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양젠歐陽健 교수와의 대담 1

오순방(吳淳邦 前 崇實大 中文科 敎授) 진행/정리

어우양졘(歐陽建) 교수, 사진 ⓒ 조관희, 2002

[진행자의 말] 푸젠사범대학(福建師範大學)의 어우양젠(歐陽健)교수님은 중국소설에 대해서는 전 분야에 걸쳐 연구를 해오셨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수호전』과 『홍루몽』연구, 그리고 청말(淸末) 소설 연구에 있어 일가를 이룬 분이며, 『중국통속소설총목제요(中國通俗小說總目提要)』의 편집자로써 소설판본과 정리분야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낸 국내외에 잘 알려진 학자인데, 1997년 10월 상하이 칭푸(淸蒲)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서 그를 만나 대담을 나누게 되었다.

오순방 : 중국소설연구에 있어 일가를 이루신 선생님을 만나 뵙고 이렇게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온 연구생애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듣기에 선생님께서는 아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연구를 시작하셨고 그리고 고전소설의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견해를 제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학문연구의 길을 시작하시게 되었고 소설을 주요 연구 분야로 정하게 되셨습니까?

어우양젠 : 저의 어렸을 때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고, 학술연구를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문화대혁명 중에 어떤 사람이 제가 15세에서 25세까지 써온 300만자(萬字)의 일기(日記)를 빼앗아 가져다가 조사하여 그 중에서 네 다섯 구의 문장을 끄집어내어 저를 “반혁명(反革命)”분자로 몰았습니다. 4년 동안 감옥에서 옥살이를 한 후에 “현행반혁명(現行反革命)”이란 낙인을 찍어 쑤베이(蘇北)의 농촌에서 4년간 감시(監視) 노동을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하루의 노동품삯은 80전 밖에 되지를 않아, 일가족 네 식구는 제 처가 공장에서 벌어온 40원(元)의 월급으로 생활해 나갔습니다. 1975년 “수호전비판운동(水滸傳批判運動)”이 시작되면서 길거리에서 시끄러운 나팔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면서 “『수호전』은 장점이 바로 (好漢들의 조정에 대한) 투항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학습문건으로 나누어주는 (신문잡지의) 사론(社論)과 평론(評論)을 읽었는데, 『수호전』을 부정하는데 대해 마음속으로 강한 저항감을 느끼면서 저는 남몰래 『수호전』을 부정하는데 늘상 쓰이는 단장취의(斷章取義)의 비판방법이나 끝없이 올가미를 씌우는 수법은 완전히 나의 일기를 왜곡시키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결백은 언젠가는 밝혀질 날이 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스나이안(施耐庵)은 이미 고인이 되었는데 누가 그를 위해 변호해 주겠는가? 라고 생각이 들어 나는 선인의 억울한 심정을 대변하고픈 마음을 생겨서 『수호전』에 대해서 기초부터 철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순방 : 선생님의 접근자세는 정말 대단하시군요. 하지만 『수호전』의 평가는 복잡한 학술논제인데,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술적인 발견을 하시기까지 어떻게 연구를 진행하셨습니까?

어우양젠 : 저는 가장 바보 같은 방법을 썼는데, 바로 『수호전』 작품을 정독(精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담배꽁초를 주어다가 그 종이를 벗겨서 거기다 『수호전』을 각회(回)마다 플롯과 개요를 써나갔고, 게다가 인물별로 카드를 만들어, 중요한 인물형상에 대해서는 그의 출신과 직업을 기록하였고 그가 나눈 대화와 작품의 사건 등등을 기록해 나갔습니다. 『수호전』에 대해 비교적 전반적으로 이해를 갖게 된 뒤에 나는 갑자기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호전』에 대한 철저한 부정은 바로 이전에 『수호전』을 대단히 찬양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농민봉기의 찬송가’라고 해도 좋고, ‘농민봉기에 대한 반도(叛徒)들의 찬송가’라도 상관이 없는데 의견은 마치 완전히 대립된 것 같지만 그러나 모두 『수호전』은 농민봉기를 서술한 것이라고 긍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제는 아마도 『수호전』이 마치 ABC의 “농민봉기”라고 하는데 있는 것 같았지요.

