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唐代)의 잡사
당대에도 잡사에 관한 명저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1) 당대의 잡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우선 당시(唐诗)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두푸(杜甫)의 시는 사시(史诗)라고 일컬어진다. 그의 유명한 시편 <석호리(石壕吏)〉․<신혼별(新婚别)〉․<수로별(垂老别)〉 등에는 당시 백성들의 고통이 묘사되어 있다. 또 바이쥐이(白居易)의 <신악부(新乐府)>는 모두 당대의 관가(官家)를 질책하는 것이고, <신풍절비옹(新丰折臂翁)> 및 <장한가(长恨歌)> 등도 어느 정도 역사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만서(蛮书)》: 이것은 당대 사람인 판춰(樊绰)가 지은 것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만(蛮)’이란 고대의 이족(彝族)을 가리키는데 ‘조만(鸟蛮)’과 ‘백만(白蛮)’으로 구별된다. 이 책은 고대 윈난(云南)의 역사를 강술한 것이다. 고대에는 ‘남조국(南诏国)’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곧 이 책에서 말하는 ‘만국(蛮国)’이다. 판춰는 여기에 소수 민족과 유관한 사실(史实)들을 기록하여 책을 지었다.
당시에 이미 샹다(向达)가 이 책을 잘 정리하여 《만서교주(蛮书校注)》를 썼다. 이 책은 이미 중화서국(中华书局)에서 출간되었다.
3) 《대당서역기(大唐西域记)》: 이 책은 당나라 사람 쉬안좡(玄奘)이 지었다. 속성(俗姓)이 천(陈)씨인 쉬안좡은 허난(河南) 사람으로서 일찍이 어릴 때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서유기(西游记)》 중에 묘사된 <당승취경(唐僧取经)> 고사는 모두 허구일 뿐 근본적으로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당승(唐僧) 쉬안좡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왔다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그 사람도 실존 인물이다.
쉬안좡은 인도에 갈 때, 창안(长安)을 출발하여 위먼관(玉门关)을 나와 신쟝(新疆)을 가로질러 파미르고원에 오른 뒤, 아프가니스탄을 거쳐서 인도의 북부 지방에 도착했다.
18년이 지난 뒤 그는 다시 서역의 각지를 거쳐 창안으로 돌아왔다. 당 태종은 그가 인도에 다녀오면서 보고 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친히 청해 들었다.
그가 여행 도중에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쓴 것이 바로 《대당서역기》다. 이 책에는 쉬안좡 자신이 직접 가본 110개의 크고 작은 고대 국가들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28개국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허시주랑(河西走廊)․신쟝 및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방글라데시․네팔․스리랑카 등의 국가와 그 지역의 당시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와 관련된 도시․백성들․풍속․명승지․인물․전설․고사 등도 실려 있다. 이 책은 내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기도 해서 상술한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참고 서적이 되고 있다. 이 책은 현재 중국의 불교협회에서 교주 작업을 진행 중이며, 해방 뒤 출판된 것도 있다. 이 《대당서역기》는 외국에서도 중시되고 있으며,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번역본도 나와 있어, 세계적인 명저가 되었다.
이 책에는 인도의 고사(故事)들도 실려 있는데, 이것으로 적지 않은 중국 고대의 고사들이 원래 인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중국인들이 약간 개정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당대(唐代)의 《두쯔춘전(杜子春传)》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두쯔춘은 공자(公子)였는데,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돈을 도박으로 다 날려 버린 후 다시 돈을 빌려 도박을 했다. 뒤에 그는 속세의 부질없음을 간파하고 출가하여 수도하기 위해 떠난다. 한 번은 꿈을 꾸는 듯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으나 그는 마음의 흔들림이 없었다. 뒤이어 다시 한 미녀가 나타나 그에게 기대려 하는 것을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온 그의 육친이 면전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이때 그가 다년간 수도하면서 빚어 온 단약(丹药)이 모두 불 속에서 타버렸다. 연단(煉丹)은 한 무제 때 성행했던 것으로서 신선이 되고 마귀와 싸우는 데 쓰였다. 이 《두쯔춘전》의 고사가 바로 인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4) 《태평광기(太平广记)》: 당인(唐人)의 필기(笔记)는 잡사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송대(宋代)의 《태평광기(太平广记)》에 실려 있다.
