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별종 제국
당 선종宣宗 대중大中 연간에 이언승李彦升이라는 사람이 장안에서 과거시험을 보고 진사에 급제했다. 그때는 수 양제가 진사과를 설치한 지 벌써 2세기가 다 된 시점이어서 사실 그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직까지 언급되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이언승이 아랍(대식大食)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수와 당은 모두 세계 제국이자 혼혈 왕조였다. 장안성 안 거리에는 이민족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예를 들어 현무문의 변에서 이세민을 적극적으로 도운 위지경덕은 우전국于闐國 왕족의 후예였다. 우전국은 지금의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허톈시和田市에 있었고 위지 가문은 틀림없이 한족화된 이민족이었을 것이다.
당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안록산安祿山도 그랬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중앙아시아 이슬람민족의 혈통인 강국康國 사람으로서 본래 성이 강康이었다고 한다. 안씨 성은 양부였던 안파언安波偃의 성을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또 안국安國 사람이기도 했다.1
안국은 어디에 있었을까?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 있었다. 강국은 또 어디에 있었을까? 역시 우즈베키스탄에 있었고 도읍은 지금의 사마르칸트에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두 나라의 국왕은 본래 같은 민족으로서 소그드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록산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혈통의 순수성이 사라진 듯하고, 더구나 그의 어머니는 돌궐인이었다. 그래서 구당서에서는 아예 그를 가리켜 ‘잡종 오랑캐’(雜種胡人)라고 했다.2
사실 종족에 대한 이런 편견은 무의미했다. 왜냐하면 양씨의 수나라, 이씨의 당나라 그리고 수나라 이전, 우문씨의 북주조차 모두 혼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세 왕조의 황제들은 서로 혈연관계가 있었는데, 더군다나 모두 한 이민족 남자와 관련이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독고신獨孤信이었다.
독고신은 역사상 가장 딸을 잘 시집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큰딸은 우문태의 아들인 북주 명제明帝 우문육 宇文毓에게 시집을 갔고 넷째 딸은 당 고조 이연의 부친, 이병李昞에게 시집을 갔으며 일곱째 딸은 수 문제 양견에게 시집을 갔다. 세 왕조가 모두 그의 사위들의 것이었으니 이런 장인은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했다.
그런데 독고신이 어느 민족이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구는 그가 흉노였다고 하고 누구는 그가 선비였다고 하며 또 어떤 학자는 그가 돌궐이라고 한다. 유일하게 밝혀진 것은 그의 가문이 북위와 같은 시기에 흥성하였고 선조가 북방 유목민족의 추장인 복류둔伏留屯이었다는 것뿐이다. 독고신 본인은 우문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3
이민족이거나 혼혈이었던 독고신은 잘생기고 대범해서 군에서는 그의 성에 젊은 미남이라는 뜻의 ‘랑郞’을 덧붙여 ‘독고랑’이라고 불렀다. 옛날에 손책과 주유가 손랑, 주랑이라고 불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독고신이 사냥을 마치고 말을 달려 성으로 돌아왔는데 바람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모자가 비뚤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이 돼서 보니 온 성의 남자들이 그처럼 모자를 비뚜로 쓰고 있었다.4
그는 북주의 주유였다.
장수의 가문에서 호랑이 같은 딸이 나오는 법이니, 독고신의 딸들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양견의 독고 황후는 자기가 낳은 다섯 아들 외에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못 낳게 했다. 이는 그녀가 14세에 시집을 왔을 때, 양견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독고 황후는 일부일처 관념의 수호자가 되었으며 남편과 관계를 가진 여자를 서슴없이 죽이기도 했다.
그 일은 독고 황후가 50세가 다 되었을 때 일어났다. 당시 황제 폐하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수 문제는 비분에 가득차 홀로 말을 타고 궁정을 빠져나가 무작정 20여 리나 산길을 달렸다고 한다. 이에 놀란 재상 고경과 양소가 쫓아가서 말을 막고 애걸복걸하고 나서야 그는 궁으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짐은 존귀한 천자인데도 자유를 얻지 못했다!”5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독고 황후는 수 문제의 현명한 내조자였다. 그녀 본인은 정무 능력이 뛰어나 양견의 잘못된 정책결정을 적잖이 바로잡곤 했지만, 자기 가문이 대권을 장악하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거나 법을 넘어서는 은혜를 베풀지도 않았다. 한번은 수 문제가 죽을죄를 지은 그녀의 외가 친척을 용서해주려고 했는데 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
“국가의 일인데 어찌 사적인 관계를 고려하겠습니까?”
이 일로 그녀의 친척들의 불만을 샀는지, 또 다른 외가 친척이 무술巫術을 이용해 그녀에게 저주를 걸려 했다. 그 일이 터진 뒤, 독고 황후는 사흘간 단식을 하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그자가 저주로 해치려던 사람이 백성이었다면 당연히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게 아니고 단지 첩이었으니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십시오, 폐하.”
