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성곽 내의 변화 2

경관의 변화

하지만 당의 지배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도시에 대한 규제력이 후퇴하면서 그런 경관에 큰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방제(坊制)의 붕괴이다. 사람들이 방벽을 부수고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당 이래 현저해진 경제의 발달도 큰 원인이다. 확대를 탐욕스럽게 갈망한 경제는 인공적인 장벽을 싫어한다. 경제는 규제를 타파하고, 강하게 바람이 부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 결과 방벽(坊壁)도 차츰 의미를 잃어갔다. 파괴되어도 수리가 되지 않았다. 수리는커녕 적극적으로 이것을 파괴한 이도 나왔다. 경제라는 마물(魔物)이 요구하는 대로, 사람들은 방벽의 수리에 열의를 잃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제까지의 거주구의 규제는 의미를 잃었다. 이것은 어느 시기의 도시 경관이 소멸한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간에도 사람들이 나돌아다녔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밤이 밝아졌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돌아다니게 되었다면, 이것을 대상으로 한 장사도 나왔다. 방벽(坊壁)의 소멸은 온갖 규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했던 것이다. 일찍이 시제(市制)의 규제 가운데 동쪽과 서쪽 시장밖에 없어 일상에서 필요한 물건의 구입을 행상인에게 의지하고 있던 사람들도 가까운 곳에 생겨난 점포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이 개방적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둘러친 방벽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의 생활공간은 누구도 개의치 않고 찾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이 부대끼는 곳까지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샛길을 지나 지름길로 들어갔다. 안에서 안으로의 길을 들어갔다. 사람들의 왕래가 한층 격렬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도시의 경관은 일변했다.

새로 탄생한 중세 도시의 경관은 거대한 성벽이 주위를 둘러싸고 당당한 성문을 통과해서 입성하는 것이었다. 성문에는 육지의 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수문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전 시대와 기본적으로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안은 일변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방벽은 없었다. 길에 서면 보이는 것은 방벽뿐이라고 하듯이, 살풍경한 풍경이 아니었다. 대로에 면해 있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큰 가로 옆에는 뒷골목이 있었다. 큰 거리로부터 뒷골목이 보였다고 하는 것은 방벽(坊壁)이 없어지고 처음으로 생겨난 풍경이었다. 다만 아케이드식으로 그 주변의 지명을 표시한 것은 남아 있었다. 이것도 역시 중세 도시 공간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길에는 노점이 늘어섰고, 거리에는 행상이 행해졌다. 거리 일각에서 대도시의 기예를 펼쳐보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구경하러 가는 이도 있었다. 거리의 고동이 시작되는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이 출근하거나 아침에 귀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노점을 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밤늦게 돌아가는 이를 위해 노점을 내는 이도 있었다. 큰 화물을 끌고 수레를 달리는 이도 있고, 노상에서 시끌벅적한 광경이 보이게 되었다.

이전에는 방(坊) 안의 부대끼는 곳에 억지로 처박아져 바깥에 나갈 수도 없었던 서민들의 생활이 폭발이라도 하듯이 큰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런 모습들이 《청명상하도》에 극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동경몽화록》이나 《몽량록》 등과 같은 도시의 기록에도 씌어져 있다. 도시의 풍속은 활발해졌고, 가볍게 활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가로의 변화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소개했듯이 방제(坊制)의 붕괴는 가로의 상태에 변화를 일으켰다. 자유로워졌던 반면에 가로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나왔던 것이다. 이것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가로의 무단 사용과 점거이다. 이 두 가지는 결부되기 쉽다. 가로의 진흙을 긁어다가 집에서 사용한 이도 있는가 하면, 집을 밖으로 튀어나오게 한 이도 있었다. 여기에 상품을 늘어놓고 장사를 한 이도 있을 정도였다. 결국 가로의 사유화․점거이다.

