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록 서문先行錄序, 代作>
말言이란 한 가지지만, 여기에는 ‘실천이 앞서는 말’先行之言이 있고, ‘실천을 할 만한 말’可行之言이 있고, ‘실천을 해야 할 말’當行之言이 있다. 나는 이 세 가지 말을 기준으로 군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더욱이 이로써 입언(立言)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실천이 앞서는 말’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한 말[1]이다. 말하기에 앞서 먼저 그 말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하는 것이 실천하는 것보다 지나친 폐단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실천을 할 만한 말’이란 무엇인가? 《역경》(易經)이나 《중용》(中庸)에 있는 말과 같은 경우이다. 《역경》[2]에서 “멀리 있는 것을 역의 도(道)로 설명하면 막힘없이 모든 것에 적용된다”[以言乎遠則不禦]라고 했다. 이 ‘멀리 있는 것을 설명한 말’[遠言]은 모두 실천할 만한 것이다. 또한 “비근한 일상의 것을 설명하면 그것들이 안정되고 바르게 자리잡는다”[以言乎邇則靜而正]이라고 했다. 이 ‘비근한 일상의 것을 설명한 말’[邇言]은 모두 실천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천지 사이의 모든 것들을 설명하면 모든 것이 그 안에 갖추어져 있다”[以言乎天地之間則備]라고 했다. 이 천지(天地) 간의 말은 모두 실천할 만한 것이다. 《중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평범한 보통 남녀도 실천할 수 있다”[夫婦之不, 可以能行焉][3]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평범한 보통 남녀도 실천할 수 있는데, 어리석거나 모자란 사람이 간혹 자기는 그래도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는 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면, 모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이 말을 실천할 만하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실천을 할 만한 말’ 정도가 되려면, 몇천 년, 몇만 년 이전에 실천해도 앞선 것이 아니고, 몇천 년, 몇만 년 이후에 실천해도 뒤진 것이 아니어야 한다. 말과 실천이 하나가 되고 이전과 이후가 어우러지니, 성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에 선후를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천을 해야 할 말’이란 오늘 말을 했는데 내일만 되어도 막상 실천을 하는 것이 부당할 때가 있는 경우이다. 하물며 몇천 년, 몇만 년 이전과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중유(仲由)의 입장에서는 실천을 해야 하고 염구(冉求)의 입장에서는 실천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시기와 상황은 달라지는 것이므로, 이에 따라 말도 변하는 것이다. 실천은 상황에 따라서 변하고, 말은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찌 예전 사람의 실천에 근거하여 그것을 모범과 요체로 삼을 필요 있으며, 예전 사람의 말을 지켜서 미생[4]과 같은 꼴이 될 필요가 있는가? 실천을 해야 할 말이라고 해서 그것 하나에만 집착하면 안되는 것이다.
실천을 해야 함을 간파한 뒤에 말하는 것은 도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고, 실천을 할 만 함을 간파한 뒤에 말하는 것은 학문이 깊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중승(中丞) 이공(李公) 같은 사람은 참으로 도에 통달하고 배움이 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를 깨끗이 하고 남을 포용하며, 공정함과 너그러운 아량을 아울러 지니고 있어, 그 말하는 것이 실천을 해야 할 경지요 실천을 할 만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지금 또한 그가 지은 《종정집》(從政集)을 읽어볼 행운을 얻었다. 이를 통해 그가 조정에서나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집안에서나 그동안 보여준 행적이 모두 이와 같음을 알았다. 이른바 말보다 실천이 앞선 사람이다. 이로써 나는 공의 학문이 진정한 학문[實學]이요 공의 정치가 진정한 정치[實政]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이것을 《선행록》(先行錄)이라고 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말하기 앞서 먼저 그 말을 실천하였으니, 실천하면 안될 것과 실천할 수 없는 것이 어찌 있겠는가?(권3)
[1] 《논어》 <위정>(爲政), “자공이 군자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말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실행하고 한 뒤에 말이 뒤따라야 한다.‘”[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往之]
[2] 이하의 인용은 《역경》 <계사상>(繫辭上) 참조.
[3] 《중용》 12장 참조.
[4] 미생(尾生)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의 대명사이다. 미생은 약속을 잘 지키기로 유명했다. 하루는 다리 밑에서 누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나갔다. 그런데 마침 냇물이 점점 불어나서, 도저히 그 자리에 있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미생은 한 번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교각에 매달려 기다리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卷三 雜述 先行錄序代作
言一也,有先行之言,有可行之言,又有當行之言。吾嘗以此三言者定君子之是非,而益以見立言者之難矣。何謂先行之言?則夫子之告子貢是已。既已先行其言矣,安有言過其行之失乎?何謂可行之言?則《易》也,《中庸》也,皆是也。《易》曰“以言乎遠則不禦”,是遠言皆可行也:“以言乎邇則靜而正”,是邇言皆可行也:“以言天地之間則備”,是天地之間之言皆可行也。《中庸》曰:“夫婦之不肖,可以能行焉。”夫夫婦能行,則愚不肖者自謂不及,賢智者自謂過之,皆不可得矣,其斯以為可行之言乎?既曰可行之言,則言之千百世之上不為先,行之千百世之下不為後;則以言行合一,先後並時,雖聖人亦不能置先後于其間故也。
若夫當行之言,則雖今日言之,而明日有不當行之者,而況千百世之上下哉!不獨此也,舉一人而言,在仲由則為當行,而在冉求則為不當行矣,蓋時異勢殊,則言者變矣。故行隨事遷,則言焉人殊,安得據往行以為典要,守前言以效尾生耶?是又當行之言不可以執一也。
夫當行而後言,非通于道者不能,可行而後言,非深于學者不能。若中丞李公,真所謂通于道、深于學者也,故能潔已裕人,公恕並用,其言之而當行而可行者乎!乃今又幸而獲讀所為《從政集》者,則又見其在朝在邑,處鄉處家,已往之跡皆如是也,所謂先行其言者也。某是以知公之學,實學也,其政,實政也,謂之曰《先行錄》,不亦宜乎!然既先行其言矣,又何不當行之有?又何不可行之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