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明代)의 잡사
명대에도 잡사에 속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다.
1) 《금고기관(今古奇观)》: 이것은 ‘삼언(三言)’ 등에서 골라 뽑은 것으로, 여기에서 ‘삼언’이란 곧 《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을 말한다. 이들 백화소설 단편집은 모두 명대 사람인 펑멍룽(冯梦龙)이 묶은 것이다. 그는 당시의 사대부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민간 문학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송대․원대․명대 세 조대(朝代)의 민간 설서인(说书人)들의 화본(话本)과 구두고사(口头故事)들을 모두 모아 소설로 만들었다.
‘원외(员外)’라는 인물의 호칭은 역사서에는 없는 것으로 지주나 상인․부호를 가리킨다. 이런 책 속의 고사를 통하여 그 당시 상업의 발전 상황 및 기타 사회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펑멍룽은 또 민가(民歌)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류의 민가로는 첫째 ‘악가(乐歌)’가 있는데, 이것은 악기로 반주하며 부르는 노래로, 서명을 《괘지아(挂枝儿)》라고 했다. 두 번째는 산가(山歌), 곧 도가(徒歌)로써, 이것은 악곡(乐曲)이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부르는 노래다. 이런 책들은 중화서국(中华书局)에서 출판되긴 했으나 공개적으로 발간된 것은 아니며 내부에서만 참고하고 있을 따름이다.
2) 《금병매(金甁梅)》: 명대 작품으로 작자는 미상이지만 산둥(山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남녀 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많이 묘사해 놓았는데,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명대 부호들의 생활이 얼마나 부패했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 역시 출판되었지만 내부에서만 참고하고 있다.
3) 명대 말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것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형타일사(荆驼逸史)》와 《명계패사회편(明季稗史滙编)》이 그것으로, 둘 다 편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여기에는 유명한 <양주십일기(扬州十日记)>와 <가정삼도기(嘉定三屠记)>가 실려 있다. 뒤에 청조 말년에 이르러 동맹회(同盟会) 사람들은 ‘양주십일’과 ‘가정삼도’로부터 혁명의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베이징 도서관에 가서 빌려 볼 수 있다.
4) 《작중지(酌中志)》: 명대 말기 사람인 류뤄위(劉若愚)가 지은 것이다. 류뤄위는 명대의 대환관(大宦官)인 웨이중셴(魏忠贤)과 동당(同党)으로, 웨이중셴이 체포되어 치죄 당하자 그 역시 하옥되었다. 그때 류뤄위가 옥중에서 태감(太监)의 일과 명대 궁중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 이 책이다.
5) 《야획편(野获编)》: 명대 사람인 선더푸(沈德符)가 쓴 책이다. 명대 사람들은 자신의 조대의 사실을 기록하기 좋아했다. 명대에 그런 사람과 책이 많이 나온 까닭은 그 당시 문자옥(文字狱)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16본으로 분량이 매우 많다. 이것을 읽으면 명대의 사정을 아주 잘 알 수 있다.
청대(淸代)의 잡사
청대에는 문자옥이 매우 잔혹했기 때문에 청대 사람이 청대의 일을 감히 기록할 수 없어, 명대와는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잡사로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있기는 하다.
1) 《우메이춘시(吴梅村诗)》: 이 때는 아직 청대 초엽이라 문자옥이 없었기 때문에 청 황제와 후비의 일을 쓸 수 있었다. 우메이춘은 곧 우웨이예(吴伟业)다. 그에게는 《위안위안곡(圆圆曲)》이라는 장시(长诗)가 있는데, 이것은 청나라 사람들이 입관(入关)할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 시에서는 그 날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제왕이 그 날 인간세를 버리고
적을 무찔러 서울을 거두고 위관까지 내려가니
육군은 통곡하며 소복을 입었고
머리 끝까지 노기가 치밀어 얼굴이 벌개졌어라
鼎湖当日弃人间 破敌收京下玉关
恸哭六军俱缟素 冲冠一怒为红顔
천위안위안(陈圆圆)은 명 말에 산하이관(山海关)을 지키며 청나라 병사와 관외(关外)에서 대항해 싸우던 대장 우싼구이(吴三桂)의 애첩이다. 우싼구이는 리쯔청(李自成)의 부장이 위안위안을 빼앗았다는 말을 듣자 노기충천하여 청의 군사에게 투항한 뒤, 오히려 청병(淸兵)을 이끌고 베이징을 공략해 빼앗았다.
또 <청량산찬불(淸凉山赞佛)>이라는 시도 있는데, 청의 순치(顺治) 황제가 출가했던 일을 말하고 있다. 청 초에는 아직 이런 시편들이 금지되지 않았었다.
2) 《소정잡록(啸亭杂录)》: 이것은 필기(笔记)로, 만주 인 예친왕(禮亲王)이 지었으며, 청 왕조의 일들이 필기체로 기록되어 있다.
