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고조 이연
수 양제가 강도에 피해 있을 때 이연은 장안을 치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대업 13년(617),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시기로 각지에서 수나라에 반대하는 투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두복위杜伏威가 역양歷陽을 점령했고 두건덕은 칭왕을 했으며 양사도梁師道는 삭방군朔方郡을 점거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또한 유무주劉武周는 군대를 이끌고 분양汾陽에 입성했고 이밀은 심지어 흥락창興洛倉을 함락시켜 동도를 위협했다. 이제 제국에 남은 요지는 장안, 낙양, 강도를 제외하면 오직 태원뿐이었다.1
태원은 예사로운 지역이 아니었다. 수도 장안과 동도 낙양을 지키는 북방의 군사 요충지로서 따로 북도北都라고 불렸다(수 양제가 있던 강도를 남도라고 불렀던 것 같다). 수 양제가 남쪽 순방에 나서기 전, 이연을 태원유수太原留守로 임명하고 그 관할 구역의 군사권을 모두 넘긴 것은 꼭 부주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연은 신임을 받을 만했던 것 같다.
우문태, 양견과 마찬가지로 이연 일가도 무천 군벌이자 관롱 귀족이면서 혼혈 가문이었다. 이연은 양광보다 두 살 많은 이종사촌 형이기도 했다. 물론 이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황위와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친형제도 골육상잔을 벌였는데 사촌형제 사이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사실 양제가 그를 임명한 데에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태원의 북쪽은 돌궐이었으며 장성 안쪽의 사방도 다 반정부 무장세력이었다. 동쪽에는 두건덕, 서쪽에는 양사도, 남쪽에는 이밀, 북쪽에는 유무자가 있었다(아래 그림을 참고). 그래서 수 양제는 이연이 막는 데 급급해 아예 말썽을 피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그 사촌형이 기회를 틈타 다섯 지역의 군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당연히 이연이 돌궐과 손을 잡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맨 처음 이연의 동태는 확실히 양제가 마음을 놓을 만했다.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연이 있는 태원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 군사 요충지는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고 이연 본인은 계속 주색과 탐욕에 빠져 아무 의지도, 생각도 없어 보였다.2
그런데 별안간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은 강요에 의한 것인 듯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밤에 배적裴寂이라는 사람이 이연을 술자리에 초대했다. 당시 수 양제는 태원에 진양궁晋陽宮이라는 행궁(行宮. 임금이 외지에 나갔을 때 머무는 별궁)을 두었는데 배적은 그 진양궁의 부감副監이었고 이연은 태원유수이면서 그곳의 총감을 겸했다. 부감이 총감을 대접한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이었다.
관리들의 술자리에는 으레 시중드는 여자들이 있곤 했다. 그런데 술자리가 파한 후, 배적은 이연에게 그 여자들이 진양궁의 궁녀였다고 실토했다. 황제의 여자를 건드리는 것은, 설사 그 여자가 황제에게 버려진 상태라고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였다. 덫에 걸려든 이연은 크게 당황해서 배적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었다. 이에 배적은 말했다.
“방법은 반란뿐입니다.”
나아가 배적은 반란의 시기가 무르익었으며 준비도 다 됐다고 말했다. 이연의 차남인 이세민이 벌써 모든 태세를 갖춰 놓았는데, 단지 이연의 허락을 못 받을까 두려워 그날 밤의 일을 꾸몄다는 것이었다.
함정에 빠진 이연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내 아들이 정말로 그런 마음을 품고 생각을 정했다면 따르는 수밖에.”3
이세민은 이렇게 여자를 동원해 아버지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배적이 술자리를 진양궁 안에 마련했는지, 아니면 밖에 마련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만약 안에 마련했다면 이연은 당연히 시중드는 여자들이 궁녀인 것을 알았을 테고, 역시 당연히 그녀들을 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밖에 마련했다면 이연은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상관을 모함하려 했다는 죄를 물어 배적을 응징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관에서 편찬한 정사를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세민을 당나라의 진정한 창업자로 꾸며내기 위해 관변 사학자들은 모두 거침없이 거짓 증거를 만들고 활용했다. 이것은 《삼국연의三國演義》가 제갈량을 띄우기 위해 주유를 희화화하고 유비, 손권, 노숙을 낮게 평가한 것과 다름없다.4
하지만 거짓은 거짓일 뿐이어서 아무리 수단이 뛰어나도 밝혀지게 마련이다.
사마광의 말에 따르면 얼마 후 이세민이 찾아가 다시 반란을 거론했을 때, 이연은 그냥 못 들은 척하고 고소장 한 통을 써서 그에게 관아에 가져다주라고 했다. 이세민은 말했다.
“아버님이 굳이 저를 고발하려 하신다면 제가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연은 말했다.
“내가 어찌 그리 박정하겠느냐. 너는 멋대로 말하지 말거라.”
