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학과 고고학의 결합 2

당대 이전에는 귀족만이 묘 안에 명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당대에 이르러서는 귀족이 아니더라도 사후(死后)에 모두 명을 쓸 수 있었다. 보통 묘에는 벽돌을 명의 재료로 썼고 위에는 주사(朱沙)로 글씨를 썼다. 한 궁녀는 죽은 후 명을 쓰려 했으나 사적을 알지 못하여 이렇게 썼다.

×씨(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氏(要有个姓) 但不知何许人也.)

허난의 뤄양 북쪽에 있는 베이망산(北邙山)은 여러 대에 걸쳐 장지(葬地)로 쓰였으므로 고묘가 많고 출토된 명도 많다. 이것들은 두 사람에 의해 힘들게 수집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민국(民国) 초기에는 군벌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살아 있었던 장팡(张钫)이라는 사람으로 4000여 개의 명을 수집했다. 다른 한 사람은 국민당의 원로인 위유런(于右任)으로, 그가 수집한 것은 2000개가 채 못 된다.

이들 명(铭)은 기증되어 일부는 산시박물관(陕西博物馆)에, 일부는 허난박물원(河南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명의 몇몇 문자를 통하여 24사의 잘못된 부분을 교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모대(某代) 모대관(某代官)의 생몰 년대 등을 바로잡을 수 있다.

8) 석각(石刻), 화도(畵图), 문자(文字) : 한대의 묘 가운데 조각된 그림이 있는 샤오탕산(孝堂山) 우량츠(武梁祠)가 발견되었다. 그곳 묘 벽에는 고대의 충효 사상과 의리에 관한 이야기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문자를 넣었다. 한대 이전의 묘에는 그림이 없었다.

그림으로는 이미 쑤저우(苏州)에서 발견된 것으로 송대에 조각된 천문도(天文图)가 있다. 또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지리도(地理图)도 있다. 이것 역시 송대에 조각된 것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우적도(禹迹图)》로서 우의 행적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이도(华夷图)》로 중국 및 사방의 이국(夷国)을 그려 놓은 것이다.

지도로는 중국 진대(晋代)부터 이미 등고선(等高缐)이 나뉘어져 있는 훌륭한 지도가 있었다. 진대의 페이슈(裵秀), 당대의 쟈단(贾耽)은 아주 훌륭한 지도를 그렸다. 고대의 지도에는 격자(格子)를 썼는데, 격자 하나는 백 리(里)를 나타낸다.

秦石鼓文

송대의 석각(石刻) 천문도와 지리도는 세계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제작된 시기도 이른 것들이다. 또 《평강성방도(平江城坊图)》라는 석각 도시도(都市图)가 발견되었다. 여기에서의 ‘평강’은 쑤저우(苏州)를 가리킨다. 이 석각도의 도로와 수로는 모두 돌 위에 그려서 조각한 것으로 역시 송대의 것이다.

석각 문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 고대의 석각 문자 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유가의 고경적(古经籍), 석가(释家)의 경전, 도가(道家)의 경전이 있다.

도가의 고경(古经) 가운데에는 5000자(字)로서 그 자수가 가장 적은 《노자(老子)》가 육각이나 팔각의 돌기둥인 당(幢) 위에 새겨져 있다.

유가의 고적으로는 13경(十三经)이 새겨졌다. 한대에는 일곱 권의 경전을 돌 위에 새겼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차이융(蔡邕)이 쓴 것이라고 한다. 위(魏)대에는 두 경전, 즉 《상서》와 《춘추(春秋)》가 조각되었다. 이를 ‘위삼체석비(魏三体石碑)’라고 한다. 왜 삼체라 부르는가? 그것은 여기에 세 가지 자체, 즉 고문자(古文字)․소전(小篆)․예서(隸书)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두 경전을 석비에 새긴 것이 가장 많으며 4800자를 새겨 넣었다.

당대(唐代)에는 13경을 모두 새겼는데 이것들은 현재 시안석비림(西安石碑林)에 보존되어 있다. 이때에는 석가의 경전이 가장 많이 조각되었다.

