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경계를 횡단한다.
오늘도 101명의 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일상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횡단해 들어왔다. 물론 필자에게는 흔한 출장에 불과하지만, 이 아이들 가운데는 비행기라는 것을 난생 처음 탔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신성한” 민족의 울타리도 처음 넘어본, 사실 요즘 사회 분위기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학생도 끼어 있다고 한다. 필자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남중국해와 필리핀 해, 그리고 술라웨시 해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러한 접촉면의 아슬아슬한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필리핀 네그로스(negros) 섬 해안의 바콜로드(Bacolod)라는 인구 50만명의 중형 도시이다. 어느덧 일상에서 오기 쉽지 않은 곳까지 멀리 왔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공항에서 노숙까지 해가며 이 먼 곳까지 왔는데, 그 이유가 뭘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바로 이 고생의 동기를 단박에 이해시켜 주는 시대정신 하나가 떠오르는데, 그것은 바로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가성비’ 좋은 글로벌라이제이션
오기에도 결코 쉽지 않고, 와서도 불편한 이 여정. 그렇다면 이 여정을 이끄는 힘으로서 글로벌라이제이션은 무슨 의미일까?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곰곰이 곱씹어 본다. 어찌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답하기 너무 쉽다. 글로벌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대학생들에게 그야말로 “가성비” 좋은 영어 훈련 장소를 찾아 제공하여 그들에게 국제적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하면 충분하다. 아마도 내가 교육으로 사업을 하는 이라면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답일 것이다. 그런데 그 답을 조금 더 솔직하게 풀어 이야기해 보면, 아마 필리핀이라는 장소는 우리들에게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적정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주 가성비 좋은 공간으로 선택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진짜 글로벌화 될까 라고 하는 질문이 계속해서 입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하지만, 아이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교수가 그 같은 비판적 질문, 아니 회의를 입 밖에 내기에는 그럴만한 면목이 없다.
The Chinese Repository 안의 문화 횡단
먼저, 이와 관련해 필자가 최근까지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과 함께 읽어온 19세기 초 서양 개신교 선교사들 관련 텍스트를 잠시 소개하자면, 그 대표적인 문헌이 바로 The Chinese Repository이다. 서양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주요 필자가 되어 1832년부터 1851년까지 발행한 이 영문 잡지는 고아, 말라카, 시암, 마카오, 광저우, 상하이 등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시작으로 일본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장소로서의 동아시아에서 당시 동양과 서양, 두 문명이 조우하는 다양한 정황들을 리포트의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안에는 유럽의 어느 항구로부터 떠나와 긴 바다의 여정을 거쳐 멀리 동아시아의 해안가에 도달한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칼 귀츨라프(Karl F. A. Gützlaff) 같은 당시 선구적 선교사들의 현지 경험들이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조금 더 의미를 보태자면, 그 글들 속에는 당시의 역사적, 물리적 사건들은 물론 글을 쓰고 있는 이들의 동아시아라는 대상에 대한 시선과 이해 방식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 학생들로 하여금 미래에 세계로 나아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진정한 글로벌 시민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접촉지대(contact zone; Pratt, 1992)에서 문화적 횡단자들이 살아간 삶의 방식은 귀중한 참조체계가 된다.
