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지고, 모호해지고, 사라지는 생존 한계선 扭曲、模糊、消失的生存底線
『월든』에서 소로는 마치 혼자 무인도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처럼(한때 필독서였던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사람들은 여전히 보고 있을까?) 수시로 자신이 가진 물품을 점검한다. 그리고 제왕이 천하를 순행하는 것처럼, 자기가 천하를 다 가진 것처럼 만족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현재 미국에서 의식주의 필수품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내 경험상 칼, 도끼, 삽, 손수레 등의 몇 가지 도구이며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 등잔, 종이와 펜, 몇 권의 책을 추가하면 거의 다 갖춰지는 셈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약간의 돈만 들여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는 집을 짓기 전에 이 말을 했는데, 입주하고 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가구 중 일부는 내가 직접 만들었고 다른 것들은 돈을 주고 산 것이어서 전부 내 명세서에 넣었다. 침대 하나, 탁자 하나, 책상 하나, 의자 셋, 직경이 3인치인 거울 하나, 부젓가락 한 벌과 석탄 선반 하나, 주전자 하나, 작은 냄비 하나, 프라이팬 하나, 국자 하나, 대야 하나, 나이프와 포크 두 벌, 접시 셋, 컵 하나, 수저 하나, 기름 단지 하나, 당밀 단지 하나 그리고 도자기 램프 하나이다.”
사실 이런 단서를 따라 다른 책을, 특히 소설을 읽으면 대단히 흥미롭다. 일종의 인류학적인 독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와 시대, 사회 형태, 나아가 서로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이른바 생활필수품과 더 많은 삶의 진상을 반드시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찰스 디킨스의 영국, 도스토예프스키의 제정 러시아, 제임스 조이스의 아일랜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롬비아, 그레이엄 그린의 하바나와 포르토프랭스와 사이공 그리고 콩고의 밀림 등에서 우리는 조금만 더 시간을 보태면 드러나는 삶의 진상을 통해 더 진한 감상을 얻을 수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무심코 드러난다는 것이다. 무심코 드러난다는 것은 우리의 이 의심 많은 시대에서는 신뢰성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로네 드 발자크의 명저 『고리오 영감』(서머셋 모옴은 이 책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대 소설 중 하나로 꼽았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소설의 무대는 프랑스 파리이며 시점은 1819년, 즉 소로의 실험이 시작된 해보다 딱 25년 전이고 이치상 인류의 발전이 25년 뒤졌던 때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파리는 당시 전혀 다른 경관을 지닌 세계의 중심지 혹은 최첨단의 장소였다. 아래 대화는 세상사에 통달한 것 같고 열정적이긴 하지만 어딘지 신비로운 40세 전후의 보트랭 씨가 법과 대학생 라스티냐크에게 해준 말이다. 앙굴렘 시골 출신의 그 젊은이는 당시 파리의 상류사회에 꼭 들어가고 싶어 했다.
“자네가 파리에서 제대로 행세하려면 말 세 필은 꼭 있어야 하네. 낮에는 이륜마차 한 대, 저녁에는 2인승 사륜마차 한 대를 타야 하는데 마차에만 도합 9천 프랑은 들지. 그리고 양복점에 3천 프랑, 향수 가게에 6백 프랑, 구두 가게에 3백 프랑, 모자 가게에 3백 프랑을 쓰는 것만으로는 크게 모자라. 옷 세탁비만 해도 1천 프랑은 드니까. 첨단을 걷는 젊은이는 셔츠도 허술해서는 안 돼. 사람들이 가장 뜯어보는 게 그것 아니던가? 사랑과 교회는 모두 자기 제단에 순백의 보를 덮기를 원하지. 자, 그럼 벌써 지출이 1만 4천 프랑 아닌가. 도박, 내기, 선물 등에 쓰는 돈은 아직 계산에 넣지도 않았네. 용돈도 최소 2천 프랑은 넘고. 나는 이런 생활을 해봐서 돈이 얼마나 드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이런 필수 지출 외에 식비 3천 프랑과 집값 1천 프랑도 더해야지. 자, 젊은이, 이러면 1년에 2만 5천 프랑이고 이 정도 돈을 안 쓰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돼. 우리의 미래도, 성공도, 사귀는 여자들도 다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이야. 하인과 시종을 또 까먹었군. 설마 자네의 연애편지를 크리스토프 같은 녀석을 시켜 전하지는 않겠지? 지금 쓰는 그런 종이를 편지지로 쓰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야.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경험이 풍부한 이 늙은이의 말을 좀 믿어보라고. 아니면 고결한 지붕 밑 방으로 이사를 가서 책이나 붙들고 있든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하게.“
이제 우리에게는 2개의 대단히 구체적인 숫자(모두 화폐 단위로)가 생긴 셈이다. 그런데 소로의 27달러 94센트는 일회성 지출이었지만(월든 호숫가에서의 농사와 낚시, 채집으로 소로는 흑자를 보았다. 그는 말하길, ”나는 1년에 6주만 일해도 생활에 필요한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대학생 라스티냐크의 2만 5천 프랑은 매년 반복되는 비용이었다. 양자가 서로 25년의 시간 간격이 있음을 감안해 총 격차가 얼마인지는 굳이 따지지 않겠다. 끈질긴 사람은 19세기 당시 달러와 프랑의 상호 환율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주톈신朱天心(타이완의 저명한 여성 소설가이자 탕누어의 아내)은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그녀는 현재 공개 강연을 하러 다니느라 바쁜데, 대부분은 주제가 동물 보호이지 문학 보호가 아니다(문학도 보호가 필요한데도 말이다). 그런데 어느 강연이 끝난 뒤, 젊은 여학생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가 너무나 용감하다고 칭찬했다. 이에 주톈신이 겸양의 말을 하려는 순간, 여학생은 너무나 진지한 어조로 ”어떻게 마스카라도 안 하고 밖에 나오실 수 있죠?“라고 물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얼마 전 내 주변에도 일어났다.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오랜 친구가 딸을 데리고 타이베이에 돌아왔는데(부모님 문안 겸 임플란트 치료를 위해 왔다. 타이완의 전 국민의료보험은 세계적으로 우수하다) 딸이 실내에 처박혀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깜박하고 여분의 마스카라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부리나케 시먼딩西門町으로 달려가 관련 제품을 싹쓸이해와야 했다. 친구는 내게, ”걔는 마스카라를 안 하는 게 벌거벗고 밖에 나가는 것보다 더 창피하대.“라고 말했다. 사실 1819년 당시 파리대학 학생이었던 라스티냐크도 유사한 생각을 했다. 『고리오 영감』을 보면 ”그 대학생은 자기 옷보다 모자에 훨씬 더 공을 들였다.“는 구절이 있다.