베이징 팡산(北京房山)에는 당에서 명대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조각한 석각경문이 있다. 팡산의 불경은 모두 산 속 동굴과 옛 탑 속에 있기 때문에 지금은 보거나 파낼 수가 없다.

熹平石经残片 사진 书法入门号

고대에 새겨놓은 불경은 몇 만 개에 달하는지 알 수 없다. 타이산(泰山)에 있는 《금강경(金刚经)》 석각은 한 글자가 작은 탁자 만한 크기다. 허베이성 츠현(磁县) 샹탕사(响堂寺)에 있는 석각 불경 또한 거대하다. 상술한 불경들은 대부분 산 위에 새겨져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고 석각 문자, 고 석각화, 고 석각도는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9) 서화(书畵) : 먼저 고인(古人)이 쓴 글씨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중국 고대에 쓴 글자가 두 파, 즉 남파(南派: 당(唐))와 북파(北派: 위(魏))로 나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신쟝(新疆)에서 삼국 시대 진대(晋代)의 글자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종이에 쓴 진귀한 문물(文物)이지만 이미 국외로 흘러 나갔다.

이른바 남파는 첩(帖)이고 북파는 비(碑)이다. 첩이라는 것은 옛 사람들이 쓴 편지를 말한다. 위나라 때의 비문은 묘 이름에 있는 글자를 참고할 수도 있다.

남파의 고첩(古帖)으로는, 송대에 많은 첩을 다시 모아 《순화각첩(淳化阁帖)》이라 하여 돌에 새기고 그것을 다시 탁본한 것이 있으나,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청 건륭 때에는 《삼희당법첩(三希堂法帖)》을 새겼다. 이 석각 고첩은 현재 베이징 베이하이 공원(北海公园)의 열고루(阅古楼)에 있다. ‘삼희당’은 건륭 황제의 서재 이름인데, 삼희란 세 가지 희귀한 보물로, 모두 왕시즈(王羲之) 부자 및 형제가 쓴 글씨다. 왕시즈는 수대에 걸쳐 이름을 떨친 사람이며, 당의 리스민(李世民)과 송 황제가 그의 편지를 수집했다는 사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모방하여 씌어진 것으로 《만세통천첩(万岁通天帖)》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만세’는 우쩌톈(武则天)을 가리킨다. 이 첩은 당대의 것이나 줄곧 새겨지지는 않았고 당에서 명으로, 또한 청으로 전해졌다. 마지막에는 푸이(溥仪)가 동북 지방으로 가지고 갔으며 지금은 선양(沈阳)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첩도 왕시즈의 글씨에서 나온 것이다.

옛 사람이 쓴 진필(眞笔)로는 한간(汉简)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진대(晋代)의 것은 신쟝에서 발견된 종이 위에 쓴 고자(古字)가 있다. 그밖에 구궁박물원(故宫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는, 서진(西晋) 때 루지(陸机)가 쓴 《평복첩(平復帖)》에는 ‘평복’이란 두 글자가 씌어 있다.

그 외에 고인들이 쓴 많은 작품들은 쟝졔스가 타이완으로 가지고 갔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대 고인이 쓴 진필 중에는 송대 사람이 쓴 것이 가장 많이 전해진다.

다음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고인의 그림 중 석각화 외에 가장 오래 된 것은 수(隋) 때 잔쯔쳰(展子虔)이 그린 《유춘도(游春图)》다. 이것은 잔쯔쳰의 수적(手迹)으로 현재까지 이미 천 이백 년이 되었다.

당대(唐代) 사람들의 작품은 종이에 그린 것이 적고, 대부분 벽화(壁畵)가 특히 많다. 이렇듯 전해 내려오는 당화(唐畵) 역시 적다. 그 중에는 병풍에 그린 것도 있는데 이를 병화(屛畵)라고 한다. 이러한 병화는 사직품(丝织品)으로 훼손되기 쉬우므로 당대의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적다.

