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설古今小說- 심소하가 출사표를 발견하다沈小霞相會出師表 1

심소하가 출사표를 발견하다 1

애오라지 서재에 앉아 고금의 도서를 읽노라니,
우연히 발견하는 기이한 이야기들 사람 마음 감동시키는구나.
충신이 외려 간신의 계략에 빠지니,
곤경에 빠진 영웅 때문에 눈물 흘려 옷깃을 적시네,
패옥 다는 인끈을 풀지 마시게나, 비녀를 던지지 마시게나.
세상사 어둠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지 않던가?
길흉화복은 결국 인과응보,
하늘은 바름과 그름을 제대로 가르더라.

때는 바야흐로 우리 왕조 명나라 가정嘉靖(1522-1566) 연간 성스러운 임금이 다스리시매 바람은 때맞춰 불어오고 비는 알맞게 내리매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은 평안하였다. 하나 간신 하나를 잘못 등용하는 바람에 조정이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도다. 그 간신이 누구던가? 그 간신의 성은 엄嚴이요, 이름은 숭嵩이요, 호는 개계介溪로 강서 분의分宜 사람이라. 나긋나긋한 성격으로 천자의 총애를 입고 환관들과 내통하여 천자의 뜻을 먼저 헤아려 비위를 맞추었다. 재초齋醮를 정성껏 모시고 천자를 칭송하는 글을 지어 바쳐 마침내 벼락출세하게 되었다.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유순하고 조심성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의심 많고 야박하였다. 엄숭은 대학사 하언夏言을 참소하여 쫓아내고 자기가 대신 그 재상자리를 차지하였다. 엄숭의 지위가 높아지고 권세가 막강해지니 조야의 사람들이 감히 엄숭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엄숭의 아들 엄세번嚴世蕃 역시 태학생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공부시랑工部侍郎으로 발탁되었다. 엄세번은 아비 엄숭보다 더욱 교활하고 악독하였다. 하지만 나름 자잘한 재주를 갖추고 있었고 박람강기하여 꾀가 많고 셈이 빨랐다. 엄숭은 오직 아들 엄세번의 말만을 신용하여 대소사를 모두 엄세번과 상의하였으니 조정에는 ‘큰재상’, ‘작은재상’이란 말이 돌았다. 이들 부자는 서로 손을 잡고 악행을 저질렀으니 권세를 믿고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을 자행하였다. 관리 중에 현달하고자 하는 자들은 엄씨 부자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고 기꺼이 양아들로 자처하였고 그런 자들이 결국은 높은 자리에 올랐다. 별로 재주도 없는 자들이 구름떼처럼 엄씨 부자주위에 몰려들었고 과거 시험장이든 관청에든 모두 엄씨 부자의 심복들로 가득 찼다. 엄씨 부자에게 맞서는 자들은 즉각 화를 입었다. 크게 밉보이지 않는 자들은 곤장을 맞거나 유배를 당했고 크게 눈 밖에 난 자들은 거침없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살벌하기가 그지없었다. 정말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따따부따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관룡봉關龍逢1), 비간比干2)과 같은 나라를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충신이 아닌 바에야 나라가 도탄에 빠지는 것을 그냥 지켜볼지언정 어찌 엄씨 부자에게 대들 것인가? 당시 무명씨가 비분강개하여 신동시神童詩를 이렇게 개작하였다.

어려서 힘들게 공부하지 말지라,
나중에 돈 벌면 벼슬자리 살 수 있으리니.
그대 엄재상을 보아라,
돈 있는 자만 골라 등용하지 않더냐!
아울러 또 이렇게 개작하였으니:
천자는 권세 있는 자를 중용하노니,
괜히 입 열어 화를 자초하지 말지라.
이런저런 거 다 필요 없으니,
그저 엄씨 부자에게 잘 보이면 최고라네.

엄씨 부자가 천자의 총애를 믿고서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여 그 죄악이 온 산하를 덮으니 하늘이 충신을 내어 기기묘묘한 행적을 보이게 하고 마침내 천하에 떠들썩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몸은 죽었으되 이름은 만고에 날리게 되도다. 정말로:

집안에 효자가 많으면 부모가 평안하고,
나라에 충신이 나면 세상이 태평하도다.

