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평점의 형태는 소설평점의 외부적인 특징이다. 고대 소설사에서 평점은 기나긴 발전 역사를 거치면서, 그 형태적 특징이 고정적이고 획일적이지 않고, 비교적 복잡한 형식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형태의 연원으로 말하자면, 소설평점의 형태는 전통적인 경전의 주석과 역사 평론, 문선(文選)의 평주(評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고대인의 독서 방식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동시에 소설평점은 고대 소설, 특히 통속소설과 결합하는 과정 속에서 점차 다른 문학 평점과 구별되는 형태적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 장에서는 이에 대해 소설평점 형태의 변화 과정과 소설평점 형태에 대한 분석과 해석, 이렇게 두 가치 측면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1) 명대 소설평점의 형태
소설평점의 형태에 관한 요즘 사람들의 일반적인 서술은 다음과 같다.
서두에는 <서(序)>가 있고, <서>의 뒤에는 <독법>이 있는데, 총론 격의 문장으로 몇 개의 조문이나 열 몇 개, 심지어는 백여 개의 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뒤 매 회의 앞부분이나 뒷부분에는 총평이 있어 해당 회 전반에 걸쳐 몇 가지 문제를 짚어내 의론을 가한 것이다. 매 회 중에는 미비나 협비, 방비(旁批)가 있어 소설의 구체적인 묘사와 서술에 대해 분석하고 평론했다. 이 밖에도 평점자는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거나 가장 정채롭다고 여긴 문장에 대해 그 주변에 권점을 가해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예랑(葉郞), 《중국소설미학》, 베이징대학출판사(北京大學出版社), 1982년]
이러한 서술은 전체적으로 소설평점의 형식적 특성을 잡아낸 것이긴 하지만, 사실 이것은 소설평점사에서 명저에 드는 작품들을 개괄한 것일 뿐이다. 혹자는 이것이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완비되어 있는 형태라고 말하지만, 소설평점의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다. 실제로 평점의 형태가 이처럼 완벽하게 구비된 것은 소설평점사에서 극히 소수만을 점하고 있을 뿐, 수많은 소설평점은 이러한 특색을 구비하고 있지 않다. 어떤 것은 미비만 있거나, 어떤 것은 방비만 있고, 어떤 것은 단지 회말총평만 있고, ‘독법’ 류의 문장은 소설평점 중에서도 더더욱 소수에 속한다. 그래서 소설평점의 형태는 이상에서 서술한 대로 획일적으로 규정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변화 발전의 실마리를 갖고 있으면서 서로 다른 소설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평점 형태를 형성했다. 동시에 소설평점은 고대 소설, 특히 통속소설이 발전하는 가운데 농후한 상업적인 띠게 되어 그로 인해 평점 형태의 형성에 어느 정도 독자의 수용과 출판의 상업적인 고려라는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에 근거해 고대소설의 전파사에서 소설평점의 형태는 자못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을 탐구하다 보면 소설평점이 변화 발전한 궤적을 분명하게 그려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소설 예술의 발전 궤적을 반영할 수 있기도 하다. 소설평점 형태가 변화 발전한 것을 서술하되, 우리는 전체적으로 명청대를 하나의 경계로 삼아 그 발전의 궤적을 그려낼 뿐 명확하게 단계를 지어 획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대의 소설평점의 진정한 기점은 만력 연간이다. 만력에서 명말에 이르는 동안 소설평점의 형태는 다음과 같은 발전 과정을 거쳤다. 소설평점은 처음부터 ‘주석’의 의미를 띠기 시작했는데, 형태적으로는 쌍행 협주(夾注)를 주도적인 형식으로 삼아 표현되었다. 이후에는 소설평점이 ‘주’에서 ‘평’으로 점차 발전해 나갔고, 그에 따라 평점 형태 역시 바뀌어 미비나 방비, 총비 등의 형식이 점차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숭정 14년(1641년)의 진성탄 비 《수호전》에 이르러 소설평점의 형태가 완비되었다. 이와 동시에 두 가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현상이 주의를 끌었는데, 하나는 위샹더우(余象斗)의 ‘평림(評林)’이고 다른 하나는 펑멍룽(馮夢龍)의 ‘삼언’ 평본이다.
통속소설에 주를 다는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가정 본 《삼국지통속연의》에서 보인다. 만력 19년(1591년)의 완췐러우(萬卷樓) 본은 가정 본의 부분적인 내용을 흡수해 더욱 상세한 주와 평을 달았다. 이 책의 저우웨쟈오(周曰校) ‘지어(識語)’에서는, “구두에는 권점이 있고, 어려운 글자에는 음주가 있으며, 지리에는 석의가 있고, 전고에는 고증이 있으며, 빠진 부분은 보충하였다(句讀有圈點, 難字有音注, 地理有釋義, 典故有考證, 缺略有增補)”고 하였다(《삼국지통속연의》, 만력 19년 완췐러우 간본). 이 다섯 가지 작업은 분명하게 주석의 범주에 속하는데, 그 형식은 모두 쌍행의 협주로 본문 가운데 표식이 있는 형식은 다음의 일곱 가지다.
석의(釋義): 본문 가운데 비중이 가장 크며, 지명을 풀이하고, 음에 주를 달며, 역사와 전고를 풀이하는 것 등을 포괄한다.
보유(補遺): 본문 중에는 비교적 적게 나타나며, 대부분 역사 사실을 보충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고증(考證): 본문 중에 비교적 많이 나타나며, 내용은 ‘보유’와 대동소이하나 역사적인 사실을 보충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논왈(論曰): 본문 중에 어쩌다 보이는데, 평론적인 성격을 자못 갖추고 있다.
음석(音釋): 주로 음을 주석한 것으로 때로 ‘석의’와 서로 뒤섞이기도 한다.
보주(補注): 본문 중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데, 역시 평론적인 색채를 자못 갖고 있다.