그렇게 벌어진 일, 이른바 가로 침범(侵街)은 중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일본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있다. 상점 앞에 많은 상품을 진열하고, 간판을 내걸고 있는 광경은 곧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아닌가? 이것은 공공의 가로를 제멋대로 사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행정당국인 도시를 지배한 권력이나 규제가 후퇴하면, 그런 행위는 당장에 기성의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약한 권력과 혼란이 심화된 사회에서는 토지의 공유권과 소유권 등이 무시되기 쉽다. 후안무치만이 횡행한다. 도로 규제가 강한 오늘날에조차 도로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어느 시대건 후안무치한 이들은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 송대의 사료에는 자기 가게가 가로를 침범 한 것을 알면서 여전히 낯 두껍게도 자신의 이권을 주장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가로 침범이 어느 정도 행해졌는지 지금은 하나도 알 수 없다. 상업상의 이권을 둘러싸고 가로 침범이 행해져서 택지에도 미쳤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가로 침범이 그렇게 점차 진행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있다.

가로에는 배수구가 붙어 있다. 그렇다면 무단으로 가로를 점거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렇게 하면 거주 환경이 파괴된다. 또 가로의 점거가 무단으로 행해지면, 고대 이래의 직선적인 도로가 소멸되게 된다. 하지만 고대 이래 일본 도시의 가로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직선적인 가로가 남아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물론 그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 전혀 없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특히 도로 폭이 상당히 좁아진 것이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구부러져서 형태가 변한 것도 있다.

하지만 고대 도시의 직선적인 가로가 인정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기본 라인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로가 남아 있기 위해서는 언젠가 일제히 가로 침범이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가로 침범은 일제히 의도적으로 행해진 것이 되어버린다. 곧 의도적인 도시 개혁이 있었든지, 강고한 반권력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쇠퇴하고 혼란스러워 가는 도시에서 그런 개혁을 일으킨 힘이 있었을까?

물론 가로의 형태 변경을 공적 권력이 부분적으로 행한 것은 인정할 수 있다. 사오싱(紹興)에는 루쉰(魯迅)의 구가(舊家)가 있다. 혁명의 위대한 전사의 구가이다. 그 앞에 수로가 있고, 그리고 넓은 도로가 있다. 이것을 옛날 지도와 비교해보면 새로운 길인 듯하다. 즉 많은 관광객을 맞기 위해 만든 도로인 것이다. 그런 것은 과도기의 권력이라 해도 행해졌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력하고도 통일적으로 가로를 변화시킨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루쉰의 집 앞 가로도 부자연스럽게 막혀 있다. 이것이 진실일 것이다. 그렇기에 가로의 변화는 각자가 멋대로 가로를 잠식해가는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잠식된 가로는 결국 구불구불하게 구부러졌을 것이다. 즉 잠식은 가로의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직선적인 가로가 상당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방자한 가로 침범과 사람들 각자의 제멋대로의 행동이 있었다면, 도시의 형태는 완전히 변했을 것이다. 폭이 넓은 가로가 종횡으로 달렸던 고대의 경관은 소멸하고, 결과적으로 똑바른 길은 구부러졌으며, 울퉁불퉁 뒤얽혔다. 여기에 생활의 장인 자잘한 길이 휘감겨 미로의 도시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고대도시의 가로는 여기까지 파괴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런 가로 침범의 상황은 지금 하나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가로 침범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만큼 도시의 변화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가로 침범이 각각의 서민의 거주지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는 심각한 토지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협애한 개인의 주택지에서의 토지 다툼이다. 개별적인 문제와 결부해 심각한 사정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아닐까?

요컨대, 나는 도시의 가로라고 하는 것은 한번 완성되면 간단히 변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기본 라인은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과 같이 변화가 급격한 도쿄에서도 꼼꼼히 찾아보면 옛날 도로가 의외로 남아 있다고 한다. 하물며 요즘과 같이 온갖 기계의 힘을 동원해 순식간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과거의 도시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도시가 기본 라인을 남기면서도 변화해 가는 과정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대의 도시에 남아 있는 직선적인 가로, 또 남아 있는 조리제(條里制)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가로 침범은 가로의 기본 라인을 파괴하는 형태로는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어떻게 진행되었던 것일까? 사람들이 가로를 잠식하고 토지 다툼을 벌였을 터인데도 직선적인 대로가 남아 있다는 것은 왜일까? 나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이와 같이 큰 문제가 남아 있지만, 가로 침범은 방제(坊制)의 붕괴나 범야(犯夜)의 금(禁)의 후퇴와 맞아떨어져 도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의 도시 관리자들은 이 가로 침범과 심각한 싸움을 벌여나가게 되었다.

