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의 삼국지 강의-유비의 멋진 말 5

유비의 멋진 말 5

유비의 멋진 말 다섯 번째는 유비가 임종 때 남긴 말에서 뽑고 싶다.

“만약 내 아들을 보좌해줄 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재목이 아니거든 그대가 성도의 주인이 되시오.”(제85회)

때는 223년 유비는 이릉 전투에서 패하고 백제성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황건 봉기 이래 평생 말을 달리고 흙먼지를 마시고 깃발을 날리고 북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그의 마지막 날이었다. 짚신과 돛자리를 엮어 팔다 24세에 전란에 뛰어들고 거의 40년이 지나, 이제 촉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지 2년만에 죽게 된 것이다.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았지만 천명의 재촉을 받았던가. 임종의 자리에서 기억할 만한 많은 말을 했지만 위의 이 말이 유비를 잘 말해준다.

유비와 제갈량은 역사상 어느 군신보다 잘 어울렸다. 오죽하면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얻고 나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다”(如魚得水)고 했겠는가.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꾸었고, 천하삼분지계를 시행했고, 멀리 통일의 대업을 과제로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표는 너무나 요원해 보였다. 국력에 있어서 위나라의 1/5, 오나라의 1/2밖에 되지 않은 약소국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비 집단은 초기 가신 그룹, 서주 그룹, 형주 그룹, 익주 그룹, 공신 그룹, 소수민족 그룹 등으로 이루어지는 등 그 구성이 무척 복잡해서 강력한 지도력이 없으면 금방 와해될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중원 통일은 고사하고 자체 유지도 어려울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비의 죽음은 촉나라의 앞날은 불안한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유비는 어리고 나약한 아들 유선(17세)이 촉나라를 이끌어나갈 수 있을지 가장 걱정하였을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서 고명지신이자 고굉지신인 제갈량에게 오직 충성만을 바랄 터인데 유비는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 보도록 하자.

장무 3년(223년) 봄, 유비는 영안궁(백제성)에서 병이 위독해지자 성도에 있는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며 말했다. “그대의 재주는 조비(위 문제)보다 열 배나 뛰어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대사를 이룰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을 보좌해줄 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재목이 아니거든 그대가 성도의 주인이 되시오.” 제갈량이 울면서 말하였다. “신이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충정의 절개를 다 하겠나이다.” 유비는 또 후주에게 조서를 써서 말하였다. “너는 승상을 따르고 아버지와 같이 모셔라.”(章武三年春, 先主於永安病篤, 召亮於成都, 屬以後事, 謂亮曰: “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 終定大事. 若嗣子可輔, 輔之. 如其不才, 君可自取.” 亮涕泣曰: “臣敢竭股肱之力, 效忠貞之節, 繼之以死!” 先主又爲詔敕後主曰: “汝與丞相從事, 事之如父.”)

소설은 위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훨씬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다.

“만약 내 아들을 보좌해줄 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재목이 아니거든 그대가 성도의 주인이 되시오.”(若嗣子可輔則輔之, 如其不才, 君可自爲成都之主.)

이런 말은 형식적인 군신 관계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의 마음을 함께 하며 간과 쓸개까지 아는 ‘간담상조’의 사이인지 알 수 있다. 마음 속 마지막 남은 앙금까지 허물없이 말할 수 있는 사이, 그런 자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유비는 유선이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만약 유선이 영용하고 믿음직스럽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촉이 망해 유선이 낙양에 압송되었을 때 촉나라 음악을 듣고 좋아하여 사마소의 핀잔을 듣지 않았던가.

세 번째로 유비가 제갈량을 떠보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후사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다시 한번 제갈량의 다짐을 받을 심산으로 위와 같이 말하였다는 것이다. 과연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이 충성을 다짐하지 않냐는 것이다. 모종강도 당시에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 즉 유비의 의심을 전제로 할 것이다. 그러나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의심과 다짐이 있었겠는가. 유비는 정말로 제갈량에게 촉나라를 가지라고 권하였는가 라는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요컨대 유비는 제갈량과 같은 사람을 얻어 인생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말은 63세의 유비가 43세의 제갈량에게 한 말이 아니다. 여기에 나이도 신분도 끼어들지 못한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남기는 부탁이자, 함께 꿈을 꾼 자가 그 꿈을 다 이루지 못했을 때 남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이다. 어쩌면 유비로서는 가장 순수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은 최후의 순간에서야 할 수 있는 말, 마지막이 되어서야 내놓을 수 있는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말이다. 유비는 그런 말이 있었고,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었고, 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집안의 작은 유산을 가지고도 형제들이 싸우는 것은 그들의 탐욕에서도 기원하는 것이겠지만 달리 보면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곧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의 모든 언행은 그 사람의 크기만큼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백제성 탁고당에 있는 아래 소조에서 유비 앞에 엎드린 두 아들은 유영(劉永)과 유리(劉理)이다. 태자 유선은 성도성을 유수(留守)하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조조가 낙양에서 운명할 때 태자 조비가 업성에서 유수하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