단론(斷論): 본문 중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데, ‘논왈’과 비슷하며, 평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상의 일곱 가지 형식 가운데 그 내용은 주로 주석이지만 이미 분화의 추세로 나아가는 것으로 ‘논왈’과 ‘보주’, ‘단론’의 세 가지가 체현하고 있는 평론적인 성격은 실제로 이미 통속소설의 주석이 ‘주’에서 ‘평’으로 발전해 가는 과도적인 추세를 드러내고 있다. 당연하게도 완췐러우(萬卷樓) 본 《삼국연의》 주석 중의 이른바 평론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소설 평론과는 거리가 먼데, 기본적으로는 역사 현상과 역사 인물에 대한 사실(史實)의 분석과 도덕적인 판단이다. 완췐러우 본의 평주(評注) 형식을 종관(綜觀)하면, 우리는 이것이 구성하고 있는 ‘석의’와 ‘고증’, ‘평론’이 삼위일체가 된 평주 형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평주 형식은 전통적인 사주(史注), 사평(史評)과 직접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남조 송대의 페이쑹즈(裵松之)는 천서우(陳壽)의 《삼국지》에 주를 달아 이런 평주 형식의 문을 열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상세히 찾아보고 두루 빠짐없이 알아보는 데 힘써, 위로는 구문을 수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빠지고 잃어버린 것을 그러모았다.(奉旨尋詳, 務在周悉, 上搜舊聞, 傍摭遺逸)” “만약 오류가 분명하고 말이 사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잘못된 것에 따라 바로잡아 그 망녕됨을 고치고, 그 당시 일의 옳고 그름이나 나이 등의 작은 잘못은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논하고 따져 물었다.(若乃紕繆顯然, 言不附理, 則隨違矯正, 以懲其妄, 其時事當否, 及壽之小失, 頗以愚意有所論辯.)”[페이쑹즈, <《삼국지》주표(三國志注表)>] 전통적인 명물훈고(名物訓詁)의 기초 위에 보유(補遺)와 고변(考辨), 평론이 하나로 융합된 평주 방식이 사학의 체례(體例)에 끼친 선구자적인 공은 후대에 대한 영향이 매우 컸고, 소설평점의 시초가 평주를 위주로 한 것 역시 이러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역사연의소설로서 《삼국연의》의 평주가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 역시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연의소설과 역사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다.
소설에 대한 이러한 평주 방식은 명대에 일정 기간 동안 연속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 말하자면, 이러한 특색은 다음의 몇 가지로 체현되어 있다.
《전한지전(全漢志傳)》(題“漢史臣蔡伯喈匯編, 明潭陽三台館元素訂梓, 鍾伯敬先生批評”)
《경판전상안감음석량한개국중흥전지(京板全像按鑒音釋兩漢開國中興傳志)》(題“撫宜黃化宇校正, 書林詹秀閩綉梓”)
《열국전편십이조전(列國前編十二朝傳)》(題“三台山人仰止余象斗編集”)
《신열국지(新列國志)》(題“墨憨齋新編”)
상술한 네 가지 간본에는 아래의 몇 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네 가지 소설 모두 역사연의이고, 평주 형식은 모두 쌍행 협주이며, 주석 내용은 주음(注音)과 석의(釋義) 위주다. 완췐러우 본 《삼국연의》의 평주와 약간 다른 것은 만력 34년(1606년)에 간행된 《열국전편십이조전(列國前編十二朝傳)》에서는 회말 비주가 증가되었고, 드러난 형식은 ‘석의(釋疑)’와 ‘지고(地考)’, ‘총석(總釋)’, ‘평단(評斷)’, ‘감단(鑒斷)’, ‘부기(附記)’, ‘보유(補遺)’, ‘단론(斷論)’, ‘답변(答辯)’, ‘논단(論斷)’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내용은 여전히 사실(史實)의 고증과 음의(音義)의 고석(考釋) 등이었다. 숭정 연간에 간행된 《신열국지》는 평주가 나뉘어 있어, ‘주’는 본문 가운데 쌍행 협주로 되어 있고, 내용은 대부분이 지명과 관명을 주하고 음의(音義)를 주석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범례>에서는 “고금의 지명이 달라 지금은 모두 《일통지》에 의거해 분명하게 조사해 주를 나누어 읽기에 편하게 했다(古今地名不同, 今悉依一統志, 査明分注, 以便觀覽.)”[<《신열국지》범례>, 명 숭정 연간 진창(金閶) 예징츠(葉敬池) 재본(梓本)]고 하였다. 비록 지명을 풀이했다고 말했지만 그 가리키는 바는 사실상 이에 그치지 않아 이 책의 주는 독립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평’이라고 한 것은 달리 미비와 소량의 방비를 덧붙인 것으로, 그 내용은 소설 인물과 정절에 대한 간략한 평론이다. 이렇게 주와 평을 나누는 형식은 이전 소설 평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만력 20년 이후에는 소설평점이 이미 점차 성숙 단계로 나아갔고, 이러한 형식의 출현 역시 전통적인 사주(史注)가 고대 소설의 영역에서 해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뒤로 주석은 이미 소설비평에서 더 이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했다. 곧 청대의 《삼국연의》와 《동주열국지》 등 역사연의소설의 평점에서 간략한 주석은 이미 무수한 소설평론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소설평점이 ‘주석’으로 그 시발점을 삼은 뒤 ‘주’는 점차 ‘평’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대체로 명말에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만약 소설평점 중의 ‘주’가 전통적인 역사학의 영향에 그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한다면, 소설평점 중의 ‘평’은 문인이 소설을 읽으면서 감상평을 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손 가는 대로 점평(點評)을 하고 느낀 바를 점묘한 것이 소설평점 중에서 사상과 예술 평론이 시작된 기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명대에 이러한 일에 종사하면서 후대의 소설평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이는 바로 리줘우(李卓吾)이다. 위안샤오슈(袁小修)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룽후가 우창의 주 씨 집안에 기거하고 있을 때(그 때는 만력 20년이었다-인용자) 내가 가서 그를 만나보니, 바야흐로 창즈에게 이 책(《수호전》)을 베껴 쓰게 하고 글자마다 비점을 하고 있었다.(李龍湖方居武昌朱邸, 予往訪之, 正命常志抄寫此書, 逐字批點.)”[위안샤오슈, 《유거시록(游居柿錄)》 9권] 리줘우 자신도 “《수호전》을 비점하는 일은 사람을 몹시 통쾌하고 즐겁게 만든다.(《水滸傳》批點得甚快活人)”[리줘우, <여초약후(與焦弱侯)>, 《속분서(續焚書)》 1권]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문인들이 개별적으로 소설을 읽고 감상평을 쓰는 것은 당시에는 비교적 보편적이었다. 한한쯔(憨憨子)는 “내가 느낀 바 있어 집으로 돌아와 그 책(《수탑야사(繡榻野史)》)을 꺼내 품평하고 비점했다.(余慨而歸, 取而評品批抹之)”[<《수탑야사》 서(繡榻野史序)>, 명 만력 연간 쭈이몐거(醉眠閣) 간본]고 말했다. 우중(吳中) 지역에서는 더욱 많은 문인들이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돌려 읽고 품평했다. 당시 문인들이 개별적으로 소설을 읽고 감상평을 하던 것이 소설의 간행과 결합했을 때, 이른바 소설평점은 개별적인 개인의 행위에서 일종의 공공의 사업으로 전화되었다. 특히 서방(書坊) 주인들이 당시의 하층 문인들을 집합시켜 그들 사이에 참여케 하자 소설평점본의 간행은 일시에 흥성하게 되었고, 명 중엽과 말기에 소설평점의 발전은 대체로 이런 태세를 드러내게 되었다.
