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노정의 중절 구간인 심양에서 산해관까지는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과 비분감, 노정의 고단함이 심했던 현장이었다면, 산해관에서 연경까지의 종절 구간은 중원문화의 핵심공간인 연경으로 간다는 기대감이 고조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주요 여정은 산해관→심하역→무령현→영평부→칠가령→풍윤현→옥전현→계주→삼하현→통주→연경(북경) 입니다.
산해관 열고 중화(中華)의 세계로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문명(중화)과 비문명(오랑캐)을 구분하는 화이의 기준을 만리장성으로 삼았습니다. 발해의 노룡두에서 시작되는 만리장성은 산해관 각산장성을 거쳐 연산산맥을 따라 북경 외곽을 넘고 서쪽 사막의 가욕관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성벽입니다. 산해관은 바로 만리장성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래서 산해관의 안을 관내(關內), 밖을 관외(關外)라 불렀습니다. 이 관문을 들어서야 ‘중화(中華)의 세계, 즉 문명(文明)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관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크기를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모르며, 산해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과 높음을 모를 것이다.” (중략) 박지원, 『열하일기』,「일신수필-장대기」 中.
연행 사신들에게 산해관은 중국의 규모와 제도를 짐작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고, 관념 속에 자리 잡은 문명의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명·청 교체기 막바지에 청에 종군한 소현세자는 명장 오삼계에 의해 산해관이 열리고 청군이 무혈 입성하는 현장에 동행함으로써 조선이 그토록 의지하던 명(明)의 몰락을 직접 목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산해관 관문인 천하제일관은 천하의 장관이었고, 발해만에서 시작되는 만리장성의 노룡두와 장대인 징해루에는 역대 황제와 시인 묵객들이 지은 시판(詩板)이 곳곳에 박혀있어 조선 지식인들과 사행단의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사행단의 노룡두 방문은 사행단원 중 한 화가가 그린 연행도에도 전합니다. 김창업(1658~1722)이 각산 장성의 각산사를 찾은 내력이 지방지인 『임유현지』(1878년)에 「유각산사기」로 전하기도 하고, 홍대용 등 후대의 많은 조선 지식인들 역시 각산사를 즐겨 찾았습니다.
사행단 숙소는 서학년과 곡응태의 집
조선 사행단이 묵었던 무령현은 춘추시대 문인 한유(768~824)의 사당과 문필봉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의 사행단 숙소는 서학년의 집을 이용했습니다. 인근의 풍윤현에서는 곡응태 집에서 숙박했는데, 이들의 후예들은 대대로 문상이 되어 세거했습니다. 조선 사행들이 중국에서 골동과 서책 구입에 집착했던 것을 감안하면, 숙박처를 삼은 이유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이 조·청 문인들의 교류공간으로 활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여정의 동일한 반복’을 들 수 있습니다.
1728년 삼절연공사의 정사로 무령현을 지나던 윤순(1680~1741)이 무령현의 진사 출신인 서학년의 정성스런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조선에 서학년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후 연행 사신들이 무령현에서 서학년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같은 여정을 오가는 사신들은 연도의 명소를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관례가 된 셈입니다. 현재 무령현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학년의 옛집이 있었다던 성 남서쪽 거리는 이미 도시 재개발로 모두 철거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역사의 미세한 연결고리들이 사라지는 현장입니다.
연행노정의 필답지, 백이숙제 묘
사행의 삼사를 비롯하여 조선 지식인들이 노정에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공간들이 있었습니다. 영평성 노룡현 난하 변에 위치한 수양산과 고죽성 이제묘 입니다. 백이숙제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이제묘는 충의와 절의를 정신적 가치로 삼아 온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징 공간이었습니다.
난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죽국의 옛 자리였다는 수양산 인근에 이제묘 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옛 터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과거 잔재 척결의 일환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현지 조사를 하다 보니 이제묘의 목재와 석물, 비석들은 대부분 흩어지고 일부는 인근 마을의 가옥 들보와 초석, 담장 등에서 간간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수 백 년 동안 선조들의 행적이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에서 망연자실을 느끼게 됩니다.
풍윤–옥전–계주로 이어지는 연행길
이제묘 참배를 마친 사행단은 부지런히 길을 나서 풍윤성에 도착합니다. 성 남쪽에 위치한 곡씨 집을 숙소로 정합니다. 앞서 무령현의 서학년 집처럼 풍윤의 곡응태 집 역시 조선 사행단의 주요 숙박처가 되는데 주인 곡응태로부터 그 후손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행단을 관대하게 응대했다고 합니다. 옛 당산지역에 속하는 풍윤현 곡응태의 집은 1979년 당산대지진을 겪으면서 사라졌고, 저택이 있던 골목만이 옛 지명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조선 사행단은 풍윤 외곽의 조선인 마을이었던 고려보를 들른 후 옥전을 지났습니다. 옥전은 연암 박지원의 한문단편소설 『호질』이 창작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호질의 원형인 기문(奇文: 벽에 걸린 기이한 글)을 베껴 썼다는 용읍암은 찾을 길 없지만, 저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던지는 정신 가치와 시대정신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사행단은 계주 인근의 연도를 지나면서 ‘신기루 같은 풍경’인 계문연수를 체험했고, 독락사와 명산 반산을 유람하기도 하였습니다.
천하의 물산이 모이는 통주 운하
통주는 강남에서 이어진 대운하의 북쪽 종착지로 통주성 외곽을 흐르는 노하에 운집한 화물선과 세곡선들이 빽빽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며, 연행록마다 이러한 모습을 연행길의 장관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해상으로 옮기는 천하의 물건들이 모두 이곳 통주로 모여들고 있으니, 노하의 배를 보지 않고는 황제가 사는 도읍지의 웅장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중략) – 박지원, 『열하일기』 中 –
통주 운하의 배를 구경하다가 배 안에서 초상집의 문상까지 참여하게 된 연암 일행은 “배에서 내려 언덕에 오르니 수레와 말이 길을 메워 갈 수가 없어서 도리 없이 말에서 내려 걸어갔을 정도였다”고 했고, “심양, 산해관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가히 통주 운하와 연경 초입의 번화한 거리를 보며 청의 번성함을 느꼈을 듯합니다.
통주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행이 북경으로 향하기 위해 영통교(팔리교)에 이르면 청 조정의 예부에서 접대하는 관원이 나와서 조선 사신단을 북경 자금성의 초입인 동악묘로 안내합니다. 동악묘에서 옷을 갈아입고 문무 반열을 지어 북경성의 동문인 조양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머나먼 3천리 연행노정의 목적지인 연경에 비로소 도착한 것입니다.
문상(文商)
조선의 지식인들이 교유했던 중국의 상인 중에는 선비이면서 상인이고, 상인이면서 선비인 이들이 있었는데, 유상(儒商)이라고도 한다.
호질(虎叱)
연암 박지원의 한문단편소설. 호랑이를 통해 조선 상류층(혹은 선비/지배층)의 위선과 허례허식 등을 비판한 사회 풍자소설. 연행노정에서 한 암자에 걸린 기문을 베껴 각색했다고 하는데,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