3) 《요재지이(聊斋志异)》: 청대 사람인 푸쑹링(蒲松龄)이 지은 것이다. 작자는 산둥(山东)의 쯔보(淄博) 사람으로, 그는 여러 차례 낙방하여 과거에 뜻을 잃은 뒤, 민간 고사들을 수집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단편 문언소설들을 썼다.
처음에 이 소설은 감히 출판되지 못하다가 몇 년 뒤에야 간행되었다. 이 책 속에는 청대 사회의 암흑상을 폭로하는 문장이 적지 않게 실려 있다. 그 가운데에는 <나찰귀국(羅刹鬼国)>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동그란 뼈로 목걸이를 만들어 관직을 사고 파는 어떤 ‘귀국(鬼国)’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곧 청조를 빗대어 풍자한 것이다. 청조의 관리들은 조정에서 내린 구슬 목걸이(朝珠)를 하고 다녔던 것이다.
4) 《홍루몽(红楼梦)》: 이것은 대단히 훌륭한 소설인 동시에 가치 있는 사서이기도 하다. 작자인 차오쉐친(曹雪芹)은 바오위(宝玉)와 다이위(黛玉)의 고사에서 나온 애정 묘사를 통해 청조 일대의 사회상을 기술했다. 또한 쟈(贾)․스(史)․왕(王)․쉐(薛), 이 네 대가족의 흥망사에 대한 묘사를 통해 18세기 중국 사회의 쇠퇴하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쟈, 스, 왕, 쉐씨 집안이 얼마나 부호인가를 말하고 있다.
쟈씨 집안의 명성 헛되지 않네. 백옥으로 집을 짓고 금으로 말을 만드나니
아방궁 삼백 리도 진링(金陵)의 스씨 집안의 살 집이 못 되도다
동해에 백옥 침상이 없다 하여 용왕이 진링 왕씨 집안에 청하러 왔더니
풍년에 큰 눈 이 내리니 진주는 흙인 듯 금은 철인 듯하여라
(贾不假, 白玉)为堂金作马. 阿房宫, 三百里, 住不下金陵一个史.
东海缺少白玉床, 龍王来请金陵王.. 丰年好大雪, 珍珠如土金如铁.)
이렇듯 네 집안의 세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쟈위춘(贾雨村)은 별 볼 일 없던 인물로 쟈씨 집안과 쉐씨 집안을 오가던 청지기였는데, 몇 년 사이에 지부(知府)에서 어사(御史)가 되고, 다시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승진했다가 병부상서(兵部尙书)․경조윤(京兆尹)에 오른다. 이것은 그 당시의 역사와 청조의 정치적 부패를 드러내 주고 있다.
또 이를테면 위안춘(元春)이 궁에 들어가 왕비가 됨으로써 쟈씨 집안의 사회적인 지위는 더욱 높아진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비로서 궁의 담장을 벗어나 친정 집에 다녀오고 싶어도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궁에서 나오는 것 자체가 극히 어려웠다. 그가 친정으로 성친(省亲)을 나올 때 이를 위해 쟈씨 집안에서는 별장을 따로 짓는데, 그 건축과 설비는 ‘하늘과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구비’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엄하고 가혹한 규제가 따른다. 바로 그 날 갔다가 그 날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위안춘이 부모를 만나고 돌아온 뒤 이 젊디젊은 왕비는 급기야 죽어 버리고 만다. 그는 왕의 후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다른 책에서는 감히 묘사하지 못한 것이었던 까닭에 어떤 이는 《홍루몽》이야말로 청대 사회에 대한 풍자 혹은 청대 사회의 거울로 비유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18세기 청대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생활 풍습 등 각 방면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열미초당필기(阅微草堂笔记)》: 청대의 대학자인 지샤오란(纪晓岚)이 지었다. 작자는 허베이(河北)의 셴현(献县) 사람으로 《사고전서(四库全书)》의 ‘총편집인’이다. 그는 자기가 평소에 직접 보고 경험하고 들은 바 있는 수많은 사회 고사들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지샤오란은 일찍이 죄를 지어 신쟝(新疆)으로 충군(充军)을 나갔던 적이 있다. 그에게는 당시 양회(兩淮)의 염운사(盐运史)라는 관직에 있던 루졘쩡(盧见曾)이라는 한 친척이 있었다. 이 루졘쩡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치죄하고 그의 집을 몰수하려고 했다. 지샤오란은 건륭(乾隆) 황제의 측근에서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는 루졘쩡에게 사람을 보내어 편지 한 통을 건네 주었다. 그 안에는 글을 쓴 편지지는 없고 약간의 차(茶)와 소금만 들어 있었다. 루졘쩡은 그것을 받아 보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것이 자신의 집을 몰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임을 알아챘다. 그는 신속하게 자기의 재산을 옮기고 분산시켰다. 뒤에 황제는 지샤오란이 기밀을 누설했음을 알고, 그를 우룸치로 충군(充军)을 보냈다. 그때 우룸치에서 충군하는 동안 지샤오란은 《열미초당필기》를 썼다. 이 책을 읽으면 청대 사회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6) 《유림외사(儒林外史)》: 청대의 문인 우징쯔(吴敬梓)가 지은 장편소설로 청대 독서인(读书人)들의 생활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줄곧 생각하는 것은, ‘책 속에는 황금으로 만든 집이 있고, 책 속에는 평생의 녹이 있으며, 책 속에는 옥같이 어여쁜 아내가 있다(书中自有黄金屋, 书中自有千锺粟, 书中自有顔如玉)’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 급제를 매우 선망해 마치 하늘의 별과 같이 여겼다. 그러나 이른바 ‘재주를 겨루는 대제전(抡才大典)’인 과거를 치를 때, ‘대필을 하거나 답안을 건네주고, 답안지를 던지거나 벽돌 사이에 끼워 둔 답안을 빼보느라 눈썹을 찌푸리고 눈알을 굴리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다.’