대상과의 소통과 공감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생명
가장 먼저 이들에게서 꼽을 수 있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중요한 자질은 문화의 경계를 횡단하면서 필요한 소통과 공감의 능력일 것이다. 일리야 콜먼 브리지먼(Elijah Coleman Bridgman)이 쓴 The Chinese Repository 제2권의 서문을 보면, 당시 유럽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상황에 비춰 그들과의 진정한 상호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들(중국인)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없다면-우리가 그들에게 묻고 또 그들이 우리에게 묻는 것을 듣고, 그들이 자신들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변호하는 것을 듣고, 또 그들로 하여금 그와 반대 입장에서의 주장을 듣게 하고 하는 그런 식의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면-그들과의 접촉이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인의 힘을 부당하게 폄하하는 어떤 저열한 견해도 환영하지 않는다.”1)라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소통이 가능하려면 물론 현지의 언어에 대한 구사능력이 기초가 되지만, 궁극적으로 상대를 호혜적으로 인정하고 열린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종의 공감 능력이 요청된다. 즉, 문화적 소통은 언어적 능력뿐만 아니라 문화적 공감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식 형성과 반성 과정에 대한 이해
여기에다 문화적 소통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자질은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지식 형성과 반성 과정에 대한 이해이다. 지식이라는 것이 외래 정보의 기계적이고 피동적인 축적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것을 돌파하고자 하는 과정 속에서 포착되는 일종의 역동성,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브리지먼이 The Chinese Repository의 전체 서문에서 “지금까지 (중국에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는 것”, 또 “아울러 능력이 닿는 한 그 중 어떤 것이 여전히 사실인지, 어떤 것이 그렇지 않는지를 구별하는 목적을 갖고 중국에 관한 외국 문헌들을 검토하려는 것”, 그리고 “외국 문헌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 사이의 불일치와 모순은 그것들을 가장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현지인에게 물어 가능한 한 내용의 진위를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을 그들 출판 사업의 목표라고 술회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지역과 세계가 쉴 새 없이 변화하고 유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대상에 대한 지식의 축적은 그들의 내면과 끊임없이 연계하고 대화를 이어가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국제화와 현지화의 결합, 이른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 가능해 질 것이다.
자기동일성의 경계를 넘어 반성하는 보편성의 세계로
마지막으로 이들을 통해 강조될 수 있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자질은 바로 문화 횡단자로서 새로운 세계로 넘어 들어갈 때의 용기와 그 안에서 보편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의식, 그 자체이다. 물론 지금까지 언급한 선교사들은 보편의 가치 기준으로 봤을 때, 또 종교적 기준으로 봤을 때 지나치게 자기동일성을 강조한 집단이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보편이면서도 특수의 통합체였고, 아마도 동서양이라는 인간의 인식적 기준을 넘어서는 절대 가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보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자신들의 정신과 실천들을 조정해 간 흔적이 여러 글 속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사유를 단순한 종교적 편향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 모로 다시 곱씹어 볼 인식의 말단이 포함된 다음의 글을 보면, “동아시아에 거주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서 지식의 통탄할 만한 결여가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고, 현재 서쪽 나라들에서 풍요롭게 향유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서쪽 나라들을 향상시켜 왔고 앞으로 더 많이 향상시키게 될 모든 가치 있는 것이, 동쪽 나라들 안에서도 동일하게 향유되고, 동일한 결과를 산출해내게 될 그날을 고대한다.”한 브리지먼의 희망에서, 우리는 먼저 그들이 새롭게 진입한 시공간 속에서 현지인들과 공통으로 향유할 보편적 가치를 찾아내고 또 그것을 나누고자 하는 의식적 고양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사실 이 글 속에 내재하는 문명론적 아집과 종교적 편견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면 그 자체로서도 의미 있는 자각일 것이며, 그만큼의 인식적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한 노력조차 지금의 현대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바, 그로부터 자기 동일성의 경계를 언제든 부정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계발 받는다면, 지금도 세계 곳곳의 낯선 길을 찾아 떠나고 있는 우리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당당해 질 것이다.
1) 원문 : Elijah C, Bridgman, “Introductory Remarks”, The Chinese Repository 2권 1호(1833년 5월), 본문의 나머지 인용문은 The Chinese Repository 1권 1호(1832년 5월)의 “Introduction”에 포함되어 있다. 번역문은 민정기와 심혜영이 엮은 『동서양의 경계 중국을 읽다-19세기 잡지 「차이니스 레포지터리」에 나타난 ‘너’와 ‘우리’』(새물결출판사, 2018)에서의 심혜영 번역을 따랐다.
동서 중국 웹진 2019 Vol.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