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일언一字一言29-멸滅

없어지다. 멸하다, 죽다 등의 뜻을 지닌 滅은 기본적으로 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글자이다. 滅은 사람을 죽이는 도끼나 창과 같이 전쟁을 하기 위한 무기,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 등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들이 모두 전쟁, 죽음, 없앰 등을 나타내는 글자들이기 때문이다. 무기와 물, 불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아할 수 있지만 전쟁할 때는 불을 놓아 태워버리거나 물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거나 하는 것처럼 되기도 하고, 물과 불을 이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없애버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에 이런 것들이 붙어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滅은 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水(물 수), 불이라는 의미를 지닌 火(불 화), 전쟁할 때 쓰는 무기의 일종인 도끼라는 뜻을 가진 戉(도끼 월)의 세 요소가 결합한 글자이다. 이 글자의 구성요소로 쓰인 글자들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를 살펴보면 滅의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의 본래 글자는 烕이었다가 나중에 滅로 바뀌었다. 烕은 갑골문에서부터 보이는데, 글자의 오른쪽은 戉 이고, 왼쪽 변은 火가 자리하고 있다.

戉은 병장기의 모양을 본뜬 것으로 나중에 鉞로 되었다. 이것은 싸움할 때 쓰는 창이라는 뜻을 기본으로 하는데, 전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글자라고 할 수 있다. 烕에서는 戉이 아니라 戌(날이 불룩한 도끼 술, 개 술)이 쓰이고 있는데, 戉과 같은 뜻을 가진 글자가 戌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잘못해서 실수로 바꿔서 썼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은 戌이 열한 번째 地支인 술 정도로 쓰이지만, 이것은 원래 노예들을 진압하거나 학살하는 도구로 사용한 커다란 도끼 모양의 무기를 나태내는 글자였다. 아울러 戌은 양기가 약해서 소멸되는 9월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 시기는 만물이 완성되면서 陽이 땅속으로 들어가서 없어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戉과 戌은 모양과 뜻이 비슷했기 때문에 나중에 烕에서는 戌로 바뀌었다.

火는 타오르는 불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象形字이다. 즉, 물체가 탈 때 만들어지는 불꽃을 형상화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태운다는 것은 파괴해 버려서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아닌 것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火는 기본적으로 태워서 없애버림. 파괴함 등의 뜻을 가진다. 불을 나타내는 火와 무기, 혹은 전쟁을 나타내는 戉(戌)이 결합하여서 불과 무기는 모두 온갖 사물을 파괴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물을 나타내는 글자인 水는 땅 위에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초기의 모양은 중간에 휘어진 곡선이 있고, 양쪽에는 물방울을 의미하는 끊어진 형태의 점이 여러 개 있어서 물이 역동적으로 흐르는 모양을 나타냈다. 거세게 흐르는 물은 위력이 대단하여 농경지를 덮어 없애 버릴 수 있으며, 생명체를 쓸어버릴 수 있어서 불과 마찬가지로 파괴한다는 뜻으로 쓰일 수 있다. 烕에 水가 가미된 시기는 대략 春秋時代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사람들은 전쟁, 불, 물 등은 모두 사물과 생명체 등을 파괴하여 없애버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이 세 가지가 결합함으로써 滅이란 글자가 완성되었는데, 戉에서 구부러졌던 획이 戌로 되면서 一로 바뀌었는데, 여기에서 一은 불에 덮개를 덮어서 꺼뜨림으로써 없애버린다는 뜻을 강조하게 되었고, 水가 가미됨으로써 물로 인해 사라져 버린다는 것으로 되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생명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퇴하여 사라지는데, 이것이 바로 滅이다. 물리적이면서도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존재하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나타내지만, 불교에서는 생사에 대한 괴로움(苦)과 번뇌의 원인이 되는 집착(集)이 사라져 없어짐으로써 깨달음의 경지(悟境)에 이르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세속적으로 쓰이는 멸망, 인멸, 멸절 등의 뜻이 종교적으로는 승화된 의미로 쓰이니 뜻글자인 한자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