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숲의 다리 가에 밤에 배를 정박하고楓橋夜泊/당唐 장계張繼
月落烏啼霜滿天 달 지고 까마귀 울고 서리 자욱한데
江楓漁火對愁眠 강가 단풍과 어화 보며 잠 못 이루네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밖의 한산사
夜半鍾聲到客船 한 밤중에 종소리 객선에 들려오네
이 시의 작가 장계(張繼,약715~약779)는 호북성 양양(襄陽) 사람으로 753년에 진사에 급제한 이래 당 현종과 대종 때 벼슬을 한 문인이지만 그다지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다. 장계는 오직 이 시로 천고에 이름을 떨쳤다. 이 시에 나오는 한산사도 당시에는 고소성 밖에 있는 허름한 시골의 작은 사찰에 불과했지만 이 시 때문에 명나라의 문징명(文徵明), 청나라의 유월(兪越) 등이 시비(詩碑)를 남기는 등, 많은 명사들이 찾아오고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날은 소주의 손꼽히는 명승지가 되었다. 한 편의 시로써 그 작가와 장소가 이처럼 이름난 경우도 드물다.
제목의 ‘풍교(楓橋)’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냥 단풍나무가 있는 곳에 놓인 다리를 말한다. 그 다리 이름은 본래 봉교(封橋)였다. 후대에 이 시 때문에 풍교로 이름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15년 전에 갔을 때 한산사 앞에는 풍교 옆에 강교(江橋)라는 다리가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를 보고 와서 2구의 ‘강풍(江楓)’을 강교와 풍교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여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이는 모두 이 시 때문에 후대의 호사가들이 만든 것인데 거꾸로 이 다리를 근거로 시 해석에 소급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월(兪越) 같은 학자는 ‘강풍어화(江楓漁火)’가 본래 ‘강촌어화(江村漁火)’였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된 판본도 다수 있다. 내가 볼 때도 강촌어화가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 물가에 정박한 사람이 물에 떠 있는 불빛을 보고 있어야지 뒤쪽의 단풍나무도 함께 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무슨 큰 강이 있고 높은 곳에 한산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여기는 그리 넓지 않은 운하가 지나가는 곳이다. 그리고 한산사는 거의 그 물 옆의 평지에 있다. 그러므로 장계가 이 시를 썼을 무렵에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와서 강가 단풍나무 숲에 있는 다리 가에 정박하고 밤에 이런 저런생각으로 잠을 못 이루다가 조그만 한산사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듣는 광경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상만천(霜滿天)’을 ‘상만지(霜滿地)’로 써야 자연스럽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도 적절하지 않은 주장이다. 배에 정박해 졸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땅을 보겠는가? 이는 소동파가 백로는 횡강(橫江)이라고 한 것처럼 한밤중 서리가 내리는 것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강풍어화대수면(江楓漁火對愁眠)’을 ‘강가의 단풍나무와 고기잡이 불빛이 시름겨워 졸고 있는 나를 대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분들이 있다. 이는 시를 잘 모르는 것이다. 강풍어화(江楓漁火)를 강조해 대(對)자와 도치한 것뿐이다. 시인이 강풍과 어화를 마주하여 잠을 청하지만 시름으로 잠이 잘 오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야반종성(夜半鍾聲)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으나 이미 해소된 지 오래다. 당시 소주에는 한 밤중에 종을 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첫 구에서 달이 진다고 한 것을 보면 상현달로 이해 되며 오늘날로 치면 자정 즈음한 한 밤의 밤 풍광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당시배항방》에 12위에 올라 있다. 이 시가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애송된 것일까? 이 시를 외어보면 시의 내용이 ‘수면(愁眠)’이란 말로 요약된다. 잠을 자려 하나 근심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것을 말한다. 시인이 무슨 일로 근심한다고 말하지 않아 근심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시의 앞 두 구는 시어도 번쇄하여 근심을 하고 있는 시인의 의식을 닮아 있다. 반면 후반 2구는 시가 매우 간결하다. 그리고 종소리는 무언지 문제가 해결되는 느낌을 안겨준다. 이런 내용은 다소 모호하지만 이런 모호성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고 저마다의 생각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리고 시가 춘추 시대 오나라로 거슬러 가는 유서 깊은 고소성(姑蘇城)과 수향(水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주는 원말 명초에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모여들어 크게 번성하였다. 농업 생산력과 양잠 등으로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부유했으며 과거 급제자 역시 전국에서 최고였다. 이런 경제적 번영 속에서 소주는 고답적인 문인 문화가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 시의 아련하고 객수 어린 시정은 소주의 분위기에 잘 녹아들어 크게 애송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일본에도 널리 퍼졌는데 시 후반에 보이는 다소 선적인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국에서도 이 시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소주의 한산사에는 중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과 한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에 내가 갔을 때 관광지 조성을 위해 단풍나무를 강가에 많이 심었는데 지금쯤 숲을 이루어 꽤 운치가 날 것도 같다. 다시 한 번 가 보아야 할 명시의 명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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