평점의 형태로 말하자면, 문인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감상평을 쓴다는 특성에 들어맞게 소설평점의 형태가 가장 우선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미비와 방비, 그 중에서도 미비가 더욱 보편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고대에 문인들이 책을 읽을 때의 습관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이것은 간결과 직접성을 특징으로 삼아 그때마다 느낌이 일어나면 손가는 대로 비점하여, 강렬한 임의성과 감오성(感悟性)을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비는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가볍고 간편한 형식이었고, 명대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형식이기도 했다. 필자가 그 동안 보았던 명대의 수십 종의 소설평점본 가운데 미비는 (석의에 중점을 둔 역사연의는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된 형식이었다. 상대적으로 소설평점 가운데 회전(回前)이나 회말총평(回末總評)은 조금 나중에 나타난다. 그것은 미비의 중점은 감오(感悟)에 있고, 총평의 의도는 총결에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임의성을 띠고 있고, 후자는 의식적인 것이며, 어느 정도 간각의 상업적인 색채에 그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평점 가운에 ‘총평’이 나타났다는 것은 곧 소설평점이 이미 개별적인 행위에서 공중을 목표로 한 사업으로의 전화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거하면 명대 소설평점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출현한 ‘총평’이라는 형식은 만력 38년(1610년)에 간행된 ‘룽위탕(容與堂) 본’ 《리줘우 비평 충의수호전(李卓吾批評忠義水滸傳)》이다. 이 책의 평점자에 대해서는 이제껏 의견이 분분해, 혹자는 리줘우(李卓吾)라 하고 혹자는 예저우(葉晝)라 하는 등 각자의 설이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작품 속의 평점을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평점 형태가 이처럼 성숙한 것은 리줘우가 마음가는 대로 평점한 풍격과는 서로 들어맞기 어려운 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리줘우의 평을 기초로 서상들이 예저우에게 가공과 보강, 개조를 부탁해 만들어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추론이 성립한다면, 만력 20년 리줘우가 《수호전》 평점을 시작해 만력 38년 룽위탕에서 《수호전》 리 평본(李評本)이 나오기까지 소설평점이 개별적인 행위에서 공중을 목표로 한 사업으로의 전환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평점 형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괄되었다.
첫 머리에는 리줘우(李卓吾)의 <《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傳)》叙>[베이징도서관(北京圖書館) 소장본에는 이 서가 없다], 다음으로는 소사미(小沙彌) 화이린(懷林)이라 서(署)한 총론에 해당하는 문장 네 편, 곧 <비평《수호전》술어(批評《水滸傳》述語)>, <량산보일백단팔인우열(梁山泊一百單八人優劣)>, <《수호전》일백회문자우열(《水滸傳》一百回文字優劣)>, <우론수호전문자(又論水滸傳文字)>가 있다. 본문 중에는 미비와 협비가 있고, 회말에는 총평이 있고, “리줘우 왈(李卓吾曰)”, “줘우 왈(卓吾曰)”, “투웡 왈(禿翁曰)” 등으로 서(署)했다. 본문 중에는 글자 옆에 대부분 권점이 되어 있고, 평점자는 본문 중 산절(刪節)을 하려는 듯한 부호가 많이 달려 있는데, 혹은 상하구을(上下金勾(한 글자)乙, 혹은 구(句) 옆에 직접 가로획을 긋고 위에 :삭제해도 된다(可刪)“고 새겨 넣었다.
이것으로 이 소설이 평점 형태가 비교적 완비된 소설평본으로 기본적으로 고대 소설평점의 외재적인 형태를 마련했고, 그 가운데 본문 앞에 평론 문장을 증가시킨 것이 중요한 특색이며, 본문 평점과 더불어 유기적인 총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룽위탕(容與堂) 본’ 이후에는 대략 만력 39년 전후로 위안우야(袁無涯) 본 《신준리씨장본충의수호전(新준李氏藏本忠義水滸傳)》이 간행되었다. 이 평본의 본문 평점 형태는 상대적으로 간략한데, 미비와 방비만 있을 뿐이다. 다만 본문 앞에는 리줘우(李卓吾)의 <서(叙)>와 양딩졘(楊定見)의 <소인(小引)>과 <송감(宋鑒)>, 《선화유사(宣和遺事)》(一節), 위안우야의 <발범(發凡), <수호충의일백팔인적관출신(水滸忠義一百八人籍貫出身)> 등 몇 종의 글이 있다. 이렇게 본문 앞에 문장을 증가한 것은 소설평점이 진일보 성숙한 것을 나타내 준다.