오순방 : 『수호전』 텍스트에 대한 독서를 통해 선생님이 가지고 있었던 의문을 입증할 수 있었습니까?

어우양젠 : 저는 『수호전』을 읽으면서 작품 속에서 시민사회의 묘사가 시종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주먹으로 진관서를 때리다, 칼을 팔다 뉴얼을 죽이다, 화가 나서 옌포시를 죽이다, 칼로 바이슈잉을 때리다, 싸우다 시먼칭을 죽이다(拳打鎭關西, 賣刀殺牛二, 怒殺閻婆惜, 枷打白秀英, 鬪殺西門慶)” 등의 이야기는 대부분 성진(城鎭)에서 일어났습니다. 『수호전』에서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는 부류가 “무뢰한”인데, 그들은 관부(官府)와 결탁하여 한 지역의 패권을 잡거나 혹은 도망 다니는 신세로 백주에 무도한 일을 자행하여 시민사회의 해충이 되었지요. 『수호전』은 “길거리에서 억울한 일 당하는 것을 보면 칼을 뽑아 도와준다(路見不平 拔刀相助)”는 의협심을 칭송하며, 이러한 무뢰배를 제거하는 영웅호걸에게 시민들이 뜨거운 애정을 기탁하고 있지요. 『水滸傳』에서 평가하는 최고의 표준은 “의를 중시하고 재물을 소홀히 여긴다(仗義疏財)”인데, 차이진(柴進)․차오가이(晁蓋)․쑹장(宋江)이 존경과 추대를 가장 많이 받는 인물이지요. 특히 쑹장(宋江)은 주요활동 무대가 도시로써, 그가 도와주는 대상은 주로 시민(市民)입니다. 상품경제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는 시민들은 현실 생활 속에서 곤궁함과 좌절을 맛보게 되는데, 그럴 때 외부의 구원이 대단히 필요합니다. “힘”으로 도와주는 것 이외에 또한 “재물”로 도움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래와 같은 완전히 새로운 견해를 얻을 수 있었지요. 바로 “『수호전』과 농민봉기는 결코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수호전』의 주제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 내가 루쉰(魯迅)의 『중국소설사략』 중에 『삼협오의(三俠五義)』는 시정 백성들의 마음을 서술한 것인데, 비교적 『수호전』의 여운(餘韻)이 남아있는 듯하지만, 그러나 역시 단지 외형만이 그러하지 정신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갑자기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는데, 『수호전』의 정신은 바로 “시정 백성들의 속마음을 서술해” 낸 것이고, 또한 봉건사회 안에서 시민들의 사상 감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루더차이(魯德才, 왼쪽), 돤치밍(段啓明, 오른쪽) 교수와 함께, 사진 ⓒ 조관희, 2002

오순방 : 단지 텍스트의 독해에만 의존해서 선생님의 새로운 견해를 확신시킬 수 있습니까?

