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한나 아렌트의 분노에서부터從漢娜‧鄂蘭的憤怒開始 1
발터 벤야민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사후의 명성’라는 것에 대해 분노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확실히 그렇게 화를 내고 심지어 구역질을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벤야민이 죽은 뒤 여러 해가 지나서야 한꺼번에 밀어닥친 그 때늦은 찬사와 숭배(그중 상당수는 진심이었을 것이다)가 아주 일부라도 그의 생전에 존재했다면 그는 그렇게 평생을 곤궁하게 살 필요가 없었을 테고, 또 사십 세도 되기 전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인 피레네 산악 지역에서 절망해 자살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명성이 아니라, 명성에 뒤따르거나 명성과 바꿀 수 있는 얼마간의 돈이나 비자였다.
사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고흐도 그랬고 에드거 앨런 포도 그랬다. 마르크스의 장례식장에는 각국의 정계 요인도, 전 세계에서 단결해 홍수처럼 몰려온 노동자들도 없었다. 참석자는 실질적으로 모두 11명뿐이었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 참석한 인원보다 1명이 모자랐지만 아마도 우리는 딴 마음을 품고 스파이 노릇을 했던 유다는 제외해야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11은 우리가 꼭 기억해둬야 할 숫자, 사후에야 명성을 얻은 이들의 생전의 상황과 관련한 역사적 상수가 된다.
한나 아렌트는 사실 발터 벤야민에 관한 글과 나란히 놓고 생각해볼 만한 글을 또 한 편 썼다.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관한 글이다. 벤야민처럼 50세도 안 돼서 죽었지만 벤야민보다 훨씬 용감하고 강한 생명력을 지녔던 그 여성은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룩셈부르크가 죽은 곳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1919년 1월 15일, 카를 리프크네히트 박사와 로자 룩셈부르크 박사가 기, 보병 방위대의 폭력으로 암살당했다. 당시 이미 죽었거나 중상을 입은 로자 룩셈부르크는 리히텐슈타인교 근처의 운하에 버려졌다.”
룩셈부르크도 사후에 명성을 얻긴 했지만 당연히 벤야민보다는 훨씬 뒤졌고 그리 진실되지도 못했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말하길, “러시아혁명 초기의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정확하고 놀랄 만한 비판을 제외하고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쓰거나 말한 모든 것이 소실되었다. 겨우 남은 것도 ”하나님은 실패했다“는 논조를 보인 이들이 그것을 편리하고 전혀 타당치 않은 무기로 삼아 스탈린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새로운 숭배자들은 그녀를 헐뜯은 자들보다도 그녀 본인과 같은 점이 더 많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것은 사후의 명성이라는 것에 대한 그녀의 또 다른 분노로서(혹은 분노가 이미 헛되이 사그라져 낙담이 돼버렸다) 결국에는 너무 늦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후련하지도 않다.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은 길이 남을 저서이다. 자본주의가 자체의 경제적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될 것이라던 마르크스의 낙관적 예언이 시종일관 전혀 실현될 기미가 없었던 것과 관련해, 룩셈부르크는 매우 일찍(너무 일렀고 너무 이른 것은 보통 자기 자신을 곤경과 위험에 빠뜨리곤 한다)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제시했다. 그 책에서 그녀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불완전한 변증법을 비난하고 자본주의의 재생산이 결코 하나의 폐쇄 체계 안에서 진행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자본주의는 계속 밖으로 확장해 지구상의 다른 지역, 다른 국가들을 집어삼킴으로써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완화시킬 것이며 이를 통해 대립의 상황이 혁명으로 치닫는 것을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예컨대 룩셈부르크는 “현대의 프롤레타리아가 확실히 가난하기는 하지만 아직 절대 빈곤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외부의 양분을 흡수하여 순조롭게 운행될 것이고, 스스로 파멸하더라도 그것은 지구 전체를 정복하고 점유한 뒤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백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당연히 룩셈부르크가 옳았다. 룩셈부르크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옳았다. 소비에트 혁명에 대한 갖가지 우려와 관련해서도 그녀는 ‘도덕의 붕괴’를 예견했고 “혁명의 왜곡이 혁명의 실패보다 더 공포스럽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