수재(秀才)가 거인(擧人)이 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추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가슴속에 이욕(利欲)이 가득 차 있고 인격은 말 할 수없이 비천했다. 판진(范进)은 거인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좋아한 나머지 기절해서 (장인인) 후투후(胡屠户)가 따귀를 한 대 때린 후에야 제 정신이 들 정도였다. 그 후 그는 ‘벼락 출세’를 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전답․집․노복․쌀․의복․살림살이 등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다가 반미치광이가 되어 죽었다. 쾅차오런(匡超人)은 ‘농사꾼’ 출신으로 원래는 비교적 순박하고 착실했으나 마얼선생(马二先生)이 그를 ‘거인이 되는 길’로 이끌어 주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지현(知县)과 알게 되면서부터 점차 원래의 순박함을 잃고 부귀와 공명을 추구하는 하릴없는 무뢰한으로 타락해 버린다. 그는 남을 교사해 소송을 일으키기도 하고 대리시험을 치르기도 하며, 사채를 놓고, 편지를 위조하고, 부녀자를 속여 팔아 넘기며, 남의 이름을 빌려 그 사람 행세도 하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다.
어떤 선비들은 일단 거인이 되고 관리가 되어 부임하면, 먼저 돈을 긁어모으는 비결을 들으러 다닌다. 그래서 오매불망 ‘청렴한 지부(知府) 노릇 삼 년에 눈같이 흰 은자(银子)가 10만’이라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아문(衙门)에서는 하루 종일 값을 매기느라고 ‘저울 다는 소리, 주판 알 튕기는 소리, 곤장 소리’가 울려 나왔다.
우징쯔 자신은 이러한 과거제도의 어두운 면을 증오했기에 과거에 나서려 하지 않았고, 집안은 당연히 가난했다. 이에 《유림외사》를 써서 청대 사회의 과거제도와 관장(官场)의 오예(汚秽)를 폭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 역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서적이라 할 수 있다.
7) 《판교잡기(板桥杂记)》: 청대 사람 위화이(馀怀)가 지은 것으로, 친화이허(秦淮河)의 사람들과 그곳의 사정들을 필기체로 기록해 놓았다. 비록 친화이허의 사람들과 그곳 일들을 쓰긴 했지만 전적으로 기녀(妓女)만이 아니라 풍류객들에 대한 기록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유객 가운데는 정치인도 끼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정치적인 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도화선(桃花扇)》은 이 책의 기록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이 고사는 명대 말년의 일을 기술한 것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녀가 관리들보다 낫다는 느낌이 들도록 묘사했다.
8) 청말에는 《관장현형기(官场现形记)》, 《문명소사(文明小史)》, 《얼해화(孼海花)》 등의 ‘견책소설(谴责小说)’이 나왔다. 이런 견책소설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청조 사회의 부패가 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청 이후 민국(民国)에 이르는 시기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凯)를 비판한 《신화춘몽기(新华春梦记)》가 나왔다. 또 장헌수이(张恨水)가 지은 것으로 군벌들을 비판하고 있는 《제소인연(啼笑姻缘》이라는 소설도 있다.
그 후 항일전쟁(抗日战争) 기간 중에 장헌수이는 또 《팔십일몽(八十一梦)》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것은 쟝졔스(蒋介石)를 비판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이야기한 것은 각 조대마다의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서적들이다. 이런 서적들의 체제는 여러 가지여서 필기(笔记)․회고록․학술 서적 외에도 시(诗)․부(赋)․소설․극본․사서(史书)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죽지사(竹枝词)》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원래 송대 사람이 부르던 사(词)였다. 후대 사람이 사패(词牌)를 이용해 송대와는 다른 시기, 다른 인물과 사건을 써낸 것이다. 이 가운데서 사료를 찾아낼 수 있는데, 이러한 사는 한 수마다 4구 7언으로 되어 있다.
이렇듯 사료적 가치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체제의 서적들은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연구할 때 모두 역사서로 간주하고 참고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들을 잡사(杂史)라고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