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제漢文帝
1. 원앙袁盎이 황제가 주발에게 겸양하는 것에 대해 간언하다
정성을 기울여 군주를 평안하게 해 주는 것을 충성[忠]이라 하고, 정직함으로 벗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믿음[信]이라 하며, 충성과 믿음을 겸한 것을 ‘두루 미치는 것[周]’이라고 한다. 군자가 두루 미치면 위아래가 화목하고 천하가 안녕하다. 주발(周勃)은 여씨(呂氏)의 반란을 평정하고 문제를 옹립해 놓고 은덕을 베풀었다는 표정을 드러냈는데, 군주를 무시하고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간특한 행위는 아니었지만 배우지 못해서 술수가 없어서 교만을 경계할 줄 몰랐을 따름이다. 원앙(袁盎)은 그와 함께 군주를 모시는 신하였는지 지위의 높낮이가 현저히 달랐지만 본래 동료지간의 의리를 지니고 있었으니, 그 잘못을 바로잡아 주었다면 주발이 어찌 공로와 지위를 내세우며 고치지 않았겠는가? 그가 고치지 않아서 조정에서 비판하면 주발은 자신의 잘못을 가리지 못할 것이고 문제의 마음도 풀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원앙은 주발을 잘못을 바로잡지도 비판하지도 않고 문제에게 이렇게 간언했다.
“승상이 교만한데 폐하께서 겸양하시면 신하와 군주가 각기 덕을 잃게 됩니다.”
이 말이 나오자 문제가 주발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다. 주발의 재앙은 진즉 잠복해 있었지만 풀 수 없었으니, 참으로 위험했구나!
황제가 겸양하는 것은 덕을 잃는 것이 아니다. 공을 세운 신하를 존중하고 대신을 예우하는 것도 태갑(太甲)과 성왕(成王)의 깊고도 두터우며 아름다운 마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황제의 겸양하는 마음을 시기와 각박함으로 이끌었으니 이야말로 불충이다. 잘못을 저지른 상대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도 바로잡아 주지 않고 참소(讒訴)하여 이간질한다면 이야말로 불신(不信)이다. 원앙은 음험하여 조조(晁錯)를 죽이게 하고 그 권력을 빼앗았는데, 주발을 해친 것은 그보다 먼저였다. 소인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간사함이 원앙에게 미치지 못하는 이들은 천박하고 조급하여 극단을 추구하면서 정말 중요한 도리[大體]를 모르니, 눈에 보이는 대로 즉시 입에 올림으로써 신하와 군주에게 모두 재앙을 끼치는데, 나중에 후회해 봐야 이미 때가 늦어 버린다. 이들은 원앙과 같은 부류는 아니지만 해를 끼치는 것은 원앙과 같다. 그러므로 군주는 마땅히 간사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조급한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가까운 이들을 친하게 대하고 현량한 이들을 존중하는 도리가 온전히 갖춰질 것이다!
2. 문제는 거짓으로 겸양하여 끝이 좋지 않았다
《주역》 〈겸괘(謙卦)〉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겸손하면 형통하리니, 군자는 끝까지 아름답게 지킨다.
謙, 亨, 君子有終.
군자인 다음에야 끝까지 아름답게 지킬 수 있나니, 군자가 아니면서 겸손한 척하고도 끝이 아름다운 경우는 여태 없었다. 그러므로 겸손을 ‘높이 휘두르고[撝]’ ‘명성을 날리고[鳴]’ ‘노력하면[勞]’ 결국 다른 나라를 침략해 정벌[侵伐]하게 된다. 길하여 이롭지 못한 곳이 없다 하더라도 분명히 군자의 도리를 지키며 끝내지 못한다. 군자의 겸양은 순수한 정성에서 비롯된다. 제왕이라 할지라도 백성에게 양보하여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고, 성인이라 해도 꼴 베고 나무하는 백성에게 양보하여 선한 명성을 얻을 수밖에 없다. 순수한 정성을 바탕으로 한 도리를 위해 온 마음을 바치면 진정 그것을 천하에 미치게 할 수 있다. 겸양을 하면서도 스스로 내세우지 않은 다음에야 끝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사양은 순수한 정성이며, 자임(自任)하는 것도 순수한 정성이다. 요임금이 천하를 위해 현량한 이를 구하여 순임금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자기 아들인 단주(丹朱)에게 사적으로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우임금이 자기 아들인 하계(夏啓)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나 탕임금이 자기 아들인 태갑에게 물려준 것, 주나라 무왕이 성왕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순수한 정성에서 비롯된 처사였다. 순임금이 요임금에게서 물려받고 하계가 우임금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태백(泰伯)이 구오(句吳)로 간 것이나 백이와 숙제가 고죽국(孤竹國)에서 도망친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순수한 정성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정성을 칼자루로 삼아 ‘높이 휘둘러[撝]’ ‘명성을 날리고[鳴]’ ‘노력하되[勞]’ 잠시 그것으로 천하에 감사할 뿐 그것을 핑계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아야 한다. 일찍이 천하를 억누르려는 마음을 품었다면 재앙의 기미가 잠복해 있다가 때가 되면 반드시 폭발할 것이니, 그 기회를 이용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정벌한다면 이롭지 못한 곳이 없게 된다. 황로(黃老)의 술수가 정성을 버리고 허위를 이용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명성을 날리고 겸양하는[鳴謙]’ 말로 ‘침략하여 정벌하는’ 일을 징험한다면 마음과 행동이 어긋나고 처음과 끝이 일치하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스스로 해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가 아니면서 시종일관 겸손을 지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담당 관리가 태자를 책봉하라고 건의하자 문제는 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왕(楚王)은 내 숙부이고, 오왕(吳王)은 내 형님이고, 회남왕(淮南王)은 내 아우이다.
