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위스郭預適 교수와의 대담

정옥근(鄭沃根, 동의대 중문과 교수) 진행/정리

[정리자의 말] 올해 여름 상하이를 찾게 되었을 때, 나의 중국 모교인 화둥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을 방문하였다. 이때 지도교수이신 궈위스(郭豫適) 선생님을 숙소인 반좐위안(半磚園)에서 만나 뵙고, 사제간에 그 간의 회포를 나누면서, 선생님의 근황과 선생님의 학문 세계에 관하여 대담하게 된 것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정옥근, 1998년 10월 5일)

정옥근 : 중국을 떠난 지가 벌써 일년 여 되었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오늘 제가 선생님을 특별히 찾아뵙게 된 것은 일전에 편지와 전화에서 말씀드렸듯, 우리 ‘한국중국소설학회’의 계간지 『중국소설연구회보』의 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문인 김태관(金泰寬) 교수도 선생님께 안부 여쭈어 달라고 했습니다.

궈위스 : 고맙습니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고, 김태관 교수도 잘 있다니 기쁘군요! 건강은 그럭저럭 합니다만 이제 늙어서 옛날만은 못하지요. 학문상의 중임(重任)을 모두 정선생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정옥근 : 선생님께서 이번에 다시 한번 ‘학위위원회학과평의원(學位委員會學科評議員)’ 직을 맡으셨으니 아직도 여러 가지 일로 아주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학교 부총장 직을 그만 두시고 난 후에, 대학원장 일도 놓으셨으니, 그래도 이전보다는 덜 바쁘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궈위스 : “문산회해(文山會海)”(써야 할 글은 산 같이 쌓여 있고 참석해야 할 모임은 바다 같이 많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일로 바쁘다는 의미다. [엮은이 주])의 부담을 벗어나니, 확실히 “무관일신경(無官一身輕)”(관직이 없으니 일신이 여유롭다는 뜻. [엮은이 주])의 감이 있지만, 아직까지 퇴직을 안 했기 때문에 교학이나 연구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학술 방면의 일에 상당히 바쁘다고 할 수 있지요. ‘국무원학과위원회(國務院學科委員會)’의 제3차 ‘학과평의조(學科評議組)’ 임기가 1992년부터 1997년인데, 작년에 제4차로 다시 뽑혔습니다. ‘학과평의조’ 성원들은 정기 혹은 부정기적인 약간의 회의나 담당 업무가 있고, 기타 단체의 일이 약간 있으며, 바깥의 학술 활동도 적당히 참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대학이나 학술원 등을 방문하기도 하고, 학회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아주 애쓰고 힘들게 활동하고 있지만, 나는 그저 이사라는 이름만 걸어 놓고 있을 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실제로 일을 잘하지도 못하고, 시간이나 여력이 모자라는 셈이지요.

일본인 학자 이소베(磯部彰) 선생과 함께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궈위스 교수(왼쪽) 사진, ⓒ 조관희, 2002

정옥근 : 근년에 계속해서 선생님의 문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유교는 종교인가 및 중국 고대소설과 종교의 관계(論儒敎是否爲宗敎及中國古代小說與宗敎的關係)」라는 논문 외에 「문화유산 연구는 사상과 방법을 올바로 해야 한다(文化遺産硏究要端正思想和方法)」와 『홍루몽학간(紅樓夢學刊)』에 발표하신 왕궈웨이(王國維)에 관한 논문, 그리고 『인민일보(人民日報)』 해외판에 게재한 『홍루몽』 연구 문장 등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선생님께서 아직도 집필에 열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궈위스 : 열심히 쓰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유교는 종교인가? ’하는 것을 토론한 문장이 발표된 이후, 많은 간행물에 전재되고 또한 발췌되어서 실리기도 했었고, 이 문제에 대하여 또 다른 사람들이 문장들을 발표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장들의 관점이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문회보(文匯報)』에 「유교는 종교인가(儒敎是宗敎嗎?)」라는 문장을 발표한 후에 어떤 간행물에서는 「유교는 종교(儒敎是宗敎)」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고, 또 어떤 문장은 나의 그 문장에 대하여 찬성 반 반대 반의 입장의 논문을 실었는데, 그것은 내 문장에서 공자가 종교의 교주라고 하는 설을 반대하는 관점을 동의한 것이고. 그 사람은 다른 한편으로, 공자와 전기 유교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지만 후기 유교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종교라든지 종교학에 대하여서 너무 간단하게 부정해 버리는 태도는 버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유교는 결코 종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종교와 다르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학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자유롭게 토론하여 각자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선생이 이야기 한대로 『인민일보』 해외판에 발표한 「‘초작’과 “차오쉐친의 재생”(‘炒作’和“曹雪芹再生”)」이라는 단편의 평론 문장은 비록 나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기자가 『문회보』에 실렸던 「문화유산 연구는 사상과 방법을 올바로 해야 한다(文化遺産硏究要端正思想和方法)」는 문장에 근거해서 뽑아 편집한 것을 다른 이름의 문장으로 낸 것입니다. 그리고 『문회보』의 그 문장은 기자가 『문예이론연구』의 “학인탐방”이란 난의 문장을 전재한 것이기 때문에, 그 문장에서 이야기한 것은 그렇게 높은 식견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동감하였기 때문에 몇몇 간행물에 보도가 되었고, 또한 전재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샤오샹카이(蕭相愷)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궈위스(郭預適) 교수(오른쪽), 사진 ⓒ 조관희, 2002