만력 40년 이후 소설평점은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발전해, 서로 다른 평점 대상에는 서로 다른 평점 형태를 채용했는데, 이 시기 소설평점의 형태의 상황을 아래의 도표로 정리할 수 있다.(“○”는 있다는 것이고, “×”는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33종의 평점본 가운데 미비가 있는 것은 21종이고, 협비가 있는 것은 5종, 방비가 있는 것은 7종이며, 총평이 있는 것은 22종, 미비와 총평이 같이 있는 것은 12종이다. 이것으로 미비와 총평이 이미 소설평점의 통상적인 형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총평이 대량으로 증가한 것은 소설평점이 이미 문인들의 개별적인 열독과 감상평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일종의 의식적이면서도 목적을 갖고 있는 문학비평 활동이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숭정 14년(1641년), 진성탄의 《관화탕 제오재자서 수호전(貫華堂第五才子書水滸傳)》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중국 고대소설사와 소설평점사상 중요한 저작으로 명대 소설평점 중 평점 형태가 가장 완비된 평점본이기도 하다. 이 책의 평점 형태는 다음의 몇 가지를 포괄한다.
첫 머리에는 진성탄의 [<서일(序一)>, <서이(序二)>, <서삼(序三)>이라 제(題)한] <서(序)> 세 편이 있고, 다음으로는 모두 69조로 이루어진 <독제오재자서법(讀第五才子書法)>이 있으며, 다음으로 진성탄이 스나이안(施耐庵)에 가탁한 [“관화탕 소장 고본 《수호전》 앞에 스스로 서 한 편을 남겨 지금 그것을 기록한다(貫華堂所藏古本《水滸傳》前自有序一篇, 今錄之)”고 제(題)한] <서(序)>가 있다. 본문에는 회전총평(回前總評)>과 협비, 그리고 소량의 미비가 있으며, 본문 가운에 권점이 있고, 소설의 본문은 진성탄이 ‘고본’에 가탁하여 대량으로 삭제하고 고쳤다.
평점의 형태에 있어 진성탄은 세 가지를 개조했다. 첫째는 <독법>을 덧붙인 것이고, 둘째는 총평을 매 회의 앞으로 옮긴 것이며, 셋째는 본문 중의 협비를 대량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평점 형태는 소설평점자의 주체 의식과 주관적인 목적성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며, 텍스트에 대한 감상과 열독, 이론적인 비평과 판단,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작법을 전수하는 것과 하나로 융합되어, 소설평점의 유파를 새롭게 열어 후대 소설평점이 모방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로부터 소설평점의 형태와 구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명대에는 소설평점의 형태에 두 가지 주의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위샹더우의 ‘평림(評林)’(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상세하게 설명할 것임)이고, 다른 하나는 펑멍룽(馮夢龍)의 ‘삼언’ 평본과 “모한자이 평(墨憨齋評)”이라 서(署)한 소설 평본이다. 이런 류의 평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경세통언(警世通言)》[“커이주런(可一主人) 평, 우아이쥐스(无碍居士) 교(校)”라 서(署)함]
《성세항언(醒世恒言)》[“커이쥐스(可一居士) 평, 모랑주런(墨浪主人) 교”라 서(署)함]
《고금소설(古今小說)》[“루톈관주런(綠天館主人) 평차(評次)”라 서(署)함]
《신열국지(新列國志)》[“모한자이(墨憨齋) 신편(新編)”이라 서(署)함]
《석점두(石點頭)》[“모한주런(墨憨主人) 평”이라 서(署)함]
《신평요전(新平妖傳)》[“모한자이(墨憨齋) 비점(批點)”이라 서(署)함]
이 다섯 가지 소설 평본은 형태상 하나의 공통적인 특색을 갖고 있는데, 모두 “하나의 서와 하나의 미비(一序一批)”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곧 본문 앞에 <서>가 있고 본문 가운데 평점에는 미비만 되어 있는데, 이 미비는 매우 간략해서 단지 감오 식의 예술 감상평만을 해 놓았을 뿐이고, <서>는 모두 가치 있는 한 편의 평론문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색은 간명하게 요점만을 잡아내고 있어 새로운 면모를 제시해 이미 명말에 ‘모한자이(墨憨齋) 평’이라 서(署)한 소설 평본의 관례를 이루어냈다[‘커이쥐스(可一居士)’나 ‘루톈관주런(綠天館主人)’은 모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펑멍룽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소설평점의 ‘모한자이(墨憨齋) 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명대의 소설평점 형태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본 방식을 귀납해 낼 수 있다. 첫째, 사서(史書)의 평주(評注) 영향 하에 있는 역사연의의 평주, 이런 형식은 전통적인 주석이 소설의 영역에서 연속되고 그 여파가 이어진 것으로, 사주(史注)가 소설평점으로 나아가는 과도적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소멸했다. 둘째, 문인들이 마음대로 열독하고 감상하다가 의식적인 비평으로 발전한 것으로, 형태적으로 미비―총평(미비와 협비 등을 포괄해)―종합(독법, 총평, 미비, 협비 등)의 발전 노선을 보여준다. 이것은 리줘우에서 진성탄에 이르는 동안 자리잡은 소설평점의 형태다. 셋째, ‘하나의 서와 하나의 미비(一序一眉)’의 ‘모한자이(墨憨齋) 체’이다. 넷째, 위샹더우의 ‘평림체’이다. 이 네 가지 방식 가운데, 첫 번째와 네 번째 방식은 명 이후에는 소실되었고, 두 번째 방식은 청대의 소설평점에 매우 심원한 영향을 끼쳤으며, ‘모한자이 체’는 청대에 부분적으로 이어졌다.
