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만菩薩蠻 · 뿌연 평평한 숲 천에 싸인 듯한 운무平林漠漠煙如織/당唐 이백李白
平林漠漠煙如織 뿌연 평평한 숲 천에 싸인 듯한 운무
寒山一帶傷心碧 늦가을 산 일대는 슬프도록 푸르네
暝色入高樓 황혼빛 높은 누각으로 들어오는데
有人樓上愁 어떤 사람 누각에서 시름겨워하네
玉階空佇立 옥 계단에 공연히 오래 섰노라니
宿鳥歸飛急 둥지 찾는 새는 날개를 재촉하네
何處是歸程 어느 곳이 내가 돌아갈 길이런가
長亭連短亭 십 리 역정 오리 역정에 이어지네
제목의 보살만(菩薩蠻)은 사패(詞牌), 즉 사곡(詞曲)의 곡조 이름이다. 이 곡조는 격률이 몇 종류가 있는데 이백이 사용한 이 곡조가 대표적이다. 이 곡조는 우선 상하 양단으로 되어 있다.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각 단 후반 2구가 서로 율격이 같기 때문이다. 두 구씩 짝을 이루어 측, 평, 측, 평의 순서로 운자가 8개 달린다.
이 사패를 <보살만>이라 한 것은 얼핏 보기에도 불교와의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곡조는 당나라 현종 시대의 교방(敎坊)의 노래였다고 한다. 본래는 면전(緬甸, 미안마)의 여자 무희들로 이루어진 악단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 악단에서 춤에 맞추어 이 노래를 불렀는데 당 현종 개원, 천보 시기에 운남을 거쳐 장안의 교방으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이 곡조는 현재 사보(詞譜)에 재현되어 있으며 상당히 격렬하고 빠르며 처량하고 애원하는 정조가 있다고 한다.
이 시는 본래 지금의 호남성 상덕(常德)에 해당하는 정주(鼎州)의 창수역(滄水驛) 역루에 적혀 있었는데 언제 누가 지었는지 모르던 작품이었다. 북송 때 위태(魏泰)라는 사람이 장사(長沙)에 가서 증포(曾布)가 편찬한 《고풍집(古風集)》을 보고는 이 시가 이백(李白, 701~762)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내력은 송나라 항주 출신의 승려인 문형(文瑩)이 지은 《호산야록(湘山野錄)》에 나온다. 다만 중국에서는 후세에 전 시대 유명인의 이름을 빌리는 위작이 흔한 일이기 때문에 진위 여부를 더 연구해 볼 여지는 있다. 이백이 이 곡조로 사를 지었다면 당시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이 궁중에 들어가 현종과 양귀비가 요구하는 노래를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춤곡에 대한 조예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작품이 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평림(平林)은 평평한 숲이다. 이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펼쳐진 평원 지대에 누각이 높이 솟아 있는 것을 말한다. 그 숲에 저녁 운무가 잔뜩 끼어 마치 천으로 두른 것만 같다. 한산(寒山)은 늦가을의 차가운 산을 말하고 상심벽(傷心碧)은 마음이 슬퍼질 정도로 너무도 푸른 산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늦가을 산 일대가 운무에 가리고 저녁이 되어 더욱 푸르게 보이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황혼 무렵 저녁 어스름이 누각으로 밀려든다. 이때 수심에 찬 어떤 나그네는 한동안 멀리 바라만 보고 서 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려다 다시 또 오래 서 있다. 새들은 모두 보금자리를 찾아 서둘러 갈 길을 가건만 그는 갈 곳이 없는 것인가? 이 나그네는 언제 돌아갈지 알지 못하는 듯이 서 있다. 그의 앞에는 오리 지나 정자 하나, 십 리 지나 정자 하나가 서 있을 뿐.
고대에는 여행자들의 숙식이나 편의를 위해 5리마다 정자를 하나 누었는데 5리에 해당하는 곳에는 단정, 10리에 해당하는 곳에는 장정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누각은 보통 2층 이상으로 된 큰 건물을, 정자는 단층으로 된 작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은 본래 정자가 이 역정(驛亭)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간이 휴게소에 해당하니 지금의 시골 마을마다 있는 정자나 도시의 카페가 근본적으로는 이 기능을 수행하는 셈이다.
이 시는 고향을 떠난 여행자가 돌아갈 기약이 없는 가운데 시름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객지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의도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우리나라의 근대기에 유행한 타향살이를 위로하는 대중가요와 그 의미 면에서는 통하는 노래이니 그런 정서를 떠올리면 1,300년을 거슬러서 이 노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65일 한시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