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성 객가 위룡옥 – 험한 세상 견디려 풍수에 기대어 지었는가
객가인들은 중원의 전란을 피해 창강을 건너 남쪽의 산간 지역으로 이주해 새로운 터전을 잡아 정착했지만, 그들이 가져간 중원의 전통문화는 그대로 유지했다. 그 결과 중원에서는 없어지거나 크게 변형된 문화가 객가문화 속에서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기도 하고, 그 지역의 요소와 결합하여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객가문화는 중원문화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객가인들의 살림집에서도 중원의 문화가 현지화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위룡옥圍龍屋이다. 위룡옥은 중원의 풍수지리가 핵심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살림집이다.
풍수는 토지에 관한 전통시대의 생태론적·환경론적 토지관이며 경험적인 지리과학이라 할 수 있다. 영어로 ‘geomentality’라고 번역하는데 풍수의 의미를 잘 전달해주는 말이다. 풍수는 도읍이나 도성을 비롯하여 촌락과 살림집의 위치와 구조를 정하는 양택풍수陽宅風水와 무덤의 위치를 선정하는 음택풍수陰宅風水로 구분된다. 위룡옥은 양택풍수다.
풍수는 중원에서 기원전 4∼5세기경부터 태동하기 시작해 한대漢代에 음양설이 결합되면서 체계적인 관념과 지식체계로 발전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무덤의 풍수가 추가되었다. 풍수는 그 이후에도 시대마다 많은 대가를 배출하면서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하나로 이어져 왔다.
전형적인 위룡옥은 위 사진과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다. 위룡옥 역시 공동 주거의 살림집으로 앞에서 살펴본 토루와 같다.
위룡옥은 중앙의 직사각형을 중심으로 앞뒤에 반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운데 직사각형 부분에는 당옥을 중심으로 좌우에 횡옥橫屋이 배치되어 있다. 당옥의 가운데 안쪽 칸은 종법에 따라 조상을 모시는 의례의 공간이다. 중간은 손님을 맞는 생활공간인데, 일진一進인 것도 있고 이진二進인 것도 있다. 횡옥은 일상의 생활공간이다. 당옥이 이진이고 횡옥이 좌우에 두 줄씩이라면 양당사횡兩堂四橫이라고 요약해서 말하기도 한다.
당옥의 앞뒤로는 두 개의 반원이 대칭을 이룬다. 앞에는 수당水塘이라고 하는 연못과 연못 둘레의 길, 낮은 담장이 있다. 연못과 당옥 사이에는 화평禾坪이라고 하는 직사각형 앞마당이 있다. 곡식을 말리는 등의 작업공간인데 명절에는 사자춤을 추거나 잔칫상을 차리는 연회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연못은 땅을 파낸 다음 집 안팎을 감싸고 내려오는 배수구를 연결해 조성한다. 여기서 파낸 흙은 위룡옥의 항토벽을 만드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연못은 건축상으로 중요한 기능이 있다. 일상으로는 빨래터이자 양어장이고 화재에 대비한 방화수의 저장소다. 이와 동시에 경관용으로 자연의 풍광을 담아내는 차경借景이 되기도 한다.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높이가 낮아 왜장矮墻이라고 하는데, 풍수사의 결정에 따라 출입이 용이하도록 두세 곳을 터주기도 한다. 이 담장은 방어용이 아니라 경관용이다.
당옥 뒤의 반원은 화태化胎(사진 2 좌측)라고 하는데, 반원형의 빈터를 위옥圍屋(사진 2 우측, 사진 3)이 둘러싸고 있다. 위옥은 위룡옥이라고도 하는데, 횡옥과 마찬가지로 한 칸짜리 방들이 옆으로 길게 이어진 단층의 주거공간이다. 워낙 독특한 모양이라 위룡옥이 포함된 주택 전체를 지칭할 때에도 위룡옥이라고 한다.
화태와 당옥 사이에는 깊이 1m 정도의 배수로가 있다. 위에서 내려온 물이 당옥의 좌우로 배수되게 하는 것이다. 위옥 바깥으로는 키가 큰 나무나 대나무를 심기도 하는데 이것은 봉위수封圍樹라고 한다. 조경을 겸하는 방풍림이 된다.
위룡옥은 다른 객가인들의 공동주택과 마찬가지로 생산활동과 생존 또는 방어를 위해 일족들이 한데 모여 사는 대가족 종법제도에 충실한 살림집이다. 모든 방이 중앙을 향하고 있고, 위룡옥의 외벽 또는 수당을 둘러싼 담장이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고 있다. 집단적인 방어성이 있기는 하지만 토루보다는 꽤 느슨하다. 외벽이 완벽한 봉쇄도 아니고, 수당의 담장은 낮고 방들도 단층이다. 후면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봉쇄하는 것은 없는 셈이다.
방어성보다는 반원형의 화태와 화태를 둘러싼 위옥, 수당과 애장의 특이한 배치에서 뭔가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느낄 수 있다. 수당에서부터 당옥을 거쳐 화태와 위옥으로 갈수록 지면과 지붕이 조금씩 높아지는 구조 역시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위룡옥은 명칭에서 용이 등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양택풍수가 풍부하게 적용된 살림집이다. 도대체 어떤 것들일까.