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형태 1
소설평점의 형태는 소설평점의 외부적인 특징이다. 고대 소설사에서 평점은 기나긴 발전 역사를 거치면서, 그 형태적 특징이 고정적이고 획일적이지 않고, 비교적 복잡한 형식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형태의 연원으로 말하자면, 소설평점의 형태는 전통적인 경전의 주석과 역사 평론, 문선(文選)의 평주(評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고대인의 독서 방식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동시에 소설평점은 고대 소설, 특히 통속소설과 결합하는 과정 속에서 점차 다른 문학 평점과 구별되는 형태적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 장에서는 이에 대해 소설평점 형태의 변화 과정과 소설평점 형태에 대한 분석과 해석, 이렇게 두 가치 측면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1) 명대 소설평점의 형태
소설평점의 형태에 관한 요즘 사람들의 일반적인 서술은 다음과 같다.
서두에는 <서(序)>가 있고, <서>의 뒤에는 <독법>이 있는데, 총론 격의 문장으로 몇 개의 조문이나 열 몇 개, 심지어는 백여 개의 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뒤 매 회의 앞부분이나 뒷부분에는 총평이 있어 해당 회 전반에 걸쳐 몇 가지 문제를 짚어내 의론을 가한 것이다. 매 회 중에는 미비나 협비, 방비(旁批)가 있어 소설의 구체적인 묘사와 서술에 대해 분석하고 평론했다. 이 밖에도 평점자는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거나 가장 정채롭다고 여긴 문장에 대해 그 주변에 권점을 가해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예랑(葉郞), 《중국소설미학》, 베이징대학출판사(北京大學出版社), 1982년]
이러한 서술은 전체적으로 소설평점의 형식적 특성을 잡아낸 것이긴 하지만, 사실 이것은 소설평점사에서 명저에 드는 작품들을 개괄한 것일 뿐이다. 혹자는 이것이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완비되어 있는 형태라고 말하지만, 소설평점의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다. 실제로 평점의 형태가 이처럼 완벽하게 구비된 것은 소설평점사에서 극히 소수만을 점하고 있을 뿐, 수많은 소설평점은 이러한 특색을 구비하고 있지 않다. 어떤 것은 미비만 있거나, 어떤 것은 방비만 있고, 어떤 것은 단지 회말총평만 있고, ‘독법’ 류의 문장은 소설평점 중에서도 더더욱 소수에 속한다. 그래서 소설평점의 형태는 이상에서 서술한 대로 획일적으로 규정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변화 발전의 실마리를 갖고 있으면서 서로 다른 소설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평점 형태를 형성했다. 동시에 소설평점은 고대 소설, 특히 통속소설이 발전하는 가운데 농후한 상업적인 띠게 되어 그로 인해 평점 형태의 형성에 어느 정도 독자의 수용과 출판의 상업적인 고려라는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에 근거해 고대소설의 전파사에서 소설평점의 형태는 자못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을 탐구하다 보면 소설평점이 변화 발전한 궤적을 분명하게 그려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소설 예술의 발전 궤적을 반영할 수 있기도 하다. 소설평점 형태가 변화 발전한 것을 서술하되, 우리는 전체적으로 명청대를 하나의 경계로 삼아 그 발전의 궤적을 그려낼 뿐 명확하게 단계를 지어 획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대의 소설평점의 진정한 기점은 만력 연간이다. 만력에서 명말에 이르는 동안 소설평점의 형태는 다음과 같은 발전 과정을 거쳤다. 소설평점은 처음부터 ‘주석’의 의미를 띠기 시작했는데, 형태적으로는 쌍행 협주(夾注)를 주도적인 형식으로 삼아 표현되었다. 이후에는 소설평점이 ‘주’에서 ‘평’으로 점차 발전해 나갔고, 그에 따라 평점 형태 역시 바뀌어 미비나 방비, 총비 등의 형식이 점차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숭정 14년(1641년)의 진성탄 비 《수호전》에 이르러 소설평점의 형태가 완비되었다. 이와 동시에 두 가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현상이 주의를 끌었는데, 하나는 위샹더우(余象斗)의 ‘평림(評林)’이고 다른 하나는 펑멍룽(馮夢龍)의 ‘삼언’ 평본이다.
통속소설에 주를 다는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가정 본 《삼국지통속연의》에서 보인다. 만력 19년(1591년)의 완췐러우(萬卷樓) 본은 가정 본의 부분적인 내용을 흡수해 더욱 상세한 주와 평을 달았다. 이 책의 저우웨쟈오(周曰校) ‘지어(識語)’에서는, “구두에는 권점이 있고, 어려운 글자에는 음주가 있으며, 지리에는 석의가 있고, 전고에는 고증이 있으며, 빠진 부분은 보충하였다(句讀有圈點, 難字有音注, 地理有釋義, 典故有考證, 缺略有增補)”고 하였다(《삼국지통속연의》, 만력 19년 완췐러우 간본). 이 다섯 가지 작업은 분명하게 주석의 범주에 속하는데, 그 형식은 모두 쌍행의 협주로 본문 가운데 표식이 있는 형식은 다음의 일곱 가지다.
석의(釋義): 본문 가운데 비중이 가장 크며, 지명을 풀이하고, 음에 주를 달며, 역사와 전고를 풀이하는 것 등을 포괄한다.
보유(補遺): 본문 중에는 비교적 적게 나타나며, 대부분 역사 사실을 보충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고증(考證): 본문 중에 비교적 많이 나타나며, 내용은 ‘보유’와 대동소이하나 역사적인 사실을 보충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논왈(論曰): 본문 중에 어쩌다 보이는데, 평론적인 성격을 자못 갖추고 있다.
음석(音釋): 주로 음을 주석한 것으로 때로 ‘석의’와 서로 뒤섞이기도 한다.
보주(補注): 본문 중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데, 역시 평론적인 색채를 자못 갖고 있다.
