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커劉恪 – 무상도無相島

류커劉恪 : 중국 선봉파의 대표작가. 1953년 후난 성湖南省 위에양岳陽 출생. 베이징사범대학교 문학원 졸업, 문학석사. 교사, 기자, 편집자, 문학잡지 편집장 역임. 현재 허난대학교 문학원 교수, 중국 국토자원부 작가협회 부주석, 국가 일급작가, 중국 작가협회 회원. 1983년 문학창작을 시작했고 장편소설『꿈과 도시』,『쪽빛 우기』,『꿈과 시』,『과부의 배』, 소설집『붉은 돛배』,『꿈속의 연인』, 문학이론서『욕망의 장미』,『단어시학 · 공성空聲』,『단어시학 · 겹눈』,『이경耳鏡』,『현대소설의 기교』,『선봉소설의 기교』등 600여만 자를 저술했다. 여러 차례 중국 내 도서상과 문학잡지상을 수상했다.

<무상도無相島>

류커 저, 김택규 역

1. 언제, 어디서, 누가, 어디로

나는 섬에 올랐다. 발밑에서 모래와 자갈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멀리 희끗희끗한 것이 보였다. 갈대밭인 듯했다. 그리고 산인지 집인지 모를, 아치 모양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나는 잠시 돌 위에 앉아 있었다. 호수물이 뭍 위로 넘치며 철썩거리면서 파도와 돌들이 서로 엉겨 붙어 한밤의 승강이를 벌였다. 바람이 돌들 사이로 기어오르는 바람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기침을 하고 싶었다. 목구멍이 뻣뻣하게 얼어붙은 듯했다.

우거진 잡초 사이로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심 뱀이 튀어나와 어떤 메시지를 게워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2, 3백 미터쯤 걷자 갈대숲이 시작되었다. 새하얀 갈대 이삭은 가볍고 부드러웠다. 움켜쥐어 보니 마치 뱀처럼 손을 휘감았다. 그리고 어떤 부드러운 것이 밟아도 꼼짝도 안 해, 깜짝 놀라서 보니 마른 도롱이와 수풀이 한데 엉켜 있었다. 하늘의 달은 맑았다. 꼭 창호지를 잘라 붙인 모양이라 언제든 뜬구름에 실려 갈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내가 파도에 밀려 이 섬에 떠내려 온 것이 생각났다. 내 환경관측용 보트는 둥팅호洞庭湖에서 암초를 만나 뒤집혔다. 달과 구름의 위치를 봐서는 깊은 밤이었다. 지금 나는 어느 섬에 있는 걸까?

달빛이 시선을 멀리 잡아당기고 거미줄처럼 엉키게 하여 모든 것이 어슴푸레하게만 보였다. 나는 호숫가를 따라 벌써 1킬로미터를 걸었다. 신축성이 좋은 부들 풀과 띠 풀이 계속 발에 밟혔다. 나는 풀숲에서 뱀이 기어 나올까 봐 내내 걱정이 되었다. 사실 입동이 지나면 뱀은 싹 자취를 감추는데도 꼭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두려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왔다. 또한 누가 뒤에서 걸음을 멈춘 것 같아 돌아보면 망망한 들판은 휑뎅그렁하여 오직 바람뿐이었다. 모르는 사이 갈대 그루터기가 몸을 찔러 아프게 했다. 앞쪽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도롱이를 입고 고기바구니를 멨는데 멜대가 갈라져 끼익끼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갈대숲의 작은 도랑가로 접어든 그 남자를 얼른 뒤쫓았다.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내가 빨리 가면 그도 빨리 가고, 내가 느리게 가면 그도 느리게 갔다.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불법 생선장수라서 붙잡힐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드디어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희미한 불빛 아래 그 남자는 마을 어귀의 집으로 잽싸게 자취를 감췄다. 나는 그 집 처마 아래에 섰다. 그곳은 갈대 묶음을 쌓아 지붕을 덮은 벽돌집이었다. 갈대 밑에는 또 비닐이 깔려 있었고 작은 창문에도 역시 비닐이 물 샐 틈 없이 달려 있었다. 나는 마음을 놓았다. 드디어 민가를 찾은 것이다. 내가 그 집에 들어갈 때 마침 어떤 사람이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안에서 나왔다. 집 안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낮은 탁자 위에 법랑 냄비가 놓여 있고 램프가 딱 하나 대들보에 걸려 있었다. 그 남자는 두 탁자 사이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 알코올버너의 고체 알콜이 붉은색으로 빛났다. 나는 그 위의 냄비가 조금 새는 것을 발견했다. 냄비는 쉬지 않고 치익치익 소리를 냈다. 이때 나는 허기를 느꼈고, 그래서 그 남자와 등을 지고 앉아 식사를 하려 했다.

2. 술집

실내에는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뭔가 끈적끈적한 것이 옷에 스몄다. 그리고 불빛이 침침해서 사람들은 서로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어슴푸레한 가운데 후루룩후루룩 생선탕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그 매운 맛이 상상이 되어 경황없는 중에도 목구멍이 짜릿했다. 나는 “주인 양반, 생선탕 하나요!”라고 소리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사람들이 또 드나들었다. 소매에 손을 넣고 서로 인사 한 마디 없었다. 등 뒤의 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탕과 술을 마시는 데만 열중했다. 그의 몸에서 뜨거운 힘이 전해졌다. 강한 기운이 튼실한 주먹처럼 내 꼬리뼈 부분을 떠받쳐 올렸다. 아무래도 그는 한 가닥 하는 남자인 듯했다. 흥흥대는 콧소리만 해도 뱃속에서 묵직하게 울려 나왔다. 이런 자는 감당하기가 힘들다. 나는 본능적으로 조금 자리를 옮겼다.

“이봐, 외지 양반. 술도 마시라고. 남자가 돼서 술이 빠지면 쓰나.”

그가 불분명하게 말하며 술사발을 건넸다. 나는 한 모금 들이키자마자 재채기를 했다. 너무 쓰고 독해서 입 안이 바늘에 찔린 듯 아프고 속에 들어간 술이 곧장 밑으로 가라앉았다. 지금껏 이런 술은 처음이었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돌려 쥬구이(酒鬼: 중국의 유명 술 브랜드-옮긴이)를 좀 달라고 했지만 주인은 없다고 했다.

“이건 쇠마름술이야, 마시면 몸이 확 터질 것 같지. 네가 말하는 그 쥬구이는 여자들 술이야, 이 얼간이 같으니.”

