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국제도시 장안
당나라의 장안은 세계의 수도였다.
이 칭호가 어울리는 곳은 장안을 빼고는 아마 고대 로마성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안은 서구의 많은 도시들처럼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길이 깔려 있지는 않았다. 총 면적이 로마성의 7배에 달했던 장안은 네모반듯했다. 선비족 천재 발명가 우문개가 설계하고 나중에 당나라인이 계속 확충한 그 도시는 매우 전형적으로 중국 제국의 기상과 위엄을 표현하였다.
그러면 장안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장안성 북쪽의 정중앙에는 황가에 속하는 궁성宮城이 있었다. 그 안에 황제의 태극궁太極宮, 태자의 동궁東宮, 궁녀들의 액정궁掖庭宮 그리고 궁정 사무처에 해당하는 내시성內寺省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궁성 남쪽은 황성皇城이었는데 태묘太廟와 사직단社稷壇이 있고 또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같은 중앙정부의 고급 관서도 있었다.
그것은 제국 정치의 중심이었다.
제국 정치의 중심을 구성하는 궁성과 황성은 서로 면적이 비슷했으며 동서 양측이 가지런하고 모두 반듯한 장방형이었다. 황성 북쪽에 담이 없어서 궁성과 황성은 3백 걸음 너비의 옆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으며 옆길 북쪽은 궁성의 남문인 승천문承天門이었다. 중요한 명절이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이곳에서 의식을 열었고 외국 사절단과 소수민족 추장의 접견도 이곳에서 행했다. 오늘날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 해당했다.
궁성의 남문인 승천문에서 출발해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朱雀門을 거쳐 장안 남문인 명덕문明德門에 도착하면 주작대가朱雀大街 또는 천가天街라고 불리던 곧은 대로가 나왔다. 천가는 너비가 150미터였고 양쪽 끝에 인도와 배수로가 있었으며 아름다운 버드나무도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여기를 중심축으로 삼아 장안성은 동서 대칭의 구조를 이뤘는데 동쪽의 만년현萬年縣과 서쪽의 장안현長安縣은 모두 경조부京兆府에 속했다.
천가 양측에는 각기 남북으로 뻗은 5갈래의 도로가 있었고 동서로 뻗은 14갈래의 길과 종횡으로 교차해 궁성과 황성 이외의 지역을 111개의 격자로 나누었다.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를 제외한 나머지 네모난 격자들은 모두 거주지였는데 동쪽이 54개, 서쪽은 55개로서 방坊이라고 불렸다.
방은 독립성과 폐쇄성이 매우 강했다. 그것들은 모두 담장과 문이 있었는데 큰 방의 문은 4개, 작은 방의 문은 2개였으며 하급 관리인 방정坊正이 아침에 문을 열고 저물녘에 문을 닫았다. 각 방 사이의 남북 간 거리는 모두 40미터 전후였고 방 안에는 각 집들로 통하는 거리와 골목이 있었다. 장안성 안에는 그렇게 큰 규모의 방들이 바둑알처럼 촘촘히 분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당시 성의 총 면적이 84제곱킬로미터에 달해, 오늘날 시안西安에 남은 옛 성의 9배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리 붐비는 느낌은 안 들었을 것이다.24
하지만 정말로 “수많은 집들은 바둑판 같았고, 열두 거리는 채마밭 같았다.”(百千家似圍棋局, 十二街如種菜畦)25
낙양성의 구조도 대동소이해서 역시 수많은 격자들의 집합체였다. 다만 궁성과 황궁이 서북쪽 모서리에 치우쳐 있었고 길과 방이 장안보다 적었다. 두 성을 비교하면 그래도 장안이 더 제국의 수도 같았다.
어떤 의도로 이런 구조를 만들었을까?
