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밤에冬至夜/당唐 백거이白居易
老去襟懷常濩落 늙어가니 가슴 속이 항상 휑한 듯하고
病來鬚鬢轉蒼浪 병이 들어 수염과 머리가 더욱 하얗네
心灰不及爐中火 가라앉은 마음은 화롯불과 같지 않고
鬢雪多於砌下霜 흰 머리는 뜰아래 쌓인 서리보다 많네
三峽南賓城最遠 삼협이라 남빈성은 고향에서 가장 멀고
一年冬至夜偏長 일 년 중의 동짓날은 밤이 유독 긴 날
今宵始覺房櫳冷 오늘밤 비로소 방안 차다는 걸 느끼고
坐索寒衣托孟光 앉은 채로 겨울옷을 아내에게 부탁하네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819년 48세로 충주 자사(忠州刺史)를 할 때 지은 시이다. 충주는 지금 장강 삼협에 해당하는 깊은 산골이다. 한 해 전에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있다가 더 산골로 좌천된 것이다. 한유도 이해에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조주자사로 좌천된다. 이 해에 유종원(柳宗元)은 47세로 죽었다. 백거이는 이해의 시련을 거친 다음 다음해 여름에 장안으로 돌아간다.
이 시에 나오는 남빈(南賓)은 지금의 중경에서 삼협으로 가는 풍도(酆都) 옆에 있는 성을 말한다. 이런 깊은 산골로 와서 동지를 맞이하니 그 처량함이 배가 된다. 이 시에 보이는 늙음에 대한 묘사가 더욱 처량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자의 이런 낙척한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호락(濩落)은 실의에 빠져 마음이 허전한 상태를 말한다. 창랑(蒼浪)은 머리가 흰 것을 말한다. 심회(心灰)는 마음이 재처럼 변해 아무런 의욕이 없는 것을 말한다. 재처럼 변한 마음이 화롯불과 같지 않다는 말은 결국 마음에 의욕이나 열정이 없는 것을 말한다. 지방으로 좌천된지 2년이 지나 낙담한 백거이의 심사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방롱(房櫳)은 방안을 말한다. 오늘 드디어 방안이 차다고 느끼고 겨울옷을 아내에게 부탁한다는 말은 마치 상징처럼 읽힌다. 시인이 처한 현실을 자각하고 대처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맹광(孟光)은 후한 시대의 은사 양홍(梁鴻)의 처이다. 그녀는 남편을 지극히 공경하여 밥상을 올릴 때 자신의 눈썹과 나란히 하여 공경을 표했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의 고사로 유명하다. 그럼 이 시에서 맹광을 인용한 것은 백거이가 자신의 아내가 현숙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굳이 많은 여인 중에서 맹광을 인용한 것은 자신을 양홍에 비기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본래 맹광은 살이 찌고 얼굴이 못생기고 피부가 검었는데 힘이 돌절구를 들 정도로 세었다. 그런데 여러 혼사를 다 마다하고 30이 넘었다. 그 때 그의 아버지가 그 까닭을 물으니 자신은 같은 고을에 사는 양홍처럼 덕이 있는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홍도 특이한 것이 여러 부잣집 예쁜 딸들을 다 마다하더니 이런 소문을 듣고 맹광을 아내로 맞은 것이다.
맹광이란 이름도 양홍이 이 여자가 사치를 마다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을 칭찬하여 자를 덕요(德曜)라고 지어줄 때 지어준 것이니, 덕이 빛난다는 뜻으로 광(光)이라한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새로 지어준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하여간 이 기이한 인연의 부부는 처음에 지금 서안 동남 방향에 있는 패릉산(霸陵山)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책도 보고 살았는데, 어느 날 서울 낙양을 지나가다가 백성들의 참상을 목도한 양홍이 시대를 탄식하는 내용으로 <오희지가(五噫之歌)>라는 노래를 지었다가 조정의 쫒기는 신세가 되어 남쪽 오나라 지방으로 이동하여 살게 된 것이다.
이 때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남의 집 노동일을 했는데 양홍이 집에 오면 맹광이 밥상을 지극 정성으로 차려 늘 거안제미 형태로 바쳤던 것이다. 맹광은 본래 힘이 세었기 때문에 밥상을 이렇게 공손히 높이 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힘으로만 하면 한 손으로 밥상을 들고 한 손으로는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이 집 주인이 고백통(皋伯通)이라는 사람이 이들의 행동을 특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알아내고는 양홍을 우대하고 그가 죽자 고대 오나라의 협객 요리(要離)의 무덤 옆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맹광과 부인은 다시 고향인 부풍(扶風)으로 돌아간다. 《후한서》 권 113 <양홍열전(梁鴻列傳)>에 실린 내용이다.
이런 양홍의 전기를 보면 알겠지만 양홍이 고향 부풍 근처인 패릉산을 떠나 멀리 남쪽 오나라 지방으로 온 것은 그가 지은 <오희지가> 때문으로 일종의 필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백거이가 818년에 강주 사마로 좌천된 것 역시 이런 필화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815년에 재상 무원형(武元衡)의 죽음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그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일부러 범인을 잡지 않는 반대 세력들이 도리어 백거이가 자기 직책을 벗어난 주장을 한다는 비방을 하였다. 급기야는 일부러 죄를 주기 위해 트집을 잡았다. 백거이의 어머니가 꽃을 감상하다가 우물에 빠져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백거이가 <상화(賞花)>, <신정(新井)> 이런 시를 지은 것은 사회 교화에 배치된다는 비판을 한 것이다. 백거이가 맹광을 이 시에 거론한 것은 바로 이런 내력을 반영한 것으로 은미한 자신의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우울한 정서와 동지를 잘 결합한 시이다. 좌천된 시인의 내면 풍경을 외면 풍경에 담아 함께 그려낸 시이다. 늘 술을 좋아하고 낭만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시이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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