단론(斷論): 본문 중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데, ‘논왈’과 비슷하며, 평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상의 일곱 가지 형식 가운데 그 내용은 주로 주석이지만 이미 분화의 추세로 나아가는 것으로 ‘논왈’과 ‘보주’, ‘단론’의 세 가지가 체현하고 있는 평론적인 성격은 실제로 이미 통속소설의 주석이 ‘주’에서 ‘평’으로 발전해 가는 과도적인 추세를 드러내고 있다. 당연하게도 완췐러우(萬卷樓) 본 《삼국연의》 주석 중의 이른바 평론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소설 평론과는 거리가 먼데, 기본적으로는 역사 현상과 역사 인물에 대한 사실(史實)의 분석과 도덕적인 판단이다. 완췐러우 본의 평주(評注) 형식을 종관(綜觀)하면, 우리는 이것이 구성하고 있는 ‘석의’와 ‘고증’, ‘평론’이 삼위일체가 된 평주 형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평주 형식은 전통적인 사주(史注), 사평(史評)과 직접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남조 송대의 페이쑹즈(裵松之)는 천서우(陳壽)의 《삼국지》에 주를 달아 이런 평주 형식의 문을 열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상세히 찾아보고 두루 빠짐없이 알아보는 데 힘써, 위로는 구문을 수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빠지고 잃어버린 것을 그러모았다.(奉旨尋詳, 務在周悉, 上搜舊聞, 傍摭遺逸)” “만약 오류가 분명하고 말이 사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잘못된 것에 따라 바로잡아 그 망녕됨을 고치고, 그 당시 일의 옳고 그름이나 나이 등의 작은 잘못은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논하고 따져 물었다.(若乃紕繆顯然, 言不附理, 則隨違矯正, 以懲其妄, 其時事當否, 及壽之小失, 頗以愚意有所論辯.)”[페이쑹즈, <《삼국지》주표(三國志注表)>] 전통적인 명물훈고(名物訓詁)의 기초 위에 보유(補遺)와 고변(考辨), 평론이 하나로 융합된 평주 방식이 사학의 체례(體例)에 끼친 선구자적인 공은 후대에 대한 영향이 매우 컸고, 소설평점의 시초가 평주를 위주로 한 것 역시 이러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역사연의소설로서 《삼국연의》의 평주가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 역시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연의소설과 역사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다.
소설에 대한 이러한 평주 방식은 명대에 일정 기간 동안 연속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 말하자면, 이러한 특색은 다음의 몇 가지로 체현되어 있다.
《전한지전(全漢志傳)》(題“漢史臣蔡伯喈匯編, 明潭陽三台館元素訂梓, 鍾伯敬先生批評”)
《경판전상안감음석량한개국중흥전지(京板全像按鑒音釋兩漢開國中興傳志)》(題“撫宜黃化宇校正, 書林詹秀閩綉梓”)
《열국전편십이조전(列國前編十二朝傳)》(題“三台山人仰止余象斗編集”)
《신열국지(新列國志)》(題“墨憨齋新編”)
상술한 네 가지 간본에는 아래의 몇 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네 가지 소설 모두 역사연의이고, 평주 형식은 모두 쌍행 협주이며, 주석 내용은 주음(注音)과 석의(釋義) 위주다. 완췐러우 본 《삼국연의》의 평주와 약간 다른 것은 만력 34년(1606년)에 간행된 《열국전편십이조전(列國前編十二朝傳)》에서는 회말 비주가 증가되었고, 드러난 형식은 ‘석의(釋疑)’와 ‘지고(地考)’, ‘총석(總釋)’, ‘평단(評斷)’, ‘감단(鑒斷)’, ‘부기(附記)’, ‘보유(補遺)’, ‘단론(斷論)’, ‘답변(答辯)’, ‘논단(論斷)’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내용은 여전히 사실(史實)의 고증과 음의(音義)의 고석(考釋) 등이었다. 숭정 연간에 간행된 《신열국지》는 평주가 나뉘어 있어, ‘주’는 본문 가운데 쌍행 협주로 되어 있고, 내용은 대부분이 지명과 관명을 주하고 음의(音義)를 주석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범례>에서는 “고금의 지명이 달라 지금은 모두 《일통지》에 의거해 분명하게 조사해 주를 나누어 읽기에 편하게 했다(古今地名不同, 今悉依一統志, 査明分注, 以便觀覽.)”[<《신열국지》범례>, 명 숭정 연간 진창(金閶) 예징츠(葉敬池) 재본(梓本)]고 하였다. 비록 지명을 풀이했다고 말했지만 그 가리키는 바는 사실상 이에 그치지 않아 이 책의 주는 독립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평’이라고 한 것은 달리 미비와 소량의 방비를 덧붙인 것으로, 그 내용은 소설 인물과 정절에 대한 간략한 평론이다. 이렇게 주와 평을 나누는 형식은 이전 소설 평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만력 20년 이후에는 소설평점이 이미 점차 성숙 단계로 나아갔고, 이러한 형식의 출현 역시 전통적인 사주(史注)가 고대 소설의 영역에서 해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뒤로 주석은 이미 소설비평에서 더 이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했다. 곧 청대의 《삼국연의》와 《동주열국지》 등 역사연의소설의 평점에서 간략한 주석은 이미 무수한 소설평론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소설평점이 ‘주석’으로 그 시발점을 삼은 뒤 ‘주’는 점차 ‘평’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대체로 명말에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만약 소설평점 중의 ‘주’가 전통적인 역사학의 영향에 그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한다면, 소설평점 중의 ‘평’은 문인이 소설을 읽으면서 감상평을 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손 가는 대로 점평(點評)을 하고 느낀 바를 점묘한 것이 소설평점 중에서 사상과 예술 평론이 시작된 기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명대에 이러한 일에 종사하면서 후대의 소설평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이는 바로 리줘우(李卓吾)이다. 위안샤오슈(袁小修)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룽후가 우창의 주 씨 집안에 기거하고 있을 때(그 때는 만력 20년이었다-인용자) 내가 가서 그를 만나보니, 바야흐로 창즈에게 이 책(《수호전》)을 베껴 쓰게 하고 글자마다 비점을 하고 있었다.(李龍湖方居武昌朱邸, 予往訪之, 正命常志抄寫此書, 逐字批點.)”[위안샤오슈, 《유거시록(游居柿錄)》 9권] 리줘우 자신도 “《수호전》을 비점하는 일은 사람을 몹시 통쾌하고 즐겁게 만든다.(《水滸傳》批點得甚快活人)”[리줘우, <여초약후(與焦弱侯)>, 《속분서(續焚書)》 1권]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문인들이 개별적으로 소설을 읽고 감상평을 쓰는 것은 당시에는 비교적 보편적이었다. 한한쯔(憨憨子)는 “내가 느낀 바 있어 집으로 돌아와 그 책(《수탑야사(繡榻野史)》)을 꺼내 품평하고 비점했다.(余慨而歸, 取而評品批抹之)”[<《수탑야사》 서(繡榻野史序)>, 명 만력 연간 쭈이몐거(醉眠閣) 간본]고 말했다. 우중(吳中) 지역에서는 더욱 많은 문인들이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돌려 읽고 품평했다. 당시 문인들이 개별적으로 소설을 읽고 감상평을 하던 것이 소설의 간행과 결합했을 때, 이른바 소설평점은 개별적인 개인의 행위에서 일종의 공공의 사업으로 전화되었다. 특히 서방(書坊) 주인들이 당시의 하층 문인들을 집합시켜 그들 사이에 참여케 하자 소설평점본의 간행은 일시에 흥성하게 되었고, 명 중엽과 말기에 소설평점의 발전은 대체로 이런 태세를 드러내게 되었다.
