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도시 생활의 전개 4

명절날 밤

도시가 도시인 까닭은 밤의 경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에서는 인가도 떨어져 있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명절이든 무엇이든 특별한 것이 없는 한, 환한 밤이나 사람들의 왁자지껄함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비해서 도시의 밤은 밝았다. 점포에서는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사람들이 왕래했다. 이것이야말로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런 경관이 전면적으로 출현한 것은 송대 이후부터였다고 하는 것은 서술한 대로다. 송대의 도시에서는 야간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해 그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야간 영업을 하는 점포를 야시(夜市)라고 한다.

야시가 송대가 되어서 생긴 도시 경관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미 당의 창안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방(坊)의 문이 닫힌 뒤 여러 구획 안에서는 여전히 장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자유스럽지 않은 대로 밤의 도시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송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 송대가 되면 방벽(坊壁)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큰길로 나섰다. 그런 와중에서의 야시이다. 예전의 닫혀 있는 야시와는 달랐다.

카이펑은 지금도 야시로 유명하다. 예전의 마싱졔(馬行街)와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마다오졔(馬道街)에 많은 점포가 나와 있다. 책방과 가구점도 있지만, 대부분은 먹을 것을 파는 가게다. 나도 그곳을 어슬렁거리다 책과 해바라기 씨 등을 샀다.

기억나는 것은 꼬치에 꿴 구운 고기를 사서 먹으며 시내를 걸어 다닌 것이다.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점포의 젊은이가 따라왔다. 머리를 돌려 가구를 팔고 있는 점포 앞에 서 있으면 그도 나란히 섰다. 왜 따라온 것인지 줄곧 모른 채로 구운 고기를 다 먹고 나자, 그가 천천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거기서 비로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꼬치를 돌려 달라고 한 것이다. 무심코 꼬치를 든 채로 걸어나갔던 나에게 그는 순진하게도 돌려달라고 하기 어려워 다 먹을 때까지 따라다녔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방인이었던 나를 배려했던 것일까? 정겨운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카이펑의 명절 밤을 우리도 걷기로 한다. 몰래 카이펑에 잠입한 쑹쟝(宋江) 등 량산보(梁山泊) 패거리와 행동을 같이 하자. 쑹쟝 등 량산보에 관한 이야기는 《수호전》에 상세하다. 이야기는 북송 말에 실제로 있었던 반란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야기가 덧붙여져 결국은 거대한 이야기로 성장했다. 이것은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년)의 일련의 쑹쟝 연구에도 상세하다.

이야기의 성립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본론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잠시 줄이지만, 그 안에 카이펑을 필두로 도시의 기술이 많다. 물론 이야기는 후세에 성립되었다. 따라서 카이펑의 모습을 동시대적으로 잡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동경몽화록》과 통하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 그들의 카이펑 구경 코스에서 취할 것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뒤를 따라 카이펑의 밤을 견학하도록 하자.

쑹쟝이 카이펑을 방문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원소절 명절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수호전》 120회 본에서는 이 72회의 쑹쟝, 차이진(柴進), 스진(史進), 무훙(穆弘), 루즈선(魯智深), 우쑹(武松), 주퉁(朱仝), 류탕(劉唐), 리쿠이(李逵), 옌칭(燕靑)이 나서는 대목과 74회의 리쿠이, 옌칭이 나서는 대목이 가장 카이펑의 모습에 상세하다. 원소절은 가장 화려한 명절이었기에, 도적이 아닐지라도 나가고 싶어진다.

