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魯迅)은 1918년에서 1922년까지 쓴 소설을 한 권으로 묶어 『吶喊』이란 제목을 붙이고 1923년에 베이징(北京) 신조사(新潮社)에서 출간했다. 루쉰은 자신이 명명한 첫 번째 소설집 제목 ‘吶喊’을 두고 이웃나라 한국에서 그처럼 오랫동안 시비(是非)가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한자 자전을 찾아보면 ‘吶’에는 두 가지 발음이 있다. 하나는 ‘눌’이고 하나는 ‘납’이다. 물론 발음에 따라 뜻도 달라진다. ‘눌’은 어눌하다, 말을 더듬다는 뜻이고, ‘납’은 외치다, 고함치다는 뜻이다. 중국어도 마찬가지다. ‘ne(너)’로 읽으면 ‘訥’과 뜻이 같아서 어눌하다로 쓰인다. 한국 발음의 ‘눌’에 해당하는 셈이다. ‘na(나)’로 읽으면 외치다의 뜻이고 대표적인 예가 ‘吶喊(nahan)’이다. 즉 이 경우는 한국 한자음의 ‘납’에 해당함이 분명하다. 쉽게 말하자면 ‘吶喊’은 중국인들이 평소에 흔히 쓰는 단어인데 이 때 발음은 ‘nehan’이 아니고 ‘nahan’이다.
우리는 이 ‘吶喊’이란 한자어를 어떻게 썼을까? 루쉰이 첫 번째 소설집 『吶喊』을 내던 1920년대에 우리 조상들이 ‘吶喊’을 어떤 사례로 썼는지 알아보면 어떤 발음이 맞는지 추정해볼 수 있다. 요즘은 우리 근대시기 신문기사도 인터넷으로 쉽게 검색할 수 있으므로 발품 팔아가며 도서관까지 갈 필요가 없다. 1926년 1월 11일자 『시대일보』 제2면 기사에 이런 제목이 떴다. “纛島面民 백여명 面所에 吶喊殺到, 불공평한 면장을 죽이라고, 면장은 자동차로 도망쳐, 구제분배 불공평으로” 독도면(纛島面)은 어디에 있나? 울릉도 동남쪽이 아니라, 옛날 경기도 고양군 소속이었다. 지금은 서울시에 편입되어 면 이름이 사라졌다. 뚝섬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으로 보인다. 당시 면장이 누구인지 몰라도 일을 불공평하게 처리하자 면민들이 들고 일어나 면사무소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들이 과연 면장을 죽이라고 말을 더듬었을까? 아니면 고함을 쳤을까? 당연히 고함을 쳤으리라. 그러자 면장은 자동차를 타고 줄행랑을 놓았다.
굳이 루쉰의 소설집 『吶喊』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吶喊’을 고함치다의 의미로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 ‘吶喊’이 한자로만 쓰여 있으므로 혹시 우리나라에서는 고함치다의 뜻으로 쓸 때도 ‘吶’의 발음을 ‘눌’로 읽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1946년에 이용규와 공역으로 『魯迅短篇小說集』을 출간하여 루쉰 소설 번역에 본격적인 바탕을 마련한 김광주는 1970년 동화출판공사 『세계의 문학대전집 7』에 「阿Q正傳」을 비롯한 루쉰 소설 5편을 번역해서 실었다. 이 책 뒷부분에서 김광주는 루쉰의 연보를 소개하며 1923년 대목에 “최초의 소설집 《납함(吶喊)》”이라고 분명하게 써놓았다. 우리나라에서도 ‘吶’이 외치다, 고함치다의 뜻으로 쓰일 때는 ‘납’으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후 고함친다는 뜻의 ‘吶喊(납함)’을 왜 ‘눌함’으로 읽었을까? 분명한 원인은 알 수 없으므로 대략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즉 ‘吶’과 ‘訥’이 글자 형태가 비슷하고 의부(義部)인 ‘口’와 ‘言’도 뜻이 통하므로 ‘吶’을 ‘訥’의 속자나 약자로 인식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吶(납)’의 경우에도 ‘訥(눌)’의 발음과 같이 읽어서 결국 ‘吶喊’의 발음이 ‘눌함’으로 굳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김광주를 이어 1963년부터 루쉰 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한 이가원은 「吶喊 自序」에서 ‘고함치다(吶喊)’가 나오는 대목을 번역하면서 ‘吶喊(납함)’을 ‘訥喊(눌함)’으로 인식하고 그 번역조차도 “나도 모르게 눌함(吶喊)이 입에서 새어나오는 수가 있다”로 써놓았다. 이후 1980년대 이전까지 루쉰 문학은 전반적으로 이가원 번역본이 많이 읽히면서 거의 대부분의 중문과 교수와 학생들이 무비판적으로 ‘눌함’이란 발음을 답습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김광주가 정확하게 읽었던 ‘납함’이란 발음은 안타깝게도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도 대학 다닐 때 이가원 번역본을 읽으며 ‘吶喊(납함)’을 ‘눌함’으로 인식했고, 전공 수업 담당 교수들도 모두 ‘눌함’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학계 일각에서는 중국 현대문학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吶喊(눌함)’을 ‘납함’으로 읽어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문제를 공개적이며 본격적으로 제기한 학자는 서울대 중문과의 김시준 교수였다. 그는 1986년 루쉰의 모든 소설을 완역하여 단행본으로 묶어 한겨레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 책이 바로 이후 루쉰 소설 번역의 정본 역할을 한 『노신소설전집』이다. 그는 이 책 「역자 서문」에서 ‘吶’이 ‘납’으로도 읽히고 ‘눌’로도 읽히는 혼란을 소개하고 루쉰 『자선집』 서문의 예를 들어 ‘吶喊’은 ‘눌함’이 아니라 ‘납함’이라고 분명하게 바로잡았다.
이로써 ‘吶喊’은 김광주가 ‘납함’이라고 읽은 지 16년만에 다시 광명을 찾게 됐고, 이후로는 당연히 ‘납함’이 대세를 점하게 됐다. 하지만 아직도 잘못된 발음을 답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吶喊을 ‘눌함’으로 읽는다. 제발 더듬지 말고 고함치라고 힘써 권해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눌함(nehan)’이 아니라 ‘납함(nahan)’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