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펑의 형태
카이펑의 건설에 관해서는 후주의 세종이 성벽 위에 서서 뒤에 송 태조가 되는 자오쾅인(趙匡胤)에게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리게 해 힘이 다한 곳에 성벽을 정하게 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일견 웅대한 로망을 감추고 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인 듯 생각되지만, 이것은 카이펑이 고대적인 로망에서 벗어나 건설된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이미 인간의 지식을 벗어난 신화에서 도시 건설의 의의를 구해야 하는 감각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설화는 카이펑의 기본 라인이 후주(後周)와 송(宋) 2대에 걸친 왕조의 노력의 산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서술해 온 바와 같이, 카이펑은 황허 유역의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한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그 때문에 마을의 근간은 여러 가지로 정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 그대로 살고 있던 사람들의 집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을 손봐서 송대의 카이펑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카이펑 또한 탄생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송대를 살아간 것은 아니었다. 시대를 상징하는 도시답게 그 시대 그 시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도시의 스케일은 약간씩 변했지만, 우리는 가장 번영했었다고 하는 북송말 경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그렇지만 카이펑의 성립과 변천까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카이펑의 정비는 내외에 미쳤다. 안에서는 옛날부터의 간선 도로를 정비해 가로를 확장하고 가로를 침범하고 있는 건물을 제거하였다. 바깥에서는 묘(墓)를 옮기고 교외 구역을 정했다.
지금까지 그런 도시 본연의 모습을 지도를 이용하면서 소개해 왔는데, 아쉬운 것은 이곳에는 소개할 만한 지도가 없다는 것이다. 왕년의 카이펑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지도는 남아 있지 않다. 겨우 《사림광기(事林廣記)》라는 유서(類書), 곧 오늘날의 일종의 백과사전에 변형된 지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것은 원대(元代)의 판본이다. 그림을 통해 도시의 윤곽을 보여주고 그 안에 운하와 궁전이 그려져 있을 뿐인 관념적인 지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 안에 도시 공간을 잡다하게 그려낸 것은 또 다른 관념을 보여준다. 그것은 도시에 비해 또는 도시 그 자체가 이미 당과 송이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보여준다. 카이펑이 제국의 수도였고, 황제가 군림한 수도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목적만을 가진 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시 안을 종횡으로 구획한 가로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이 그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림광기》의 지도는 한편으로 관념적인 외관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잡다한 성 안의 경관을 보여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송 왕조의 본질을 훌륭하게 말해 주고 있다. 북방 민족의 압박 속에서 외부에 대해 왕조의 정당성과 명분을 보여주고 틀을 정비하는 데 부심했던 송 왕조. 그러나 내부에서는 내적인 번영에 취해 넋이 빠졌던 왕조. 이 지도는 그런 송의 모습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대로는 도시 경관의 해석에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에는 문자에 의한 관념적인 도시 경관의 복원이 우선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읽어 왔던 중세 도시의 경관에 관한 지식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에서 복원을 시도해 보자.
성 안의 가로(街路) 역시 카이펑의 스케일에 대응해 당의 창안만큼 넓지 않았다. 30보, 50보 등이라는 숫자가 산견되는데, 30보라면 약 46.2미터이고 50보라면 약 77미터이다. 이것 역시 후주 시대에 넓이 50보의 가로라면 양측의 집이 각 5보, 곧 약 7.7미터 남짓 튀어나와도 되었다고 하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집을 세워도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수목을 심고 우물을 파고, 때로는 차양을 만들기 좋다고 하는 정도였다. 순차적으로 정령(政令)이 나와 30보 이하 15보까지는 3보, 곧 약 4.62미터까지 양측에서 튀어나와도 좋았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77미터의 가로라면 실질적으로 약 61.6미터, 37미터 넓이의 가로라면 약 41.6미터 넓이까지 도로를 확보하면 좋다고 하는 것으로, 여기까지는 가로 침범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 카이펑의 시내에는 당의 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가로는 보이지 않고 있다. 아울러 동서남북에 종횡으로 달리는 격자무늬 모양의 가로도 모습을 감추었다. 카이펑 성 안의 가로는 몇 개의 간선도로를 남기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얽혀있는 길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은 길로 들어서면 여기는 이미 서민의 주택가였다.
카이펑 경관의 또 한 가지 특색은 종횡으로 운하가 굴착되어 있는 것이다. 수도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자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운하를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이펑에는 네 줄기의 운하가 설치되었다.
운하는 강남에서 물자를 옮기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것은 볜허(汴河)라 불렸다. 운하의 폭이 100척 내지 150척이라고 했으니 약 31미터에서 45미터 정도의 폭이 된다. 깊이는 8척 5촌으로 약 2.6미터나 2.7미터 정도로 상당히 얕았다. 게다가 흐름이 빠르고 진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배는 평평하고 낮았으며, 다리 밑을 지날 때는 삿대로 다리를 짚고 배를 지나가게 했다. 무지개다리(虹橋) 밑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필사적으로 배를 조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볜허에는 배를 끄는 사람, 배를 젓는 사람, 열심히 노를 조종하는 사람, 배가 교각(橋脚) 위에 걸쳐 있는 널빤지에 부딪히지 않도록 밀어 올리는 사람 등의 모습이 보였다.