그 의도는 장안을 보면 더 명확히 나타난다. 즉, 황제가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중앙정부를 통해 천하에 군림하는 구도이다. 그리고 사농공상 등의 백성들이 영수와 최고 권력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하늘의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과 같다. 통일된 구조와 배치는 통일된 국가가 통일된 의지와 관리체계를 갖춰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앙집권적 대제국의 정치이념이 일목요연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런 구조는 심지어 혼혈왕조의 스타일을 구현하기도 했다. 그 바둑판같은 구조는 서주의 정전제井田制를 상기시키고 하나하나 스스로 체계를 이룬 방들은 또한 호인들의 부락을 연상시킨다. 물론 우문개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정말로 그랬다면 그것은 정전과 부락의 도시화였다.26
틀림없이 그것은 넘치는 재능과 넓은 도량을 필요로 했다.
재능은 우문개에게 속했고 도량은 이세민에게 속했다. 이세민이 아직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던 정관 초기에 투항한 돌궐인들을 1만 호 가까이 장안에 살게 한 것은 단지 도시의 수용 능력만 감안해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그 후, 이 황제는 나라가 부강해지면서 손이 더 커졌다. 통계에 따르면 성당 시기 홍려사의 국빈관에는 수십 개 나라와 민족의 사절이나 대표가 묵었으며 어떤 사람은 임무가 끝났는데도 안 돌아가고 수십 년을 눌러 살았다고 한다. 그 비용은 전부 홍려사가 부담했다.
그러나 당 제국은 안사의 난 이후로는 그 비용을 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재상 이필李泌은 물자 공급을 끊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사절들은 바로 정부에 고발장을 넣었다. 하지만 이필은 끄덕도 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불러 꾸짖었다.
“하늘 아래 당신들 같은 외교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회흘을 거치거나 뱃길을 택해 귀국하라. 정 남고 싶으면 당나라를 위해 일하고 봉록을 받든가. 어디 두고 보겠다!”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자 이필은 그들을 황궁 예하 부대인 신책군神策軍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황궁은 병력이 늘었고 홍려사는 매년 접대비 50만을 아끼게 되었다.
동시와 서시, 두 시장의 상인들도 그 일에 갈채를 보냈다.
동서, 두 시장은 장안의 상업 구역이었다. 대체로 동시는 국내무역의 중심이었고 서시는 국제무역의 중심이었다. 진귀한 보물부터 자질구레한 일상용품까지 온갖 상품을 동서, 두 시장에서 구입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물건을 산다는 말이 ‘동서’를 산다는 말로 바뀌었다. 오늘날 중국어에서도 ‘동서東西’는 물건을 뜻하는 단어인데(현대 중국어 발음으로는 ‘둥시’이다), 결국 ‘동서’는 본래 동서, 두 시장에서 사온 물건을 뜻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절과 대표들이 군에 편입된 것을 상인들은 왜 기뻐했을까?
그 ‘외국 손님’들이 툭하면 와서 외상을 졌는데도 ‘외교 관계’에 구애되어 독촉을 하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절과 대표들이 외상을 졌던 것은 국가 재정이 위태로워 홍려사의 보조금이 제때 안 나왔기 때문이다. 당나라가 외국 손님에게 지불을 미루면 외국 손님은 가게에 지불을 미뤘다. 하지만 가게는 나라를 상대로 그럴 수가 없었으니 연일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란이 끝난 뒤의 혼란한 현상일 뿐이었다. 성당 시기의 장안은 그래도 화려하고 번화했다. 어느 이야기를 보면 당 현종 천보 9년(750), 정륙鄭六이라는 사람이 거리에서 절세미녀와 마주쳤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함께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그는 방문坊門에서 떡을 파는 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자기가 사랑에 빠진 미녀가 여우귀신이라는 것을 알았다.28
그 아름답고 착한 여우귀신은 이민족 여성의 예술적 형상이 아니었을까?
