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漢武帝
5. 이광(李廣)과 정불식(程不識)은 각기 장수로서 장점이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흉노는 이광(李廣)의 전략을 두려워했고 병사들도 기꺼이 이광을 따랐지만 정불식(程不識)을 따르는 것은 힘들어했다.匈奴畏李廣之略, 士卒亦樂從廣而苦程不識.
사마광은 이렇게 말했다.
정불식을 본받으면 공은 세우지 못하더라도 실패하지는 않지만, 이광을 본받으면 패망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效不識, 雖無功猶不敗, 效李廣, 鮮不覆亡.
그러나 둘 다 한쪽으로 치우친 평가이다.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는 데에 어떤 이는 병졸들을 잘 통솔하고, 어떤 이는 장수들을 잘 통솔한다. 장수는 공격하기도 하고 수비하기도 하며,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기도 하고 소규모 병력을 지휘하기도 한다. 정불식은 대오(隊伍)를 똑바로 정렬하고 밤이면 조두(刁斗)를 치며 순찰하여 적의 습격에 대비했고, 군대의 장부를 엄격하게 관리했으니 수비군의 장수로 적합했다. 이광은 병사들을 관대하고 간편하게 관리하여 모두 편하게 해 주었으니 공격군의 장수로 적합했다.
대오가 엄정하고 정찰과 경계가 치밀한 것은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는 방법이다. 야간 순찰을 소홀히 하고 문서를 간략하게 다루는 것은 소수의 병력을 통솔하는 방법이다. 대오를 엄정하게 한 채 공격하면 적이 이쪽의 동태를 쉽게 살필 수 있기 때문에 공을 세울 수 없다. 병사를 간편하게 관리하면서 수비를 하면 적이 틈을 발견하고 공격할 것이다. 관대하고 간략한 방식으로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면 지휘가 원활하지 못해서 쉽게 궤멸한다. 소규모 병력을 통솔하면서 엄격하게 다스리면 규율에 얽매어 곤란을 자초하니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광과 정불식은 각기 하나의 장점이 있으니, 성패는 장수를 통솔하는 사람에게 달렸을 따름이다. 병력을 통솔하는 데에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장수를 통솔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함께 사용해야 하므로,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군주는 장수를 통솔하는 사람이고, 대장은 병력을 통솔하면서 아울러 장수를 통솔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삼대 이후로 농민은 병사로 충당할 수 없었으니, 장수가 통솔하는 병사는 효자나 말 잘 듣는 손자와 다르니 관대하고 간략한 방식으로 통솔하지 않고 기꺼이 따르게 하려 한다면 그들이 목숨을 걸고 명령에 따르도록 통제할 방법은 당연히 없다. 그러므로 병력을 엄격하게 다스리더라도 반드시 관대하고 간략한 방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춘추 전국시대에는 병력을 이끌고 치달릴 때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았고, 추격하거나 도주할 때에도 국경을 넘지 않았으며, 농민을 소집해 병력에 충원했고, 저녁이면 갑옷을 벗고 아침이면 서로 왕래했다. 나쁜 일은 법에 따라 다스렸는데, 소홀함이 없으면 당연히 죄인을 잡아 옥에 가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수비할 때는 엄격히 다스리고 공격할 때는 간략하게 하여 방종하지 않게 하면서도 고생스럽지도 않게 해야 한다. 여기에는 오묘한 책략이 필요하다. 그러니 어찌 한 가지 방법만 신봉하며 고집할 수 있겠는가?
반초(班超)는 관대하고 간략한 방식으로 서역(西域) 땅 36개 나라의 운명을 틀어쥐었으며, 그의 아들 반용(班勇)도 그 방법을 써서 위명을 날렸다. 제갈량이 병력을 엄격하게 다스리니 사마의(司馬懿)가 감히 공격하지 못했는데, 강유(姜維)는 그것을 본받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옛날과 지금의 방법이 다르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르며, 이웃 나라와 사방 오랑캐 및 도적들과 대적하는 상황도 다르다. 사마천이 이광을 칭찬하고 정불식을 폄훼한 것은 한나라가 변방을 나가 흉노를 공격하는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사마광의 비평은 조정의 높은 자리에 앉아 붓을 쥐고 먼 변방을 통제하는 이의 견해가 아니겠는가!
6. 왕회(王恢)는 한나라가 흉노에게 곤란을 겪는 이류를 몰랐다
왕회(王恢)는 이렇게 말했다.
“전국시대에 온전했던 대(代)나라는 북방에 강력한 오랑캐(흉노)가 있었고 안쪽으로는 중원의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는데도 노인을 봉양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때맞춰 농사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흉노는 감히 함부로 침략하지 못했다.”
