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삽화는 개전 초기 러일전쟁을 바라보던 유럽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동아시아 지도가 그려진 링 위에 ‘유럽 챔피언’ 벨트를 찬 러시아와 ‘아시아 챔피언’ 팬티를 입은 일본이 서 있다. 러시아는 두 발로 굳건히 만주에 선 채로 뒷짐을 지고서 ‘아시아 챔피언’을 내려다보고 있다. 일본은 조선으로 한 발 성큼 내디디며 러시아를 향해 도발하고 있다.
거대한 러시아가 분할하는 화면의 좌측에는 프랑스 등 러시아와 동맹이거나 호의적인 나라들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고, 우측에는 영국, 미국 등 일본에 호의적인 나라들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중국 대표는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 채 경기장 바깥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지만, 그래도 일본 쪽에 붙어 있다. 비록 중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중국 내에서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줄 것을 기대하는 여론이 높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체급 차이다. 전쟁 초기 유럽이 보기에 이 시합은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성인 씨름선수와 유치원생의 힘겨루기였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은 국토의 면적과 국력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동급으로 보기 힘들었다. 삽화가 보여주는 대비는 러시아와 일본의 차이를 넘어 서구 문명과 동아시아 문명, 백인종과 황인종의 대비로 자주 원용된다.
그러나 서구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이미지는 한 눈에 드러나는 규모의 차이로 이 대결을 형상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