. 징쑤이루京綏路는 난커우에서 북쪽을 향하기에 이미 산길로 접어들어 길가의 풍경은 밝고 빼어나기보다는 웅장함이 두드러졌다.

철로는 구불구불 산자락을 휘돌아 가며 어떤 때는 산마루에 끊겨 길이 없는 듯 보이다가도 봉우리를 돌아서면 갑자기 별천지가 펼쳐졌다. 쥐융관居庸關과 우구이터우五桂頭, 스포쓰石佛寺 이렇게 세 개의 산굴이 극히 험준한 산 고개를 뚫고 그 뱃속에서 나왔으니, 산골짜기 오목한 곳이나 깎아지른 협곡 위에 몇 개의 마을이 점점이 놓여 있었다. 나무에는 낙엽이 밭에는 시든 채소가 그리고 초가집 대나무 울타리 등이 엇섞여 있으면서 푸른 것은 푸르고 누런 것은 누르고, 붉은 것은 붉은 대로 여기에 한 줄기 맑고 투명한 시냇물까지 커다란 바위를 때리며 졸졸 소리 내는 것이 옥구슬 같았다. 나는 유명한 화가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들쭉날쭉한 산 정상에 몇 천 년 됨직한 옛 장성이 가로질러 있는데, 이미 대부분 무너져 내리고 퇴락했지만,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공정의 거대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아울러 장성이 지나가는 곳은 산세가 험준한 것이 칼이나 도끼가 늘어서 있는 것 같고, 우뚝 솟은 돌 절벽은 사나운 괴수와 같아 그것을 우러르고 있는 우리는 당시 요역의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험준한 절벽 아래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스러져 후대 사람들의 추모의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모르겠다. 비록 당시에는 호마胡馬의 남하를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투쟁의 본능이란 게 인류 생존의 필수 요소였던가?

그 날 바람은 거세고 차가웠다. 하지만 나는 열차 안에서 양쪽의 풍경을 볼 수 없는 게 싫어서 몇 명의 학우와 함께 스카프를 하고 열차 사이의 문밖에 서 있었다. 밀려오는 바람에 우리는 서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난간을 꽉 잡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가 버릴 것 같았다.

우리가 열차에서 한 시간 남짓 주변 경치를 실컷 보고 난 뒤 칭룽챠오에 도착했다. 예전에 나는 이 곳이 바다링에 인접한 고적古迹이라 규모가 큰 정거장이고 사람들로 북적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그 반대였다. 그저 산 아래 작은 정거장으로 매표소와 철도 건설 인부가 덮어놓은 차일 말고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동서남북이 모두 산인데, 황량한 것도 황량한 데다, 형세 역시 험준했다. 열차가 멈춰 선 뒤 우리 모두는 바다링을 유람한다는 열광에 빠져 미친 듯이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저 무정한 풍백風伯은 여기서도 엄청난 바람을 보내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거의 서 있을 수도 없게 했다. 길가의 모래 먼지 역시 호가호위狐假虎威 하듯이 우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현재의 칭룽챠오 역

이에 쳰융허 군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추운 게 무섭지 않다면 바다링까지 갈 것이고, 추운 게 두렵다면 여기에 있거나 인근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야.”

그녀가 이렇게 말한 저의는 당연히 길이 험하고 바람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몸이 약한 이라면 어쩌다 조심하지 않아 어떤 위험에 빠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산에서 노닐고자 하는 열광과 외부의 바람、모래와의 싸움이 서로 대치하는 형국 하에서 외부 인사가 이 일에 대해 하는 한 마디 말은 모두 일거수일투족이 영향을 주어 좌우 쌍방 간의 승부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아! 우리가 산에서 노닐고자 하는 열광은 바람의 위력 앞에 포로가 되었다! 바람의 위력에 대한 나의 공포가 나의 모든 심령을 점령해버렸다! 의지가 박약하고 모험심이 없는 사람은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없고, 단지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웅장하고 험준한 걸로 온천지에 유명한 저것이야말로 내가 4년 동안 마음속에 놀러가고 싶어했던 고적古迹이거늘, 지금 그 아래에서 배회하는 것 역시 유람 중의 좋은 기회가 아닐쏘냐? 하지만 결국 내 눈앞에서 그것이 안온하게 지나가버리는 걸 바라만 보는 것은 내 성격이 유약한 탓이 아닐는지. 이제껏 살아오며 잃어버린 기회는 또 얼마나 많은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잃어버릴 기회는 또 얼마나 많을까? 이 순간 산수 유람에서 비롯된 감상이 인생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만감이 교차하는 중에 내 마음은 이런 감상에 의해 난마와 같이 얽혀, 어떤 불만족이 내 자신이 잘못한 일과 함께 내 심령을 향해 총공격을 가했다.