이세민은 또 반복해서 설득에 나섰고 이연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앞으로 가문의 파멸도 네게 달렸고 가문이 나라가 되는 것도 네게 달렸다!”5
이 이야기에 따르면 태원 반란은 전적으로 이세민의 공이고 이연은 어쩔 수 없이 가담한 ‘공범’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배적의 술자리에 간 후로 이연은 그 궁녀들을 거두었을까? 그랬다면 반란의 결심을 이미 굳힌 것이므로 더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그러지 않았다면 관변 사학자들이 이연과 궁녀들의 스캔들을 만들어낸 것은 훗날의 고조와 태종을 모함한,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볼 수 있다.6
이렇게 사실과 무관한 조작을 일삼다니 도대체 학자의 양심이란 것이 있었는지 극히 의심스럽다.
한마디로 사적인 이익에 눈이 어두웠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당연히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통치계급의 정치적 이익이다. 이 이익의 요구를 역사학은 반드시 경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뜻하지 않게 성형수술을 하게 된다. 수 양제를 요괴로, 당 태종을 성인으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역사에 대한 존중, 사실에 대한 존중은 관변 사학의 직업 도덕이 아니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당 태종의 주장이었다.
불쌍한 그의 아버지는 불가피하게 머저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검은색과 흰색이 서로 뒤바뀔 수는 없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이연은 절대 어리석지 않았고 머저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어리석음은 고의로 꾸며낸 것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진작부터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왜 이건성과 이세민을 시켜 군대를 둘로 나누고 각기 은밀히 영웅호걸을 모으게 했겠는가?7
군사 행동을 자제한 것도 단지 성공의 가망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때다 싶었을 때 이연은 날랜 토끼처럼 움직였다. 대업 13년 5월 14일, 두 명의 부유수副留守가 그에게서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채고 수 양제의 감시 명령에 따라 조치를 취하려다가 그에게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죄명은 당연히 날조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추호도 망설이거나 봐주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당 태종 당시의 사관과 사마광의 역사 조작은 재주를 피우려다 일을 망친 꼴이 돼버렸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세민은 어리고 경험이 일천해 보이는 반면, 이연은 노련하고 용의주도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연은 옛날의 손권처럼 누구보다 감정 조절에 능했다. 왕부지王夫之가 말했듯이 그는 위험한 곳에 처해 천지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기회를 엿보다가 움직여 야망을 달성한 인물이었다.8
게다가 일단 움직이면 또 누구보다 매서웠다.
이때 그는 장안을 눈독들이고 있었다.
장안은 본래 수나라의 수도였다. 단지 수 양제가 남북을 소통시킬 목적으로 정치의 중심을 동쪽 낙양으로 옮겼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 대운하의 노선이, 천하를 제패하려는 각 제후들이 쟁탈을 벌이는 지역이 된 반면, 장안은 사람들에게 잊히고 말았다. 그래서 그 격동의 시기에 장안도 태원처럼 이상하게 조용한 사각지대가 되었다.
하지만 장안은 어쨌든 관롱집단의 근거지였다. 장안을 소유하여 장안을 새 왕조의 발상지로 삼는 것은 이연 같은 무천 군벌이나 북주와 수나라의 오랜 협력자들 그리고 관농 귀족에게는 익숙하기도 하고 명분에도 맞았다. 더구나 장안을 지키던 인물은 13세의 대왕代王 양유였으므로 이연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그곳을 탈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연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먼저 다른 염려가 생길 여지를 없애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3가지 일을 벌였다.
우선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과 협정을 맺어, 장안을 함락하면 땅과 백성은 이연이 갖고 여자와 보물은 돌궐이 갖기로 했다. 이것은 당연히 돌궐은 북쪽에, 장안은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원에서 남하하여 장안을 취했을 때 혹시라도 돌궐이 퇴로를 막고 습격하면 그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연은 돌궐이 대군을 보내주겠다는 것도 거절하고 그들의 말(馬)만 받았다. 괜히 늑대를 집에 들여 휘둘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9
돌궐 문제를 매듭 짓고 이연은 또 이밀을 속여넘겼다. 반수反隋 세력들의 맹주임을 자처하던 이밀에게 편지를 보내, 진심으로 그를 천자로 추대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제후에 봉해주기만 해도 된다고 밝혔다. 이에 오만방자한 이밀은 이연에게 신경을 끊고 낙양 공략에만 열중했고 도리어 이연을 위해 동쪽의 적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했다.10
가장 중요했던 한 수는 반군이 아니라 의군의 깃발을 든 것이었다. 이연은 자신이 남하하는 목적이 수나라의 부흥이며 양유를 황제로, 양광을 태상황으로 받들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래서 반역의 죄명을 피하고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제가 죽자마자 그는 즉시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무 스스럼없이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걱정거리가 다 제거되고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다.
7월 5일, 이연은 3만 명의 군대를 앞에 두고 출정을 선언했다. 그리고 11월 9일, 장안을 함락했다. 이듬해 3월 11일에는 양광이 강도에서 피살되었다. 그러고서 이연은 5월 20일에 황제로 즉위했다. 한 왕조가 무너지고 또 다른 왕조가 일어섰다. 단지 그 새 왕조는 한차례 피의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