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수천 년 역사를 보면 변방에서 생장한 에너지는 중원으로 몰려들었고,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거대 권력은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중원이란 권력의 산실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살벌한 쟁투의 무대이자 승자의 화려한 거소였다. 쿠빌라이가 택하여 대도(大都)가 됐고, 영락제가 궁궐을 신축했고, 산해관을 통과한 만주족 황제가 차지한 자금성. 자금성의 남문은 오문(午門)이다. 남문으로 처음 들어선 만주족 수장은 도르곤, 1644년 봄이었다. 280년의 역사가 흐른 1924년, 퇴위한 채 자금성에서 거주하던 마지막 황제 부의는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으로 빠져나갔다. 오늘은 바로 그 자금성 남문에서 북문까지를 더듬어 만주족 역사기행을 마감하려 한다.
도르곤은 만리장성 산해관과 영원성의 철벽 방어선을 행군만으로 통과했다. 반대편에서 열었기 때문이다. 이자성의 난에 휘둘린 명나라 장군 오삼계가 만주족에게 투항해서 일어나 일이다. 이때 대청 황제는 여섯 살의 순치제였다. 도르곤은 그의 숙부이자 어린 황제를 보필하여 국사를 책임지는 섭정이었다. 오문으로 들어선 도르곤은 태화문 태화전의 서편에 있는 무영전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중축선에 세워진 궁궐들은 황제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도르곤이 시작한 중원 통치는 분리와 본속(本俗)을 원칙으로 했다. 한족과 만주족의 거주를 분리하고, 한족은 한족의 습속과 통치체제로, 만주족은 만주족 방식으로 통치한다는 것이다. 청은 명의 수도뿐 아니라 법제의 상당 부분 이어받았다. 중앙의 육조와 감찰, 지방의 성제(省制)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치발령을 내려 중원의 백성들이 누가 새로운 지배자인지는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한족 관리를 활용했지만 몽골 티베트 러시아 조선 등 또 다른 변방과의 국제외교에서는 분명하게 배제시켰다.
무영전의 반대편 동쪽에는 내각대당 문화전 문연각이 있다. 중축선을 중심으로 문무가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내각대당은 육조가 모여 황제와 정사를 논하는 곳이다. 문화전은 황제의 경연이 열리는 곳이고 문연각은 황제의 도서관이다. 사고전서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태화전은 자금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황제의 즉위나 대혼, 조칙반포와 같은 국가적 의례를 행하는 공간이다. 선양의 고궁에서 제위에 오른 어린 순치제(재위 1644~1661)는 1644년 가을 자금성으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조칙을 반포했고 1651년에는 친정을 시작하는 전례도 이곳에서 성대하게 치렀다. 순치제는 명나라 잔당(南明 1644~1661)들을 진압하는 것까지 보고 24세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를 이어 여덟 살의 황자가 태화전에서 즉위하니 그가 곧 강희제(1661~1722)이다.
태화전 북으로는 중화전과 보화전이 이어진다. 이를 묶어 전삼전(前三殿)이라 한다. 자금성의 전체 구조를 전조후침 또는 내정외조라고 구분하면 삼전이 전조 또는 외조의 중심이다. 보화전은 순치제에 이어 강희제가 거처했던 곳이다. 오삼계 상지신 경정충 등 만주족에 투항했던 한인 무장들이 남방에서 삼번의 난(1673~1681)을 일으키자 강희제는 이들을 하나씩 정벌했다. 남몽골 차하르의 반란도 제압했다. 강희제는 청나라를 중원에 뿌리를 내리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전삼전을 지나 건청문을 통과하면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의 후삼궁이 이어진다. 건청문은 자금성 남북을 구분하는 선이다. 지금도 자금성의 문을 닫을 때 건청문을 제일 먼저 닫는다. 건청문이 닫히면 북쪽의 관람객은 북문으로 나가고, 남쪽의 관람객은 오문으로 나가야 한다. 후삼궁은 황제와 황후의 거소이자 사적 공간이다.
거창한 의례는 중축선의 궁전에서 이루어지지만 황제의 실제 정무는 양심전과 군기처에서 이루어졌다. 양심전은 건청궁 바로 서쪽이다. 규모도 작고 소박하다. 옹정제(1722~1735)가 거처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의 황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격식에 매이지 않는 편리한 공간을 숙소 겸 집무실로 이용한 것이다. 군기처는 양심전 바로 남쪽 80미터 거리에 있다. 준가르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옹정제가 전쟁 지휘소 격으로 직속 TF팀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서 발송된 문서는 빠르면 하루 800리를 달려 먼 곳까지 황제의 명령을 내렸다.