그 충신의 이름은 심련沈鍊, 별명은 청하靑霞, 절강성 소흥 출신이다. 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였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주고자 하는 의지가 넘쳤다. 어려서부터 제갈량을 존경하고 제갈량이 지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며 바치는 글이라는 의미의 「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를 애송하고 수백 번을 베껴 쓰고 또 베껴 써서 집 벽면을 다 도배할 지경이었다. 매번 술을 마실 때마다 큰소리로 암송하였다. 그러다 “이 한 몸 나라 위해 기꺼이 바치리니 오직 죽어서야 그만두리라”하는 구절에 이르면 장탄식을 하고 격정에 빠져 방성대곡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수군대었다. 가정 무술년戊戌年 그러니까 1538년 그는 진사시에 급제하여 현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세 곳에서 현령을 지냈다. 그 세 곳은 바로 율양溧陽, 장평莊平, 청풍淸豐이었다. 그는 이 세 곳에서 맡은 바 일을 너무도 잘 처리하였다. 정말로:

휘하의 아전들이 모두 법을 준수하게 만들고,
본인은 청렴하여 절대 뇌물을 받지 아니하고.
지역의 권세가들을 제대로 단속하니,
백성들 모두가 평안하도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아부할 줄을 모르는지라 마침내 천자 호위부대의 문서담당관으로 좌천되었다. 서울로 들어온 그는 엄씨 부자의 온갖 추행이 더 이상 봐줄 수 없는 정도임을 알게 되었다. 마음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어느 날 공식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엄세번의 오만방자한 모습이 도저히 눈뜨고는 못 봐줄 정도임을 목도하게 되었다. 엄세번은 술을 마시다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일쑤며, 커다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고는 다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겐 벌을 내렸다. 이 술잔은 족히 한 말은 들어갈 정도로 컸으나 양쪽에 들어선 사람들은 엄세번의 위세에 눌려 감히 못 마시겠다고 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좌중의 마급사馬給事는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였다. 엄세번이 일부러 마급사 앞에 술잔을 갖다 대라 하였다. 마급사가 재삼재사 봐 달라 하였으나 엄세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급사는 술잔에 입을 대자마자 벌써 얼굴이 빨개지며 미간이 굳어지며 곤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엄세번은 직접 마급사에게 다가가 마급사의 귀를 잡고는 술잔을 들이부었다. 마급사는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몇 입을 마셨다. 술을 마시진 않았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으나 이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하늘이 아래로 내려오고 땅이 위로 치솟는 듯하고 사방의 벽이 빙빙 돌고 머리는 자꾸 아래로 처지고 다리는 하늘로 향하여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엄세번은 이 모습을 보고 깔깔대며 손뼉을 쳐댔다.

심련이 이 꼴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소매를 털고 일어나 그 술잔을 뺏어들고 가득 술을 따라 엄세번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하였다.

“마급사가 선생이 따라주는 술을 다 마시지 못하고 취해버려 실례를 범했습니다. 소인이 마급사를 대신하여 선생에게 술잔을 돌려드리겠소이다.”

이 말을 듣고 엄세번은 당황하여 손을 휘저으며 사양하였다. 그러나 심련은 정색으로 하고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이 술잔을 다른 사람에게 마시도록 하였다면 당신도 마셔야 하는 거 아니요.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두려워하는지 모르나 나 심련은 그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심련은 바로 엄세번의 귀를 잡고서 엄세번에게 술을 마시게 하였다. 심련은 탁자위에 술잔을 집어 던지고 아까 엄세번이 그랬던 것처럼 손뼉을 치면서 가가대소하였다. 자리를 함께하였던 관리들은 놀라서 얼굴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찍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엄세번은 취했다 핑계 대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심련은 그런 엄세번에게 신경도 쓰지 아니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탄식하였다.

“아하, 한왕실과 반역자들이 어찌 함께할 수 있으랴! 한왕실과 반역자들이 어찌 함께할 수 있으랴!”

사실 이 구절 역시 「출사표」에 나오는 대목이었다. 심련은 엄씨 부자를 조조 부자에 비긴 것이다. 사람들은 엄세번이 행여 들을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땀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심련은 그런 것들에겐 전혀 신경도 쓰지 아니하고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켜다가 술기운이 오르자 자리를 떴다. 오경 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난 심련은 생각에 잠겼다.

“엄세번 이 인간이 나 때문에 억지로 술을 마시게 되었으니 분명 이 일을 가만히 넘기지 아니하고 나한테 해코지를 하려고 들것이라. 기왕에 시작한 거 반드시 끝장을 봐야지. 궁리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일단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낫겠네. 엄씨 부자의 패악질이 이미 하늘과 사람들의 공분을 샀도다. 그들 부자는 조정에서 크게 신임을 받고 있고 나는 그저 하급관리에 불과하니 섣불리 얘기하였다간 본전도 못 찼을 것이니 일단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손을 써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무턱대고 기다릴 수가 없구나. 장량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을 철퇴로 공격하였던 일이 있지 않은가!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뭇사람들에게 의기의 본을 보이지 않았던가!”