나는 쇠마름이란 건 얘기만 들었다. 둥팅호의 야생 마름이며 질기기 짝이 없어서 때로는 두터운 칼을 써야 겨우 벨 수 있고 육질이 톱밥 같다고 했다. 나는 듣기만 했지 본 적도, 먹은 적도 없었다. 사람들은 쇠마름이 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으며 일찍이 양요楊幺가 그걸 호숫가에 가득 깔아 진陣을 만듦으로써 처음 악비岳飛의 수만 대군을 무찔렀다고들 했다.

“자, 생선탕이요. 고추 채도 있으니까 천천히 들어요.”

몇 모금 국물을 마셔보니 무척 신선했다. 진한 국물을 들이키자 생선 냄새가 몸속에 퍼지고 콧김에서도 구수한 국물 냄새가 나면서 위와 장이 단번에 후련해졌다. 몇 모금 더 마시고 고추도 곁들여 먹었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냄비 속을 뒤져봤는데 달랑 허연 뼈밖에 없었다. 이때 와드득와드득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탁자에서 누가 그 생선뼈를 씹는 소리였다. 큰 뼈는 거의 젓가락 굵기인데 어떻게 그걸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생선뼈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와드득 힘주어 씹어보니 예상외로 이가 얼얼했다. 그런데 힘을 덜 주면 뼈가 바스러져 흩어지면서 콩가루 냄새가 났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었다. 돌아보니 뒤의 그 남자가 냄비를 싹 비우고 꺼억 트림을 하는 중이었다. 부실한 걸상이 그의 체중에 눌려 흔들거렸다. 탁자와 걸상은 다 까맣고 땟국물이 자르르 흘렀으며 침침한 램프는 실내의 물건들을 전부 빛바래 보이게 했다. 나는 어떤 물건이 어떻게 안으로부터 부식되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그 남자가 뻑뻑 잎담배를 피고 있었다. 회색 연기가 산 물고기의 가시처럼 사람을 찔러댔다. 아프게 찔렀지만 피는 나지 않고 통증이 온몸의 신경을 자극했다. 어떤 사람이 쉬지 않고 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쓰러져, 쓰러지라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안이 벙벙해 하고 있는데, 내 왼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돌연 탁자 밑으로 넘어졌다. 손을 뻗어 그를 잡아당겼지만 일으키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의 튀어나온 두 개의 큰 앞니에는 빨간 고춧가루가 묻어 있었으며 안색은 거무죽죽해 보일 정도로 짙은 보랏빛이었다. 그리고 꿈틀거리며 꺽꺽대는 신음소리는 흡사 깊디깊은 구멍에서 뽑아져 나오는 듯했고, 단단한 데 부딪친 이빨은 깨졌는지 빠졌는지 긴가민가했다. 이어 누렇고 멀건 뭔가가 솟구쳐 내 다리에 화악 끼얹어졌다. 뜨끈뜨끈한 느낌과 함께 술지게미인지 구정물인지 모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뱃속 가득 까만 벌레가 기어다니고, 어떤 힘이 나를 갈기갈기 찢고 입을 틀어막는 동시에 코를 고추단지 속에 처박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등 뒤의 그 남자가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내게 말했다.

“어이, 어서 내빼라고. 아니면 가서 ‘주승마周升麻’를 찾든가.”

“주승마가 누군데요?”

“너가 방금 먹은 건 복어내장탕이야. 게다가 쇠마름술까지 마셨잖아. 그래놓고 목숨을 부지할 것 같아?”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술집을 뛰쳐나가 벽을 짚고 몇 집을 지나친 끝에 어느 나무 문 앞에서 고꾸라졌다.

3. 갈대 끝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

여인은 똑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했다. 먼지도 안 나는데 갈대이삭을 묶어 만든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댔고, 허리를 실룩이고 왼쪽, 오른쪽 어깨를 차례로 들먹대며 플라스틱 대야를 들어올렸다. 그런데도 대야에 가득한 물은 조금도 일렁이지 않았다. 각목을 못질해 만든 탁자 위의 작은 석유램프의 불꽃이 파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침상 위에, 아니 갈대 더미 위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움찔 움직이자마자 끼익 소리가 났다. 여기가 어디지? 아직 죽지 않은 건가?

“이게 세 번째 대야 물이에요. 당신 씻는 데 벌써 물을 두 대야나 썼다고요. 당신은 토했어요, 노란 쓸개즙에 고추, 야채잎까지.”

여인은 허리가 가늘고 엉덩이가 컸다. 그녀의 엉덩이가 흔들릴 때마다 체로 쌀을 칠 때처럼 어지럽고 침침한 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질긴 갈대 줄기로 짠 돗자리를 방의 발로 썼다. 그런 돗자리는 시골에서 보통 배추, 무, 면화를 말릴 때 쓴다. 바람을 막기 위해 돗자리에 싸구려 비닐 막을 씌워 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시로 발 뒤를 들락거렸는데 마지막에는 끓인 물을 가져와 보온병에 채우고 과자로 배를 채웠다. 그녀는 탁자 앞에 앉아 석유램프의 심지를 돋워 둥근 빛 무리를 만들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그런 옷을 입고도 어부 같지가 않네요.”

나는 그제야 내가 시골 사람들의 무명옷을 입고 있는 걸 깨달았다. 두 섶을 가운데에서 헝겊 단추로 잠그는 옷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몸이 훨씬 따뜻했다.

“그건 죽은 남편의 겨울옷이에요. 몇 번 안 입은 새 옷이에요.”

“당신이 나를 구했나요? 복어내장탕에다 술까지 마셨는데 구할 수 있었나 보죠?”

나는 물었다. 복어는 봄에 산란을 한 후 양쯔강에서 거슬러 올라온다. 둥팅호에도 먹을 수 없는 물고기가 있는 것이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주승마가 누구죠?”

나는 물을 마시고 음식을 조금 먹었다. 훨씬 몸이 편해졌다.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붉은 실로 촘촘히 신발 깔창을 박고 있었다. 바늘을 넣고 빼면서 때로는 머리칼에 꽂기도 했는데, 손동작을 따라 실이 흔들리며 아름다운 호를 그었다.

“여기가 어디죠?”

“메이탕완, 야오쟈오, 루디저우, 차치쟈, 귀무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데 저도 여기를 정확히 뭐라고 그러는지는 잘 몰라요.”

나는 시 환경보호국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그런 지명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느낌상으로는 퉁팅호 한가운데가 틀림없다는 판단이 섰다. 여기 퇴적 지대에는 갈대 밖에 없고 아무도 안 사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유랑민들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고기를 잡으며 사는 걸까? 아니면 갈대를 베며?