『홍루몽』에 대한 연구와 기타 문학 유산 연구에 있어, 어떤 저작과 문장 중에는 확실히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문제가 능히 해결될 수 있다면 학술사업의 건전한 발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근년에 내가 앞장서서 ‘국가사회과학연구과제(國家社會科學硏究課題)’를 맡게 되었는데, 그 제목이 『문학유산연구적이론화방법(文學遺産硏究的理論和方法)』으로, 이 연구조에는 천다캉(陳大康)과 탄판(譚帆), 자오산린(趙山林) 등이 속해 있으며, 현재 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옥근 : 선생님 최근의 연구 활동은 비교적 연구사상과 방법의 문제에 착목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홍루몽학간』에 발표하신 논문의 제목이 「왕궈웨이 학문 연구의 사상과 방법(王國維治學的思想和方法)」이 아닌지요?

궈위스 : 그렇습니다. 왕궈웨이(王國維)는 유명한 『홍루몽』 연구가일 뿐만 아니라, 그는 학문연구 방법을 중시했고, 연구 영역도 아주 광활한 대학자였습니다. 작년에 학간편집부(學刊編輯部)가 왕궈웨이 탄생 120주년ㆍ서거 70주년을 기념해서 나에게 한 편의 논문을 쓰라고 해서, 이 논문을 쓰게 된 것이지요. 그 분은 이미 가셨지만, 그 사상과 저작은 후인들로 하여금 그를 잊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왕궈웨이는 학문을 함에 있어 진실을 구하려고 했고, 아울러 학문을 중서 혹은 고금을 구별하지 않고 중학과 서학이 마땅히 서로 보탬이 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는 바가 크기에, 역사적 가치와 현실적 의의가 함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연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고인들의 모든 가치 있는 사상 이론의 성과를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정옥근 : 선생님께서 이전에 저희들에게 “후스의 학문연구방법론 및 기타(胡適的治學方法論及其他)”라는 내용을 강의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후스는 학문연구방법을 아주 중시했는데, 그의 학문연구방법론은 결코 그의 미국 선생님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에서 온 것이 아니고, 중국 고대 학자의 학문연구 경험에서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후스가 말한 그 합리라는 것의 핵심을 지적하셨고, 그 고증방법의 득실을 분석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스의 학문연구방법론의 전기, 후기의 변화를 분석하신 것을 저희들은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궈위스 : 그 논문은 일차적으로 국제학술연구토론회의 석상에서 발표한 논문인데 먼저 『학술월간(學術月刊)』에 게재된 후에 다시 『후스연구총간(胡適硏究叢刊)』 제2집에 수록되었습니다. 철학ㆍ사회과학 연구에 있어 학문연구방법이라는 것은 결코 순전히 고립적이고 사상을 초월하는 추상물이 아닙니다. 또 학문연구 방법이라는 것 역시 결코 만능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어떠한 사상이 어떤 학문연구방법을 장악했다고 해서 학술상 모든 것이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학문연구 과정 중에 그것을 인도하는 사상이 어떠한가? 즉 사고하는 길과 방법이 정확한가의 여부는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전 사람 곧, 청대의 훈고학ㆍ고증학 등의 학자를 포함해서 왕궈웨이(王國維)와 후스(胡適) 등의 학자들은 이 방면에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그 경험이 정면이든 아니면 반면이든, 우리가 정확하게 간파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좋은 학술 재산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옥근 : 선생님의 『홍루몽』 연구사와 같은 전문저작이 이 방면에서 제일 먼저 출판된 것은, 또한 선생님께서 학술사를 중시한다는 생각을 체현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 저작 이후의 기타 홍학연구의 성과는 이미 보충되었습니까?

