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매墨梅/원元 왕면王冕
吾家洗硯池頭樹 우리 집안 벼루 씻는 연못 가의 매화나무
個個花開澹墨痕 송이마다 피어난 꽃 옅은 먹색 띠었네
不要人誇好顏色 남들이 예쁜 얼굴 칭송하는 것 원치 않고
只流清氣滿乾坤 그저 맑은 향기 세상에 충만하길 바랄 뿐
이 시는 원나라 말기의 저명한 화가 왕면(王冕, 1310~1359)이 자신이 그린 묵매(墨梅)의 상단에 적어 놓은 제화시(題畵詩)이다. 이 그림을 보면 아마도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 그림이 상당히 품격이 있는 것을 절로 느낄 것이다. 자기 수중에 이런 그림이 들어오면 최소한 함부로 싼 값에 팔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이 사람의 시와 그림을 논하기 전에 이 사람의 삶을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의 생애는 《명사(明史)》 권 285에 입전(立傳)되어 있다.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에 전기가 실려 있다는 것은 그가 정치나 문화, 예술 어떤 방면에서든지 당대에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후대에 끼친 영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소흥(紹興)과 제기(諸曁) 사이에 풍교(楓橋)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왕면의 고향이다. 왕면은 어려서 집이 몹시 가난해 그의 아버지가 소 치는 일을 시켰다. 그런데 왕면이 소를 치면서 몰래 학동들이 글을 외는 곳에 가서 그것을 따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어느 날 소를 잃어버려 아버지에게 심한 매를 맞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종전의 행동이 되풀이되자 그의 어머니가 “아이가 저리도 빠져 있는데 왜 학당에 보내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절간에 맡겼다.
왕면은 절간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불상의 다리에 앉아 장명등 빛에 책을 비추어 독서를 했다. 이런 기이한 행동을 하는 소문을 회계(會稽)의 한성(韓性)이라는 선비가 듣고는 자신의 제자로 거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면은 통유(通儒), 즉 여러 경서에 두루 밝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한성이 죽자 제자들이 왕면을 스승처럼 대하였다.
그런데 왕면은 과거 운이 없었던지 향시에서 계속 떨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남 일대는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 경쟁이 아주 치열하였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자 왕면은 과거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유람을 갔다. 거기서 비서경(秘書卿) 태불화(泰不花)를 만났는데 그가 관직(館職 주로 문헌이나 문장을 다루는 직임)에 추천을 한다고 하였지만 그는 머지 않아 이 곳이 다 토끼들이 다니는 길이 될 것이라는 기이한 말을 남기고 회계 구리산(九里山)으로 들어갔다. 매화 천 그루를 심고 복숭아와 살구도 500그루 심고는 거처를 매화옥(梅花屋)이라 명명하고 자신의 호도 매화옥주(梅花屋主)라고 하였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곧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말하니 모두들 그가 망령된 말을 한다고 했다. 이 때가 대략 1349년 무렵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농민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더니 드디어 주원장(朱元璋)이 무주(婺州)를 점령하여 왕면을 불렀다. 왕면은 그 전에 이미 이 때를 대비해 《주관(周官)》을 모방한 책을 지어 놓았다. 《주관》은 주나라 제도를 기록한 책으로 흔히 《주례》라고 부르는 책의 본래 명칭이니 왕면이 주나라 시대의 이상 정치에 뜻을 가진 것을 짐작하게 한다. 왕면은 주원장의 책사가 되었지만, 어느 날 저녁 죽고 말았다. 허망한 일이다.
이러한 왕면의 인생 내력을 볼 때 그는 이윤(伊尹 은나라 탕왕의 재상)이나 여상(呂尙 주나라 무왕의 재상인 강태공) 같은 경세의 큰 뜻을 품고 구리산에 은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도 현실의 인간이라 그림을 그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림의 크기에 따라 쌀의 양이 결정되었다. 이 시는 바로 그가 이러한 생활을 영위해 가던 어느 날 양좌(良佐)를 위해 그린 그림이다. 양좌는 그의 친구이다.
지금 이 시에 달린 <묵매>라는 제목은 이 시만 따로 기록된 문헌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고 본래는 제목이 없는 시이다. 묵매 그림에 제화시로 썼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붙은 것이다. 첫 구에 나오는 벼루를 씻는 연못이라는 말은 왕희지가 글씨 연습을 하느라 연못의 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왕희지와 왕면이 같은 사람이기에 오가(吾家)라고 표현한 것이다.
매화꽃에 담묵(淡墨)의 흔적이 있다고 한 것이 참으로 절묘하다. 담(澹)은 담(淡)과 통용하는 글자이다. 세연지 옆에 매화가 자라 그 물을 먹어 꽃도 담묵이지만 지금 이 그림이 담묵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매화의 은은한 자태가 또한 담묵이나 참으로 오묘한 솜씨이다. 왕면이 화가이기 이전에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뒤의 2 구절은 더욱 절묘하다. 이 매화는 사람들이 예쁜 얼굴을 칭찬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이 세상을 맑은 향기로 충만하게 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류(流)는 흐른다는 의미가 아니고 남긴다는 의미이니 류(留)의 의미로 쓴 글자이다. 꽃다운 이름을 남긴다는 유방백세(流芳百世)가 바로 그런 용법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지 않고 맑은 향기로 세상을 채운다는 말은 단순히 이 매화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바로 시인 자신의 포부와 지향을 담은 말이다. 왕면이 시인이기 이전에 지사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을 살펴보면 가지와 꽃잎이 모두 생명을 지닌 채 고상한 아취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잔잔한 선율마저 흐르는 듯한 음악성도 지니고 있다. 세속에 영합하는 것을 거부하는 고오(孤傲)의 품격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화폭 전체에서 기운이 생동하고 있다. 매화의 절조를 지향하고 매화를 심고 매화를 노래하고 매화를 그린 나머지 이제 매화보다도 더 매화 같은 사람이 된 시인이자 화가의 향기가 풍기고 있다.
이러한 그림에 걸맞게 글씨도 정갈하게 적혀 있어 이 작품은 그야말로 시와 글씨와 그림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된 극히 뛰어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지금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