베갯머리에서 임금께 올릴 상소를 구상하였다. 해가 밝아올 무렵까지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나 향을 사르고 손을 씻은 다음 마침내 상소를 적기 시작하였다. 상소에 엄씨 부자가 권세를 믿고 뇌물을 받아 챙긴 일, 온갖 극악무도한 일을 행한 것,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망친 대죄를 저지른 것 등등을 소상히 적고 그들을 죽여 천하에 사죄케 하라고 적었다. 임금이 그 상소를 읽고서 이렇게 성지를 내렸다.

“심련은 조정의 대신을 함부로 비방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나 높이고자 하였으니 호위부대에 보내어 장형 1 백 대에 처할 것이며 삭탈관직하고 변방으로 보내노라.”

엄세번은 호위부대 장교에게 사람을 보내어 심련을 심하게 곤장을 쳐서 아예 죽어버리라고 일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책임자 육병은 나름 심지가 곧은 사람이고 평소 심련의 절개와 의리를 존중하고 있었던 자였던지라 오히려 부하직원들에게 부탁하여 심련에게 곤장을 심하게 치지 않도록 손을 써두었다. 덕분에 심련은 곤장을 맞아도 그렇게 심하게 맞지 않았다. 호부에 가서 삭탈관직되어 평민이 되었음을 신고하고 보안주保安州의 주민으로 신고하였다. 심련은 그날로 짐을 꾸려 처자식을 데리고 수레 한 대를 빌려 도성문을 나서서 보안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본디 심련은 부인 서徐씨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었다. 장남 심양沈襄은 과거 지방시험을 합격하여 일정하게 학비를 보조받는 수재秀才였으므로 그냥 소흥부에 남아 있었다. 둘째 심곤沈袞, 셋째 심포沈褒는 부친의 임지를 쫓아와 공부하고 있었다. 막내 심질沈帙은 이게 겨우 돌을 지났다. 이렇게 다섯 식구가 길을 떠나니 만조백관들은 엄씨 부자의 눈이 무서워 아무도 배웅하지 나오지 않았다. 시 한 수가 있어 이를 증거하노니:

한 통의 상소가 천자의 비위를 건드니,
슬프다 선비는 짐을 꾸려 변방으로 향하는구나.
배웅하러 오는 자 아무도 없음은,
권세가의 비위 거슬려 화를 입을까 걱정함이라.

보안주를 향하여 가는 길이 험난하고 고생스러웠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겠다. 아무튼 그래도 별 탈 없이 보안주에 당도하였다. 보안주는 선부宣府에 속한 아주 궁벽한 곳으로 번화한 내지와는 비할 수가 없었다. 눈에 띄는 건 모두 낯설고 처량하였다. 게다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려 하늘땅이 온통 거무튀튀하니 쓸쓸한 기운이 더욱 깊었다. 누구 집이라도 하나 빌려 살아야겠는데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어디로 가서 몸을 쉬어야 할지 막막하였다.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던 바로 이 때 작은 우산을 쓴 사람 하나가 걸어오다가 길옆의 짐을 보고 또 심련을 바라보더니 심련의 범상한 모습을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나리 성씨는 어떻게 되십니까, 어디서 오셨나이까?”

“나는 심가고, 서울에서 왔소이다.”

“천자 호위부대 문서담당관 심련이 천자께 상소를 올려 엄씨 부자를 처단하라고 요구하였다는데 나리가 바로 그 심련이오?”

“그렇소이다.”

“소인이 오래전부터 나리를 앙모하였소이다.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 예서 멀지 않은 곳에 소

의 집이 있으니 나리께서는 식솔들과 함께 잠시 소인 집에 머무셨다가 다른 곳을 알아보시도록 하십시오.”

심련은 그 자가 이렇게 정중하게 권하는 것을 보고서는 두말없이 그 자 뒤를 따랐다. 얼마가지 않아 그 자의 집이 나타났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갈한 집이었다. 그 자는 심련을 거실로 안내한 다음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올렸다. 심련은 놀라며 황망히 답례하였다.

“그대는 대체 뉘시오? 어인 일로 소인을 이렇게 챙겨주시는 거요?”