일행은 완서우먼(萬壽門) 밖에 여관을 잡았다. 사실 카이펑에 완서우먼은 없다. 서쪽에 있는 완성먼(萬勝門)의 오기로 보이는데, 다음날 방향이 전혀 다른 북쪽의 펑츄먼(封丘門)에서 들어왔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첫째, 량산보에서 찾아왔다면, 완성먼은 크게 돌아가는 게 된다. 또 만약 펑츄먼과 마찬가지로 북쪽에 있는 쏸짜오먼(酸棗門) 안쪽의 완서우관(萬壽館) 부근을 가리킨다면 이것 또한 방위각이 들어맞지 않는다. 원래 《수호전》의 지리 감각은 상당히 들어맞지 않는다. 엉터리라고 말해도 좋을 듯한 부분도 있다. 이 점이 소설 등을 사료로 사용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다소 의문스러운 점은 있지만, 그들의 뒤를 쫓아가보자. 사전에 탐색하러 나간 차이진과 옌칭 두 사람은 문을 들어선 뒤 위졔(御街)에 이르러 그대로 둥화먼(東華門)으로 갔다. 이것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는 코스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이 부근은 카이펑의 번화가로, 가장 붐비는 곳이었다. 주루와 찻집이 많이 있다. 그들도 그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층에서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카이펑에는 많은 주루가 있었다. 그 숫자는 72개였다. 지점도 많았다. 지점은 각점(脚店)이라 불렀다. 주루는 요정도 겸했다. 이것도 종류가 많다. 바이판러우(白礬樓) 같이 큰 것부터 작은 선술집까지 실로 많았다. 일류 점포가 되면 문 앞에 색색의 비단 장식을 하고 밤이 되면 불야성의 경관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커다란 낭하가 이어져 그곳에서 성장을 한 기녀 수백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류 점포에 가려면 은 1백 냥은 들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만 한 것이, 바이판러우가 신장개업 했을 때는 먼저 도착한 사람에게 순금의 깃발을 선물했다고 했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언제나 술손님이 1천 명 남짓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일류 점포에는 식기가 모두 은제품이었다. 호방한 기세다. 런허뎬(任和店)과 후이셴러우정뎬(會仙樓正店) 등에서 두 사람이 마실 때 [사용한] 은식기의 무게가 1백 냥이라고 했다. 카이펑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은식기를 좋아했던 듯하다. 은식기로 요리 배달을 했다고도 한다.

이런 곳의 급사는 용의주도하게 훈련이 되어 있어 손님이 오면 젓가락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주문을 받았다. 주문이 끝나면 복창하고 카운터에 알렸다. 이윽고 요리가 나오는데, 그 기술이 굉장했다. 왼손에 그릇을 세 개 집고, 오른 팔에는 손끝에서 어깨까지 20개가량의 그릇을 올리고 운반했다. 아주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급사가 갖고 온 종이는 어떤 용도였을까? 주문을 적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냅킨이었을까? 이곳의 정경을 조금 더 알고 싶다.

당시의 서민은 어느 정도 글자를 읽었을까? 진작부터 알고 싶었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도 알 수 없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글자를 익히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사람이 글자를 읽을 수 있었을까? 만약 읽을 수 있다면, 어느 만큼의 단어 수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의문이 많다. 최저 3천자 가량은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너무 많은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인이라면 거래 상대편을 기억하고, 취급하는 물품을 기억하며, 계산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의 급사라면 물품 목록과 주문한 숫자, 가격의 계산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읽기와 쓰기, 그리고 주산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3천자까지는 몰라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토지 소유의 진전과 상품 경제의 진전, 또는 과중한 세금에 의해 농촌을 떠나는 이가 많았다. 그들의 정착지 가운데 하나로 도시가 있다. 도회에는 얼마든지 일이 있었다. 수레를 끌거나 창고지기, 분뇨의 수거와 청소부, 소행상도 있고, 목수, 대장간의 조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에 정착하고 약간이라도 상승하려면 역시 글자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회에 가면 일이 얻어걸릴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일에는 지식이 필요했고, 거기에는 문자를 읽을 수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시는 온갖 사람들을 흡수하지만, 여기에도 자연스럽게 선택이 있었다. 서민은 좀 더 좋은 생활을 누리기 위해 어디서 전문적인 지식을 몸에 익혔던 것일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회조차 없는 채로 슬럼에 침전되고 있었던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다음날 펑츄먼(封丘門)에서 혼잡을 틈타 잠입한 쑹쟝은 동료들과 함께 마싱졔(馬行街)로 향했다. 약 2킬로미터 지점에 쥬쏸짜오먼(舊酸棗門)에 이르렀다. 그 도중에 샹궈쓰(相國寺)의 장원이 있다.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 득도했던 루즈선(魯智深)이 파수꾼 노릇을 하고 있던 곳이다. 가는 곳마다 소동을 일으켰던 그는 여기에서 채원(菜園) 지기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채원 이웃의 동웨먀오(東岳廟)에 참배하려 가는 린충(林冲)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는 판박이처럼 되풀이되는 사건과 전락(轉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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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대문의 향료점. 《청명상하도》

이 부근에는 또 의사와 약방이 많이 거주했다. 향료점도 있고, 관리의 집도 많았다. 상당히 고급주택가인 것이다. 밤이 되면 수레와 말이 길에 가득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마싱졔(馬行街)다. 이곳도 번화가다. 이 거리에는 견직물, 진주, 향료, 약품 등을 파는 점포가 있고, 점포에 걸상과 책상을 놓고 장사를 했다. 중국의 비단에 관해서는 지금 새삼스럽게 말할 것까지는 없지만, 향료 역시 중요한 상품이었다. 남해 무역을 통해 중국에 전래되었던 향료는 막대한 양에 달했고, 송 왕조의 국가 재정을 크게 윤택하게 했다.

