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냉전 논리가 맹위를 떨치면서 루쉰과 그의 문학작품은 타이완과 우리나라에서 금기 대상이 되었다. 루쉰이 생전에 중국 진보운동에 앞장 섰고, 사후에도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신격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쉰은 좌든 우든 맹목화된 권력과 그것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압행위에 거의 생래적이라 할 정도로 도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초기에 문학혁명을 주도하고 철저한 리버럴리즘을 추구하며 점점 루쉰의 대척점에 섰던 후스(胡適)도 나중에 장제스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타이완 정부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다.
냉전 기간 동안 루쉰의 이름을 내걸고 단독으로 루쉰의 작품을 출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루쉰의 작품은 거의 대형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꼽사리 끼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때 소개된 루쉰 작품의 종류나 번역의 질이 절대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차차 소개하겠지만 그 나름의 고급 수준에 도달한 번역물이 꾸준하게 출간되었다.
이 책도 그렇다. 화국량(華國亮, 화궈량)은 누구인가? 이 책 판권지에 소개된 역자 약력을 보면 그는 중국 장쑤성(江蘇省) 출신이다. 생년은 표기되지 않았지만 대략 1920년대 전후일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오사카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동국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연구했으며, 중국문화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저서로 [아편전쟁], [만리장성], [화목란], [대운하] 등이 있고, 역서로 [단도회], [무림삼봉], [일검파천황] 등이 있다.
위의 소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화국량은 중국 장쑤성 출신 화교로 중국어, 일어, 한국어에 능통한 중국 연구가 겸 번역가였다. 특히 번역 작품 제목만으로 추정컨대 우리나라 초기 무협소설 분야에서 일정 정도 활약한 분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좀더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
비록 세계문학전집에 속한 번역물이지만 직접 ‘魯迅’의 이름을 내건 타이틀이 흥미롭다. ‘魯迅’의 이름을 단 책으로는 해방 직후 김광주와 이용규, 1960년대 이가원에 이어 세 번째로 여겨진다. 또한 이 번역서를 읽어보면 중국어 원어민으로서 문맥 파악이 매우 세밀함을 알 수 있다. 한국어 구사 능력도 거의 완벽하여 외국인으로서의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또 특기할만한 일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중국 인명과 지명을 중국어 원음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재미있게도 그 중국어 원음을 베이징 표준어가 아니라 아마 오음(吳音)으로 여겨지는 중국 남방 발음으로 표기했다. 역자가 장쑤성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방언에 의지해서 중국어 발음을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이 번역서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의 하나로 인정되어야 한다. 루쉰이 바로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출신이니 평소에 화국량의 발음 표기와 거의 비슷한 남방 중국어를 구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을 치밀하게 생각하다 보면 이같은 방언 표기 문제에까지 가닿는다.
이 책에 번역된 작품은 [阿Q正傳], [孤獨], [高先生], [비누], [來日], [사랑과 眞實], [孔乙己], [祝福], [端午], [故鄕], [집오리의 喜劇], [후지노 선생] 등 모두 12편이다. 그런데 마지막 [후지노 선생]은 소설이 아니라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에 실린 수필이다. 어쨌든 루쉰의 문학역정 이해에 필수 문장인 [ 후지노 선생]은 이 책에서 처음 번역되었다. [집오리의 喜劇]을 제외하면 이전에 모두 한 번 이상 번역된 작품들이지만 루쉰 소설의 진수가 수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루쉰 번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이 책은 우리가 쉽게 놓치는 몇 가지 번역 원칙을 이론이 아니라 실천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루쉰 번역사 뿐만 아나라 중국어 번역사에 끼친 공로가 적지 않다고 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