이처럼 독고황후는 빼어난 여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독고 황후가 당 고조 이연의 친이모였다는 것을 또 잊지 말아야 한다. 이밖에 당 고조의 두竇 황후와 당 태조의 장손 황후도 모두 선비족이었다. 장손 황후의 조상은 성이 탁발이었는데 종실의 수장을 맡아 성을 장손으로 바꾸었으며 두 황후의 숙부는 그 유명한 북주 무제 우문옹宇文邕이었다. 이렇게 수당 양대의 황족은 일찌감치 대대로 피가 섞여 이민족인지 한족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7
아마도 이 원인으로 인해 수당은 별종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 제국이 주로 3가지 범주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첫 번째 범주는 진나라,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처럼 화하華夏민족이 세운 것이다. 비록 송나라인과 명나라인은 이미 순수한 한족은 아니었지만, 또 양한 사람들도 진즉에 피가 섞이긴 했지만, 그래도 문화심리 면에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스스로 화하이며 한족이라 생각했다.
이 범주를 ‘화하 왕조’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 밖의 두 범주는 다른 민족이 세운 제국인데, 그중 하나는 침투 왕조(Dynasties of Infiltr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 왕조(Dynasties of Conquest)이다. 전자는 오호와 북위이고 후자는 원나라와 청나라다. 침투에서 정복으로 바뀐 것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변화였다.8
수당은 소수민족으로서 화하에 침투한 것이 아니었고 정복자로서 중원의 통치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통치자는 혼혈아였는데도 역시 화하의 정통임을 자처했다. 당나라의 천자는 더욱이 이중의 신분을 소유했다. 대내적으로는 당의 황제, 대외적으로는 천카간으로서 주변 민족들에 대해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아마도 혼혈 왕조(Dynasties of Hybrid)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중국민족에게 혼혈 왕조의 수립은 의미가 컸다. 우리는 화하민족의 전통 관념이 역대로 “우리 민족이 아니면 그 마음도 필히 다르다”(非我族類, 其心必異)였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피가 섞인 뒤로는 도대체 누가 “우리 민족이 아닌지”도 모호해졌고 본래 이민족 혈통을 가진 당나라 왕조는 더더욱 그런 구분에 연연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 태종은 포부가 크고 도량이 넓어, 새로운 민족정책이 정관 연간에 탄생했다.
정책은 새로웠지만 수단은 옛것이었다. 즉, 은혜와 위험을 병행하였다. 단지 한 무제는 무력에 호소하는 것을 더 선호했지만 당 태종은 가능한 한 은혜를 베풀었다. 예컨대 공주와 종실의 여성을 이민족에게 시집보내고, 변경의 무역을 개방하고, 이민족의 추장을 조정으로 불러 직책을 맡기고, 이민족의 자제들이 장안으로 유학을 오도록 장려했다. 그리고 이민족 사람들이 임명, 상벌, 복지 등에서 당나라의 백성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미羈縻정책이었다.
기미가 무엇일까? 기는 말의 굴레이고 미는 소의 고삐인데 이민족에 대한 기미 정책은 사실 연 날리기와 비슷했다.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 같아도 통제의 끈은 놓지 않았다. 구체적인 방법은 이랬다. 우선 당나라에 귀속된 변경의 소수민족 지역에 지방행정 단위를 개설했다. 큰 것은 도독부都督府, 중간 것은 주州, 작은 것은 현縣이었고 각기 기미부, 기미주, 기미현이라 불렀으며 약칭은 기미주였다. 부의 도독과 주의 자사는 현지의 카간과 추장에게 맡겼다.10
하지만 제국의 임명을 받은 추장은 반드시 카간이라는 칭호를 포기해야 했고 기미주 위에는 또 한족이 장관을 맡는 도호부都護府를 만들어 제국 중앙정부를 대표해 주권을 행사하게 했다. 이것은 주변의 크고 작은 칸국과 부락을 죄다 당나라의 군현으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산적 두목 같은 이민족 수령들이 과연 그것을 원했을까?
원했다. 왜냐하면 그 정책이 동돌궐 패전 후에 대규모로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반 주현과 달리 기미주의 장관은 세습이 가능했다. 그들은 본래 부락민이었던 이들을 계속 통치했고 거둬들인 세금도 원칙적으로는 알아서 처리했으며 생활 습관과 종교 신앙도 과거와 동일했다. 당나라는 그들의 안전까지 책임지고 보장해주었다. 이것은 패전국과 속국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개명 전제였다.11
개명 전제가 폭정보다 나았고 기미정책은 크게 성공했다. 이에 대해 당 태종은 매우 만족했다. 정관 21년(647) 5월, 그는 취미전翠微殿에서 담화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중화를 귀하게 여기고 이적夷狄을 천하게 여긴 유래가 이미 오래됐는데 오직 짐이 둘을 하나처럼 사랑해 각 민족 백성들이 다 짐을 부모처럼 여긴다.”12
이것은 당 태종의 자화자찬만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기쁘게 그를 ‘중화와 이적의 부모’라고 칭한 사람들이 정말로 많았다. 어쨌든 이세민의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내는 다 한족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둘을 하나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꼭 가식과 정치적 모략만은 아니었다. 비록 화기애애한 분위기 뒤에 깊숙이 도검의 그림자가 숨어 있기는 했지만.13
하지만 민족 단결의 국면이 어쨌든 조성되었고 문화 교류의 통로도 이미 열렸기 때문에 이제 다채롭고 포용적인 대당의 면모가 잇달아 드러날 차례였다.
그러면 먼저 서북 지역을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