숙부와 형제처럼 대단히 가까운 관계라면 응당 거짓된 마음을 시행으로 옮길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나중의 일로 보건대 오왕 유비(劉濞)와 초왕 유무(劉戊), 회남왕 유장(劉長) 가운데 그 목숨을 온전히 지킨 이가 하나도 없었다. 형제간의 불화를 노래한 〈척포두속(尺布斗粟)〉의 노래처럼 천하의 미움을 받아도 구제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서에서 말한 것은 “거두어 모으려면 반드시 먼저 뿌려 흩어야 하는” 술수로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들의 잔인함을 이용한 것이니, 역시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말이란 행동이나 사건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오왕과 초왕, 회남왕이 그 말을 듣고 기꺼이 망령된 마음을 품었다면 그들을 쳐서 없앨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에 불이 붙으면 불을 일으킨 나무를 태운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일으킨 일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문제도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제후가 반란을 일으켜서 정벌해 평정하더라도 천하는 위태로울 것이다. 군자가 지극한 정성을 바탕으로 말을 하면 그 말을 실천할 수 있고, 그 행위를 피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 사람들 모두 그의 마음을 환히 알고 귀신도 믿고 따를 것이다. 전쟁의 싹은 마음에서 사라져서 때가 닥쳐도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임무를 맡아도 겸양할 곳이 없고, 겸양하더라도 지극한 정성에서 비롯될 것이니 거짓으로 ‘명성을 날리는[鳴]’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무력으로 침략하여 정벌하는 것이 어찌 이로울 수 있겠는가?
3. 가의가 예악을 일으키려면 먼저 문제에게 학문을 권해야 했다
한나라가 건립되고 문제 때에 이르러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가의(賈誼)가 정삭(正朔)을 개정하고 복색(服色)을 바꾸며 관직의 명칭을 정하고 예악을 일으키라고 건의한 것은 아주 시의가 적절했다. 노나라의 두 선비가 백 년 뒤에나 예교가 일으켜질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가의의 말대로 갑자기 예악을 일으키자고 해서 바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무제는 당연히 예악을 일으켰고, 당나라 현종도 그렇게 하고자 했다. 심지어 고기 비린내에 절은 탁발씨(拓拔氏)와 우문씨(宇文氏), 간사한 채경(蔡京)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었다. 문제가 가의의 요청을 받아들여 하루아침에 제도를 만들려고 했더라도 저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일으키고 일으키지 못한 것이 교착하면서 예악이 시들어 없어지고, 선왕이 이루어놓은 지극한 중화(中和)도 그에 따라 중원에서 단절되어 버렸다.
가의는 순수한 정성으로 예악을 일으키고자 했는데, 문제가 다스리던 시대에 문제의 현명함을 이용해 중화의 덕으로 인도하면서 악(惡)의 싹을 바로잡고 학문의 공(功)으로 보양(輔養)하고 인의의 가르침으로 일깨워 깊고 오묘한 의리(義理)를 체득하게 했어야 했다. 그러니 하늘의 때를 거스를 수 없으니 정삭을 고쳐야 했고, 인사(人事)를 소홀히 할 수 없으니 관직 명칭을 개정해야 했으며, 지극한 덕을 망칠 수 없으니 예악을 반드시 일으켜야 했다. 하지만 두려워서 마음이 불안하여 마치 유람에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과 온화한 목소리를 마치 보고 들릴 것 같아서 다급하게 보고 들으려 했다. 그래도 꾸밈으로 바탕을 따르고, 일로 마음을 따르며, 미흡한 상태에서 악률(樂律)을 찾고, 응수(應酬)하는 때에 오르내림을 살피는 것이 모두 자신이 천성적으로 편안히 여기는 바와 깊고 두덮게 쌓인 학문에서 나와 낡은 옛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세우려 했다면, 한 해가 가기도 전에 찬란하고 분명하게 갖춰졌을 것이다. 그런데 가의가 학문으로 권하지 않고 일로 권했으니 역시 음악가의 말단 행위에 지나지 않은지라,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힘이 없어 기대고 들으려는 순간 피곤해 드러눕게 된다. 이렇게 바탕과 꾸밈이 상생(相生)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예악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문제의 겸양은 정말 여기(학문)에 부족함이 있었으므로 그는 당연히 거꾸로 자신에게서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남을 속이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예악은 백 년을 기다려야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학식에 따른 제약을 받을 따름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성왕은 어려서 덕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주공이 서둘러 종법과 예악을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주공이 스스로 제정한 것이지 성왕이 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성왕이 일취월장해서 학문이 밝게 빛나는 경지에 이른 뒤에 주공이 제정한 예악 제도를 계속 사용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가의는 당연히 주공이 아니었고, 설령 그의 능력이 주공과 같았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황로(黃老) 사상을 마음에 품고 중화(中和)의 전범(典範)을 실행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것이 어울리지 않아서 없애 버리려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가의의 가르침을 종일토록 견지할 수 있었겠는가?