하천은 천정천(天井川)이었다. 황허에서 온 진흙과 모래로 하상이 높아졌던 것이다. 제방은 평지보다 1장 2척이 높고, 오르내림이 대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민가를 보면, 계곡 바닥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반적인 인가가 별로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방에는 느릅나무가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한 녹음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운하는 다른 곳에도 있다. 산둥 방면에서 오는 물자를 운반하는 운하로서, 동북부를 관류하는 우장허(五丈河), 곧 광지허(廣濟河)이다. 하남 방면에서 오는 물자를 운반하는 차이허(蔡河), 곧 후이민허(惠民河)도 설치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북서쪽에서 유입되어 궁성에 도달한 진수이허(金水河)도 있다. 이 네 개의 하천이 도시에 흘러드는 간선 수로로, 카이펑의 명줄을 쥐고 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동맥으로서의 운하가 굴착되어 있으면, 그 주위로 이권을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볜허의 제방에까지 점포를 확장했다는 상인들의 이야기가 왕년의 수도 이야기에 산견되는데, 좀 더 거대한 침점(侵占)도 있다. 이것은 졘캉부(建康府)의 친화이허(秦淮河)와 마찬가지다. 운하를 따라 정부의 창고가 서면, 여기에 편승해 유력자가 영리를 목적으로 창고를 세웠다. 일본의 수계를 따라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창고 마을(藏町)이 카이펑의 운하를 따라서 출현했던 것이리라.
카이펑 성내의 건물에 대해서는 이것을 엿볼 만한 근거가 거의 없다. 당시의 건축물의 평면적인 구조에 관해서는, 이를테면, 《송평강도》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높이나 위치 등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림 등에 약간 남아 있지만,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은 멋있는 시골집이나 주루 등과 같은 다소 특수한 것이다. 《청명상하도》를 보아도 마찬가지로, 고층의 건축은 누각의 문과 주루뿐이다.
이에 비해서 근근이 보이는 일반 서민의 집은 거의가 평옥(平屋)이었다. 명청시대의 그림 등을 보면 성문 근처에 2층으로 지은 집을 빽빽이 그려낸 것도 있다. 하지만 송대의 그림 속에서 민가의 2층 건물은 적다. 곧 당시의 도시의 건축물, 특히 서민의 집 등은 평옥이 대부분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물론 높은 건물이 도시 안에서 많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궁성이나 관공서, 절이나 도관(道觀) 등은 비록 평옥이었다고는 해도 으리으리한 건물로 지붕도 높았을 것이다. 또 상점이라 하더라도 큰 것은 틀림없이 그 나름대로 높이가 있었을 것이다.
대체로 2층 또는 그 이상의 층을 가진 건물 등은 좁은 토지를 유효하게 이용하기 위한 것이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권력자의 건물은 누각을 만들지 않는 한 오히려 으리으리한 것이 주류였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 따라서 카이펑의 거대한 건물은 역시 주루 등이었을 것이다.
궁전의 동남쪽에 둥쟈오러우(東角樓)가 있고, 둥쟈오러우졔(東角樓街)라 불렸던 일각에는 극장이 50개 남짓 있었다. 큰 것은 수천 명이 들어갔다고 했으니 상당히 큰 건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또 궁성의 둥화먼(東華門) 밖에 있는 바이판러우(白礬樓)는 3층 이상의 건물이 다섯 개나 세워져 각각이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 서쪽 누각에서는 금중(禁中, 곧 궁궐)이 보였기에 전망이 금지되었다. 《청명상하도》 속의 주루는 겨우 2층 건물이긴 해도 상당히 높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정부 고관과 대상인 등 여러 가지 규모와 높이를 가진 집이 상당히 있었다. 따라서 카이펑에 관한 한 도시 경관은 한층 정비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상상을 긍정케 할 만큼, 카이펑의 부자는 대단했다. 고가의 요정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시사하지만, 천 수백 만 관의 거래를 한 미곡상이 있었다고 한다. 차로 이익을 도모했던 마지량(馬季良) 등은 진종 황제의 황후의 오빠인 류메이(劉美)의 사위로 궁중에 숨어 있는 세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 한마디로 차의 전매가 일시 중지될 정도였다. 그 시대가 삼대 황제 때였다는 사실로 상인의 발전이 얼마나 일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지은 저택이 굉장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같이 카이펑의 중심가에는 거대한 건물이 많이 있었다고 추측하는 게 무난할 것이다. 카이펑은 쑤저우와 비슷하게 아니 그 이상의 도시적 경관을 자랑했던 것이다.
카이펑으로
인구 100만이라는 카이펑에서는 갖가지 인생이 펼쳐지는 도시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많은 정착자 외에도 꿈과 야망을 가득 품고 카이펑에 여행 온 이도 많았다.
도회로 간다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마음이 들뜨는 것이다. 그곳에는 꿈이 있고, 기대가 있었다. 활기 넘치고 최신의 유행이 있는 곳. 이것이 도회였다.