옹정제는 청나라의 체력을 강건하게 만든 위대한 군주이다. 비밀건저법을 만들어 황위 계승문제를 안정시켰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순행을 삼갔다. 지방 관리들의 상주문[摺奏]까지 일일이 받아보고, 붉은 색 친필로 회신[硃批]하여 철저하게 관리했다. 옹정제가 회신한 주비가 2만2천여 건이나 된다고 하니 그의 업무처리량은 대단했다.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즉위하여 13년간 재위했던 황제로서, 디테일이 살아있는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양심전과 군기처에 담긴 옹정제의 치적이다.
자금성은 좌우 대칭 구조이지만 두 곳은 어긋나 있다. 하나는 자금성의 동북을 차지하고 있는 영수궁 구역이다. 구룡벽에서 황극전과 영수궁, 양성전과 낙수당으로 이어진다.
건륭제(1736~1799 태상황 포함)가 가경제에게 제위를 물려준 뒤 태상황으로 거하기 위해 개축한 것이다. 그러나 건륭제는 양위를 하고도 모든 정무를 자기가 처리했다. 실제 거처도 옮기지 않았다. 가경제는 37세에 황제가 되고도 피교육자 뉘앙스가 묻어 있는 육경궁(毓慶宮)에 있어야 했다.
청나라의 전성기는 건륭제 시대였다. 그것은 강희제 옹정제가 다져놓은 탄탄한 국가적 에너지를 건륭제가 마음껏 발산한 것이다. 막대한 전비를 들여 티베트-몽골 세계를 전부 복속시켰다. 북순 동순 남순 등의 끊임없는 순행을 했다. 선양고궁 피서산장 원명원 이화원 천단기년전 등등 대규모 토목 건축사업이 이어졌다. 자금성을 황금빛 유리기와로 전면 교체한 것도 건륭제였다. 밖으로는 화려한 명성을 떨쳤으나 안으로는 부패와 재정고갈이 심해졌고 반란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고 귀주성에서는 묘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건륭제 사후의 청나라는 가경제(1796~1820) 도광제(1820~1850) 함풍제(1850~1861)시대는 내우와 외환이 요동쳤다. 아편전쟁에서 태평천국의 난까지 우리 귀에도 익숙한 청나라의 쇠락기이다. 군기처 바로 옆의 융종문(隆宗門) 편액에는 지금도 박힌 화살이 남아 있다. 천리교도들이 자금성을 침입했을 때 꽂힌 화살촉이다. 가경제가 자성하는 의미로 남겨둔 것이라고 한다.
함풍제가 사망하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제위에 올랐다. 그의 생모 서태후와 함풍제의 황후였던 동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동치제(1861~1875) 광서제(1875~1908) 선통제(1908~1912)로 이어지는 서태후의 시대이자 청조의 몰락기였다. 1862년 11월 1일부터 양심전의 옥좌 동쪽에 면한 동난각에서 서태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됐다.
자금성의 좌우대칭 구조에 또 하나의 변화가 발생했다. 건청궁 동서의 동육궁과 서육궁은 황후를 포함해 귀비 등 12명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서태후는 자신의 50세 축하연을 위해 서육궁에서 네 개의 궁을 터서 1궁1전으로 개조했다. 태상황 건륭제의 영수궁에 비견되는 권력에의 집착이 궁궐건축으로 드러난 셈이다.
자금성의 더 큰 변화는 성벽 밖에서 발생했다. 서태후는 자금성 서남쪽의 중남해에 서원(西院, 지금의 국가주석단의 거처)을 지었다. 수렴청정이 끝난 이후의 거처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그즈음 광서제는 1898년 6월 조칙을 내려 입헌군주제를 핵심으로 하는 무술변법이란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서원에 연금해버렸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선포되었다. 황태후는 선통제 부의의 퇴위를 결단했다. 황실의 명칭을 유지하고 자금성에 거주하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후 군벌의 혼란 속에 1917년 부의가 복위하는 소동도 있었으나 결국 1924년 신무문을 빠져나갔다. 자금성을 떠난 것이다. 부의는 일본 제국주의에게 넘어가 만주국 황제로 창춘의 궁에서 1932년 세 번째 제위에 올랐다. 1945년 종전과 함께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훗날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일을 했다. 1967년 세상을 떠났다. 언제 광장으로 소환당할 지 모르는 홍위병 광기의 불안감 속에서, 6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