어우양젠 : 그럴 수는 없지요. 텍스트의 해독은 문헌(本事와 版本 등을 포함해서) 고증과 결부되어야만 합니다.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과 검색을 통해서 저는 역사적으로 쑹장(宋江) 사건은 당시에 영향이 대단히 미미했기 때문에 정사(正史)에서는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으며 “량산보취의(梁山泊聚義)”가 혁혁한 명성을 얻은 것은 완전히 『수호전』의 공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호전』이 량산보(梁山泊)의 위세를 알린 것은 또한 송원(宋元)시대의 “설화(說話)”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 “설화인(說話人)”은 “문물이 풍요롭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 활동하였고, 게다가 도시서민을 주요 공연대상으로 하였으므로 그들은 시민들의 심리상태를 상당히 심도 있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사용 언어도 시민들이 잘 알고 생명력이 있는 구두어(口頭語)를 사용하여 시민들이 잘 알고 있는 스토리를 구술하였습니다. 『수호전』은 송원(宋元)에서 명초(明初)에 이르는 2․3백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창작한 작품으로, 비록 역사상 쑹장(宋江)의 36인 전설에서 취재하였지만 『수호전』의 기층(基層) 작자는 많은 시정예인(市井藝人)으로써, 그들은 농촌의 계급모순과 계급투쟁에 대해서 실제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그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은 단지 쑹장(宋江) 등 36인의 “기문이설(奇聞異說)”을 빌려다가 그들 자신들이 심도 있게 체험했던 시민사회의 현실생활을 구술하여 시민계층의 내면에 있는 희로애락을 설창(說唱)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오순방 : 선생님의 새로운 주장은 “수호전비판운동(水滸傳批判運動)”을 부정하는 데에 있어 어떤 학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우양젠 : 『수호전』에 대한 평가는 『수호전』이 “농민봉기에 대한 찬가”라고 하며 크게 떠받드는 것에서부터 『수호전』이 “농민혁명반도의 찬가”라고 비판하며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깊이 살펴보면 모두가 투항문제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실, 량산보 호한들이 량산을 점거하게 된 것은 대부분 “관리들이 부패하여 권력을 남용하므로 핍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대죄(大罪)를 범했기 때문에 잠시 호숫가에 피난 온” 것이다. “핍박받아 량산에 오르다”라는 것은 『수호전』의 일관된 흐름인데, 산에 올라 도적이 되면 도의상(道義上)으로나 생활면에서 모두 오래 유지하기가 어렵지요. 108명의 호한(好漢)은 누구도 산적이 되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누구도 민가를 약탈하는 것을 자신의 평생사업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변방에 가서 무공으로 군공(軍功)을 세워 가족과 후손까지 봉작을 받고 길이길이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기면 일생이 억울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희망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지요. 지도자로써 쑹장(宋江)은 비교적 똑똑한 정치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기에 그는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替天行道)”는 구호를 내걸고 “취의청(聚義廳)”을 “충의당(忠義堂)”으로 바꾸어 ‘의(義)’자 위에 ‘충(忠)’자를 하나 더했지요. 그의 충의관(忠義觀)은 량산보(梁山泊)의 이익이나 운명과는 일치하였지요. 그의 귀순 주장 역시 시세(時勢)를 통찰하고 추측하여 득실을 저울질함으로써 “체면”을 살리는 귀착점을 찾아내어 “나라를 위해 힘쓰자”는 방안이 대다수 호한들의 바람과 요구에 부합되었으며, 당시의 조건 속에서 선택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되었지요. 때문에 무슨 “농민봉기에 위배되는” 문제가 있다고는 근본적으로 말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순방 : 『수호전』에 대한 새로운 학설은 조기에 이룬 연구 성과인데, 그 이후에 선생님께서는 소설연구에 있어 어떤 분야에 주력하셨나요?

어우양젠 : 제가 『수호전』을 연구하고 있을 때에, 외부환경의 변화에 따라, 제 개인의 생활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1980년 저는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의 연구원을 선발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장쑤성(江蘇省)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 조리연구원(助理硏究員)으로 선발되어, 그때부터 전업연구(專業硏究)의 길을 걷게 되었고, 저의 시야도 크게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1985년부터 1988년 사이에 저는 『중국통속소설총목제요(中國通俗小說總目提要)』의 편찬을 주관하여 북으로는 하얼빈으로부터 남으로는 쿤밍(昆明), 서쪽으로는 란저우(蘭州)에 이르는 전국 60여개의 도서관을 방문하였는데, 그중에는 북경 한 곳에서만 베이징도서관(北京圖書館), 서우두도서관(首都圖書館), 베이징대학도서관(北京大學圖書館), 베이징사대도서관(北京師大圖書館), 인민대학도서관(人民大學圖書館), 중국과학원도서관(中國科學院圖書館),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 문학연구소도서관(文學硏究所圖書館) 등 12개의 도서관을 조사하였습니다. 『중국통속소설총목제요(中國通俗小說總目提要)』는 모두 314만 자(字)로 통속백화소설 1164조(條)가 수록되어 있는데, 내가 찬술(撰述)한 조목(條目)이 395조(條)에 51만 자(字)에 이르지요. 이 어려운 작업은 그후 저의 소설연구에 적어도 두 가지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순방 : 첫 번째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우양젠 : 중국통속소설총목의 편찬 중에서 저는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당대(唐代)에서 청대(淸代)에 이르는 통속백화소설 전체는 1164부(部)인데, 1901년부터 1911년까지의 11년 사이에 529부가 창작되어 거의 1200년 동안 배출된 총량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은 저로 하여금 “청말 작가들의 창작열정은 어떻게 불붙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였지요. 여태까지의 정설은 1900년의 “경자사변(庚子事變)”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았지요. 루쉰(魯迅)은 『중국소설사략』에서 “무술신정(戊戌新政)이 성사되지 못했고, 2년 후 바로 경자년(庚子年)에 의화단사건이 일어나게 되니, 군중은 정부의 통치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시에 공격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어우양졘(歐陽建) 교수, 사진 ⓒ 조관희, 2002

