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고향은 서안으로 알려져 있다. 출생지는 북경(北京)이지만 고향은 조상의 본향을 따라가기에 서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서안과 붙어 있는 위남(渭南)시의 부평(富平)현이 그의 고향이다. 그럼에도 서안이라고 알려진 까닭은 대대로 관습적으로 그 일대가 서안으로 대표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西)’안이 아닌 ‘장(長)’안이었던 곳
1970년대 초, 진시황릉의 우연한 발견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서안은 21세기 들어 더욱 ‘핫(hot)’한 도시로 부각되고 있다. 적어도 2,050년까지 지속될 대규모 국토개발사업인 서부대개발 프로젝트의 거점인데다가, 시진핑 주석의 대표적 대외정책인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의 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곳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서부대개발은 낙후된 서부 내륙 일대를 본격적으로 개발함으로써, 개혁개방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룬 동남연해안과의 경제적, 문화적 격차를 줄여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겠다는 거대 프로젝트이다. 물론 이러한 대내적 목표만 지닌 프로젝트는 아니다. 그것은 신쟝 위구르, 티베트 일대의 소수민족 독립 저지, 지하의 천연자원 확보 등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는 실크로드 일대를 한층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데 필요한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대외적 목표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시진핑시대 중국의 웅대한 세계전략인 일대일로 정책이 겹쳐졌다. 일대일로 정책은, 동서양 간 문물과 무역의 양대 경로였던 육로인 비단길[一路]과 언젠가부터 ‘해상실크로드’라 불리는 해상 무역로[一帶]를 중국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재건하겠다는 세계전략이다. 이는, 중국을 기점으로 하여 육로로는 과거 비단길을 기초로 서역 곧 중앙유라시아와 유럽을 잇는 ‘하나의 벨트’를 건설하고, 해로로는 과거 바닷길을 기초로 동남아와 서남아,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하나의 길’을 건설하겠다는 대규모의 국가전략이다. 과거 동서 교류의 양대 젖줄인 비단길과 바닷길을 유기적으로 통합함으로써 지구촌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굳이 숨기지 않은 셈인데, 그 욕망과 함께 서안은 907년 당(唐) 제국 멸망 후 장장 천여 년 만에 다시 중국의 주요 거점으로 한창 발돋움하고 있다. 사실 ‘중국’이란 정체성을 고안해낸 이후부터, 약 삼천 년가량 지속된 중국 역사 중 전반부 2천 년가량의 중심은 서안이었다. 소위 ‘화하족(華夏族)’의 하(夏)와 동이족의 상(商, 후기 명칭은 은(殷)이다)도 중국역사로 볼 수 있기에, 이들부터 따지면 중국역사는 4천여 년을 상회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중국이란 정체성은 상을 역성혁명을 통해 무너뜨리고 천자의 나라가 된 주(周) 왕조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적 의의를 지닌 주의 도읍지가 지금의 서안 부근인 호경(鎬京)이었다. 이후 서안 일대는 진시황의 진(秦) 제국의 수도인 함양(咸陽)과 한(漢) 제국의 도읍과 당 제국의 도읍 장안(長安)이 거듭 자리하였던, 중화문명의 핵으로 번창해왔다.
물론 그 이천여 년 동안 서안 일대가 줄곧 도읍이었음은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엔 낙양(洛陽)이 천자의 도읍이었고, 동한(東漢) 이백여 년 동안엔 낙양이 제국의 수도였다. 혼란기인 위진남북조 시절엔 화북(華北)지대의 이곳저곳이 수도로 흥기했다. 이를 고려하면 서안 일대가 그 이천여 년 간 도읍 역할을 했다는 진술은 “그 시기 동안 ‘대체로’ 그러했다.”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다만 낙양이 기원전 11세기 경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서안 일대의 동쪽에 자리한 동이의 내침을 대비하기 위해 건설된 신도시로서 그 이후 장안의 부도(副都)로서 기능했음을 감안하면, 최소한 통일왕국을 일군 시기엔 장안과 낙양이 한 조합으로 왕국의 도읍 역할을 수행했다고 봐야 한다. 곧 분열시기를 제외한 시기엔 서안 일대에 도읍이 자리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 세월 동안 서안은 천하의 한 측방(側方)이 아니라 중심이었다. 그래서 서쪽[西]에 치우친 곳이 아니라 장구히 존속[長]되며 안정[安]을 구가하는 중앙이었다. 같은 이유로 대대로 왕조의 넉넉한 곡창 역할을 수행했던 서안 일대의 드넓은 황토고원지대의 이름이 관‘중’(關中)평원이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중원(中原)’이 지금처럼 낙양-정주(鄭州)-개봉(開封)으로 이어지는 황하 중하류 일대가 아니라, 당시엔 서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평원이었던 셈이다. 낙양을 비롯한 황하 중하류 일대는 ‘관동(關東)’, 그러니까 관중 동쪽이라고 불렸다. 서안은 이렇듯 적어도 이천여 년을 상회하는 참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중화문명의 심장으로서 기능한 역사기억이 켜켜이 쌓인 장소(topos)였다.
