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 어른과 아이의 대결?

아래의 삽화는 개전 초기 러일전쟁을 바라보던 유럽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동아시아 지도가 그려진 링 위에 ‘유럽 챔피언’ 벨트를 찬 러시아와 ‘아시아 챔피언’ 팬티를 입은 일본이 서 있다. 러시아는 두 발로 굳건히 만주에 선 채로 뒷짐을 지고서 ‘아시아 챔피언’을 내려다보고 있다. 일본은 조선으로 한 발 성큼 내디디며 러시아를 향해 도발하고 있다.

인종과 백인종의 대결 : 《르 프티 파리지앵》(문학 삽화 부록) 제791호 1904년 4월 3일 일요일
LE PETIT PARISIEN(SUPPLÉMENT LITTÉRAIRE ILLUSTRÉ)Nº791, DIMANCHE 3 AVRIL 1904

거대한 러시아가 분할하는 화면의 좌측에는 프랑스 등 러시아와 동맹이거나 호의적인 나라들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고, 우측에는 영국, 미국 등 일본에 호의적인 나라들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중국 대표는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 채 경기장 바깥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지만, 그래도 일본 쪽에 붙어 있다. 비록 중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중국 내에서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줄 것을 기대하는 여론이 높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체급 차이다. 전쟁 초기 유럽이 보기에 이 시합은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성인 씨름선수와 유치원생의 힘겨루기였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은 국토의 면적과 국력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동급으로 보기 힘들었다. 삽화가 보여주는 대비는 러시아와 일본의 차이를 넘어 서구 문명과 동아시아 문명, 백인종과 황인종의 대비로 자주 원용된다.

위 삽화와 유사한 구도에서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양자의 크기차이는 크지 않고, 인물묘사에도 편견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중국인은 관중석에서 구경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서구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이미지는 한 눈에 드러나는 규모의 차이로 이 대결을 형상화했다.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겠다는 약속은 깔아뭉개고 조선을 먹을 준비를 마쳤다. 일본이 조선에 발을 담그며 도발하지만, 그 역시 접시 위에 먹힐 신세로 보인다.여기에서도 조선은 하나의 인격으로조차 묘사되지 않고 있다.
조선은 인격으로 등장하더라도 짓밟히는 대상으로 묘사된다. 美郷, 혹은 美好라는 서명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만화가 비고( Georges Bigot )에 의해 묘사된 동양인은 왜소하고 못생긴 존재로 전형화되었다.
사실 당시 러시아 입장에서 일본은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하룻강아지 같은 존재였다.
도발하는 왜소한 일본과 여유만만한 거대한 러시아라는 식의 전형화는 당시 서구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과연 일본은 러시아의 “열려진 문”으로 꿀꺽 삼켜질 것인가?
불곰의 꼬리에 걸린 모자로 알수 있듯이 러시아의 배후에는 동맹 프랑스가 있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일본을 지지한 세력으로 군함을 머리에 인 영국이 묘사되고 있다.
껄렁한 양아치처럼 그려진 일본이 러시아의 등에 칼침을 놓을 수 있었던 것도 영국과 미국이라는 배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자하기까지한 러시아의 표정과 사악해 보이는 일본의 자세와 표정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크기의 대비는 다른 의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일본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유럽, 중앙아시아, 만주를 넘어 조선까지 발을 뻗치는 거대하고 사악한 문어와 같은 존재였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은 러시아에게 시원하게 엿을 먹였다. 러시아의 패배는 그 거대한 몸집을 더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아무리 사나운 이빨과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다 한들 러시아는 이제 작은 인간 왜의 손짓에 따라 재주부리는 곰으로 전락했다.
거대한 러시아와 왜소한 일본의 대비는 이 그림에서 완전히 뒤집힌다.
개전 초기에 제작된 조르주 비고의 삽화를 아래 그림과 비교하면, 러일전쟁 전후의 인식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 일본은 러시아마저 꿀꺽 삼킬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