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연원과 작자
《서유기》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당나라 초기의 고승 진현장(陳玄奘, 600~664)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면서 겪은 갖가지 경험을 변형한 것이다.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3년(629)에, 당시 스물여섯 살의 진현장은 국가의 금지령을 어기고 국경을 벗어나, 오늘날 실크 로드라고 부르는 ‘하서회랑河西回廊’을 통해 서역西域과 인도印度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십칠 년에 걸쳐 쉰 개가 넘는 나라들을 여행하며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657부의 경전을 구해 돌아왔다. 현장법사의 이 경이로운 여행은 《대자은삼장법사전大慈恩三藏法師傳》 10권과 각종 전기들, 그리고 진현장 자신이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에 들어 있다. 그러나 소설 《서유기》의 이야기는 진현장의 모험에 관한 각종 민간 전설에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가미하여 변형한 것으로, 삼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왔다는 기본적인 틀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거의 허구적 상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소설과 유사한 형태로 각색된 삼장법사의 이야기 가운데 지금까지 문헌으로 확인 가능한 최초의 것은 남송南宋 때에 이루어진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이다. 청중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문적인 ‘이야기꾼’들의 대본과 직접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책에는 훗날 손오공과 사오정이라는 등장인물의 모태가 되는 후행자猴行者와 심사신深沙神이 삼장법사를 따라다니며 모시는 배역으로 등장한다. 이밖에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때에도 삼장법사의 ‘취경’을 소재로 한 여러 가지 희곡들이 상당히 성행했으며, 특히 원나라 때에는 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소설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조선에서 중국어 교재로 편찬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 소개된 《서유기》 이야기의 일부는 이 무렵 중국에서 이미 현재와 같은 이야기 구조가 상당히 비슷하게 갖춰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서유기》는 대개 명明나라 때의 오승은吾承恩(1500?~1582?: 자는 여충汝忠, 호는 사양산인射陽山人)이 기존에 축적된 민간 설화와 이야기 문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일부 판본에 작자로 기록된 원元나라 때의 도사道士 장춘진인長春眞人 즉, 구처기丘處機를 원작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구처기가 원나라 태조太祖의 초빙을 받고 설산雪山과 사막을 비롯한 서역의 여러 오지를 만 리도 넘게 여행했다는 역사 기록이 그 증거라고 내세운다. 그러나 《서유기》는 다소 과장된 여행기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치밀하게 구상된 허구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비록 작자의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그것이 순수하게 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도 확인할 수 없지만, 그것은 결국 역사 기록이 아니라 문학 작품인 것이다.
어쨌든 명나라 때에는 이른바 번본繁本을 대표하는 ‘이탁오비평본李卓吾批評本’ 《서유기》 100회—실제로 이 책의 비평과 개작에 관여한 인물은 이지李贄(1527~1602)의 문도門徒로 알려진 섭주葉晝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와 주정신朱鼎臣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당삼장서유석액전唐三藏西遊釋厄傳》 10권이 간행됨으로써 이 작품은 불후의 고전으로 완성되었다. 특히 전자는 청淸나라 때에 간행된 다양한 축약본인 ‘간본簡本’들의 토대가 됨으로써 명실 공히 《서유기》의 대표 판본이 되었는데,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이 판본이 이제 민간 설화 특유의 조잡함 혹은 소박함을 많이 벗어던지고 ‘문인화文人化’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작품 전체에서 기본적으로 삼장법사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다른 판본에 비해, ‘이탁오비평본’은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함을 지향하고 신선 세계의 초월자들이나 삼장법사에 대해 반항하거나 조롱을 서슴지 않는 손오공의 존재를 부각시킨 점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에 대한 민중의 반발 심리를 문학적으로 통쾌하게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논자에 따라서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통적인 유학을 신봉한 선비였던 것으로 보이는 오승은이 이 작품의 최종 작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작품의 창작 배경