평점의 형태로 말하자면, 문인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감상평을 쓴다는 특성에 들어맞게 소설평점의 형태가 가장 우선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미비와 방비, 그 중에서도 미비가 더욱 보편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고대에 문인들이 책을 읽을 때의 습관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이것은 간결과 직접성을 특징으로 삼아 그때마다 느낌이 일어나면 손가는 대로 비점하여, 강렬한 임의성과 감오성(感悟性)을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비는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가볍고 간편한 형식이었고, 명대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형식이기도 했다. 필자가 그 동안 보았던 명대의 수십 종의 소설평점본 가운데 미비는 (석의에 중점을 둔 역사연의는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된 형식이었다. 상대적으로 소설평점 가운데 회전(回前)이나 회말총평(回末總評)은 조금 나중에 나타난다. 그것은 미비의 중점은 감오(感悟)에 있고, 총평의 의도는 총결에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임의성을 띠고 있고, 후자는 의식적인 것이며, 어느 정도 간각의 상업적인 색채에 그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평점 가운에 ‘총평’이 나타났다는 것은 곧 소설평점이 이미 개별적인 행위에서 공중을 목표로 한 사업으로의 전화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거하면 명대 소설평점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출현한 ‘총평’이라는 형식은 만력 38년(1610년)에 간행된 ‘룽위탕(容與堂) 본’ 《리줘우 비평 충의수호전(李卓吾批評忠義水滸傳)》이다. 이 책의 평점자에 대해서는 이제껏 의견이 분분해, 혹자는 리줘우(李卓吾)라 하고 혹자는 예저우(葉晝)라 하는 등 각자의 설이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작품 속의 평점을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평점 형태가 이처럼 성숙한 것은 리줘우가 마음가는 대로 평점한 풍격과는 서로 들어맞기 어려운 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리줘우의 평을 기초로 서상들이 예저우에게 가공과 보강, 개조를 부탁해 만들어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추론이 성립한다면, 만력 20년 리줘우가 《수호전》 평점을 시작해 만력 38년 룽위탕에서 《수호전》 리 평본(李評本)이 나오기까지 소설평점이 개별적인 행위에서 공중을 목표로 한 사업으로의 전환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평점 형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괄되었다.
첫 머리에는 리줘우(李卓吾)의 <《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傳)》叙>[베이징도서관(北京圖書館) 소장본에는 이 서가 없다], 다음으로는 소사미(小沙彌) 화이린(懷林)이라 서(署)한 총론에 해당하는 문장 네 편, 곧 <비평《수호전》술어(批評《水滸傳》述語)>, <량산보일백단팔인우열(梁山泊一百單八人優劣)>, <《수호전》일백회문자우열(《水滸傳》一百回文字優劣)>, <우론수호전문자(又論水滸傳文字)>가 있다. 본문 중에는 미비와 협비가 있고, 회말에는 총평이 있고, “리줘우 왈(李卓吾曰)”, “줘우 왈(卓吾曰)”, “투웡 왈(禿翁曰)” 등으로 서(署)했다. 본문 중에는 글자 옆에 대부분 권점이 되어 있고, 평점자는 본문 중 산절(刪節)을 하려는 듯한 부호가 많이 달려 있는데, 혹은 상하구을(上下金勾(한 글자)乙, 혹은 구(句) 옆에 직접 가로획을 긋고 위에 :삭제해도 된다(可刪)“고 새겨 넣었다.
이것으로 이 소설이 평점 형태가 비교적 완비된 소설평본으로 기본적으로 고대 소설평점의 외재적인 형태를 마련했고, 그 가운데 본문 앞에 평론 문장을 증가시킨 것이 중요한 특색이며, 본문 평점과 더불어 유기적인 총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룽위탕(容與堂) 본’ 이후에는 대략 만력 39년 전후로 위안우야(袁無涯) 본 《신준리씨장본충의수호전(新준李氏藏本忠義水滸傳)》이 간행되었다. 이 평본의 본문 평점 형태는 상대적으로 간략한데, 미비와 방비만 있을 뿐이다. 다만 본문 앞에는 리줘우(李卓吾)의 <서(叙)>와 양딩졘(楊定見)의 <소인(小引)>과 <송감(宋鑒)>, 《선화유사(宣和遺事)》(一節), 위안우야의 <발범(發凡), <수호충의일백팔인적관출신(水滸忠義一百八人籍貫出身)> 등 몇 종의 글이 있다. 이렇게 본문 앞에 문장을 증가한 것은 소설평점이 진일보 성숙한 것을 나타내 준다.