지명과 마을의 변화

방제의 붕괴는 다만 단순히 가로의 형태와 도시의 경관을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었다.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언저리 일대의 구조적인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지명도 변했다. 중세 도시 변화의 과정은 여전히 눈을 뗄 수 없다.

방제가 붕괴해 갔다면,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방의 이름에 딸린 영역의 변화가 당연히 그 지역의 이름의 변화에도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 방(坊) 안에 있는 길이 잘 사용되는 것이라면, 그 길에는 그 방의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오늘은 어디에 갑니까?”

“아무개방(謀坊)을 통해 가면 가깝기 때문에 아무개방을 통해 갑니다.”

또는,

“오늘은 어디에 갑니까?”

“아무개방 옆을 통해 가면 가깝기 때문에, 아무개방 옆의 길을 통해 갑니다.”

이런 대화가 이어지게 되면, 아무개방의 이름은 결국 가로의 이름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이것은 방의 이름이 그 방 안에 있는 길의 이름이 될 뿐 아니라 여기를 스쳐 지나가는 가로의 이름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당시의 지도, 이를테면 《송평강도》를 보면, 가로에 마을의 이름을 쓴 표지가 그려져 있는 게 있다. 이것이 「방표(坊表)」이다. 이것은 뒤에 [우리가] 쑤저우(蘇州)에 입성할 때 천천히 살펴볼 수 있다. 그 때에 알게 되겠지만, 방표에 붙어 있는 가로는 여러 가지였다. 큰 거리가 있는가 하면 작은 거리도 있었다. 똑같은 게 아니었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번화가에 많다는 것이다. 사람이 많으면, 집들이 많으면, 그리고 가로가 뒤섞여 있으면, 표지가 필요한 것이다. 방표는 그런 도시 경관의 변화와 실태를 보여준다.

물론 그렇게 단순한 케이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방제의 붕괴는 하나의 통합된 구역을 붕괴시켰기 때문에, 이 구역의 일부가 이웃 방의 일부와 기능을 합쳐서 새로운 거리를 형성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 때는 방의 이름이 약간 이동해 본래의 지역에서 떨어져 있는 지명으로 사용된 것도 있을 수 있다. 번성한 쪽의 이름이 모두를 아우른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예전의 방(坊)의 지역의 양쪽에 이쪽의 방 이름이 사용된 것도 있고, 일본의 ○○ 긴자(銀座)와 같이 유사한 이름이 사용된 것도 있을 수 있다. 또 일정 지역이 발전한 것은 그 지역의 구조가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 지역에 새로운 지명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런 고찰의 실마리가 마을 이름의 표지, 곧 방표(坊表)의 해독이다. 송대의 도시 지도에 쓰여 있는 방표의 상태는 똑같지 않다. 큰 거리 위에 세워진 것도 있고, 작은 거리 위에 세워진 것도 있고, 옛날 명칭을 내건 것도 있고, 새로운 지명을 내건 것도 있는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가로나 거주지의 상태 변화를 그대로 이야기해준다.

이 변화의 과정은 시대에 따라 파악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에는 현지의 상세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어떻든지 간에 도시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겨났다는 것을 이 지도는 보여주고 있다.

물론 가로의 상태만이 아니라 지명 등에도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다. 마을 이름, 다리 이름, 온갖 것에 변화가 일어났다.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 있으면,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바꾸기도 하고, 좋지 않은 이름은 유래가 좋은 이름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런 변화는 도시의 여러 상황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차츰 파도처럼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당에서 송으로 시대가 바뀌어 가는 가운데 도시를 지배하는 권력의 변화가 그런 상황의 등장을 초래했던 것이다. 덧붙여 서민의 힘의 향상도 들 수 있다. 자유롭고 활달하게 살아가는 서민은 규제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 도시의 지명 변화는 그들의 행동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