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술은 새 부대에:《장자 100문장》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중국 도서는 예나 지금이나 역시 고전이다. 십 년 전만 해도 고전과 고대사 관련 중국 해설서와 처세서가 서점에서 크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사이 독서의 호흡과 트렌드가 달라지면서 그런 중국 책들은 고리타분하거나 분량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외면을 당하고 있다. 나도 매년 중국에 가서 서점에 들르면 여전히 고전 관련 서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본체만체한 지 이미 오래다. 한국어로 번역하고 나면 대부분 원고지 2, 3천 매에 달하고 내용에서도 혜안과 통찰이 엿보이는 예가 거의 없어 아예 손댈 생각조차 않는 것이다.

하지만 2018년 베이징국제도서전 역림(譯林)출판사 부스에서 발견한 《노자 100문장》과 《장자 100문장》은 달랐다. 판형은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고 페이지 수도 300쪽이 안 됐으며 무엇보다 꼭지별 글밥이 많아봤자 원고지 7, 8매 전후여서 독서 호흡이 짧은 사람도 쉽게 읽을 듯했다. 그리고 하얀 양장 표지도 눈에 띄었다. 다른 고전 관련 도서들과 다르게 말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이 책에 관심이 있으세요?”

구면인 역림출판사 저작권 담당자가 다가와 상냥하게 물었다.

“이 책, 굉장히 잘 만들었네요. 나온 지 얼마 안 됐나 본데요?”

“네, 두 달 전에 나왔어요. 젊은 독자들을 겨냥해 특별히 기획한 책이에요.”

“젊은 독자들을 겨냥했다고요?”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답했다.

“네. 요즘 젊은이들은 어렵다고 고전을 안 읽으려 하니까요. 가독성을 높이려고 책을 작게 만들고 내용도 가벼운 에세이풍이에요.”

‘그러면야 나는 고맙죠.’

그런데 책날개를 펴보니 《노자 100문장》, 《장자 100문장》 외에 다른 고전도 출간 예정인 듯했다. 눈치를 채고 담당자가 말했다.

“《논어》, 《맹자》, 《시경과 이소》도 나올 거예요. 하지만 그것들은 ‘100문장’ 형태는 아니에요. 그냥 ‘선편’(選編)이에요.”

‘선편’이라면 일반적인 해설집하고 크게 다르지 않을 듯했다. 《시경과 이소》는 어차피 한국에 독자가 없으니 그렇다 쳐도 《논어》와 《맹자》는 같은 ‘100문장’ 형태가 아닌 게 많이 아쉬웠다. 《논어》, 《맹자》, 《노자》, 《장자》를 한꺼번에 ‘중국 고전 100문장 시리즈’로 수입해 출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귀국 후 M출판사에 연락해 《노자 100문장》과 《장자 100문장》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봤다. 며칠 뒤, M출판사는 간단히 시장 조사를 마치고 내게 답변을 주었다.

“《노자》는 너무 심오해서인지 서점에서 잘 안 팔리더라고요. 《장자 100문장》만 기획해주세요.”

나는 신중하게 기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우선 《장자 100문장》이 겨우 원고지 600~700매에 불과해서 독서의 부담이 적다는 것을 강조했고 저자가 중국의 명문 푸단대학교 중문과 교수여서 기본적으로 내용도 충실하다고 적었다. 하지만 관건은 역시 샘플 번역이었다. 짧은 꼭지 하나를 골라 깐깐하게 번역했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
물이 많이 고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한 잔의 물을 움푹 파인 곳에 부으면 풀잎을 놓아 배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잔을 놓으면 바닥에 붙어버린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于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 <소요유逍遙遊>
주석:
坳堂: 움푹 패인 곳.
膠: 바닥에 붙다.
해설:
많은 축적이 있어야만 붕새가 날개를 펴고 구만 리 위로 솟아오르듯 비약할 수 있다. 인생의 성취는 대부분 수많은 노력 내지는 시련이 있은 뒤에 얻어진다. 길에서 금덩이를 줍는 것 같은 우연한 행운조차 적어도 우리가 집 밖을 나가야만 만날 수 있다.
세상일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오게 마련이다. 붕새가 머나먼 창공을 나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유의 상징이다. 하지만 사실 바람에 의지해 날아가야 하므로 역시 한계나 부자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제해》에서는 붕새가 “유월의 큰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고 했다. 붕새는 유월에 큰 바람이 불어야만 그것에 의지해 날아갈 수 있으니 이것은 자유로운 것일까, 부자유한 것일까? 칠월칠석에 오작교에서 만나는 견우와 직녀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들의 상봉도 일 년에 한 번이니까.

이 정도 내용과 분량이면 일반 독자도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기획자 코멘트는 아래와 같이 적었다.

“《장자》는 중국 철학을 대표하는 동시에 풍부한 우화로 문학성까지 높은 명저이지만 내편, 외편, 잡편으로 이뤄진 방대한 분량과 심오한 내용으로 인해 우리 독자들의 손길이 닿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따라서 대중 독자들을 위해 핵심적인 문단을 뽑고 갈무리해 참신한 해설을 첨가한 ‘명구집’이 필요한 시점인데 마침 이 《장자 100문장》이 적합한 책이라고 본다. 게다가 해설도 장광설을 피해 딱 한두 페이지 정도로 간명하고 현대적인 관점도 가미하고 있어 안성맞춤이다. 이 《장자 100문장》을 내서 독자 반응이 좋으면 《노자 100문장》도 내서 소프트한 중국 고전 시리즈로 키워나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논어》와 《맹자》도 잘 찾아보면 다른 중국 출판사의 것으로 비슷한 컨셉트의 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샘플 번역이 마음에 들었는지 C출판사는 선뜻 《장자 100문장》의 출판을 결정했다. 한물간 중국 고전도 새로운 형식으로 꾸며지면 출판사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한 마디로 헌 술도 새 부대에 담기면 통할 수 있다. 며칠 뒤 나는 시리즈에 넣을 만한 《논어 100문장》도 다른 중국 출판사의 출간 리스트에서 찾아냈다. 하지만 그 사실을 C출판사에 통보해줄 기회는 없었다. 그 사이, C출판사의 태도에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저작권 거래만 성사시켜주고 깨끗이 손을 뗐다. 당연히 번역도 맡지 않았다. 느낌이 안 좋은 파트너와는 빨리 갈라서는 편이 좋다. 안 그러면 두고두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