내 가분은 아랑곳 않고 여인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몇 년 전에 큰 홍수가 나서 3백여 리의 제방이 무너지는 바람에 물이 타오화산桃花山 기슭까지 밀어닥쳤어요. 피난민들이 개미떼처럼 많았죠. 이때 한 아가씨가 안후강安胡崗으로 피신했는데 산속의 옹기쟁이 사내가 밥을 줘서 그녀의 목숨을 구했죠. 그 아가씨는 ‘당신에게 보답할 게 없으니 제 몸을 드릴게요.’라고 했어요. 하지만 사내는 눈을 부릅뜨고 ‘이 아가씨가 나를 지옥에 보낼 생각이로군. 어서 가, 가서 가족을 찾아.’라고 했지요. 아가씨는 ‘우리 가족은 다 물에 빠져 죽었어요. 갈데가 없으니 저를 거둬줘요.’라고 애걸했답니다.

사내는 들은 체 만 체했어요. 그 아가씨가 무척 예뻐서 마음이 동하긴 했지만 자기는 가족이 있으니 그냥 가라고만 했죠.

그곳을 떠난 아가씨는 이듬해 다시 사내를 찾아 돌아왔어요. 사내는 자기 일만 하고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죠. ‘아저씨, 저를 모르시겠어요? 작년에 여기로 피신 온 저를 당신이 구했잖아요.’라는 말에 사내는 깜짝 놀랐어요. 일 년 만에 그녀는 추악하게 변해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피난 중에 나쁜 남자한테 강간을 당해 이 꼴이 되었어요. 다 아저씨 때문이라고요. 그때 나를 거둬줬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그녀의 원망에 사내는 할 말이 없었어요. 그냥 자기 일에만 매달렸죠. ‘아가씨, 운명을 받아들여. 그만 떠나라고, 나는 가마 문을 닫아야 해.’

아가씨는 새빨간 불을 보고는 사내에게 무릎 꿇고 절을 했어요. 그러고는 훌쩍 가마 속으로 뛰어들었죠. 사내는 부랴부랴 달려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요. 아가씨는 이미 다 타 버리고 말았어요. 사내는 가마를 봉하고 불을 때면서 몇날 며칠을 먹지도 마시도 않았어요. 가마를 열어 보니 아가씨가 뛰어든 곳에 단지 몇 개가 있었어요. 그중 나머지는 다 망친 물건인데 딱 한 개가 눈부시게 하얗고 조잡한 꽃무늬가 어른거렸어요. 그 무늬는 깊은 밤만 되면 아가씨의 모습이 되어 사내에게 방긋 미소를 지었죠. 사내는 울상이 되어 종일 고민만 하다가 결국에는 그 단지를 갖고 안후강을 떠났어요. 소문에 따르면 여기 호수의 사주沙洲에 그걸 가라앉혔대요. 그런데 그해, 한커우漢口에서 짐을 실은 배가 우기에 이곳을 지나다가, 사주 위 콘크리트 돈대에 부딪쳐 뒤집혀서 2리 밖 강이 갈라지는 곳에 가라앉았지 뭐예요. 그 배 선주는 화물에 깔려 죽었고요. 그런데 사람들 말로는 그 선주가 바로 그 아가씨를 강간한 남자였대요.”

이때 나는 여유로운 기분이었다. 여인은 이야기를 꽤 잘 지어냈다. 이런 이야기는 시의 문화국에서 꼭 수집해야 할 것 같았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겪어서인지 확실히 피곤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서 갈대 더미 위에 누우니 여인이 와서 이불을 덮고 옷을 벗겨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들이 한 벌 한 벌 가벼이 나부끼며 꼭 춤처럼 구김살이 탄력 있게 쫙 펴졌다가 접히기도 하고 비틀리거나 호를 그리기도 했다. 옷과 옷, 옷과 육체가 스치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반짝이며 의미심장하게 약동했다. 여인의 봉긋한 두 가슴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게, 하지만 또 약간 둔하게 바르르 흔들렸다. 램프 불빛이 물방울 같은 탁한 노란색으로 빛나며 그녀의 유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아연실색했지만 온몸이 나른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한 줄기 연기가 목을 태우듯 갈증이 심했다. 정신도 가물가물했지만 아직 약간의 의식은 남아 있었다.

“여기는 바람도 많고 습하고 차가운 곳이에요. 교미를 해서 남녀가 껴안고 온기를 주고받아야 음양陰陽이 자랄 수 있어요. 아니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녀의 눈빛이 측은해 보였다.

“나는 추워요, 당신이 필요해요.”

그녀는 섹스를 교미라고 불렀다.

이 여인은 누굴까? 나는 어째서 그녀의 갈대 침상 위에 있으며, 또 어째서 그녀가 말하는 지명들을 하나도 모르는 걸까? 정말 이상하군!

4. 어수 또는 예금

이튿날 아침 깨어나니 실내는 환하고 석유램프 아래에는 신발 깔창이 놓여 있었다. 갈대 발 너머로 이봐요, 하고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여인은 언제 이부자리에서 빠져나갔는지 집 안에 없었다. 나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발 뒤에는 고기잡이 도구들과 비린내 나는 통만 놓여 있었다. 아, 도롱이와 삿갓도 있었다. 그것을 보니 막 섬에 올라온 후 보았던, 고기바구니를 멘 그 남자가 생각났다. 문을 당겨 열어보니 갈대 묶음을 얼기설기 이은 간이문이 한 겹 더 있었다. 나는 갈대 묶음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하늘과 땅이 온통 하얗고 바람이 여기저기 하얀 공을 굴리고 있었다. 한밤중에 큰 눈이 내린 것이다. 이 지역에서 수십 년 만에 온 큰 눈인 듯했다. 먼 곳의 갈대 밭이 아치형의 눈 더미로 변해 있었다. 마을의 몇몇 집에서는 뜨거운 수증기와 파란 연기가 밖으로 새 나오고 가끔씩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락날락했다. 시야에 호수는 들어오지 않고 이미 막힌 도랑만 보였으며, 눈이 두텁게 덮인 도랑 언덕 위에는 드문드문 갈대 한두 줄기와 버드나무 가장귀만 눈에 띄었다.

핸드폰이 물에 젖어 고장난 탓에 어디든 가서 전화를 걸어야 했다. 가게에 가서 공중전화로 교환원과 연락해 배를 보내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또 먹을 것도 조금 사야 했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손가락으로 북쪽 모퉁이 쪽을 가리켰다. 거기 가니 담장에 ‘어수魚須’(물고기 수염을 뜻함-옮긴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대체 무슨 뜻일까? 담장에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정말 가게가 있었다. 자그마한 잡화 진열대가 있고 탁자 위에는 다이얼식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나머지 공간에는 비닐을 씌운 기다란 나무 탁자 위에 그물, 고기잡이 칼, 작살이 놓여 있었고 벽 모서리에는 고기 집게, 고기 바구니가 있었다. 그밖에 생선튀김용 기구와 화약도 있었다. 고기를 잡는 데 필요한 도구는 다 갖춰져 있는 셈이었다. 내가 아는 것 중에 유일하게 없는 것은 낚싯대뿐이었다. 또한 그 기다란 탁자는 중앙의 기둥에 기대어 있었는데 기둥 위에는 붓으로 역시 ‘어수’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불가사의했다. 어구를 파는 가게에 이렇게 유식한 이름을 지어 붙이다니, 그 이름은 어떤 고인高人의 존재를 알려주는 듯했다. 나는 공중전화의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참을 불러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점원 아가씨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전화는 먹통이에요. 여기에는 전화선이 없어요.”