궈위스 : 그렇습니다. 근래에 『고대문학연구도론(古代文學硏究導論)』(潘樹廣ㆍ黃鎭偉ㆍ包禮祥 著, 安徽文藝出版社 1998年 6月)이라는 책이 나온 것을 보았는데, 그 중에 『고대문학연구사술략(古代文學硏究史述略)』이라는 한 절에서 말하기를, “고대문학연구사의 전문저작은 궈위스(郭豫適)의 『홍루연구소사고(紅樓硏究小史稿)』가 1980년에 출판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1995년 궈잉더(郭英德), 셰쓰웨이(謝思煒) 등이 지은 『중국고전문학연구사(中國古典文學硏究史)』가 출판되기까지, 불완전한 통계이긴 하지만 어떤 통계 자료에 의하면, 그 사이에 계속해서 시경(詩經), 초사(楚辭),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 잡극(元雜劇), 명청소설(明淸小說) 등 전문적 연구사 10여종이 학술계에 출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347쪽) 중국 역사상에는 학술사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적지 않은 “학안(學案)” 류의 저술이 그렇지요. 최근 20년 사이에 적지 않은 학자가 이러한 점에 노력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종류의 학과에서 학술 사상의 성과와 경험ㆍ교훈을 돌아보고, 정리ㆍ비판하고, 그 장점을 흡수하는 것은 학술연구에 있어 계속 진행되어야 하며, 좋은 점이 아주 많다고 봅니다. 정선생도 아는 바와 같이, 나는 『홍루연구소사고(紅樓硏究小史稿)』와 『홍루연구소사속고(紅樓硏究小史續稿)』를 합본할 것이고, 아울러서 신시기 홍학연구의 내용을 보충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老牛破車(소는 늙었고, 수레는 낡았다)”의 감이 있습니다. 그 동안 짬나는 대로 계속 노력은 하고 있는데, 집중할 시간과 정력이 부족해서 아직 완성하지 못했지요.

정옥근 : 선생님께서 근래에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요? 저희 선․후배님들의 연구 실정은 어떻습니까?

궈위스 : 푸후이성(傅惠生) 선생은 『삼국(三國)』ㆍ『수호(水滸)』를 연구한 그 논문 이후에 『송명지제의 사회심리와 소설(宋明之際的社會心理與小說)』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동방출판사(東方出版社)에서 “중국문학연구시리즈(中國文學史硏究系列)” 총서에 편입되어 정식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천다캉(陳大康) 선생은 금년에 『명대 상인과 당시 기풍(明代商賈與世風)』이라는 책을 펴낸 후에 새로이 『명대소설사』약 60만 자를 새로 지어서, 지금 내가 그와 함께 교정을 보고 있어, 얼마 안 있어 출판할 예정입니다. 이 책의 『도언(導言)』과 그 목록은 이미 『명청소설연구(明淸小說硏究)』, 『문학유산(文學遺産)』에 실려 있지요. 올해 그가 교주한 『만화루연의(萬花樓演義)』, 『두붕한화(豆棚閑話)』, 『조세배(照世柸)』 등이 타이베이(臺北)에서 출판됐습니다.

