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호柿圓壺는 형태가 감柿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평평하고 둥근 뚜껑과 납작하고 둥근 꼭지, 굽은 물대, 고리 형태의 손잡이, 봇짐 형태의 바닥, 입전에는 한 줄의 선이 드리워져 있다. 널리 알려진 형태로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모습에 친근한 느낌을 준다.
자사 차호를 처음 만드는 초심자들은 모두 이 차호를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어, 자사 기예의 기초를 연마한다. 이것을 본떠 만들면서 호의 몸통과 어깨, 배, 다리 부분의 비례의 아름다움과 기능의 합리성을 깨닫게 된다. 《양선사호도고陽羨砂壺圖考》 진황도陳煌圖의 대형 자사차호 한 점을 거론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피운루披雲樓에서 소장한 대형 자사차호 한 점은 기품이 중후하고, 손잡이와 물대에서는 명대 말기의 풍모가 보이며, 진명원 차호의 느낌을 자못 가지고 있다. 披雲樓藏紫砂大壺一持, 氣格渾厚, 把與流意存明季風度, 意味頗近鶴峰.”
호 바닥에는 “하늘의 달빛 강물처럼 서늘하다明月一天凉似水”라는 초서체 시구와 “난손蘭孫”이라는 서명이 대나무 칼로 새겨져 있는데 서체가 대범하고 정취가 있어 이 차호와 비슷한 느낌이다. 아마도 피운루에서 예전에 소장했던 차호가 아닐까 한다.
진황도陳煌圖는 명 말기 서화가이자 장서가이다. 장쑤江蘇 창수常熟사람으로 자字는 홍문鴻文 이고 초명이 난손蘭孫이며 이름을 홍鴻으로 개명한 적이 있었다. 명 숭정崇禎 15년(1642) 진사 보결합격자副榜로 뽑혔고 숭정 말년에는 관직이 한림원翰林院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명이 멸망하자 항저우杭州 서호西湖에 은거하며 북산초당北山草堂과 원소재鴛嘯齋 등을 수리하여 기거하고 책을 보관하였다. 강희 21년(1682)에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명 만력 연간 자사호의 공예기술은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강남의 사대부들, 이를테면 화팅華亭의 동기창董其昌, 상하이의 반윤단潘允端, 창수常熟의 진황도陳煌圖, 장시江西의 정한鄭漢과 같은 이들은 이싱宜興에서 문인풍의 다도구를 주문하였고 시원호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