“뭐라고요? 전화선이 없는데 전화는 왜 설치한 거죠?”

“촌장님한테 가 보세요. 거기엔 전화가 있으니까.”

아가씨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무시하고 과자와 라면, 전지 세 개들이 손전등을 샀다. 그밖에 라디오 같은, 외부 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전자 기기가 없나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소 절망했다. 큰 눈이 오는 날씨에 얼마나 더 여기 묶여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내 수중에는 현금 몇 백 위엔元밖에 없어서 당연히 아껴 써야만 했다. 점원 아가씨에게 카드로 계산할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내 카드를 이리저리 뒤집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건 처음 봐요.”

나는 혼자 웃었다. 여기에는 카드결제기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기가 없었다.

“여기 우체국이나 은행은 없나요?”

아가씨는 큰 눈으로 멀뚱멀뚱 나를 보았다. 나는 손짓을 하며 다시 말했다.

“편지 부치는 데 말이에요.”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종이상자를 더듬어 작은 쇠가죽 가방과 비닐봉지를 꺼냈다. 부칠 물건이 있으면 먼저 그 쇠가죽 가방에 담은 다음, 비닐봉지로 싸서 촌장에게 넘긴 후 배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치면 시간이 한참 걸리겠네요.”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 달에서 반 년쯤? 고기 잡고 새우 건지는 사람들이 급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고는 다른 곳에 저축소貯蓄所가 있다고, 나가서 모퉁이를 돌면 바로 있다고 말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눈이 그친 세상은 온통 한 덩어리였고 누런 개는 흰 개로 변해 버렸다. 눈이 유일한 사물이 되어 모든 사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다 흰색이어도 단계적으로 구분이 없지는 않았다. 수면, 도랑 언덕, 갈대 밭, 집 등은 흰 계단을 이루었고, 흩어져 있는 갈대나 나무 가장귀는 흰 요를 찢고 나와 반짝반짝 눈을 빛나게 했다. 눈 위를 밟으면 먼저 사삭, 그 다음에는 뽀드득 소리가 났다. 힘껏 밟으면 제법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호수의 이 퇴적 지대에서는 멋대로 뛰어다니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희고 보드라운 눈 밑이 늪일 수도 있었다. 설원에서 그런 함정에 빠지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모퉁이를 도니 두세 명의 아이들이 눈 더미를 헤치고 공터에서 놀고 있었다. 투호도 하고 사방치기 놀이도 했다. 모자를 쓴 아이가 던진 동전이 반짝이며 날아가 항아리 가장자리에 쨍 하고 부딪쳤다. 그 맑은 소리가 눈송이를 흩날렸다. 나는 그것이 청나라 시대 동전인 걸 알아보았고, 이어 그 위에 은화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로 다가갈 때는 또 청동 도폐刀幣가 날아왔다. 내가 의아했던 것은 그 애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마구 그 옛날 동전들을 던져댄다는 사실이었다. 명나라 동전도 있고, 동판(銅板: 청나라 말부터 중일전쟁 이전까지 동용된 구리 돈)도 있고, 오수전(五銖錢: 서한 시대부터 수나라 시대까지 쓰였던,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쓰인 동전)도 있고, 당연히 요즘의 니켈 동전도 있었다. 그 애들은 그 옛날 동전들을 손에 쥐고 쩔그렁거렸다. 어떤 것들은 지저분해서 누렇고 거무튀튀하며 무늬가 닳아빠졌으며, 또 어떤 것들은 안의 네모 구멍과 밖의 둥근 가장자리가 이가 빠져 있었다. 그 해묵은 것들은 눈밭에서도 여전히 찬란해 보였다. 돈도 흐르는 물처럼 사라질 수 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가치가 그런 동전들로 치환되면 확실히 영원히 지속되거나, 혹시 낡더라도 빛을 간직하게 마련이다. 투호, 사방치기 같은 고대의 놀이도 영원히 전해진다. 사람들이 어떤 놀이에 대해 전혀 무지해서 그 가치를 제거해야만 그 오래 된 방식은 새로운 형식이 된다.

이때 한 중년 남자가 저축소에서 나와 왜 저금을 못하게 하냐고, 이런 외딴 곳에서 돈을 갖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투덜거렸다. 나는 잠깐 기다려 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지폐 한 다발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저축소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직원에게 내 용건을 설명하자 옆에서 그 중년 남자가 웃는 게 아닌가. 여직원은 그곳에서는 돈을 저금만 할 수 있지 인출은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혹시 불법업소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자기들은 그곳에 원해서 저금을 한다고 말했다. 나는 여직원에게 왜 그 남자의 돈을 저금해 주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녀는, 그가 저금을 하려면 주승마를 찾아가야 한다고 답했다. 이번에도 주승마가 문제였다. 도대체 그가 누구냐고 남자에게 물었지만 그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여직원은 그곳에서는 인민폐(중국 화폐의 별칭)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인민폐는 전국 유일의 화폐인데 인민폐를 안 받으면 어떻게 저축소를 운영하느냐고 물었지만 여직원은 귀찮아하며 자기네는 장부 기록만 한다고 했다.

나는 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 돌아서서 그곳을 나오니 세 아이가 그 중년 남자를 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애들은 남자의 힘과 체격에 한참 못 미쳤다. 그때 모자를 쓴 아이가 허리춤에서 칼등이 두껍고 끝이 날카로운, 버들잎 모양의 자루 없는 고기잡이 칼을 꺼내 남자의 팔과 다리를 몇 차례 찔렀다. 화가 나서 당장 달려가 막으면서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나를 만류하며 자기 잘못이라고, 자기가 돈을 줬는데 그 애들이 받지 않은 것이니 그 애들을 탓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왜 여기에 저금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더구나 그건 좋은 일인데도 그들은 원치 않는데다 칼로 찌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 남자는 나를 밀치면서, 나는 이해를 못하니 묻지도 말고 누구에게 이 일을 발설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절뚝이며 다른 집 쪽으로 걸어갔다. 눈밭에 선홍색 피가 점점이 떨어졌다. 그것은 눈 속의 매화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가 발을 멈추는 곳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금세 응고되었다. 그것은 투명하고 영롱한, 피와 얼음의 조각이었다. 아마도 그 이야기 속 아가씨의 단지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