16~17세기 명나라 무렵은 중국에서 강남을 중심으로 한 도시경제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시기이다. 화물 운송 통로로서 양쯔 강과 운하라는 지리적 이점과 황도皇都의 남하南下라는 정치적 요인의 상승작용으로 인해 이미 남송南宋 때부터 각종 수공업과 유통업이 발전하면서 규모가 확장되어 온 남경南京과 소주蘇州, 항주杭州, 양주揚州, 무석無錫을 비롯하여, 경덕진敬德鎭이라는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를 끼고 오래 전부터 해운업의 중심지로 발전해온 영파寧波 등이 이러한 도시경제의 번성을 주도했다. 이처럼 도시에서 인구의 밀집과 소비 및 유통 경제의 활성화, 출판업의 발전 등의 특별한 변화가 생기면서부터 이른바 ‘시민市民’들의 여가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문화와 오락 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소설과 희곡 같은 문예의 번성도 그런 여가생활의 수요 가운데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다만 중국 고유의 한자와 한문이 지닌 원천적인 난해성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독서 능력을 전제로 한 소설은 여전히 이야기꾼의 공연이 차지하던 인기를 넘어서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통적으로 소설을 천박한 것으로 취급하던 문인 사대부들의 완고한 관념이 비록 그 정도가 점차 약해지는 추세를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무렵 소설 창작에 관여하게 된 지식인들은 상당히 특별한 존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중에는 어려운 경서와 역사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일반인들에게 성인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여 ‘교화敎化’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일종의 계몽적 사상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중이 친숙하게 여기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과 역사의 교훈을 쉽게 풀어주거나, 부패와 타성에 물든 사대부 및 관료 사회의 병폐를 고발하거나 풍자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계몽적 혹은 개혁적 성향을 가진 적극적인 지식인들의 수는 여전히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민간에서 소설 작품을 만들어내고 유통시킨 데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사실 출판업자나 그와 관련된 편집자들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소설이라는 것이 아직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문예의 한 분야로 완전하게 정착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개 소설 작품의 창작과 편집, 출판,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판매까지의 역할을 한두 사람이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는 상업적 부르주아 사회의 산물인 ‘저작권’의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인기 있는 어떤 작품을 임의로 개작하거나 해서 출판하는 일도 많았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소설 출판과 관련된 일인다역一人多役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최초의 인물로 흔히 명나라 말엽의 풍몽룡馮夢龍(1574~1646)이 꼽히곤 한다. 그는 유명한 단편소설집 ‘삼언三言’—《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과 장편소설 《신열국지新列國志》를 창작(혹은 개작)하고 출판함으로써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덕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선례를 제공했다.
흔히 ‘장회소설章回小說’이라고 부르는 중국 장편 소설의 독특한 형식이 정착된 것도 바로 이러한 발생 단계의 조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소설의 생산업자들—당시까지 소설은 아직 고유한 문예 영역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작가’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은 기본적으로 민간 이야기꾼의 공연 형식을 거의 그대로 문자화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독자들의 친밀감을 유도했다. 우리는 이런 증거들을 소설의 본문 가운데 종종 등장하는 ‘화표話表’나 ‘각설却說’, 그리고 ‘차청하회분해且聽下回分解’ 등의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는 ‘한편’ 또는 ‘어쨌든’ 등의 뜻인데, ‘화표’가 대개 한 회回의 첫머리에 사용되는 데에 비해, ‘각설’은 한 회의 첫머리에서도 사용되고 본문 중간에서 화제를 바꾸거나 단락을 전환할 때에 습관적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차청하회분해’는 ‘(뒷이야기가 궁금하면) 다음 회를 들어보시라’는 뜻이니, 이것은 특히 장편의 이야기를 한 자리에서 끝내지 못하고 다음 공연을 예고하는 이야기꾼의 용어를 그대로 빌려다 쓴 것이다.
