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傳序>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한비자》(韓非子)의 <세난>(說難)⋅<고분>(孤憤)은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이다”[1]라고 했다. 이로써 보자면 예로부터 성현들은 발분하지 않으면 저술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발분하지 않았는데 저술을 하는 것은 마치 춥지도 않은데 떠는 것과 같고 병도 없는데 신음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비록 저술을 한다 해도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
《수호전》(水滸傳)은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송(宋)나라 왕실이 성하지 못하게 된 때로부터, 모자를 밑에 쓰고 거꾸로 신발을 위에 신은 듯, 현명한 사람들이 아랫자리에 있고 모자란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멸시하고 천대하던 이적(夷狄)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중국이 아랫자리에 처하는 것에 길들어져, 일시에 왕상(王相)은 마치 어느 집 처마에 집을 지은 제비나 까치와 같은 신세가 되어, 개․양처럼 취급하던 이적에게 폐물을 바치고 신하라 칭하며 달갑게 무릎을 꿇었다.
시내암과 나관중,[2] 이 두 사람은 몸은 원(元)나라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송나라에 있었고, 비록 원나라 통치 시기에 태어났지만 사실 송나라가 겪은 일을 분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2제(二帝)가 북방을 순행하다 당한 굴욕에 분개해서, 요(遼)나라를 대파한 이야기를 설정함으로써 그 분함을 쏟아냈고,[3] 송나라 왕실이 구차한 안정을 꾀하여 남쪽으로 거점을 옮긴 것에 분개해서, 방랍(方臘)을 멸망시킨 이야기를 설정함으로써 그 분함을 쏟아냈다.[4]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통하여 분함을 쏟아냈을까? 바로 당시 수호(水滸)[5]에 모여들었던 힘센 호걸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충의(忠義)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내암과 나관중은 수호(水滸)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앞에 ‘충의’라는 수식어를 붙였던 것이다.
충의로운 사람들이 왜 수호(水滸)로 몰려갔을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리고 수호에 모인 사람들은 어찌하여 하나하나 모두 충의로왔는가? 그들이 그곳에 모이게 한 원인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의 정치 상황은 덕이 조금 있는 사람이 진정 덕이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여 부려먹고, 조금 현명한 사람이 위에 군림하여 진정 현명한 사람이 부림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덕이 조금 있는 사람이 군림하여 남을 부려먹고 진정 덕이 많은 사람이 남에게 부림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달갑게 복종하려고 하겠는가? 이는 마치 힘이 약한 사람이 힘 센 사람을 묶으려고 하면서 순순히 묶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 힘 센 사람이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손을 내밀어 묶이려고 하겠는가? 이 모든 상황이 필시 천하의 힘 센 자와 진정 현명한 사람을 몰아세워 모두 수호로 모여들게 하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므로 수호에 모여든 무리는 모두 힘이 세고 진정 현명한 사람이고 충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공명(宋公明) 만큼 충의로운 사람도 없었다. 108명을 살펴보면, 공과(功過)를 함께 하고 생사를 함께 하여, 그 충의로운 마음이 송공명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오직 송공명만이 몸은 수호에 있으면서 마음은 조정에 있어, 안정을 가져오겠다는 한 뜻을 지녔고, 오로지 나라에 보답할 것을 도모하여, 끝내 크나큰 곤경을 무릅쓰고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간신들 때문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는 것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생사를 함께 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열렬한 충의이다. 그는 진정으로 108명을 마음으로 복종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산(梁山)에서 결의하여 108명의 맹주가 될 수 있었다.
최후로 남쪽으로 방랍(方臘)을 정벌하러 가서, 108명 중 목숨을 잃은 자가 반을 넘었고, 노지심(魯智深)도 육화사(六和寺)에서 입적했고, 연청(燕靑)도 눈물을 흘리며 공명과 작별을 고했고, 동위(童威)․동맹(童猛) 두 사람은 혼강룡[6]의 계략에 빠짐으로써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7] 송공명이 그렇게 될 줄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사태의 추이를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은 소장부가 자기만 살아남기 위해서 도모하는 것에 불과할 뿐, 왕에게 충성하고 친구에게 의리를 지키는 사람은 결코 차마 취할 행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송공명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충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호전》을 쓰지 않으면 되겠는가? 《수호전》을 읽지 않으면 되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으면 안된다. 《수호전》을 한 번 읽으면 충의로운 사람들이 더 이상 수호로 모이지 않고 모두 왕의 곁에 있게 된다. 현명한 재상은 읽지 않으면 안된다. 《수호전》을 한 번 읽으면 충의로운 사람들이 더 이상 수호에 있지 않고 모두 조정에 있게 된다. 군대의 중요한 업무를 관장하는 병부(兵部)나 변방의 막중한 업무를 맡는 독부(督府) 또한 읽지 않으면 안된다. 하루만이라도 《수호전》을 읽으면 충의로운 사람들이 더 이상 수호로 모이지 않고 모두 잘 선발된 간성(干城)과 심복(心腹)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 이 사람들이 조정에 있지 않고, 왕의 곁에 있지 않고, 간성과 심복이 되지 않으면, 어디에 있게 되는가? 수호로 모이게 된다. 《수호전》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호사가가 자기 입담과 언변만 내보이려는 뜻에서, 혹은 용병가가 자기 지모와 계략만 내세우려는 뜻에서, 각자 자기의 잘난 모습을 자랑하려고 쓴 것이라면, 등장 인물의 충의스러운 점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권3)
[1] .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나오는 말이다.
[2] . 시내암(施耐庵)․나관중(羅貫中)은 모두 원말명초(元末明初) 사람이다. 두 사람이 수호설화(水滸說話)를 수집 정리하여 《수호전》(水滸傳)을 편찬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나관중은 우리에게 《삼국지》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소설 《삼국연의》를 편찬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순전히 처음으로 이것들을 창작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고, 예로부터 민간에서 유행하며 대중 앞에서 낭독하거나 공연하는 설창(說唱)의 형태로 전해지던 것을 수집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3] . 《수호전》 제 83회 참조.
[4] . 《수호전》 제 111회 이하 참조.
[5] . 글자 그대로 따지면 수호(水滸)는 ‘물가’를 뜻한다. 그런데 《수호전》에서 108 호걸이 양산박(梁山泊)에 모여들어 활약하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곳을 일컫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6] . 혼강룡(混江龍)은 옛날 중국에서 사용했던 일종의 어뢰를 말한다. 주머니에 폭약을 채우고 도화선을 연결하여, 물 속에 가라앉혀 두었다가 폭발시켜 수중으로 침투하는 상대방을 교란시킬 때 사용한 무기이다.
[7] . 《수호전》 제119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