사실 여우귀신은 장안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국제화된 다른 도시들, 예를 들어 낙양, 양주揚州 그리고 하서주랑(河西走廊. 동쪽 오초령烏鞘嶺에서 시작해 서쪽 옥문관에 이르는, 약 900㎞ 길이의 좁고 긴 평지. 황하의 서쪽에 있어서 ‘하서’라 명명되었다)의 양주(凉州. 우웨이), 감주(甘州. 장예張掖), 숙주(肅州. 주취안酒泉), 사주(沙州. 둔황)에도 있었다. 서북쪽의 그 도시들에서는 불교가 낙타 방울 소리를 따라 인도어, 페르시아어, 소그드어, 돌궐어, 토번어로 각 민족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다.
가장 전형적인 곳은 역시 광주廣州였다.
광주는 손권의 시대부터 중국의 중요한 통상 항구가 되기 시작했고 당나라 때에 와서는 한층 더 이민족 상인들이 운집했다.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감진鑒眞 법사는 페르시아, 인도, 스리랑카와 남해 및 동남아시아 각국의 상선들을 보았다. 사산 왕조가 멸망한 뒤로 아랍인들이 더 많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랍의 배는 여전히 페르시아의 배라고 불렸고 인도양에서 통용되던 말도 페르시아어였다. 이는 육로에서 소그드어가 통용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29
각국의 선박들이 광주 항에 꽉 들어찼다.
당나라는 존중과 보호와 우대의 정책을 제공했다. 그 호상胡商들은 자신들끼리 번방蕃坊에 머물렀고 번방의 책임자를 통해 관청의 관리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풍습을 유지해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는데 심지어 일정한 자치권까지 얻어 내부의 갈등을 처리했다. 그래서 건물의 스타일도 전부 아랍식이었다. 남방의 풍경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더해져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한족과 이민족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당 태종의 주장이 충분히 현실화됨으로써 광주에 사는 외국인들은 당나라를 자신들의 나라로 보았다. 그래서 황소黃巢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광주 방어전의 최전선에 섰다. 결국 12만의 외국인이 죽었는데 거기에는 무슬림, 기독교도, 유태인이 다 포함되었다.
종교 분쟁은 잠시 미뤄졌다. 그때 그들은 모두 당나라인이었다.
양주는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경항대운하로 부유해진 양주의 상징은 시인과 미녀 그리고 페르시아인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사산 왕조의 멸망 후 중국으로 도망쳐 객지 생활을 했지만 하나같이 백만장자였다. 당시 위조 상품의 별칭이 ‘가난한 페르시아인’이었는데 한 마디로 페르시아인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호주머니가 가벼우면 “아름다운 춘삼월에 양주에 가기”(煙花三月下揚州)가 힘들었다. 상업도시의 밤은 사치의 극을 달렸다.30
그런 까닭에 두목은 양주에서의 10년을 잊지 못했고, 장원을 두고 다퉜던 서응과 장호도 다시 양주에 관한 시를 써서 겨뤘다. 장호는, “거리와 시장이 십 리나 이어졌고, 달 밝은 밤에 다리에 서서 신선을 보네.”(十里長街市井邊, 月明橋上看神仙.)라고 했고 서응은, “천하의 달 밝은 밤이 셋으로 나뉘면, 둘은 할 수 없이 양주의 것이네.”(天下三分明月夜, 二分無賴是揚州.)라고 했다.
이번에도 장호는 서응에게 패한 듯하다.
이밖에 촉금(蜀錦. 오늘날 쓰촨 지방에서 생산되던 채색 비단)이 많이 나던 익주(益州. 청두成都), 중계지이자 집산지였던 홍주(洪州. 난창南昌) 등도 다채로운 곳이었다. 그 도시들은 물론 저마다 특색이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역시 거리에 호인들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세계 각국의 상인, 은행가나 고리대금업자, 외교관, 학자, 탐험가, 선교사를 끌어들인 것일까? 단지 비단과 차, 그리고 손님의 뜻을 잘 헤아리는 기루의 여자들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