만력 40년 이후 소설평점은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발전해, 서로 다른 평점 대상에는 서로 다른 평점 형태를 채용했는데, 이 시기 소설평점의 형태의 상황을 아래의 도표로 정리할 수 있다.(“○”는 있다는 것이고, “×”는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33종의 평점본 가운데 미비가 있는 것은 21종이고, 협비가 있는 것은 5종, 방비가 있는 것은 7종이며, 총평이 있는 것은 22종, 미비와 총평이 같이 있는 것은 12종이다. 이것으로 미비와 총평이 이미 소설평점의 통상적인 형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총평이 대량으로 증가한 것은 소설평점이 이미 문인들의 개별적인 열독과 감상평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일종의 의식적이면서도 목적을 갖고 있는 문학비평 활동이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숭정 14년(1641년), 진성탄의 《관화탕 제오재자서 수호전(貫華堂第五才子書水滸傳)》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중국 고대소설사와 소설평점사상 중요한 저작으로 명대 소설평점 중 평점 형태가 가장 완비된 평점본이기도 하다. 이 책의 평점 형태는 다음의 몇 가지를 포괄한다.
첫 머리에는 진성탄의 [<서일(序一)>, <서이(序二)>, <서삼(序三)>이라 제(題)한] <서(序)> 세 편이 있고, 다음으로는 모두 69조로 이루어진 <독제오재자서법(讀第五才子書法)>이 있으며, 다음으로 진성탄이 스나이안(施耐庵)에 가탁한 [“관화탕 소장 고본 《수호전》 앞에 스스로 서 한 편을 남겨 지금 그것을 기록한다(貫華堂所藏古本《水滸傳》前自有序一篇, 今錄之)”고 제(題)한] <서(序)>가 있다. 본문에는 회전총평(回前總評)>과 협비, 그리고 소량의 미비가 있으며, 본문 가운에 권점이 있고, 소설의 본문은 진성탄이 ‘고본’에 가탁하여 대량으로 삭제하고 고쳤다.
평점의 형태에 있어 진성탄은 세 가지를 개조했다. 첫째는 <독법>을 덧붙인 것이고, 둘째는 총평을 매 회의 앞으로 옮긴 것이며, 셋째는 본문 중의 협비를 대량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평점 형태는 소설평점자의 주체 의식과 주관적인 목적성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며, 텍스트에 대한 감상과 열독, 이론적인 비평과 판단,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작법을 전수하는 것과 하나로 융합되어, 소설평점의 유파를 새롭게 열어 후대 소설평점이 모방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로부터 소설평점의 형태와 구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명대에는 소설평점의 형태에 두 가지 주의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위샹더우의 ‘평림(評林)’(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상세하게 설명할 것임)이고, 다른 하나는 펑멍룽(馮夢龍)의 ‘삼언’ 평본과 “모한자이 평(墨憨齋評)”이라 서(署)한 소설 평본이다. 이런 류의 평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경세통언(警世通言)》[“커이주런(可一主人) 평, 우아이쥐스(无碍居士) 교(校)”라 서(署)함]
《성세항언(醒世恒言)》[“커이쥐스(可一居士) 평, 모랑주런(墨浪主人) 교”라 서(署)함]
《고금소설(古今小說)》[“루톈관주런(綠天館主人) 평차(評次)”라 서(署)함]
《신열국지(新列國志)》[“모한자이(墨憨齋) 신편(新編)”이라 서(署)함]
《석점두(石點頭)》[“모한주런(墨憨主人) 평”이라 서(署)함]
《신평요전(新平妖傳)》[“모한자이(墨憨齋) 비점(批點)”이라 서(署)함]
이 다섯 가지 소설 평본은 형태상 하나의 공통적인 특색을 갖고 있는데, 모두 “하나의 서와 하나의 미비(一序一批)”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곧 본문 앞에 <서>가 있고 본문 가운데 평점에는 미비만 되어 있는데, 이 미비는 매우 간략해서 단지 감오 식의 예술 감상평만을 해 놓았을 뿐이고, <서>는 모두 가치 있는 한 편의 평론문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색은 간명하게 요점만을 잡아내고 있어 새로운 면모를 제시해 이미 명말에 ‘모한자이(墨憨齋) 평’이라 서(署)한 소설 평본의 관례를 이루어냈다[‘커이쥐스(可一居士)’나 ‘루톈관주런(綠天館主人)’은 모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펑멍룽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소설평점의 ‘모한자이(墨憨齋) 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명대의 소설평점 형태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본 방식을 귀납해 낼 수 있다. 첫째, 사서(史書)의 평주(評注) 영향 하에 있는 역사연의의 평주, 이런 형식은 전통적인 주석이 소설의 영역에서 연속되고 그 여파가 이어진 것으로, 사주(史注)가 소설평점으로 나아가는 과도적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소멸했다. 둘째, 문인들이 마음대로 열독하고 감상하다가 의식적인 비평으로 발전한 것으로, 형태적으로 미비―총평(미비와 협비 등을 포괄해)―종합(독법, 총평, 미비, 협비 등)의 발전 노선을 보여준다. 이것은 리줘우에서 진성탄에 이르는 동안 자리잡은 소설평점의 형태다. 셋째, ‘하나의 서와 하나의 미비(一序一眉)’의 ‘모한자이(墨憨齋) 체’이다. 넷째, 위샹더우의 ‘평림체’이다. 이 네 가지 방식 가운데, 첫 번째와 네 번째 방식은 명 이후에는 소실되었고, 두 번째 방식은 청대의 소설평점에 매우 심원한 영향을 끼쳤으며, ‘모한자이 체’는 청대에 부분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