탄판(譚帆) 선생은 근래에 소설 비평에 관한 논문을 한 편 썼는데, 그것은 중국민족 특색을 갖고 있는 소설 비평학에 대하여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정리ㆍ연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에 『문학평론』에 그의 장문「중국 고대소설 평점의 가치시스템(中國古代小說評點的價値系統)」을 발표했지요. 올해 탄판 선생은 귀교의 중문과에 가서 일년 동안 강의를 맡게 되지요? 정선생은 곧 한국에서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상하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에서 올해 “봉래각총서(蓬萊閣叢書)”를 출판하는데, 그 중에 한 권이 루쉰(魯迅)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입니다. 책머리에 붙힐 『 <중국소설사략>도독(中國小說史略導讀)』을 출판사가 나에게 쓰라고 했지요. 또 학림출판사(學林出版社)는 근래에 상하이사회과학원(上海社會科學院)의 류겅다(劉耿大)가 쓴 『서유기』의 심미의식과 수사예술을 연구한 『서유기미경탐유(西遊記迷境探幽)』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내가 평론을 써서, 그것으로써 이 책의 서문으로 삼았습니다. 근래에 이러한 단체활동의 항목 외에도, 시간을 내서 내 자신이 몇 년 동안에 발표한 문장, 주요하게 문학유산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든지, 중국민족의 우수한 문화 전통을 홍양한다든지, 치학방법론 등의 연구문장에 대하여서 한번 자세히 살펴보고 계속 연구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정옥근 : 선생님 지금 학술 연구에 있어서 또한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시는지요? 혹은 마땅히 주의해야할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궈위스 : 중국 고대소설을 포함한 학술 연구에 있어서, 국제적 범위로 말한다면 학술교류의 활동이 계속되었으면 좋겠고, 국내적으로 말한다면 학술연구에 있어서 너무 “공방형(孔方兄)”(옛날의 동전은 모양은 둥글고 안에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었기에, ‘공방(孔方)’이라는 말로 돈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엮은이 주])의 지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정선생도 그 취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최근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그 사건은 우리들로 하여금 학자나 작가 스스로가 사상ㆍ방법상에 있어서, 형이상학적인 면이나 사물을 간단화시키려고 하는 점을 극복하고, “단절” 현상을 방지해야 하는 것에 중요성을 느끼게 하지요. 보도에 의하면, 최근에 어떤 사람이 일부분의 청년작가에게 설문지로 조사를 벌였는데, 그 대답 중에서, 어떤 사람이 자칭하기를, “우리는 ‘이리의 젖을 먹고 컸다’”고 했다는군요. 오사 이후의 문학 전통에 대하여서는, 루쉰에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가에 대하여서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전제하면서, 이전의 학술성과를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지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루쉰은 하나의 아주 단단한 돌멩이다.”라고 했다는군요. 이러한 “신”청년작가를 보면 루쉰을 벌써 포기해 버린 것 같습니다. 요즈음의 어떤 청년작가나 평론가는 이와 같이 너무 얄팍하고 어리석고 망령되어 우리를 자못 놀라게하고 있습니다.

천다캉(陳大康, 왼쪽)과 탄판(譚帆, 오른쪽) 교수, 사진 ⓒ 조관희, 2002

나는 단순한 얇은 지식과 무지는 오히려 겁낼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단지 태도가 정확하고, 열심히 공부하게 되면 무지도 바뀌어서 야간의 지식, 나아가서는 많은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고금에 있어서의 많은 대학자와 대작가들도 그 깊이가 아주 천박한 것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우매하거나 미치고 망령된 것은 정말로 어찌할 수가 없지요. 이렇게 우매하고 망령되어서야 어떻게 학문을 하고, 작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정선생도 『중국소설사략』이라는 루쉰의 책을 읽어 봤겠지만, 꼭 이 책 한 권만이 아니더라도 루쉰의 공헌은 정말로 큰 것입니다. 어떻게 “루쉰은 아주 단단한 돌멩이다.”라고 멸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옥근 : 중국에 오늘날 루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루쉰은 위대한 작가이면서도 학자입니다. 그의 저작들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귀중한 유산입니다. 우리가 연구하고 공부할 만한 가치가 정말로 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궈위스 : 정선생의 견해에 아주 동감합니다. 정선생이 요번에 와서 아주 바쁜 것 같은데, 내일 귀국한다면서요? 귀국 후에 이곳에서 유학했던 다른 학생들에게 안부전해 주고, 최용철, 박재연 등 여러분들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기 바랍니다. 중한 양국의 학술연구와 문화교육에 더욱 많은 교류가 있기를 빌겠습니다. 그리고 정선생의 「중국 고대 통속소설의 조선에서의 전파와 영향(中國古代通俗小說在古代朝鮮的傳播和影響)」이라는 논문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계속 노력해서 어서 한 권의 책으로 내기 바랍니다.