장안(長安)이 서안(西安)이 된 까닭
당 제국이 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거쳐 송(宋) 제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중국문명의 중심은 장안에서 동쪽으로 전이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원(元) 제국에 이르러 북경이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간택된다. 이후 명(明)과 청(淸) 그리고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팔백 년 가까이 북경은 중국의 수도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관중의 배꼽 장안은 서안으로 그 위상이 조정됐다. 천하에 중심이 두 군데 있을 수는 없기에 장안의 위상 재정립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무릇 천 년이라 함은 참으로 긴 세월이다. 이는 역사상 천 년 가까이 존속한 나라나 제도, 사회조직 등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수도도 마찬가지다. 일국(一國)이든 제국이든, 한 도시가 천 년 안팎의 세월 동안 도읍의 역할을 담당해온 사례 또한 희소하다. 그러니 장안처럼 물경 이천여 년을 상회하는 동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 경우는 더욱 드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제국의 도읍이 북경으로 옮겨지자, 서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제국의 수도가 ‘장기지속’ 되고 있다. 북송의 수도 개봉부터 치면, 북경-개봉-난징(南京) 축이 장안-낙양 축을 대신하여 통일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지가 천 년을 넘어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다양한 각도에서의 답변이 가능하다. 가령 기후의 변동과 그에 따른 경작 조건의 변화, 장강 일대의 경제적 부흥, 중국 강역의 확장, 정치 주도 세력의 변화 등이 그러한 현상의 대표적 원인으로 꼽히곤 한다. 그 가운데 여기서는, 이 글이 일대일로라는 세계전략과 관련하여 서안을 살피는 글인 만큼,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요인을 소개하기로 한다. 참고로, 이하의 소개는 박한제 교수(서울대 명예교수)께서 이미 수행하신 연구 성과에 온전히 기대고 있음을 밝혀둔다. 그는 관련 연구에서 중국제국의 도읍이 서안-낙양 축에서 북경-남경 축으로 전이된 주요원인을 중앙유라시아 일대의 국제정세 변동에서 찾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유목민족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목민은 중국역사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역사 변동의 주요 변수였다. 하여 유목민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지는 역대 중국 왕조에겐 중차대한 과제였다. 주나라가 서안 부근인 호경에 도읍을 정하면서 낙양을 부도로 건설했던 것도 당시에 동이라고 불리던 이민족에 대해 공세적 자세를 취한 결과였다. 그 성과로 관동 지역은 차츰 중원의 일부가 되었고,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주로 서북쪽의 유목민족이 중원을 위협하는 상수로 등장하였다. 이후 서북부의 유목민족은 당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줄곧 중원을 위협하는 주요 상수로서 작동되었다. 진 제국, 한 제국 시절의 흉노가 그러했고, 위진남북조 시대의 오호(五胡)가 그러했으며, 당 초엽의 돌궐 등도 그러했다. 그러다 755년 발발한 안사의 난을 기화로 동북부 일대의 유목민이 강성해지면서 중앙유라시아 일대를 석권하기 시작했다. 몽골계 거란족이 세운 요(遼) 제국과 퉁구스계 여진족의 금(金) 제국이 번갈아 유목세계를 호령하더니, 몽골계 몽골족인 칭기즈 칸의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 곧 대원대몽골제국과 만주족의 대청 제국이 차례대로 유목세계뿐 아니라 중원을 호령하였다.
이렇듯 무게의 추가 서북부의 유목세계에서 동북부로 완연히 넘어간 것은 대략 10세기 전후한 때였다. 박한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즈음 중국 왕조의 도읍이 서안-낙양 축에서 북경-남경 축으로 전이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곧 서북부 유목민이 강성할 때에는 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왕조의 도읍이 서안과 낙양을 오갔던 것이고, 동북부 유목민이 강성해지자 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왕조의 도읍이 북경과 남경 축을 오가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목세계에 대해 자신감이 있을 때는 그들과 더 가까운 곳, 그러니까 서안과 북경에 도읍을 건설하여 공세적으로 그들을 대했고, 반대의 경우엔 그들과 더 먼 곳인 낙양과 남경에 도읍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네 번째 밀레니엄은 ‘북경–서안’ 축선의 시대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할까? 먼저 동북부 그러니까 만주 일대를 살펴보자. 만주족은 이미 중국화 되어 정치적으로 세력화될 수 없는 상태이다. 몽골은 어떠한가? 만주족과 별반 차이가 없는 상태이고, 그 북쪽의 몽골공화국 또한 현대중국의 앞길에 주요 변수가 되기엔 힘이 너무도 부족하다. 옛적 발해를 품고 키웠던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 일대 또한 유목세계를 호령할 정도로 세력화될 수 있는 저력은 이미 마른 상태이다.
반면에 서북부는 다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댄 옛 소련에서 독립한 투르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은 풍부한 지하자원 등을 발판으로 중앙유라시아 지역의 어엿한 일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 중 중국과 국경을 맞댄 투르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은 중국 영토인 신장 위구르 일대와 이슬람교를 원소로 하는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 적어도 소강상태인 동북부에 비하면 이들 서북부는 새로운 전기에 휩싸였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바로 여기서 서안이 21세기 중국의 ‘거점 중의 거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세 번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단지 서안이 지니는 의의는 서부대개발, 일대일로의 거점이기만 한 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북부의 유목세계가 다시 쟁점으로 떠오름에 따라 서안은 과거 주나라로부터 당 제국에 이르렀던 시기처럼 다시금 중국의 핵으로 부상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서안이 21세기 중국의 수도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동아시아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데다가 동아시아 배후의 태평양 건너 미국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 위력을 잃지 않을 것이기에 북경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새로운 축의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란 정체성이 고안된 후 첫 번째, 두 번째 밀레니엄에선 서안-낙양 축이 작동됐고, 그 후 세 번째 밀레니엄에선 북경-남경 축이 작동됐다면, 이제 21세기부터 펼쳐지는 새로운 밀레니엄에는 북경-시인 축이 작동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서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