5. 까마귀 우는 눈밭

이곳은 어디인가? 주승마는 누구인가? 모두가 바삐 돌아가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바쁜 걸까? 사람들이 서로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게 너무나 무시무시했다. 나는 마을 서쪽을 따라 달음질쳤다. 눈밭에는 길이 없었지만 눈송이를 날리며 뛰어갔다. 뒤에서 뭔가가 쫓아오는 것 같았다. 모자를 쓴 그 아이가 칼을 들고 헉헉대며 따라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더 힘껏 뛰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어깨를 거는 느낌이 들어 더 뛸 수가 없었다. 눈보라가 속옷 안으로 파고들어 내장을 얼어붙게 했다. 피가 손과 다리 사이에서만 돌고 흉골 사이에서는 얼음조각이 되었다. 입김이 신속하게 서리로 변하고 두 입술은 이미 마비되었다. 나는 아예 눈밭에 나뒹굴고 말았다. 느닷없이 들토끼 한 마리가 옆을 뛰어가는 통에 놀라 식은 땀이 흘렀다. 멀리 갈대밭에서는 새 한 마리가 푸드덕 튀어나와 빙그르르 허공을 돌더니 화살처럼 설원을 스쳐갔다. 까악, 까악, 꼭 벌거벗은 아이가 얼음구멍에서 소리치듯이 울어댔다.

사람의 마음을 찢는 그 소리에 섬 전체가 뒤흔들렸다. 이 황량한 섬에 본래 길이 없는 건 그렇다 쳐도, 들판 전체가 눈에 덮여 청록색 빛을 발했다. 쥐와 들토끼야 멋대로 다닐 수 있겠지만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6. 매장 · 개미의 평생의 숙명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촌장밖에 없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연자주빛 섬은 여전히 또렷했고 저물녘 마을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다. 그들이 오가는 모습이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무 인형처럼 기계적이고 말도 없어서 유령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들은 온몸이 무거워 보이고 발도 치켜들지 않는데 발자국 소리가 났다. 마치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듯했다.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부랑자와 개미가 뼈 한 개를 두고 다투었다. 결국 부랑자가 뼈를 빼앗긴 했지만 이미 개미가 깨끗이 핥아먹은 뒤였다. 부랑자는 화가 나서 수많은 개미들을 눌러 죽였고, 이에 개미들은 다 함께 힘을 모아 그 엄청난 체구의 적을 상대하기로 했다.

부랑자는 개미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조금만 먹을 것을 구해도 잽싸게 빼앗아 먹었다. 배가 든든해진 부랑자가 움푹한 곳에 누워 햇빛을 쬐고 있는데, 개미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흙을 파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진 나그네는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개미들은 그를 매장하는 것이 자신들의 평생의 임무라고 말했다. 나그네는 경멸의 미소를 짓고는 자기는 한 잠 잘 테니 매장이 끝나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마을 정북쪽에 촌장의 집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마을 어귀까지 갔는데도 집은 보이지 않았다. 갈대로 지은, 나지막한 움막 한 채가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폭설 때문에 커다란 눈 더미가 돼 버렸다. 그런데 움막에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살펴 보니 한 사람이 드나들 만한 입구가 있고, 움막 지붕을 지탱하는 버드나무에 램프 한 개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움막이 나무를 둘러싸고 지은 건지, 움막을 지을 때 버드나무 목재를 버팀목으로 사용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움막 안에서 콜록콜록 소리가 들렸다. 희한하게도 거기에는 모기장이 쳐져 있고, 촌장이 침대에 누운 채 음침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기침을 할 때마다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갈대를 쌓아 만든 침대 주위에 자그마한 걸상 몇 개가 있었다. 거기에 앉으니 끼익끼익 소리가 났다. 나는 배가 뒤집혀서 전날 밤 섬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촌장은 담뱃대를 빨면서 훅훅 잎담배에 불을 붙였다. 침침한 불빛 속에서 나는 촌장의 침대맡에 정말 전화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에 연락해서 경찰 순시선을 파견해 환경보호국에 데려다 달라고 할 셈인데 전화기를 써도 될까요? 전화비는 지불하겠습니다.”

촌장은 우물우물 말했다.

“그럼…… 쓰시오. 에…… 에취! 전화는 걸 줄 아시오?”

속으로 전화도 못 거는 사람이 어디 있나 생각하며 다이얼을 돌렸다. 그건 건전지를 쓰는 장비였다. 수화기에서는 전류가 흐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몇 번을 불러봤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왜 교환원이 안 나오죠?”

촌장이 말했다.

“내가 교환원이오.”

촌장은 수화기를 넘겨받고서 송화기에 대고 내 사정을 간략하게 얘기했다. 정말 대화를 하는 듯했다.

“내일, 아, 내일 주승마를 시켜 돌려보내지요. 아,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에…… 에취!”

촌장은 내게 주승마를 찾으라고 했다.

“주승마가 누군데요? 어떻게 그 사람을 찾죠?”

“주승마는 당신이 섬에 오르고 난 뒤 첫 번째 집에서 복어탕을 먹던 그 사람이오. 아니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초조해 하지 마시오, 그 사람이 당신을 찾을 테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내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주승마는 짙디짙은 그림자로 나를 뒤덮고 있었지만 나는 줄곧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도 만날 수가 없던데요.”

“마을이 좀 커야 말이지.”

촌장은 또 마른 기침을 했다.

“그 사람이 가긴 어딜 가겠소? 이 섬은 백 리가 넘고 사방이 진흙탕이라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오. 늪에 빠지면 그대로 황천행이지. 이곳의 모든 건 그 사람 혼자 관할하오. 호수의 크고 작은 지류가 꼭 그물 같아서 길을 잃으면 빠져나갈 수가 없지. 오직 그 사람만이 당신을 내보내줄 수 있소.”

촌장은 무척 친절했다.

나는 감사를 표하며 돈을 지불하려 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새파란 눈에서 독기가 번뜩이고 유별나게 긴 두 개의 앞니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 낮은 탁자 위에 주저앉았다. 거기에는 아직 판이 안 끝난 장기말들이 깔려 있었다. 촌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돈은 필요 없소, 나랑 장기나 한 판 둬주시오. 당신이 단 급 실력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더욱 기가 막혔다. 그는 나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시내 아마추어 장기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었다.

“자, 말을 잘 깔아 보시오. 새로 한 판 둡시다.”