정옥근 :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엮은이 주: 이 글은 원래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6집(1998년 11월)에 실린 것을 엮은이가 수정 보완했다.]

[참고] 궈위스(郭豫適, 1933~ ) 교수 소전(小傳)

중국의 대표적인 홍학가(紅學家)이자 소설사가(小說史家). 필명으로는 위쓰(余思 또는 于斯) 등이 있고, 1932년 12월에 광둥성(廣東省) 차오양현(潮陽縣, 今 潮陽市)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상하이로 이주하였고 1953년에 화둥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 중문과(中文系)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졸업 후에는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 강사·부교수·교수를 역임하였다.

1984~1994년간에는 같은 학교의 부총장, 대학원장(硏究生院院長) 등 직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역시 같은 학교 중문과 박사연구생 지도교수, 학위위원회 부주석, 학술위원회 부주임, 타이완홍콩문사연구센터(臺港文史硏究中心) 주임, 국무원학위위원회 학과평의원, 상하이고적정리출판규획소조 부조장, 상하이사회과학련합회 위원, 상하이고전문학연구회 부회장, 상하이『홍루몽』학회 부회장, 중국고전문학학회 이사, 중국색인학회 고문, 중국『수호』학회 부회장, 중국『홍루몽』학회 상무이사, 중국『삼국연의』학회 이사, 중국『유림외사』학회 이사 등 직을 맡고 있다.

그는 장기간 중국문학사와 중국소설사의 교학과 연구에 종사하여 50년대에는 중국문학사에 관한 토론에 참가하였고 60년대에는 교육부에서 위탁한 통합교재 『중국역대문학작품선(中國歷代文學作品選)』의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70년대에는 4년 간 베이징에 머물면서 신판 『루쉰전집(魯迅全集)』의 책임편집을 맡아 제9권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 등의 주석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그리고 80년대에는 『중국전통문화신탐총서(中國傳統文化新探叢書)』를 주편하였고 90년대에는 고적정리출판의 국가중대항목인 2억7천만 자 편폭의 『전세장서(傳世藏書)』 편찬사업에 학술위원 겸 고대소설분류주편을 담당하였다.

주요 저작으로는 『홍루몽연구소사고(紅樓夢硏究小史稿)』(上海文藝出版社, 1980), 『홍루몽연구소사속고(紅樓夢硏究小史續稿)』(上海文藝出版社, 1981), 『홍루몽문제평론집(紅樓夢問題評論集)』(上海古籍出版社, 1981), 『중국고대소설론집(中國古代小說論集)』(華東師範大學出版社, 1985; 1992년 3판), 『삼국연의선수(三國演義選粹)』(편저, 上海敎育出版社, 1986), 『홍루몽연구문선(紅樓夢硏究文選)』(주편, 華東師大出版社, 1988), 『중국소설비평사략(中國小說批評史略)』(공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0), 『홍루몽 및 그 연구(紅樓夢及其硏究)』(上海古籍出版社, 1992), 『민족문화의 지양과 발전(民族文化的揚棄與發展)』(편자 겸 주필, 湖南敎育出版社, 1993), 『역대세설정화총서(歷代世說精華叢書)』(주편, 東方出版中心, 1996)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民間文學主流論及其他(民間文學主流論及其他)」(『解放日報』 1959년 7월 8일), 「杜甫對于儒家思想的繼承和批判」(『解放日報』 1962년 5월 29일), 「西方文藝思想和紅樓夢硏究」(『學術月刊』 1981년 2월호), 「論水滸傳」(『文藝理論硏究』 1984년 제4기), 「李贄評傳」(『中國歷代著名文學家評傳·제4권』 山東敎育出版社, 1985), 「關於中國古代小說理論批評特點問題」(『華東師大學報』 1988년 제6기), 「關於弘揚民族優秀文化的幾個問題」(『文藝理論硏究』 1990년 제4기), 「評古代小說硏究方法的探索及其它」(『華東師大學報』 1991년 4월) 등이 있다. 그의 성과가 『中國人名大辭典』(당대인물권), 영국의 『世界名人錄』(제2판), 『五百位世界傑出名人傳略(The First Five Hundred)』(제2판) 등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