송대 사람들은 《태평광기》뿐만 아니라 4 편의 대 저작을 펴냈다.
첫 번째는 《태평어람(太平御览)》으로 1000권이 있다. 이것은 잘 분류된 백과전서로 제왕(帝王)․산천(山川)․천문(天文)․지리(地理) 등에 관한 사실들이 실려 있다.
두 번째는 《태평광기(太平广记)》로 500권이 있는데, 모두 당대(唐代) 사람들의 소설과 필기를 수집해 놓은 것이다.
세 번째는 《책부원구(册府元龟)》로 1000권이 있다. 이 가운데에는 옛 사람들의 사서가 수집되어 있는데, 모두 분류가 잘 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정사다. 따로 인행된 정사 서적들 가운데는 착오가 있는 것도 있으나 이 책 속의 정사에는 착오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십사사’를 교정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네 번째는 《문원영화(文苑英华)》 1000권이다. 이상 네 편의 책들은 아주 쓸모 있는 것들이다.
《태평광기》가 있어 당대 사람의 소설과 필기 몇 종을 찾아볼 수 있다.
송대(宋代)의 잡사
송대의 잡사 서적은 꽤 많지만 특별히 중요시되는 것 두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1) 《몽계필담(梦溪笔谈)》: 가장 가치 있는 송대 잡사서로, 송대 사람 선과(沈括, 1031~1095)가 지은 것이다. 선과는 정치가․군사 전략가이며 특히 대과학자다. 그는 평생 군사 과학을 연구하여 《변주진법(边州阵法)》을 남겼다. 그는 물리학․수학․지리학․천문․역법․수리․지질․기상․지도학 등 수많은 방면의 학문들을 연구했다. 그는 이런 모든 과학에 관한 지식을 다 갖고 있었고 각 학문의 영역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으며 석유광(石油鑛)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송대 사람들은 이미 산베이(陜北)에서 석유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달 자체에는 빛이 없으며, 달빛은 태양 광선이 달 표면에 반사된 것이라는 사실도 발견했다.
선과는 지방 관리를 지낸 적이 있었기에, 과학을 연구하여 개혁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는 또 군대를 지휘하여 적들의 대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송대 통치자의 부패로 인해 그의 정치 개혁에 대한 웅지는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만년에 이르러 58세 때, 선과는 쟝쑤(江苏)의 전쟝(镇江)에서 한거했다. 그때 그는 온 정력을 기울여 저술에 임해 끝내 《몽계필담》이라는 대저작을 써냈다.
이 책의 내용은 매우 풍부하여 정치․경제․문화․과학․기술 등 각 방면을 다루고 있다. 본서는 모두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600여 가지의 조목들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과학과 기술에 관한 것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학․천문․역법․기상․지질․지리․물리․화학․생물․농업․수리․건축․의학․약물학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작자 개인의 과학적 성취를 기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11세기 중국의 과학적 성과도 담고 있어 이 책을 읽으면 송대 사람의 과학 수준을 알 수 있다.
《몽계필담》은 세계 과학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은 그의 저서 《중국과학기술사(中国科学技术史)》 제1권에서 《몽계필담》을 ‘중국 과학사상의 좌표’라고 찬양한 바 있다. 이 책은 현재 상하이 중화서국에서 출판되었으며 후다오징(胡道静)이 정리했다.
2) 《송막기문(松漠纪闻)》: 이것은 두 번째로 중요한 잡사서로 우리가 이야기할 만한 것이다. 이 책은 남송 초기의 사람인 훙하오(洪皓)가 지었으며, ‘송막(松漠)’은 현재 중국 동북 지방을 가리킨다. 그때 훙하오는 송의 황제의 명을 받고 당시의 금에 사신으로 갔다가 통치자에 의해 억류되어 한대(汉代)의 쑤우(苏武)처럼 1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남송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송막기문》은 그가 10여 년 간 금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쓴 것인데, 여기에는 금의 역사와 동북 지방의 고대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적지 않게 실려 있다.