4. 문제는 위장군衛將軍과 그 휘하의 병력, 태위太尉의 관직을 없애고 장군과 재상을 하나로 합쳤다
문제가 위장군(衛將軍)과 그 휘하의 병력을 없앤 것은 병력이 지나치게 경사에 모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정(軍政)을 담당한 태위(太尉) 관직을 없애고 승상에게 예속시킨 것은 병권이 쉽게 다른 사람의 손에 장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장군과 재상을 하나로 합쳤기 때문에 흉노가 상군(上郡)을 침범했을 때 관영(灌嬰)이 승상의 신분으로 병력을 이끌고 출전했다. 이는 문제가 이것이 바로 문무(文武)가 같은 길을 걷는 삼대(三代)의 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따져 보면 위군(衛軍)을 없애고 태위를 없앤 것이 마땅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천자는 병력을 보유하여 위엄을 보이는 게 아니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당연히 병권을 한 사람에게 함부로 줄 수 없다. 그런데 장군과 재상을 하나로 합쳐서 장군을 재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관영은 장군은 될 수 있으나 재상은 될 수 없는 인물이고, 재상으로 삼을 수 있는 이는 또 장군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삼대의 제도 가운데 후세에 시행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농민은 병사가 될 수 없고 병사는 농민이 될 수 없다. 둘째, 재상은 장수가 될 수 없고 장수는 재상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옛날에 장수와 재상을 하나로 합친 것은 열국(列國)이 경쟁하던 시기의 일일 따름이다. 초(楚)나라의 영윤(令尹)은 초나라 군대의 통수(統帥)였고, 진(晉)나라의 중군(中軍)을 이끈 장수는 진나라의 재상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열국 시기에는 의례(議禮)와 제도, 문헌을 고증하는 일이 없었고 백규(百揆) 즉 재상과 사문(四門) 즉 학교, 천자의 일의 기록한 대록(大麓)도 없었다. 당시 정권을 잡은 관리는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교화를 일으키며, 상벌을 시행하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통수가 되는 것은 이웃 나라와 불화가 생겼을 때 쌍방이 병력을 이끌고 들판에서 만나는 경우인데, 혹시 서로 화살을 주고받는 상황이 오더라도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러니 후세에 천하를 가진 군주가 오랑캐나 도적과 사직의 존망을 놓고 싸웠던 것과는 달랐다. 당시의 장상(將相)이란 오늘날 한 군(郡)에서 통판(通判)을 보조하는 관리일 따름이고, 개중에 더 작은 이는 한 현(縣)의 주부(主簿)나 현위(縣尉)에 지나지 않았다. 천자의 시대에는 주나라 선왕(宣王) 때의 윤길보(尹吉甫)나 중산보(仲山甫), 방숙(方叔), 남중(南仲)처럼 각기 맡은 바 직무가 있지만 서로 예속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삼대에도 그렇지 않았는데 하물며 후세에 만방(萬方)의 혼란을 다스리거나 변방의 안위를 책임지는 이들이야 어떠했겠는가!
재상이 장수를 부리게 할 수는 있지만 그를 장수로 만들 수는 없고, 장수는 재상과 권력의 균형을 맞출 수는 있지만 육경(六卿)과 나란히 자리를 만들 수는 없다. 송나라 때는 추밀사(樞密使)가 병력을 통솔하지만 재상의 명령을 따르게 했으니, 옛날의 제도와 가까워졌다고 하겠다. 추밀사가 천하의 군사를 통솔하니 병력을 전문적으로 다스리는 기관이 있게 되었고, 재상이 추밀사의 잘잘못을 감독하니 추밀사에게 정벌을 전담하는 권력을 맡기지 않게 되었다. 깊이 연구하여 삼대가 남긴 제도를 모방하면서 시대에 맞추어 늘리고 줄였으니, 이야말로 잘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각의 신하(재상)이 군대를 지휘하면 천하는 빨리 망해 버릴 것이다. 아! 위태롭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