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빠져들기 어려운 함정愈來愈不可能掉入的陷阱
그래서 우리는 어째서 바흐로무친의 깨달음이 “뱀에게 물린 것 같았”는지 알게 된다. 그 뱀은 동시에 최초의 뱀, 《성경·창세기》에 나오는 그 뱀이었다. 정확히 말해 그는 뱀에게 물린 것이 아니라, 뱀에게 유혹당해 사람의 눈을 맑게 해주는 금단의 과실을 깨문 것이었으며 부와 권력의 에덴동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체호프 본인은 평생 가난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농노였고 아버지는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파산해 빚쟁이를 피해 다닌 소상인이었다. 체호프는 16세에 모스크바로 가서 2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의대 공부였으며 다른 하나는 돈을 벌어 집에 부쳐서 가족을 부양하고 빚을 갚는 것이었다. 그 후, 40세가 돼서야 서서히 가난에서 벗어나게 됐지만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드라마에 나오는 착한 인물과 흡사했다. 만약 드라마가 30부작이면 그런 인물은 앞의 29부 내내 고생과 억울한 일만 겪다가 마지막 30부에서도 겨우 5분을 남기고 행복을 얻는다. 시청자들은 행복이 오자마자 드라마가 끝나는 것에 분노한다. 이러면 다들 나쁜 인물이 되고 싶어 하지, 왜 좋은 인물이 되려 하겠는가. 체호프는 겨우 44세에 고질인 폐병으로 죽었다. 그 병은 그 추운 나라에서 일종의 가난병이었다.
그런데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처럼 밝고 건강한 사람은 실로 보기 드물었고(그래서 체호프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해와 자기연민의 치유자였다.) 어쩌면 그를 대체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인 것일까? 체호프가 진지하고 겸손하게 써내려간 글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따스하고 즐거운 그 웃음소리는 음습하고 더러운 구석에 산뜻하게 피어난 꽃과도 같다. 그는 프로이트의 비현실적인 이론을 파괴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많은(한 가지, 한 종류에 국한되지 않은) 상처들은 그의 소설 창작의 바닥나지 않는 견실한 재료일 뿐이었으며 그것을 이용해 그는 남을 이해하고 동정했다. 그리고 귀족 출신 작가들은 보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러시아의 거대한 하층민의 세계를 포착하여 “행복한 시로 변화시켰다.” 보르헤스가 말한 문학 창작처럼 말이다. 단지 유일한 치명적인 상처가 그의 폐에 있어서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체호프는 줄곧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였다. 혹시 ‘소설가’ 뒤에 ‘들’을 붙인다 해도 5명을 넘지 않는다(타이완의 소설가 장다춘張大春은 3명이라고 말했으며 그 역시 체호프를 대단히 좋아한다). 나는 그의 소설에 관해 자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되풀이해 읽어왔다. 마치 재미있고 내 정신의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삶의 벗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미 그의 수명을 훌쩍 넘어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이 되었지만 갈수록 그 젊은이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격히 말하면, 체호프는 벤야민보다 훨씬 ‘불행’했다. 벤야민의 불행은 어느 정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었지만(성격과 행동 때문에) 그의 불행은 삶 자체의 불공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체호프가자신의 불행에 휘둘리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했던 적이 있어(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나의 탐욕을 당연시한 것과 달랐고, 내가 ‘상처’ 받은 적이 있어 억지를 부리고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한 것과도 달랐다(40년도 넘게 그랬다). 체호프는 심지어 그런 사람을 업신여기지도 않았다(부끄럽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바흐로무친이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발휘할 기회를 놓친 자신의 재능뿐만이 아니었다. 그 깨달음이 가져다준 백일몽에서 천천히 깨어나 현실의 삶으로 돌아온 뒤, 사실 우리 스스로 그리 깨닫기 어렵지 않은 더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결국 바흐로무친은 유혹을 떨쳐냈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계속 자신의 편안한 5등 문관의 삶을 살았다. 1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역시 누가 그런 아름다운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볼 일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젊은 나이에 자신에게 소설가로서의 비범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몸부림쳐 빠져나와 5등 문관 같은 새로운 인생을 향해 힘껏 나아간다. 그들은 젊은 날의 그릇된 깨달음으로 인해 뒤처진 것을 만회하려고 더 굳세고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나아가 부와 권력의 소유자는 대부분 자녀를 키워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데 열성적이다(다행히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자손손 영원히 물려주려 하는 것은 부와 권력의 ‘세습화’ 경향이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추동력이다. 그러나 내 주변의 한가락 하는 작가 친구들을 둘러보면 다들 될 수 있으면 자식들은 자신의 일을 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다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생 해온 일을 회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 착잡함을 이루 다 설명하기 힘들다.
사람들의 행위가 이토록 일치하는 것은 아마도 개개인의 선택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심지어 어느 특수한 사회에만 해당되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히 더 항구적이고 더 보편적인 이치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