향료는 서민 생활에까지 들어갔다. 당시 서민 생활에 후추가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요리의 안내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부근도 유복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점포가 고층으로 굉장한 부지를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다. 《청명상하도》에 묘사된 향료점에는 규모가 큰 것은 있지만, 결코 2층 건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쑹쟝은 동료를 데리고 마싱졔의 일류 요정에 들어갔다. 이곳은 놀기 좋아하는 풍류 천자였던 휘종이 편애했던 당대에 으뜸가는 인기 예기(藝妓)였던 리스스(李師師)가 있던 점포였다. 휘종과 리스스의 사이는 당시 수도에서도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이 있었다. 궁전과 리스스의 집 사이에는 지하도가 있어 황제는 내킬 때마다 리스스를 만났다고 하는 소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황제와 거리의 기녀. 영화 《회의는 춤춘다(會議の踊る)》는 아니지만, 송대 사회의 서민성을 이야기해주는 일화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난숙성을 이야기해주는 일화라고나 할까?

쑹쟝은 그 뒤 판러우졔(潘樓街)로 갔다. 그곳도 번화가이기에, 많은 찻집(茶屋)이 있었다. 거기서 동료들과 합류해 돌아온 것이다. 다음날도 똑같은 코스로 리스스(李師師)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내 황제를 만나려고 할 때, 늘 그러하듯 리쿠이(李逵)가 날뛰기 시작해 결국 허탕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쑹쟝은 큰 점포에서 술을 마셨는데, 리쿠이는 그렇지 않았다. 서민의 역할을 하명 받은 극중의 또 한 사람의 인기 있는 인물인 리쿠이가 마신 곳은 값싸고 부담 없이 들어가는 점포였다.

카이펑에는 서민이 하루의 피로를 푸는 편안한 점포도 많았다. 수십 매의 동전을 짤랑거리며 귀가 길에 한 잔 하는 것도 일상생활에 얽혀 있는 패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포에서도 모든 것에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요리사는 다반량주박사(茶飯量酒博士)라 불렸다. 당시 사회에서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아무개 박사라고 부르는 것이 마을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포 안의 나이 어린 점원은 대백(大伯)으로 여급은 준조(焌糟)로 불렸다.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인 천을 몸에 걸치고, 머리를 높이 묶었다. 그런 이가 손님의 시중을 들었다.

술을 마시고 있으면 여러 가지 시중을 드는 이가 있다. 사파(厮波)라 불렸던 이도 술을 따르기도 하고, 요리를 가져오기도 하면서 나중에 팁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었다. 등급이 낮은 기녀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와서 노래 한 곡을 하고 팁을 가로채 가는 것이다.

술을 마실 때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밖에서 술자리에 찾아와서 주문하지도 않은 향신료나 과일 등의 술안주를 테이블에 놓고 돈을 갈취해 간다. 일류 요정이라면 그런 류의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어디에서건 출몰했다고 하니 지나치게 취기가 돌면 바가지 쓰게 마련이었다.

더 싼 집도 있다. 전(錢)을 10문(文) 조금 더 남짓을 가지고 있으면, 술 한 잔과 무언가 다른 안주로 우울함을 풀 수 있는 곳도 있다. 밥을 먹는다고 해도 반찬에 밥만은 아니다. 뜨거운 훈둔을 훌훌 먹을 수 있는 장소도 있다. 그런 이야기는 《수호전》의 곳곳에 나오는데, 《청명상하도》 안에도 나온다. 카이펑의 시끌벅적한 밤은 그렇게 깊어갔던 것이다.

《동경몽록화》으로 추측해 보면, 그런 시끌벅적함은 명절 밤의 것만은 아니었다. 특별한 광경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물론 명절 밤이 되면 한층 붐볐다. 이것은 또 당시 서민이 한 숨 돌릴 수 있는 다시없는 오락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