나는 불안해 하며 말을 깔았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벽에 기대고 있었다. 내가 말을 움직이는데도 그는 장기 얘기만 하고 있었다. 먼저 선수를 치자 그는 바싹 따라오기만 했다. 나는 그의 장기가 느슨하다고 느꼈지만 십여 수가 지나자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말을 죽이려는 포석이라는 걸 알았다. 일찍이 나는 천퇀陳摶 선생의 기보棋譜를 공부한 적이 있어서 승리의 묘책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안정적으로 판을 이끌어갔다. 우리는 갈수록 말을 놓는 속도가 느려졌고 촌장은 몇 번이나 허리를 구부렸지만 침대에서 내려오지는 않았다. 확실히 그는 실력이 대단했다. 번번이 내 공격을 격퇴했다. 서로 대치하면서 나는 그가 왜 침대에서 안 내려오나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이 노인은 표정도 못 봐주겠고 등도 굽었는데 굳이 기를 쓰고 이기려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 한 번 틈을 보여주자 그가 돌진해 들어와 내 급소를 치려 했다. 나는 차마 당할 수가 없어 다시 반격을 해서 평수를 이뤘다. 나는 이번 판은 비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내가 우세한 상태였다. 주인의 체면을 세워주려 한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에취, 에취, 기침을 해대면서.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입 꼬리가 비틀리고 표정이 쇠처럼 삭막했다. 스케이트날처럼 새하얀 치아는 언제든 사람의 목을 끊을 수 있는 톱날이 달려 있는 듯했다. 한참만에 그는 탁 하고 내 장(將: 중국 장기의 대장은 ‘장將’과 ‘수帥’이다 – 옮긴이) 앞에 말을 들이밀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몇 수의 고심 끝에 결국 병兵 두 개로 그의 수帥를 공격했다.

그가 말했다.

“젊은이, 장기 두는 사람은 손에 정을 둬서는 안 되네. 적을 끝장내지 않으면 후환이 끝이 없는 법이니까. 이만 가 보시오.”

그는 낡은 탁자 위에 무겁게 탁탁 담뱃대를 털었다. 밖에서 두 사람이 들어와 나를 배웅했다.

밖에 나온 후 나는 문득 섬에 전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전의 전화 통화는 가짜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촌장은 나를 속인 걸까!

7. 물과 기슭 사이 · 나루터

움막을 나오자마자 호되게 등허리를 얻어맞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어 여러 가지 둔기가 공격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간신히 버틸 만했지만 금세 정체 모를 몇 명에 의해 풀 더미 속에 처박혔다. 마른 풀의 칙칙한 냄새가 코를 찌르면서 누가 한 점 한 점 피부를 떼내는 듯한 통증이 발에서 전해졌다. 또한 뇌에서는 수천수만 마리의 붉은 피라니아가 선체腺體와 각질을 파고드는 것 같았고, 동시에 목 뒤의 근육이 당기면서 작은 벌레들이 오장육부를 갉아 먹는 느낌과 함께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통증이 퍼졌다. 나는 고통 속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이 섬에 오른 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들은 나를 용납하지 않는 걸까? 이미 내 머릿속에는 대충 짚이는 점이 있었다. 그들에 관해 생각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보이지 않게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나를 향한 살의였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그들의 공격 목표는 나일 수밖에 없었다. 섬을 둘러싼 여러 호수들은 조수와 물결이 일정치 않고 망망대해와 같아서 목표도 찾을 수 없고 의지할 데도 없었다. 황량한 사주로 이뤄진 섬도 온통 늪이거나 함정이어서 달아날 방향도, 경로도, 방법도 없었다. 이것은 거대한 악몽이었다. 기이한 세계에 잘못 빠져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달아나도 뒤에서 악마가 쫓아와 틈만 나면 검고 예리한 발톱으로 옷깃을 움켜잡았다. 벌써 내 몸을 나꿔채 쥐어뜯는 바람에 살 조각이 비닐처럼 날아다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피가 나지 않았다. 내 발 밑의, 자줏빛 핏덩어리 같은 진흙탕은 꼭 철조망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온통 지렁이 무늬로 갈라져 있었다. 그 무늬는 모두 털이 보송보송한 오얏나무 가시들이었고 그 끝은 하나같이 검붉은 색이었다. 내 피부는 꼭 두부처럼 꿰뚫리고 말았다. 그 검은 가시들이 내 발 밑에서 자라, 뼈를 뚫고 발등으로 솟아난 상태였다. 작은 가시 끝마다 송글송글 영롱하게 맺힌 핏방울은 새빨간 거품 모양이었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공포스럽기도 했다. 심장이 어지럽게 뛰다가 수많은 알갱이로 부서졌다. 어떤 것은 튀어 달아나고 또 어떤 것은 가슴 속에 뿌리를 내렸다. 형체 모를 걸레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어 아무리 입을 벌려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했지만 이것이 꿈일 거라고 생각해 힘껏 머리카락을 뽑고 손가락을 깨물어 보았다. 그런데 끔찍할 정도로 아팠다.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맙소사, 이걸 어쩌면 좋지! 내 몸은 땀인지 피인지 분간이 안 되게 흠뻑 젖어 있었고 이미 살을 에는 고통에도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안 돼, 달아날 방도를 생각해야만 해. 섬에 올 수 있었으니 섬에서 나갈 수도 있을 거라는 게 내 논리였다. 다만 나가는 길과 방법이 관건이었다.

이때 풀 더미에서 사사삭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자들이 마지막 독수를 쓰는가 싶어 긴장하고 숨을 죽였다. 손 하나가 내 몸을 더듬었다. 여자의 손이었다. 내가 꿈틀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어서 나와요. 새벽이 가까워지면 당신은 죽은 목숨이에요.”

나는 풀 더미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전날 밤 나와 껴안고 잤던 그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끌고 허리를 숙인 채 담장을 따라 마을 밖으로 걸어갔다. 동남쪽 모퉁이를 통해 마을로 들어온 기억이 났다. 거기 길이 있는 것이다. 도롱이를 입고 고기바구니를 멘 남자가 나를 인도해 온 길이었다.

“입을 다물어요. 당신이란 사람은 참 말이 많아요. 여기 사람들은 말수가 적은데.”

그녀는 몸이 가벼워서 나는 듯 성큼성큼 걸었다. 나는 죽어라 그녀를 붙잡고 따라갔다. 마을 어귀에 다다라 커다란 갈대 덤불에 기댄 채 여인은 말했다.

“당신은 여기 와서 죽을 짓을 했어요. 잠자코 있었으면 됐을 텐데 뭐가 잘났다고 정의로운 척한 거예요.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에요. 돌아가서는 더 이상 얘기를 꺼내면 안 돼요.”