남송 사람들은 필기를 짓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한 번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들은 누구나 필기로 책을 쓴 것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송막기문》이 제일 잘 된 책이다.
남송 때의 다른 수많은 필기들은 모두 명대(明代)에 마오진(毛晋)이 교각(校刻)한 《진체비서(津逮祕书)》 속에 실려 있다. 서명에서 ‘진(津)’자는 ‘물길(水路)’을 가리키고, ‘체(逮)’자는 ‘이른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기타 송대 사람의 필기로는 《송인필기총간(宋人笔记丛刊)》이 있는데, 이미 상무인서관(商务印书馆)에서 출판되었다.
원대(元代)의 잡사
1) 《설부(说郛)》: 원대 사람의 잡사 가운데 이 책이 으뜸이다. ‘부(郛)’ 자는 ‘외성(外城)’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원대의 타오쥬청(陶九成)이 송조(宋朝)와 원조(元朝)의 수많은 책들 가운데 가려 뽑아 기록해서 펴낸 것이다. 원대의 책들은 연이은 전란으로 대량 소실되었기 때문에 《설부》는 매우 유용한 책이다.
이 속에는 캄보디아에 대해서 기록해 놓은 《진랍풍토기(眞腊风土记)》라는 책이 들어 있다. 작자인 저우다관(周达观)은 일찍이 캄보디아에서 오래 살았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캄보디아 인들도 기록해 놓지 않은 사실들이 많이 실려 있다. 현대의 캄보디아 인들은 이 책에 언급된 사원들을 실제 조사를 통하여 찾아낸 바 있다. 그래서 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중국의 사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원곡선(元曲选)》: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원대 사회의 풍습과 사회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명대(明代) 사람이 지었는데, 원곡은 낭만성뿐만 아니라 현실성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서상기(西厢记)》는 왕스푸(王实甫)의 대표작으로, 이것은 장성(张生)과 추이잉잉(崔莺莺)의 연애 고사를 다룬 희곡이다. 여기에서 작자는 청춘 남녀가 애정의 자유를 쟁취하고 봉건 예교의 속박을 깨뜨리는 투쟁 정신을 묘사하고 있다.
원의 잡극 중에는 수호 고사(水浒故事)를 제재로 한 것이 적어도 30여 종은 있는데, 《이규부형(李逵负荆)》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마즈위안(马致远)이 지은 《한궁추(汉宫秋)》는 왕자오쥔(王昭君)이 흉노(匈奴)에 시집간 고사를 서술한 것이다. 《두아원(窦娥冤)》은 다두(大都) 사람 관한칭(关汉卿)이 쓴 것이다.
그는 한인(汉人)이었던 까닭에 이 극본을 빌어 원대 사회의 암흑성을 묘사했다. 극중에서 두아(窦娥)는, “아문은 예부터 남쪽을 향해 열려 있되 원한 없는 사람이 없구나(衙门自古向南开 就中无个不冤哉)”라고 외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원의 통치자에 대한 항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곡선》은 잡사로 볼 수 있다.
3) 《수호전(水浒传)》: 원 말기에 스나이안(施耐庵)이 지었다. 쑹쟝(宋江)이라는 인물은 《송사(宋史)》<허우멍전(侯蒙传)> 속에 나타나 있다. 송 말 원 초(宋末元初)에 나온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遗事)》라는 책에도 쑹쟝의 고사가 실려 있다. 쑹쟝에 관한 고사는 남송 때부터 민간에서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원대에 이르러서는 쑹쟝을 주인공으로 한 구두전설(口头传说) 및 설서선생(说书先生)들의 평화(平话)와 희극의 고사가 민간에서 점점 더 많아졌다.
스나이안은 관리가 되기를 거절하고 대부분 원대에 이르러 발전되고 유전(流传)되었던 쑹쟝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수호전》을 썼다. 이 책은 잡사로 읽어도 된다. 이 책 속에서 ‘은자(银子)는 적고 표자(票子:지폐)는 많다’라는 화폐 상황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당시의 통화 팽창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책에는 시먼칭(西门庆)과 같은 토호(土豪) 열신(劣绅)들의 갖가지 악랄한 형상에 대한 묘사가 없으나 이 책에는 아주 많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