대나라는 평안했지만 한나라는 곤란을 겪는 이유를 왕회가 알겠는가? 그는 흉노가 함부로 침략하지 못한 이유가 대나라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한나라는 중원 천하의 힘을 다 기울여 흉노와 싸웠지만 승패를 주고받았다. 오랑캐는 탐욕스럽고 사납지만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어찌 두려워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대나라가 평안했던 이유는 그 나라가 천하의 경중에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흉노가 대나라를 점령한다 해도 남쪽에 있는 조(趙)나라와 동쪽에 있는 연(燕)나라를 뒤흔들어 와해시킬 수 없었다. 연나라와 조나라가 들고 일어나 새로운 적이 되면 흉노는 고립되어 대나라 땅에서 편히 지낼 수 없게 되니, 대나라를 엿보는 마음을 이 때문에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하가 한나라에 의해 통일된 뒤에는 한쪽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천하가 동요하게 되었다. 온 천하의 힘을 동원해 그들과 싸우게 되면 흉노는 가만히 앉아서 천하의 병력을 자기 쪽으로 오게 할 수 있고, 한나라 군대가 한 번만 실패하더라도 흉노는 중국 병력의 힘이 이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대나라가 온전했던 시대에 흉노가 중원의 일곱 나라가 가진 힘을 헤아릴 수 없었던 상황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서한(西漢)은 관중(關中) 땅에 도읍을 두고 있어서 흉노가 감천(甘泉)을 압박했는데, 동한(東漢)은 낙양에 도읍을 두고 있어서 상곡(上谷)과 운중(雲中)이 흉노에게 해를 당했으며, 당나라가 다시 장안에 도읍을 두자 돌궐(突厥)과 회흘(回紇), 거란이 서쪽 담을 타고 쳐들어 왔고, 송나라가 변경(汴京) 전주(澶州)와 위박(魏博) 지역을 공격하여 결국 훗날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女眞)이 하북을 통해 변경으로 침입했으며, 서하(西夏)의 이원호(李元昊)는 여러 차례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고도 화친을 청했다. 천자가 있는 경사(京師)는 중병(重兵)으로 지키니, 저들은 그곳에 중국 전체의 역량이 모였음을 알고 전력을 기울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건다. 그러다가 요행으로 도성을 점령하게 되면 중원 천하는 들보가 부러진 건물의 서까래처럼 저절로 붕괴하게 된다. 게다가 경사는 재물과 미녀가 모인 곳이니 저들은 오래전부터 군침을 삼켜 왔다. 이를 통해 미루어 보면, 대나라가 흉노와 맞서 싸우면서도 여유로웠던 것은 그저 거기에 흉노가 욕심낼 만한 것이 없고 천하의 안위에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싸움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나운 남만(南蠻)은 비록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북방 오랑캐처럼 용맹하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흉험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무슨 짓인들 꺼리겠는가? 이에 그들은 가끔 도발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끝내 그들 강역(疆域)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욕심을 다 채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운남과 귀주, 옹주(邕州, 즉 난닝[南寧]), 계림(桂林)을 점령해 봐야 중국으로서는 아무 손해가 없고, 수천 리 밖에서 통제하고 있는 천자가 예측할 수 없는 위세를 기르고 있으니, 편안하지 않은 이들 지역을 점거하려는 헛된 꿈을 꾸기에는 진즉부터 영혼까지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인심도 태연해서 그들이 경계를 게을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압하니, 병사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성을 수비하지 못해 붕괴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 운남과 귀주가 남만을 제압하고, 연나라와 대나라가 북방 오랑캐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차가 똑같다.
여진과 몽고가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도읍한 것은 남방과 멀리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중국의 모든 역량이 남방에 있는데 천자가 외로이 북방에서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나라는 일개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지만 흉노를 여유롭게 견제했는데, 진나라는 천하의 역량을 기울였어도 역부족이었고, 한나라와 당나라는 변방을 지키는 신하를 임용하여 구차하게 사직을 보전했다. 천자가 연경에 도읍을 정할 경우 일단 함락되면 다시 수복할 수 없으니, 그 효과는 눈에 선하다. 위세는 양성하여 무겁게 하고, 전쟁은 차분하게 미리 준비해야 하나니, 이를 일컬어 위대한 책략[大略]이라고 한다.
7. 주보언(主父偃)과 서악(徐樂), 엄안(嚴安)이 처음 상소를 올려 무제의 환심을 산 것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주보언(主父偃)과 서악(徐樂), 엄안(嚴安)은 천하의 간사한 소인배지만 처음에 상소를 올려 무제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모두 이해득실을 적절히 논의해서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말은 본래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 부족한 것이 아니었던가?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즐겨 하는 사람은 없으니, 도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즐겨 하는 사람도 없다. 사인(士人)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일반 백성과 가까워서 천하의 공론을 익히게 된다. 그런데 익히고 나면 다른 이의 마음에 맞추고 싶어지니 그들의 말이 듣기 좋게 된다. 말을 듣기 좋게 잘하면 군주가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들이 군주의 마음에 들게 되었을 때는 군주가 좋아서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다른 곳에 가 있다. 위로 조정에서 아래로 군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시류에 영합하고자 하는 사대부들도 여기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군주에 대해 개인적인 호감을 느끼고, 벼슬을 보전하고 군주에게 아부하는 사대부의 기풍을 갈수록 더 잘 익히게 된다. 그것을 익히고 나면 시대의 추세에 영합하려 하니, 그래서 그 행위가 간사해지고 말도 그것을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천하에 좋은 말이 없음을 염려하지 말고, 천하에서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이들이 행실을 돌보지 않는 것을 염려해야 한다. 말이 듣기 좋은데 군주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신하가 군주의 마음을 움직일 때 짧은 순간에 직언하며 논쟁하는 것을 염려해야 한다. 그리고 신하가 군주의 마음을 움직일 때 군주가 이목이 현혹되어 마음이 흔들려 기울어서 자기중심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염려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감정이 성품을 낳지만 성품이 감정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윗사람이 좋아하고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일 빠름이다. 천하에 도리가 있다면 서악과 엄안, 주보언도 어찌 선후로 무리를 이끌고 군주에게 나아가 의지할 수 없었겠는가? 그래서 주나라 문왕에게 네 명의 벗이 있었지만, 오직 문왕만이 그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궁벽한 시골에 살면서 천하를 걱정하는 이는 천하의 공론에 영합하려 하지 않는다. 군주를 만나서 자신이 한 말을 시종일관 지킨다면 수시로 말을 바꾸며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바로 용덕(龍德) 즉 성인이나 천자의 덕이니, 천하 사람들에게 가볍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