그녀는 내 정수리를 탁 때렸다. 마침 혀가 윗니, 아랫니 사이에 끼어 있었던 나는 혀 한가운데를 무는 바람에 뭐라 말은 못하고 모호한 소리만 냈다. 그래도 안간힘을 써서 겨우 “주……승……마!”하고 발음했다. 죽어도 그것만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여인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왜 아직 기억하고 그래요? 빨리 가요! 수로를 따라가는 걸 잊지 말아요. 버드나무 그루터기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에요. 안 그러면 영원히 진흙탕에 빠지게 돼요. 호숫가에 닿으면 거룻배가 있을 거예요. 끝이 뭉툭한 배는 안 돼요. 꼭 양쪽 끝이 뾰족한 배를 찾아야 해요. 지금은 서풍이 부니까 하룻밤만 배를 저으면 아마 구조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뱀처럼 몸을 꼬며 마을 쪽으로 휘적휘적 돌아갔다. 나는 한참을 보고 있었는데, 왠일인지 그녀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나는 돌아서서 미친 듯이 뛰어갔다. 공처럼 굴러가다 몇 번이나 수로에 빠질 뻔했지만, 다행히 마름 넝쿨에 몸이 걸리고 질긴 쑥 덤불을 붙잡고 늘어진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눈밭이 온통 하얀 빛을 반사해서 버드나무 그루터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몇 걸음을 뛰다가 요령을 터득했다. 흰 눈 위에 푸른색을 띤 손바닥 만한 둥근 자국들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밟으며 뛰었다. 딱딱한 나무 뿌리들은 위치가 일정치 않아서 잘못 디디면 발이 빠질 게 뻔했다.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빨리 갈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어 필사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반대로 앞에서 누가 길을 인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경공이 뛰어난 무림 고수가 지나간 것처럼 눈밭 위에 어렴풋한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끝없는 호수와 기슭 사이에 다다른 것이 느껴졌다. 피는 이미 응고되었고 땀이 흘렀다. 핏자국에 땀이 얼룩질 때마다 상처가 아파왔다. 꼭 온몸이 끈적끈적한 액체에 담궈진 것 같았다…… 하지만 걸음은 계속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절망과 절망 사이에서 극한의 공포 속에 내달린 끝에 마침내 물가에 도착했다.

나는 한숨을 돌렸다. ‘물가’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삶과 죽음이 그 위에 떠 있는 셈이니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기슭’이라는 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거기에는 정말 거룻배들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속이지 않았다. 하지만 호숫가의 진흙탕이 골칫거리였다. 위에 갈대를 충분히 깔고 걸어야 겨우 물가의 거룻배까지 갈 수 있었다. 평평한 눈밭은 죄다 은빛의 눈꽃이어서 꼭 흰 비단처럼 보이지 않게 흔들렸다. 망설이던 나는 수로 가장자리의 갈대밭에서 갈대 한 다발을 뽑아 눈밭에 깔았다. 그러고는 다른 한 다발을 안고 그 위에 올라가 또 그것을 깔았다.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드디어 물가에 도착했다. 손만 뻗으면 배를 잡아당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 양쪽 끝이 뾰족한 배가 있을까? 쓱 살펴보니 정말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정신이 나갈 정도로 놀랐다. 어떻게든 시도는 해 봐야했지만 그 남자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마치 탑처럼 늠름했다. 맙소사, 더구나 그는 섬에 상륙하자마자 들른 첫 번째 집에서 나와 등을 지고 앉아 복어탕을 먹던 바로 그 남자였다.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난 터라 두렵지는 않았다. 그를 물에 빠뜨리기만 하면 이길 것도 같았다. 나는 거룻배에 올라 그의 배에 뱃전을 바짝 갖다대고서 소리쳤다.

“너는…… 왜 나를…… 죽이려는 거냐?”

혀가 뻣뻣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지만 의사는 전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늙은 귀신과 같은 부류는 아니야. 너는 배짱이 있더군, 감히 그자에게 장기를 이겼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어쨌든 너는 이곳의 비밀을 다 알고 있으니 그냥 보내줄 수 없어.”

나는 조용히 그가 나를 죽이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리를 두 배 사이에 걸치고 있다가 그가 달려들어 손을 뻗는 순간, 뱃전에 엎드려 삿대로 그의 다리를 후려쳤다. 성공이었다. 그를 물에 빠뜨렸다. 하지만 그는 물속에서도 힘주어 배를 밀었고, 나와 배는 진흙탕 위에 놓이고 말았다. 그 남자는 나는 듯 물속에서 솟구쳐 배 위에 선 다음, 나를 진흙탕 위에 던지고는 대나무 삿대로 내 두 발을 콱콱 눌렀다. 나는 선 자세로 진흙탕 속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 꼼짝없이 죽게 된 것이다. 이 순간, 나는 돌연 깨달았다.

“너, 너가…… 주승마로구나.”

그 남자는 냉소를 지었다.

“자기가 똑똑한 줄 아나 보군. 우리 이곳에는 주승마가 없어. 너, 너 자신이 바로 주승마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인과 촌장과 그 남자 모두 내게 주승마를 찾으라고 했는데 거기에는 호의와는 무관한 어떤 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절묘했다, 내가 바로 주승마라니. 하지만 대체 주승마가 무슨 뜻일까? 나는 이미 진흙탕에 목까지 빠진 상태여서 눈짓으로 의사를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삿대로 내 머리를 갈겼다.

“죽은 자는 비밀이 없어, 그렇게 많은 걸 알 필요도 없고.”

나는 완전히 진흙탕 속에 잠겼다. 주위의 눈이 그 야트막한 지점에 한데 모여 서서히 평평해졌다. 더구나 주름 한군데 없이 온통 하얗게 말끔해졌다. 하지만 그 대나무 삿대는 아직도 거기 꽂혀 있고 양쪽 끝이 뾰족한 거룻배도 호숫가에 대어져 있었다. 세 번째 날 새벽까지 그 황량한 섬에는 여전히 아무 기척도 없었다. 오직 그 여인만 마을 어귀에서 탄식을 했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젊은 남자가 뭐하러 이 무상도에 온 거냐고.”

8. 주승마

주승마는 일종의 식물이자 약초이다. 이처럼 사람 이름을 가진 약초는 꽤 많다. 예컨대 마금남, 진경검, 서장경, 고비, 당몽, 진지백, 황대극, 장적, 왕혜, 모각인, 문란수, 석장생, 백목향, 주락, 강리, 임란, 금기노, 호연지 등이 있는데, 식물도 사람의 작용과 마찬가지로 경시하면 안 된다. 주승마는 승마, 주마라고도 하고 ‘귀신얼굴 승마’라는 별명도 있다.

『식물도감』6권 부록: “승마는……주마라고도 한다.”

