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에 나온 책이 마치 최근에 나온 것처럼 읽힐 수 있을까? 얼마 전 양계초(1873-1929)의 <중국역사연구법>(유용태 역주, 서울대출판문화원 2019)을 읽다 도입 부분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최신 역사 이론으로 중국사를 공부하는 방법론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 특유의 거침없는 필체까지 더해져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유용태 교수의 유려한 번역도 한몫한 것 같다.
1922년 출간된 그 책을 뒷부분까지 다 읽지는 않았다. 중국사를 공부해온 사람이라면 대체로 익숙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큰 수확이 있었다. 양계초가 101년 전에 출간한 <청대학술개론>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7년에 여강출판사에서 첫 번째 번역이 나왔고, 2005년에 전인영 역, <중국 근대의 지식인: 양계초의 청대학술개론>(혜안)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번역까지 나온 걸 모르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 빌려서 한 번 읽고, 바로 구입해서 한 번 더 읽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주저 없이 지난 학기 대학원의 “중국고대사연구”라는 수업에서 첫 번째 읽을 책으로 결정했다. 모든 책의 이해는 독자가 지닌 배경에서 나오는 만큼 학생들이 나 같은 감동을 느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200년 동안 중국에서 일어난 고증학으로 대표되는 학술 변혁의 거대한 흐름을 조금이라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귀납적 과학 정신에서 나온 많은 저작들이 근현대 중국의 학문, 특히 중국 고대사 연구의 디딤돌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0세기 초 동아시아 최고의 선각자인 양계초는 사실상 그 학술 변혁의 막바지에 자리했던 사람이다. 자신까지 그 학술의 주체 중 한 명으로 포함시킨 이 책이 더욱 생동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보름 만에 쓴 책답지 않게 200년의 학술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청대의 사조를 송명이학에 대한 일대 반동으로, 그 주된 이념을 복고로 보고 있는 양계초는 청대 학술의 동기와 내용이 유럽 르네상스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본다(27쪽). 송명 유학의 굴레에서 벗어나 옛 경전으로 직접 돌아가 연구해야 한다고 제창한 고염무(1613-1682)와 위경(僞經)을 변별하여 진실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 염약거(1636-1704)가 그 선구다.
송학에서 완전히 벗어나 고증학과 경학을 비로소 경험적 학문의 반열에 올리며 전성기를 연 이들이 2세대의 혜동(1697-1758), 대진(1724-1777), 단옥재(1735-1825), 왕념손(1744-1832) 등이다. 이때 모든 경전에 합리성에 기초한 새로운 주석(소)이 달렸고, 증거 위주의 사학 역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 증거의 핵심으로 음운학, 문자학 등 소학뿐만 아니라 지리학, 천문학, 수학, 금석학, 교감학 등도 번성했다.
양계초가 탈피기로 묘사한 3단계는 자신의 스승 강유위(1858-1927)가 주도했는데, 경전에 나오는 성인에 대해 공자가 개혁을 위해 가탁한 것으로 파악했다. 개혁을 위한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그 학술 자체는 문제가 많지만, 성인이 가공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대담한 주장이 2000년 이상 짓눌려온 경전의 굴레에서 해방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아편전쟁 이후 개항 이래 서양의 사조가 들어와 청대의 학술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청대 학자들의 학술 태도였다. “청대 학자들은 책을 경솔하게 저술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여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완전하게 만족할 만한 자료를 구하지 못했다면 정본(定本)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으므로, 평생 동안 자료만 준비하는 사람들도 흔히 있었다. 또한 당시의 일류 학자들은 자신의 저서에 이해하여 깨달은 것 이외에 한 글자라도 더 쓰려고 하지 않았다…”(141쪽). 이러한 엄정성은 오늘날 학문의 세태와 맞지 않는 면이 있지만, 학술 종사자라면 누구나 새겨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양계초가 스승 강유위와 결별한 이유를 서술한 부분에서 자신의 학문을 객관화한 부분도 흥미롭다. “양계초는 학문을 넓히는 데에만 주력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깊은 조예는 부족했다. 어떤 학문을 조금씩만 섭렵해도 바로 논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의 저술은 애매모호하고 근거가 없으며 추상적인 말이 많았고…양계초는 (강유위와 달리) 너무 선입관이 없었기 때문에 때로는 상황에 따라 자신이 지키고 있었던 것을 버리곤 했다. 그의 독창력은 강유위에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199-200쪽)
양계초는 청대 학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매조지한다: “청학의 정통파의 정신은 주관성을 경시하고 객관성을 중시하였으며, 연역을 낮게 여기고 귀납을 중히 여기는 것이었으니, 비록 고칠 것이 없지는 않지만, 학문을 연구하는 정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다른 학파(금문학파)가 나와 과감히 의심하여 해방시켰으니, 이 또한 창작의 선구였다. 이것이 청학이 가치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231쪽)
100년 전에 나온 주장이 현대에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가 송명의 학술에 대해 “창조성 억압”과 “허위 부추기”를 들어 심하게 비판한 것(37-38쪽)은 자신도 속한 청대 학술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과 함께 회고적 관점으로 재단한 것이다. 모든 학문은 그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결과로서 가치를 지닌다. 한국의 독자들이 읽기에 청대 학술에 대한 찬양은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성이 상대적으로 배격된 고증학이 학문을 정치에서 분리시키며 근현대로의 이행기에 중국 혹은 동아시아 전통 학문의 맥을 창조적으로 계승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에서도 유사한 학문 풍조가 일어났지만, 유독 조선에서는 그러한 학문을 수용할 여건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고증학의 학술적 성취가 경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당히 복잡한 청대의 학술사를 이렇게 쉽게 정리한 책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양휘웅 선생이 번역한 벤자민 엘먼의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예문서원, 2004)와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 (생각의 나무, 2009), 카이윙 초우의 <예교주의>(모노그래프, 2013)까지 읽으면, 당시 동아시아를 주도한 학술사의 쟁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격동기에 중국을 뒤흔들었던 정치가이자 동아시아의 청년들에게 꿈을 불어넣은 계 몽 지식인 양계초는 아깝게도 신장병으로 57세에 사망했다. 슬하의 6남4녀 중 몇 명이 그를 이어 학술계의 거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