물론 불안도 있었다. 번잡한 거리에서 범죄에 노출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치욕을 당하지 않고 사람들과 사귈 수 있었을까? 말은 통했을까? 시골에서 대도회로 나갈 때 수반되는 불안을 이 시대 사람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도회로 나가는 사람은 여러 가지였다. 송대에 멀리 긴 여행을 해서 수도를 목표로 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사람들이 있었다. 지방에서의 임기가 차서 도회로 전근되거나, 공용으로 수도에 올라온 관료들까지. 과거 시험 때문에 혹은 상용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도회로 올라온 이도 있었을 것이다. 갖가지 목적과 이유를 갖고 수도로 향한 길을 송대 사람은 걸었던 것이다.
물론 밝은 꿈만을 갖고 수도에 올라왔던 것은 아니다. 시골에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도망치듯 온 이도 있었을 것이다. 꿈이 깨지고 드넓은 도회로 잠입한 이도 있었던 것이다. 도시는 온갖 것을 삼켜버렸다. 그런 잡다한 것을 감싸 안고 도시는 팽창해 갔다. 그와 같이 카이펑에는 1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생활을 하고, 또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도시가 기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 틈새로 또 많은 이가 잠입해 그날의 양식을 벌어들였던 것이다.
이 긴 도정을 거쳐 사람들이 도착해 들어갔던 도시의 경관은 이제까지 서술해 온 대로다. 근엄하게 솟아오른 성벽. 높고 위엄 있는 성문. 도심에는 궁전과 관청, 주루 등 고층 건물이 우뚝 솟고, 사람들의 번잡함이 이어졌다. 관청이 성 안 곳곳에 산재해 있었던 것은 일찍이 쑤저우에서도 보았던 풍경이다.
처음으로 본 카이펑의 경물은 무엇이든 진기했을 것이다. 운하, 특히 볜허를 통행하는 수많은 배는 틀림없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그 혼잡함에 놀라 입성하면 그곳에도 세계 유수의 대도시에 굉장한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화물을 숙소에 두고, 사람들은 만사를 제치고 여기저기 나다녔을 것이다. 이를테면 궁성이다. 일본에서 온 여행객이었던 죠진(成尋)도 당장 궁성 부근을 걸었다. “우리나라의 고쇼(御所, 일본 천왕의 거처)와 같다.” 이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실제로 송의 궁성은 작았다. 《수호전》을 읽으면, 은밀하게 잠입한 쑹쟝(宋江)의 수하였던 차이진(柴進)이 마치 천국이나 되는 양 감탄하고 있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당(唐)의 궁전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담한 고쇼(御所)라고 말했던 곳이었다. 작은 곳에 몇 개의 궁전이 밀집해 있었다고 하는 것이 실상이다.
《사림광기》에 실린 궁전의 그림을 보아도 빽빽한 건물이 늘어서 있다. 그런 곳에서 매일 매일의 생활을 보냈던 것이었을까? 베이징(北京)의 쯔진청(紫禁城)을 보더라도, 저런 곳에 억지로 갇혀 살았던 여성은 어떤 정신 구조를 갖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그보다도 작은 카이펑의 궁성은 장식이 지나치다 할 정도 많았던 것에 비해 자유로운 공간은 없었는데, 이것이 송대의 궁전이었다.
이 협애하지만 장대한 건물로 가득한 공간에 관해서는 회화사(繪畵史)의 입장에서 흥미롭게 연구되고 있다. 오가와 히로미츠(小川裕充, 1948~ )의 《원중의 명화(院中の名畵)》이다. 오가와 히로미츠의 고찰에 의하면, 몇 개의 궁전 장벽에는 왕년의 저명한 화가의 손에 이루어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장벽에 그려진 그림은 건물과 운명을 같이 한다. 궁전이 개축되면 장벽화는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을 엿볼 수 있는 방법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오가와 히로미츠의 고찰은 다방면에 걸쳐서 방대하면서도 장대한 장벽화의 전모가 드러나게 했다. 이에 의하면 장벽화의 주류는 풍경이었던 듯하다.
도시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풍경화가 증가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인공적인 공간이 오히려 인간들에게 아득한 태고적에 생활했던 야산(野山)을 생각나게 했던 것일까?
역대 회화의 제작자는 갖가지 화풍을 달리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때그때마다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원중의 명화》는 송대 사대부 문화의 융성을 배경으로 궁중에 장대한 산수화의 세계를 펼쳐 놓았던 것이다. 둥위(董羽), 쥐란(巨然), 야오쑤(姚肅), 궈시(郭熙) 등, 북송을 대표하는 화가가 종횡으로 팔을 휘둘렀던 거대한 공간은 오늘날에는 없다. 그러나 호탕하게 펼쳐진 일군의 산수화는 틀림없이 협애한 궁전들의 공간에 내적인 넓이를 제공했을 것이다.
궁전의 배치와 역할에서 고려해야 할 점도 있는데, 궁전을 탐방하는 것은 이번 카이펑 방문의 본의가 아니기에 언급을 삼가겠다. 그럼에도 에도성(江戶城)의 벽화가 차츰 분명해져 오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 흥미를 끄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