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신에게 연행노정의 첫 번째 마디(初節)인 동팔참(東八站) 구간은 한민족의 옛 영토였음을 상기하는 역사적 공간이면서 조선의 산천과 닮아 친근한 이미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 살펴볼 연행노정은 바로 병자호란의 상흔과 치욕을 상기하며 비분감을 토로했던 공간인 요동의 중심도시 심양(瀋陽)입니다.
피로인(被擄人) 돼 심양으로 떠나는 백성들
16세기 후반 동북아시아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7세기 초 조선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어 온 명과 신흥세력인 후금 사이에서 매우 복잡 미묘한 외교적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은 후, 지속적으로 대명 공략에 나서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하의 예’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조선은 재조지은(再造之恩: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임진왜란 당시 명의 원조를 말함)과 같은 명분론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정은 대립이 극심해져 급기야 병자호란(1636)을 초래하게 됩니다.
1636년 12월, 청 태종(황태극)이 팔기군의 주력인 철기병을 앞세운 10만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이후, 47일 만인 1637년 1월 30일에 인조가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함으로써 전쟁은 종료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패전국의 백성에게는 고난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조선 백성들이 청의 수도인 심양으로 전쟁포로가 돼 끌려가야 했습니다. 왕세자인 소현세자도 강화조약에 따라 볼모가 되어 세자빈 강씨, 왕자인 봉림대군(후일 효종), 대신과 자제들 60여만 명의 백성들과 함께 심양으로 가야 했습니다. 후대인들은 이 길을 피로노정이라 불렀습니다.
“뒷날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 명이나 되었는데, 몽고 군대에서 포로로 잡힌 이는 포함하지 않았으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가 없다.”
– 출처 : 나만갑, 『병자록』
위의 기록만 보더라도 당시 청군이 조선 침략 과정에서 자행했던 노략질의 실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인 포로들의 운명, 그리고 그 후예들
소현세자의 행적을 기록한 『심양일기(瀋陽日記)』와 『심양장계(瀋陽狀啓)』에 따르면, 청인들은 붙잡아온 조선인을 날마다 성 밖에 모아놓고 몸값을 치르고 데려가도록 했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값이 너무 비싸서 조선인 가족들이 공적(公的) 속환을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전쟁으로 인한 폐해는 아이, 노인, 특히 여성에게 극심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처첩(妻妾)이 되거나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었습니다. 팔려 간 조선인들은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잡혀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당하거나, 체념하고 머물러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병란 이후 포로에서 속환되어 귀국한 여성을 환향녀(還鄕女)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대하는 조선 사회의 분위기는 매우 비우호적이었고, 이것으로 대두된 사회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왕세자인 소현세자도 볼모가 되어
60여만 명의 백성들과 함께
심양으로 가야 했습니다.
후대인들은 이 길을
피로노정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던 장소는 현재 남탑공원(라마백탑)으로 조성되어 심양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신들이 심양의 혼하나루를 건너면 가장 먼저 쉬어가는 곳이 남탑 일대입니다. 심양성에 입성하기 전에 남탑 일대를 지나가노라면, ‘반드시 당시의 치욕적인 일들을 상기하곤 했다’는 기록이 연행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잠시 들렀던 광자사와 남탑이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역사의 현장을 찾는 여행자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지금도 요동지역 곳곳에는 당시 포로의 삶을 살았던 조선인 후예들이 살고 있습니다. 조선인의 후예임을 상징하는 족보와 성씨, 동성통혼 금지 등 조선 민족의 문화를 유지하는 후손들이 요녕, 길림, 하북지역에 ‘박가보’, ‘박보촌’, ‘김가촌’과 같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들의 흔적을 추적하여 현지 조사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대신하는 심양관의 소현세자
조선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세자빈, 왕자, 대신들의 심양 생활은 적국의 포로였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소현세자가 8년여를 머물렀던 심양관은 ‘고려관’, ‘조선관’으로 불렸습니다. 심양 조선관은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영구 귀국하기까지 약 8년간(1637~1644) 볼모로 잡혀 온 조선인들의 숙소 겸 대청 외교에 관한 대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심양장계』, 『심양일기』 등을 살펴보면, 소현세자는 조선 정부 입장을 대리하였고, 강빈은 대명전쟁과 수렵에 종군한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조선관의 살림(농사, 무역)을 돕기도 했습니다.
소현세자는 매월 5, 15, 25일 황궁의 제삿날과 주변 국가의 조공 때면, 입궁하여 진과연(眞瓜宴)과 같은 각종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청의 대명(對明) 전쟁 승전 시에는 황궁 대정전 앞마당에 전리품을 펼쳐놓고 구경을 시키는 모임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는데, 청의 무력을 드러내는 무언의 압박이었습니다. 조선관으로 돌아와야 했던 그의 발걸음은 무척 무거웠을 겁니다.
소현세자 귀국 후 조선관은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심양 조선관의 위치는 『심양지도』(1907년)와 『최신심양지도』(1924년)에 ‘고려관호동’(高麗館胡同), 고립관(高立館:‘까오뤼관’으로 고려관(高麗館)과 발음 동일)의 명칭이 정확히 남아있고, 옛터에는 심양시공로건설개발총공사와 유치원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조선관 옆에는 유득공, 박제가 등이 심양 선비와 교류했던 취생서원(심양서원)과 문묘 터가 있습니다.
소현세자와 조선인들의 사연이 스며 있는 조선관 터에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상징물이라도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동팔참의 산천을 지나면서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들었다가도 치욕의 공간 심양으로 들어서면 괜시리 위축되는 심리를 감추려는 듯, 오히려 오랑캐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비분감을 시문(詩文)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심양을 떠난 사신들은 요하를 건너 거칠고 진창 투성이인 이도정(二道井) 일대를 거치면서 산해관(山海關)으로 방향을 잡아야 했습니다.
-피로인(被擄人) : 전쟁의 포로(볼모)가 되어 적국으로 붙들려 가는 사람.
-피로노정(披露路程) : 피로인들이 걸었던 볼모노정이라고도 하며, 연행노정과 겹친다.
-속환(贖還) : 포로로 붙잡힌 조선 백성들을 노예시장에서 돈을 주고 다시 구해오는 것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