『본초경本草經』(초부草部 상품上品): “승마는 맛이 달고 기가 고르며 주로 백 가지 독을 푼다. 모든 귀신과 요괴를 죽이고 돌림병, 풍토병, 벌레독을 물리친다. 오래 복용하면 요절하지 않으며 가볍게 먹어도 오래 산다. 주승마라고도 하며 산골짜기에서 자란다. 승마의 학명인 Cimicifuga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Cimex는 빈대, Fugo는 도피로서 합치면 뜻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승마 속屬인데 승마의 학명인 Foetida는 악취를 뜻한다. 승마는 여러해살이 식물로서 그 특징은『고대식물명도감』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승마는 주로 열병과 두통을 치료한다. 열을 풀고 발진을 없애며 해독과 피를 맑게 하는 효능이 있다. 또한 배탈, 탈항, 피부병도 치료한다. 그 약효가 별로 쓸모있는 축에 못 든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약방에 가서 알아보길 바란다. 주승마를 찾은 이유를 말하자면, 사실은 작가가 중대한 부분에서 전환부로 넘어가기 위해 어떤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써 놓고 보니 가장 중요한 고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물에 대해 자세한 고증을 해야 했는데, 이것 역시 작가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다.

9. 전해질 수 없는 비밀에 관하여

전해질 수 없는—-

비밀(비밀의 비밀)에—-

관하여.

“지금 나는 펄펄 흩날리는 눈꽃을 보고 있다. 그것들은 녹아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하나의 비밀임을 알았다. 나는 더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 아멜리 노통,『오후 네 시』

2009년 설, 고도古都 베이징에서

해설


‘신新 도화원기’의 축조와 해체

김택규

<무상도>,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의 도가니 같은 이 소설과 맞닥뜨리자마자 떠오른 관련 텍스트는 역시 <도화원기桃花源記>였다. 둥팅 호의 암초에 배를 잃고 낯선 섬에 오른 ‘나’는, 무릉武陵의 도화림桃花林에서 길을 잃고 산 속 동굴을 통해 어느 선경仙境에 이른 어부를 연상시켰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섬마을 주민들은, 진나라의 전란을 피해 자기들끼리 수백 년 간 평화를 누려온 그 동굴 속 마을의 사람들을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무상도’(이 소설에서 ‘무상도’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작가의 명명일 뿐이다)는 도가적 유토피아인 ‘무릉도원’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디스토피아이다. 폐쇄회로 같은 섬마을, 구석구석 안 미치는 곳이 없는 권력의 억압적 시선, 모든 것을 좌우하면서도 신입자의 접근을 불허하는 권력의 핵심(‘주승마’로 상징되는), 이 모든 것의 총합은 결국 현대의 통제사회를 빗댄 부정적 암흑세계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2004년 4월, 어느 문학좌담회에서 작가가 밝힌 소설관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존재는 일종의 자연적 서술이다. 나는 전前서술에 대한 재서술을 하려고 하며, 이 재서술은 성찰과 질의의 서술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유사 이래로 세계에 발생해 온 모든 객관적 현상에 대해 더 이상 전적으로 믿지 않게 되었다. 그것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식을 의심하고 해체한 후 재창조해야 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메타서술이다. 자연적 서술은 재현의 상태이지만 나의 서술은 재발견이다. 사회, 역사에 대한 발견은 일종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며 일상생활의 인간과 사건, 심층적 심리 및 인격에 대한 재발견은 원형비평이다. 내게는 후자가 더 중요해 보인다.

‘재현’이 아닌 ‘재발견’의 서술, 이것을 작가는 ‘메타서술’이라 부르며 자신이 지향하는 ‘재발견’은 이데올로기 비판과 원형비평, 두 가지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무상도를 중국 민족의 정신적 유토피아인 무릉도원에 대한 부정적 패러디로 본다면 위의 발언은 이 작품을 해명할 결정적 열쇠로 읽힌다. 작가는 이데올로기 비판과 원형비평에 입각해 ‘신新 도화원기’를 축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작품 말미에서 약초인 ‘주승마’에 대한 고증과 짧은 창작노트를 부가함으로써 앞에서 애써 축조해 낸 무상도라는 음험한 세계를 스스로 해체한다. 사실 이런 수법은 2천년대 이후 작가가 여러 단편소설을 통해 꾸준히 시도해 온 일명 ‘본문-첨가문 서사체’이다. 평론가 왕이촨王一川은 이 독특한 수법에 대해 “본문에서 잘 갖춰진 이야기를 서술하다가 첨가문에서 보충과 해체를 가하는 서사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주승마’는 화자인 ‘나’가 때로는 복어독과 독주로 망가진 신체를 고치기 위해, 때로는 끊어진 외부세계와의 연락을 잇고 섬을 탈출하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하는 마을의 최고 권력자로 호명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니면서 동시에 ‘나’일 수도 있는 것으로 무화되어 버리고, 급기야 ‘첨가문’에 와서 작가는 그것에 대해 “중대한 부분에서 전환부로 넘어가기 위해 어떤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써 놓고 보니 가장 중요한 고리가 되고 말았다.”고 하여 작품 전체의 리얼리티를 해체시켜 버린다. 이러한 해체 행위는 역시 작가의 특정한 글쓰기 전략과 관계가 있다.

“나의 소설 창작은 순수감각적이다. 대강의 요점을 상정해 본 적이 없으며 백지 위에 인명과 지명 몇 개만을 적고 지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어떤 감각적 포인트를 찾으면 소설은 바로 자연스럽게 추진되며 인물, 스토리, 환경 모두 소리 없이 전개된다. 간혹 맨 처음 어렴풋한 아이디어가 있을 때도 있지만 마지막에 소설은 전혀 별개의 모습을 가지며 대부분의 소설들은 처음에 제목조차 없다.”

이쯤 되면 작가 류커가 중국 아방가르드 소설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집대성자이자 최후의 실천자로 꼽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 장르 특유의 문법을 해체하고 드러내 보이는 메타소설의 일환으로서 그 전개 방식은 작가의 ‘순수감각’과 자동기술에 기대고 있다. 물론 완전히 상호텍스트성과 절연한 작가의 순수감각은 있을 수 없기에 이 작품은 계속적으로 ‘장르의 기억’을 호명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익숙한 기대지평에 머물게 하지만 그 끝은 처절하게 해체된 텍스트의 폐허 그 자체이다.

‘무상無相’의 ‘상相’은 특징을 말한다. 따라서 무상은 어떤 특징에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어떤 원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공空’의 상태를 뜻한다. 무상도는 바로 그런 공간이다. 독자들의 시선을 끌며 특정한 이미지의 복합적인 공간으로 축조되었다가 단 한순간에 가장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해체됨으로써 자신과, 독자들의 기대를 ‘공’으로 돌려버리는 허무의 세계인 것이다

번역 해제 김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