송대 사람의 그림은 전해 오는 것이 약간 더 많은데, 그것은 송 휘종(徽宗)이 그림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화(宣和; 1119~1125) 연간에 ‘선화화원(宣和畵苑)’을 세워 적잖은 화가를 불러모아 궁 안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래서 그려진 것도 많고, 남아 있는 것도 많은 것이다. 송대의 그림은 대부분이 공필화(工笔畵), 즉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장인화(匠人畵)’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의 공필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북송 사람 장쩌돤(张择端)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图)》다. 이 그림은 북송 시대의 도성인 볜량성(汴梁城 : 开封) 안팎의 풍경과 운하 주변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송대의 경성(京城)은 수륙(水陆)의 요충지로 동경개봉부(东京开封府)라고도 불렀다. 이때 볜허(汴河)․차이허(蔡河)․우장허(五丈河)․진수이허(金水河) 등의 수도(水道)는 경제적으로 번영된 지역인 남방과 산둥․시안의 각 지역을 연결해 주었다. 길거리는 매우 번화했고 몇몇 큰 거리는 하도(河道) 연변에 형성되어 있었다.

《청명상하도》는 길이가 긴 화권(畵卷)으로 교외와 성 안, 볜허 양안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는 밭․촌사(村舍)․주점(酒店)이 있고 강에는 배와 배를 매는 역부(役夫)가 있으며 행인과 노새의 왕래가 빈번한 것이 나타나 있다. 권상(卷上)의 ‘홍교(虹桥)’ 위아래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고 노상 음식점․칼 노점․잡화점․찻집․술집 등이 있다. 그림에 그려진 사람은 수백 명으로 꽃을 사는 사람, 칼 사는 사람, 활 사는 사람, 점치는 사람 등 그 부류가 여러 가지다. 길 거리의 사람 중에는 짧은 옷을 입은 노동자, 말을 달리는 관원, 가마를 탄 궁녀도 있다.

이를 통하여 송대의 사회 풍속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대체로 송대 사회의 풍속을 표현해내고 있는데, 이렇듯 송화는 풍속을 표현한 것이 많다. 이 화권의 길이는 50여 미터에 달하며, 북송 때의 풍속화이므로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의 가치 또한 높다.

清明上河图 일부

10) 직금자수(织锦刺绣): 옛 사람들의 직금자수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송대의 직금(织锦)과 명대의 자수(刺绣)로서, 이것들은 역사를 고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수는 ‘고수(顾绣)’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명대 상하이에 살던 구씨(顾氏; 露香园) 부녀(父女)가 자수에 능하여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생겼다. 이것은 현재 구궁박물원에 보존되어 있다.

11) 고대의 당안(档案): 고대의 당안이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단지 명대와 청대의 당안, 즉 명․청 내각고(内阁库)에 있던 당안만 남아 있을 뿐인데 모두 수십 만 건(件)에 이른다.

청조 말년, 통치자가 모든 당안을 정리하려 했을 때,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없애 버리자고 주장했으나, 푸이(溥仪)의 스승인 뤄전위(羅振玉)가 극력 주장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것은 마(麻)로 만든 주머니 8000개에 넣어져 고궁 오문루동(午门楼洞)에 보존되었다. 그 후 또 몇몇 사람들이 당안을 폐지(废纸)로 만들어 종이 공장에 팔아 버렸다. 이 일이 뤄전위에게 알려지자 그는 2만 냥의 은으로 그것을 사들였다. 그리고 민국 때에는 당시 중앙연구원에서 그것을 샀다. 현재 일부분은 타이완에 있지만 대부분은 시산(西山) 온천(温泉)의 당안국(档案局)에 보존되어 있다.

총괄하자면, 우리는 역사를 연구할 때 사료학과 고고학을 결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각종 고물․사료를 하나하나 고증하려면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가 반드시 협조해야 한다. 고옥(古玉)․고절(古节)․고도(古陶)․고비․고명․고석각․고서화․당안 모두에 더욱 많은 전문인, 전문학자가 필요하며, 고고(考古)에만 그치지 말고 역사학 연구와 긴밀히 결합하여야 한다. 이로써 역사 연구는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진보하고 발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