풍수에서 산은 자손을,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 집 앞의 수당은 집 안팎으로 흘러내린 물을 한데 모으는 것으로, 곧 재물을 모은다는 풍수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전체 위룡옥의 폭과 같은 크기로 크게 만든 것이다.
후면의 위룡옥은 용을 집 안으로 모셔서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는 뜻인데, 풍수서는 산이 바로 용이다. 위룡옥이란 명칭 자체가 풍수인 것이다. 위룡옥은 야트막한 산에 기대어 집을 짓지만, 산사태나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산골짜기가 아니라 산의 능선이 내려오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산등성이가 길게 이어진 형상이 곧 용의 모양인데, 그 용을 위룡옥으로 둘러싸 화태에 앉힘으로써 용을 집 안에 모시는 것이다. 이 용은 집 안에 들어앉았다는 뜻으로 준룡蹲龍이라 한다.
위룡옥은 뒤로 갈수록 지면과 지붕이 높아지는데 후면 위룡옥의 가운데 칸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이 방을 용청이라 한다. 용청은 빈 공간으로 두는데, 후면에 문을 설치하지 않는다. 이곳에 물건을 쌓아두면 준룡의 맥을 누르게 되고, 뒤로 문을 내면 용이 밖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산의 혈이 맺히는 곳을 태라고 하는데, 위옥이 둘러싸는 반원의 공간은 여자의 자궁을 상징하여 화태化胎라고 한다. 산등성이가 남자의 기운으로 내려오고, 그 끝의 혈이 자손을 생산하기 때문에 화태라고 한다. 화태는 가운데가 약간 높은 구면球面으로 조성하고 표면은 난석이라고 하는 굵직한 자갈을 덮는다(사진 2 좌측). 이것 역시 자손이 자갈의 숫자만큼 가득 차고 번성하라는 의미다. 조상과 생식 숭배의 흔적이다.
풍수의 요소는 또 있다. 화태와 당옥의 구분선과 중축선이 만나는 점이 곧 용혈이다. 위룡옥을 지을 때 집의 방향과 위치를 잡아주는 건축의 기준점이 바로 용혈이다. 풍수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용혈을 제대로 정해주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용혈을 기준으로 산 쪽으로 위옥을 짓고, 아래로 당옥과 횡옥을 짓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화태는 자궁이라 아이를 출산하는 산문産門이 있다는 것이다. 당옥에서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작은 공간인 조감祖龕이 바로 산문이다. 조상의 신위가 화태의 산문에 앉아 있으니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산의 맥이 산문을 거쳐 조상으로 이어지고, 조상의 생기가 후손에 이어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풍수에서는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친자감응親子感應이라 하여 조상이 얻는 생기는 후손에게 이어진다고 여긴다. 산의 기운이 조상에게 이어지고 조상의 생기가 후손에게 이어진다고 하는 재미있는 풍수의 발상법이 응축된 곳이 바로 조감인 것이다.
위룡옥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풍수는 집의 후면이 전면보다 높아진다는 것이다. 뒤로 가면서 층계가 하나씩 설치되는데 이것을 보보등고步步登高라고 한다. 이것은 지면뿐만 아니라 지붕에도 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중축선상의 대문 바로 바깥쪽은 문도의 바닥보다 약간 높은데, 이것은 집 안의 풍수가 집 밖으로 흘러나가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전체적인 집의 구조에서도 안정감을 주게 되고, 집 밖으로 배수를 원활하게 하는 건축적인 기능도 있다. 그리고 안정적인 곳에 앉아 트인 공간을 향한다는 좌실향허坐實向虛가 되기도 한다. 이런 요소는 위룡옥만의 특성은 아니다. 대부분의 건축에서 나타나지만 위룡옥에서는 풍수상의 해석이 더 강조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배수와 관련해 집 안팎의 지표수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위룡옥 바로 바깥이든 집 안이든 배수를 급하게 하지 않고 천천히 배수되게 한다. 이것은 수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풍수상으로는 재물이 일시에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의미다. 주방에도 연통이 높지 않은데 연기를 서서히 빠져나가게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이와 같은 위룡옥은 광둥성 동북부의 메이저우시梅州市 서쪽 15km 거리에 있는 차오샹촌桥乡村에 많이 남아 있다. 앞에서 답사했던 스차오촌石桥村에도 있다.
풍수는 중원에서 발전해 삼국시대에 우리에게 전해졌고, 고려시대와 조선 건국 시까지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효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조상의 묫자리를 잘 잡는 것을 효라고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조상의 음덕에 기대려는 기복에 너무 기울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21세기에도 묘지가 낭비하는 토지가 상당한 터라 음택풍수는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통시대의 풍수는 묫자리 타령만은 아니다.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해석되지 않는 민간신앙적 요소도 있다. 그러나 풍수의 본질은 당시의 지리학, 건축학, 지정학, 토지학 등의 경험과 지식이 종합된 토지 관념이다. 조선시대 수도와 왕궁을 현재의 위치로 정하게 하고 살림집의 여러 요소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여 지을 것인지를 논하는 양택풍수는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일뿐더러 지금도 합리적인 것으로 수긍할 만한 측면이 적지 않다.
자연을 정복하겠다고 하는 오만한 현대 과학기술의 관점보다는 자연에 수긍하고 적응해서 조화롭게 사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주는 풍수의 관점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