“소인은 성은 가賈요, 이름은 석石입니다. 선부 아문의 무관으로 본디 형님이 맡았던 자리였으나 형님이 작년에 돌아가시고 슬하에 아들이 없어 소인이 물려받았습니다. 한데 엄씨 부자가 권력을 농단하게 되면서 부형에게서 관직을 물려받은 자들에게 뇌물을 바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기에 소인은 그냥 그 벼슬을 관두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조상님 덕분에 땅뙈기가 조금 있어 농사를 지으며 소일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나리께서 엄씨 부자를 탄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나리야말로 천하의 충신이요, 의로운 선비이십니다. 한데 나리께서 이곳으로 폄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리를 직접 만나 뵙고자 원하였던 나의 소망을 하늘이알고서 나리를 보내준 것이니 이것은 삼세에 걸친 인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마치더니 다시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심련은 가석을 재삼재사 일으켜 세우고 둘째 아들 심곤과 셋째 아들 심포를 불러 가석에게 인사를 시켰다. 가석은 아내를 불러 심련의 부인을 안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마차에서 짐을 내리고 마부를 돌려보냈다. 집안의 하인을 불러 돼지를 잡고 술을 걸러 심련 일가족을 접대하였다. 가석이 심련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음산하게 비가 오는 날씨에 괜히 다른 곳에 가시려 하지 마시고 그저 아쉬운 대로 소인의 집에 머무시지요. 평안하게 술도 몇 잔 드시면서 그 동안 쌓인 여독을 풀도록 하십시오.”심련이 감사하며 말하였다.

“부평초가 물길 따라 흐르다 우연히 어디에 멈추듯 아무런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난 그대에게 이렇게 큰신세를 지다니 내가 참 면목이 없소이다.”

가석이 대답하였다.

“시골집이라 옹색하고 누추합니다. 보리밥에 푸성귀라도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심련과 가석은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시대를 슬퍼하고 통탄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맘이 너무 잘 맞아서 왜 이제야 만났는지 한탄하였다.하룻밤을 묵고서 다음 날 아침 심련이 일어나서 가석에게 말하였다.

“집을 구하여 식솔들을 안돈시키고 싶은데 번거롭겠지만 좀 도와주셨으면 고맙겠소이다.”

“그래 어떤 집을 원하십니까?”

“그대 집 같은 정도면 좋겠습니다. 집세는 얼마나 내야 하는지도 좀 알려주셨으면 좋겠소이다.”

“그야 뭐가 어렵겠습니까!”

가석이 집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돌아와 심련에게 말했다.

“빌릴 만한 집이 있기는 하지만 다 좁기도 하고 더럽기도 해서 마음에 드는 게 없습니다. 차라리 소인이처자식을 데리고 처가에 가서 살다가 나리께서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 소인이 다시 돌아와 사는 게 나을 것같습니다.”

심련이 대답하였다.

“그 마음은 고마우나 제가 어찌 그대의 집을 차지할 수 있겠소? 아니 될 말씀이오.”

가석이 대답하였다.

“소인이 비록 촌 농부에 불과하나 그래도 세상 이치는 좀 압니다. 나리가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이신지라 나리를 위해서 말고삐라도 잡고 허드렛일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가 이제 하늘이 소인을 어여삐 여겨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이 누추한 집을 나리께 내어드림은 나리를 향한 나의 존경심을 표하는 것입니다. 제발 사양하지 마시옵소서!”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가석은 하인을 시켜 마차와 말 그리고 노새를 준비하게 하고는 돈이 좀 되는 것들을 옮기게 하고는 나머지 가재도구는 그대로 남겨두고 심련이 쓰도록 하였다. 심련은 가석이 하도 단호하게 나오는지라 감히 그 뜻을 꺾지 못하였다. 심련은 가석에게 의형제를 맺자고 제안하였다. 가석이 대답하였다.

“소인이야 일자무식 촌놈인데 어찌 감히 조정의 권신과 의형제를 맺겠습니까?”

“장부끼리 뜻이 통하면 되었지 무슨 촌놈이다 권신이다 따지겠소이까?”

가석이 심련보다 다섯 살이 어리니 가석이 아우, 심련이 형님이 되었다. 심련은 두 아들에게 가석을 숙부로 부르게 하였다. 가석은 안식구를 불러 나오게 하여 인사를 시켰다. 두 가족은 마치 한 가족처럼 되었다. 가석은 심련과 함께 식사를 하고 나서는 처자식을 거느리고 처가를 향해 떠났다. 심련은 가족들과 더불어 가석의 집을 오롯이 쓰게 되었다. 당시 시인이 시를 지어 가석이 심련에게 집을 내준 일을 읊었으니 시에 이르기를:

마차를 몰고 가다 살짝 지나치듯 만나도 뜻이 통하면 진정한 친구,
자기 집 비워주고 친구에게 쓰라 하며 우정을 드러내네.
이 세상의 그 많고 많은 일가친척,
그 놈의 재산 때문에 다툼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1) 하나라 마지막 임금 걸임금에게 충언을 했다가 목숨을 잃은 전설적인 인물.
2)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임금에게 충언을 했다가 목숨을 잃은 전설적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