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山行/당唐 두목杜牧
遠上寒山石徑斜 멀리 가을 산 돌길을 돌아 오르니
白雲生處有人家 흰 구름 이는 곳에 마을이 보이네
停車坐愛楓林晚 늦가을 단풍 아름다워 수레 멈추니
霜葉紅於二月花 붉게 물든 단풍 2월의 꽃보다 붉네
가을의 금강산을 풍악산(楓嶽山)이라 한다. 지금쯤 금강산에 단풍이 한창일 것이다. 금강산은 그 이름 그대로 금강과 같이 단단한 화강암이 많아 가을 단풍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예전 문인들은 특히 가을 금강산 유람을 좋아하여 남긴 기행문이나 시가 많다. 오죽했으면 정조(正祖)가 김홍도에게 금강산 그림을 그려 바치라고 했을까.
이 시는 바로 이런 계절에 딱 맞는 시이다. 본래 중국 문학의 전통에서 보자면 가을은 비추(悲秋)라 해서 슬픔과 결부시키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두목의 이 시는 그런 전통과는 달리 매우 호매(豪邁)하고 낙관적인 정조를 띠고 있다. 특히 마지막 2구는 천고의 절창이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구절이다. 이 시가 <<당시배항방>>에 69위에 오른 것은 다소 의아할 정도로 낮다.
이 시는 몇 가지 논의할 점이 있다. 우선 간단한 것부터 보면, 제2구의 ‘생(生)’ 자가 ‘심(深)’자로 된 판본이 있다. 시의 전반적인 정조로 보거나 높은 산의 기후 변화로 보거나 ‘생’ 자가 훨씬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제3구의 좌(坐) 자는 다소 긴 논의가 필요하다. 통상 한국의 교과서와 한시 선집에는 이 부분을 ‘수레를 멈추고 앉아’로 풀이하고 있다. 즉 글자 그대로 ‘앉다’라는 동사로 본 것이다. 《오칠당음》에는 이를 ‘앉아서 사랑하다(坐而愛之)’라고 하여 ‘앉다’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교학사 사전에는 이를 ‘저절로’의 의미로 풀고 있다. ‘즉시’라는 의미가 있는 ‘입(立)’과 비슷한 의미로 본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출간된 허사 사전에는 모두 이 용례와 아울러 여러 문헌 근거를 제시하고 이를 ‘~ 때문에’라는 부사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죄좌(罪坐)되다.’라고 할 때 쓰이는 ‘좌’처럼 뒤에 그 원인이 되는 목적어를 동반하는 문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시 내용상으로 보면 ‘수레를 멈추고 앉아’라고 보면 한시 전구의 전환이 별 의미가 없게 되지만 ‘늦가을 단풍이 너무 사랑스러워’ 수레를 멈춘다고 하면 시상의 전환이 급격하게 일어난다.
이 시를 그린 그림을 <풍림정거(楓林停車)>라고 한다. 그림 안에 이런 화제를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풍림정거’라는 조어를 보면 ‘좌’를 ‘앉다’라고 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림을 보면, 앉아서 감상하는 주인공도 있지만 어디에 기대어 넋을 놓고 단풍을 보고 있거나 수레 옆에 서 있는 사람도 있다.
수레를 타고 가는 그림 중에 소옹을 그린 <요부소거(堯夫小車)> 그림과 두목의 고사를 그린 귤만거(橘滿車)가 있다. 소옹이 꽃을 좋아하여 사마광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은 모습을 주제로 하였기에 달리 <화외소거(花外小車)>라고도 하는데 이는 꽃이 피는 봄을 배경으로 하고, 두목이 풍채가 좋아 양주의 거리를 수레를 타고 가면 기녀들이 귤을 던져 수레에 가득했다는 고사는 도회가 배경이어서 <풍림정거>와는 구분되나 민화로 넘어가면 매우 모호하게 그려진 것들도 나온다. <풍림정거>가 이 2종류의 그림과 뚜렷이 차이가 나는 점은 대개 수레에서 내려 가을 산의 풍경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치로 보면 수레를 멈추고 앉는다는 말이 이상하기는 하다. 수레를 멈추면 보통 일어나게 되지 않는가? 이런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나는 이 구절이 너무도 아름답게 단풍이 든 만추의 장관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음껏 구경하려고 자신도 모르게 수레를 멈추고 내려서 휴식을 취했다는 의미로 본다.
이 구절의 마지막 글자 ‘만(晩)’을 늦가을이 아닌 저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볼 때는, 시상이 한산(寒山)에서 풍림만(楓林晩)을 거쳐 상엽(霜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늦가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장사(長沙)의 악록서원(岳麓書院)에 가면 애만정(愛晩亭)이 있다. 이 시를 염두에 두고 지어진 정자이다. 여기 만(晩) 자는 ‘풍림만’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정자를 지은 사람 역시 만추로 이해한 것을 알 수 있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도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처럼 2월 꽃이 아름다운 것을 전제로 생겨난 말이다. 서시나 양귀비보다 더 곱다거나 항주 서호보다 아름답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전에 누가 중국 황산을 다녀온 사람이 금강산보다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금강산이 정말 아름답긴 아름다운가보다 이런 생각을 했다.
대개의 역대 평자들은 이 시를 서경시로 보고 있다. 다만 청나라 유방언(劉邦彥)은 ‘영락 중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낸 데에 묘함이 있다.’라는 말을 하여 눈에 띈다. 즉 사람이 영락해 있을 때나 노경의 아름다움이 젊은 시절 못지않다는 의미로 읽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두목의 시풍이 감개가 있고 질탕한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견해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나 늙음이 찾아와 무언가 무기력과 좌절감, 그리고 비애감을 느끼는 독자들은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우의(寓意)를 덤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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