오후 1가 되어서 산에 올랐던 학우들 10여 명―나와 같은 태도를 취했던 것은 너댓 명이었기에―이 앞뒤로 속속 정거장으로 돌아왔다. 그네들의 말에 의하면, 바다링으로 가는 길은 확실히 난코스라 어떤 곳은 높은 산이고 어떤 곳은 깊은 골짜기인데, 다리도 무척 적어서 대부분 철도 위 열차가 달리는 다리인데, 중간에는 철판이 덮이지 않은 곳도 있어 지나갈 때는 한 걸음 한 걸음 이 침목에서 저 침목으로 건너가야 하며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은 지상의 바람보다 훨씬 세차다고 했다. 그네들은 바람이 불면 땅 위에 쪼그려 앉아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억지로 몇 걸음 가야만 하는데, 바람이 다시 불면 그대로 쪼그려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후회의 정도가 감소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기심이 증폭되어 이런 우주의 장관을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 가보지 못한 학우들에게 그네들의 족적을 이어갈 두 번째 조의 탐험을 해보자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네들은 모두 나의 제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회한을 안고 굴복해 그네들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산에 갔다 온 학우들은 내가 산에 오르지 못해 후회하는 걸 보고 자기들이 산 위에서 주워온 기암괴석의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이걸로 어찌 나의 회한을 위로할 수 있으니. 그저 회한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더해졌을 따름이다.

3시를 전후해 기차가 베이징을 향해 출발했다. 연도의 풍경을 다시 한 번 되짚어간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하루 사이에 아침 저녁의 광선이 다르고 이에 따라 경물도 차이가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해 마지 않았던 것은 석양이 언덕 위에 비추는 가운데 무리를 이룬 눈같이 희거나 칠흑 같은 황갈색 소와 양들이 혹은 일어나 있고 혹은 누워 있거나 종횡으로 오가는 모습과 그것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진 이들이 돌산 위에 편히 앉아 산림의 아름다운 경치를 음미하거나 산가山歌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진정이 우러났다. 그들의 정신에는 간교한 마음이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으니 그 얼마나 고귀하고 사랑스러운가! 평화의 원천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연도의 산은 때로는 비껴드는 태양에 가려졌다가 때로는 드러났다가 하면서 신출귀몰하는 가운데 나의 정신은 점차 현실감을 잃고 공허한 환상 속에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마음속으로 내년 봄에 유람할 생각을 떠올렸다. 시후西湖를 어떻게 노닐 것이며, 황허러우黃鶴樓를 어떻게 올라 창쟝長江을 바라볼 것인가……마침내 회한의 어두운 구름들은 이런 환상 속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난커우를 지나자 날이 더 어두워졌다. 싸늘한 한기가 들어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스카프를 량梁 군에게 주고 나는 똑같은 걸 하고 있는 급우와 서로 의지한 채 창에 기대어 창밖의 저녁 풍경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이미 우리의 시선 밖으로 사라졌고, 그저 남아 있는 빛줄기만이 핏빛으로 물든 저녁노을로 변해 담담하고 맑은 하늘가에 걸렸다. 먼 산은 검푸른 보라색에서 어두운 회색으로 변했다가 결국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나의 환상이 이렇듯 기이한 풍경의 자극을 거치고 나니, 왕보王勃의 “노을빛 엉기니 저녁 산은 자줏빛烟光凝而暮色紫”이라는 구절이 진정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리바이李白의 “한산 일대는 상심으로 푸르다寒山一帶傷心碧” 역시 천고의 절창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왜일까? 중국의 고대문학에서 쓰이는 문자들은 실제 경치나 감정과 부합하지 않는 곳이 많기는 하나, 천재적인 문학가들이 그 정감에 의해 자극을 받게 되면 그들이 빚어내는 문장들은 실제 경물을 묘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후대 사람―꼭 나중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창작상의 천부적 재주가 없는 사람―은 경물이 실재하는 상태나 상황을 체득하지 못하고 그저 선인先人들을 답습하는 상투적인 구절을 이해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니, 문장이라는 두 글자는 끝내 그 진정한 가치를 잃게 된다. 나의 뇌리 속에서 어지러운 상념들이 오가는 사이 기차는 이미 창핑昌平과 칭허淸河의 여러 정거장을 지나 시즈먼西直門에 도착했다.

우리가 밖으로 나올 때는 원래 시스먼에서 하차한 뒤 인력거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늦어 인력거를 부르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결국 환성環城 지선 표를 끊고 바삐 열차에 올라 쳰먼前門으로 갔다. 우리가 돌아온 날은 국경일이라 놀러 나온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아 3등칸에는 앉을 자리가 전혀 없어 우리는 줄곧 서서 가야 했다. 다행히도 그리 오래지 않아 쳰먼에 도착했다. 그 때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반달이 중천에 떴다. 그날은 쌍십절 저녁이라 늘 그렇듯 화려하게 장식이 된 패루牌樓에 밝게 빛나는 전등을 수없이 달아놓아 대낮같이 환하게 밝았다. 등불과 달빛을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밝고 투명한 신월新月이 더욱 다정하게 다가왔다. 달은 우리가 학교에 돌아올 때까지 맑고 아리따운 면모를 드러내더니 창 앞에서 우리의 안면安眠을 지켜주었다.

1921년 10월 13일 밤

(1921년 10월 24일∼30일 베이징 『신보부간晨報副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