이밖에 이야기꾼이 공연을 시작할 때 청중들을 모으거나 이야기 중간에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혹은 하나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전체적인 줄거리나 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을 정리하기 위해서 구성지게 읊조리거나 노래로 불러주었을 운문韻文들을 각 회의 첫머리와 중간,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장회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다. 다만 책으로 출판된 장회소설들은 종종 그 작품의 창작(또는 개작)에 나름대로 명망이 있는 사대부 문인의 손길이 닿았음을 내세우기 위해 이런 운문들을 형식적으로 좀 더 다듬고, 그 안에 교묘한 풍자를 덧씌움으로써 예술적으로 고상하게 윤색한 흔적이 점점 뚜렷해진다. 널리 알려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경우를 예로 들면, 《(이탁오선생비평李卓吾先生批評)삼국지三國志》—이 역시 섭주가 관여한 것인 듯한데—에 상당한 문학적 소양을 갖춘 명나라 때의 문인 주정헌周靜軒이 쓴 시를 삽입함으로써 이야기꾼들의 투박한 공연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다만 《서유기》의 경우에는 삽입된 시가詩歌들이 작품성 혹은 예술적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각 회마다 혹은 장면마다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고, 그 수준이 전체적으로 ‘사대기서’로 아울러 일컬어지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이 작품이 아마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고, 그 결과 다른 작품들에 비해 민간 이야기꾼의 대본으로서 흔적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유기》의 줄거리 구조
이런 배경 위에서 탄생한 ‘이탁오비평본’ 《서유기》의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먼저 제1회부터 제7회까지는 손오공의 탄생과 하늘궁전에서 벌인 난동, 그리고 석가여래에게 제압당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제8회에서는 관음보살이 사오정과 저팔계, 손오공을 삼장법사의 길을 인도할 제자로 안배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후대에 전해지는 판본에는 삼장법사의 출생과 부친을 해친 강도들에 대한 복수 과정을 서술한 「부록」이 첨가되어 있다. 제9회부터 제12회까지는 당나라 태종太宗 때의 재상 위징魏徵 꿈속에서 경하涇河 용왕의 목을 벤 일로부터 태종이 죽어 저승에 갔다가 사흘 만에 소생한 후, 죽은 영혼들을 제도하기 위해 불교를 진흥하기로 결심하여 삼장법사를 서역으로 파견하는 과정을 서술했다. 여기까지는 이후의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서론에 해당한다.
실질적으로 삼장법사와 제자 일행이 서역으로 가는 도중에 겪게 되는 이른바 ‘81난難’에 대해서는 제13회부터 제99회까지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회에 한 가지 고난이 서술되지만, 하나의 일화가 두세 회에 걸쳐서 전개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모든 일화는 고난의 원인이 대단히 상징적으로 설정된 요괴에 의해 야기되고, 삼장법사 일행—특히 손오공—의 의지와 능력으로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식으로 설명된다. 마치 힘겨운 고개들을 하나하나 넘어가는 것처럼 구성된 이런 이야기 패턴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회에서는 고난이 끝난 후 삼장법사가 부처의 도를 깨달아 극락으로 가고 그 제자들도 각기 마땅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서술했다.
그런데 책으로 출판된 다른 장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서유기》는 전체적인 이야기의 짜임새도 상당히 치밀하게 다듬어졌고, 각 회마다 그럴 듯한 운문을 동원하여 제목을 붙어 있다. 특히 미국의 어느 학자가 꼼꼼히 지적했듯이, 이러한 이야기 구조의 재편 과정에서 수數에 관한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관념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서, ‘81난’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각기 10의 수가 들어가는 회마다 특별히 중요한 관문을 안배하기도 했다.
다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장회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한 회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식의 장회소설은 따로 떼어놓아도 감상하기에 별 무리가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제목 아래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종종 하나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通讀하지 않고 중간에서 한두 회만 떼어 감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옛날 중국에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이야기꾼이나 극단의 공연에서 장편소설의 줄거리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만 떼어 올리는 경우가 흔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식의 구성이 마치 구슬을 죽 꿰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해서 ‘연주식連珠式’이라는 그럴싸한 명칭을 붙였다. 사실 모든 장회소설들은 얼핏 보기에 독립된 이야기들처럼 보이면서도,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일정한 흐름이 존재하는 것도 분명하기 때문에, 그 명칭은 대단히 적절한 듯하다.
물론 줄거리의 치밀한 짜임새와 긴박한 전개를 중시하는 현대 소설의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토막토막 끊어지는 장회소설의 구조가 무척 엉성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점을 껄끄럽게 생각하기 전에, 이번 기회에 옛 중국인들처럼 소설을 감상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굳이 내가 중국 고전 소설을 전공으로 삼아서 칭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줄거리의 전개보다는 ‘디테일’에 주목하면서 천천히 읽어보기를 시험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