나는 청년들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청년들은 비판해서도 안 되고 비판받을 대상도 아니다. 마땅히 ‘우리 사랑스러운 타이완 청년들’이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어느 일본 여대생의 아래와 같은 주장을 알고 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일본의 윗세대가 늘 요즘 젊은 세대의 소비 방식이 사치스럽고 비이성적이라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그녀는 멋지게 반격했다.
”우리야말로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인내심이 강한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절약해야 하는지도 가장 잘 알고 말이죠. 당신들만큼 우리는 자유롭게 쓸 돈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옷과 신발과 명품 백 혹은 꿈에도 그리던 새 휴대폰을 살 때마다 먼저 자세히 계산하고 계획을 짜야 해요. 절대 충동 구매를 안 할뿐더러 때로는 3개월, 6개월을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다리죠. 그리고 당신들은 생각지도 못할 방식으로(점심을 굶거나 차를 안 타고 걸어서) 돈을 짜내요. 어디 그뿐인가요. 반드시 관련 정보를 샅샅이 뒤지고 도쿄 전체, 심지어 전 세계에서 가격 비교를 하고 난 뒤, 마지막으로 짧은 할인 특가 타임을 노려 구매를 하죠. 금세 물건이 동이 나는 바람에 평생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도 말이에요.“
정말로 은행 절도를 모의하듯 끈질기고 용의주도하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좋은 기회를 놓칠 테니 그럴 만도 하다. 주톈신은 유사한 주제로 「티파니에서의 아침식사第凡內早餐」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 소설 속 젊은 아가씨도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를 사기 위해 별의별 궁리를 다한다. 그것은 자기를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줄, 반 캐럿도 안 되는 조그만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일본 여대생의 이야기는 「장자‧도척盜跖」편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전혀 반박할 여지가 없다. 그녀를 질책하는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추호도 꿀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돌이켜 생각하게 만든다. 도대체 무엇이 생활필수품이고 사람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걸까? 점심 식사 혹은 마스카라인가?
절대 수요는 케인스와 다른 경제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유용한 개념으로서 매우 명확하고 직선적이며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때문에 유연성이 부족한 듯 싶다. 사람은 배부르고 따뜻한 상태에서 조금만 정도가 더 심해지면 즉시 고통스러워지지 않는가(너무 배부르거나 너무 뜨거워서). 『월든』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된다. 소로는 독일의 유기화학자 리비히의 견해를 끌어와서 인간의 몸은 난로이고 적절히 통제된 상태에서 서서히 타오르며 ‘동물적 열’을 잘 유지한다고 말했다. 또한 음식은 내부 연료이고 은신처(동굴이나 집)와 옷은 그 열의 보존을 책임질 뿐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인생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 일단 하나하나 구체적인 실제 사물(특정한 음식이나 집, 옷, 나아가 마스카라, 다이아몬드 반지까지)을 떠올려보면 우리의 마음속 그 직선은 당장 구부러지고, 모호해지고, 심지어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인생의 현실이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인간 세계를 가리킨다. 이것은 대략 1만 년 전부터 4천 년 전까지 신비하게 구축되었고 마치 단 하루와도 같았고 다시 돌아가기 힘든, 그전의 2, 3백만 년에 걸친 순純 생물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본능적이고 서로의 행동이 고도로 일치하고 투명했던 생물종 중 하나가 지금은 한 점도 똑같은 게 없는 눈송이처럼 각자 어둡고 비밀스러운 마음을 가진(조셉 콘래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이질적인 존재이자 변수로서 그 지능과 상상력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흔히 근거도 단서도 없이 노출되는 그 비이성과 어리석음은 더더욱 가늠하기 힘들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한 것처럼 새롭게 ‘어린 짐승’이 되어 다시 출발한 인간은 미완성이며 고정돼 있지 않은,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이다.
생물 세계에서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사유와 희망을 지운 채 그냥 시간만 흘려보내면 된다. 하지만 인간 세계에서 버티는 것은 어떨까?
2, 3천 년 전의 『예기禮記』에서는 사람이 어떤 나이에 이르면 먹고, 입고, 쓰는 것을 다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원단이 가볍고 부드럽지만 보온성이 좋은 옷(당연히 희귀하고 비쌀 것이다)을 입고 항상 고기와 술을 섭취하며 초상이 나도 무리해서 몸을 상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했다. 이것은 물론 이미 칠순에 이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기』를 읽으면 여전히 다소의 흥분과 모색의 느낌이 깃든 반짝임이 감지된다. 비록 주제는 죽음과 상례喪禮이지만 그때는 진정한 어려움이 아직 안 닥친, 보르헤스가 초승달이나 새 트럼프처럼 참신했다고 말한 인류 세계의 초창기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