그런데 문제는 정부의 통치능력에 의문이 생기면 모두 일어나 혁명을 하면 되지 소설은 써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청대(淸代)의 사료 『광서조동화록(光緖朝東華錄)』과 대량의 청말소설 작품을 읽고서 저는 상황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청말(淸末)의 진정한 개혁은 사학계(史學界)에서 오랫동안 부정되어 오던 “신정(新政)”이었습니다. 경자사변은 전 민족의 위기감을 가중시켰으니, 츠시태후(慈禧太后)를 포함한 최고 통치자들은 팔국연합군(八國聯合軍)의 침공으로 황제의 도주와 식량이 끊기는 고난을 맛보았고 거액의 배상을 통해 “국가가 쇠약해진 원인을 갑자기 깨닫고서는 금후로 구국하기 위해서는 행정방침을 개혁에 두지 않을 수 없음을 절감하고서 신정(新政)을 단행한다”는 유지를 국내외에 선포하였지요.(黃鴻壽의 『淸史紀事本末』卷69) 광서(光緖) 26년 12월에 선포된 유지에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리며,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후사(後事)의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한다”는 말이 있으며,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례”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법이 쌓이면 가리고, 법이 가리면 바꾸는 것이니, 오직 강국이민을 해야한다”는 방침을 제기하여 대규모의 사회개혁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개혁은 과거의 폐지, 학당 건립, 유학(留學)의 장려, 신군(新軍)의 확대, 철도건설, 실업(實業)의 발전, 법제개혁(法制改革), 지방자치와 입헌정치의 추진 등으로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법률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것으로 이로부터 중국의 정치 환경과 사회풍속이 현대화의 방향으로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개혁이 최고통치자의 주창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유신파(維新派) 신문잡지가 우후죽순으로 발간되어 애국구망(愛國救亡)과 민중계몽, 민권주창(民權主倡), 미신반대 등을 열정적으로 선전하였고, 이로부터 전국적으로 개혁유신(改革維新)의 시대조류가 형성되었습니다. 바로 개혁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사상의 통제도 풀려서 작가들이 감히 시대의 적폐를 들추어내어 정치를 비판하게 되었고, 동시에 개혁 자체가 사회 현실생활로 하여금 전례 없는 대변동을 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소설의 창작에 대단히 풍부하고 새로운 소재를 제공하여 청말소설의 번영에 충분한 여건을 조성해 주었지요. 우리가 만일 역사학계에서 정론이 된 오류에서 벗어난다면 청말(淸末) 소설은 확실하게 전통소설과는 다른 일종의 “신소설(新小說)”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소설은 혹은 개혁의 전체에 대해, 혹은 개혁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 당시 사회의 진실 된 면모를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아울러 구국부강(救國富强)과 관련된 해결방안을 제기하였는데, 신소설은 20세기 벽두 중국의 대지 위에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개혁유신 사업의 산물이며, “우리나라가 많이 발전할 기회”라고 옌푸(嚴復)가 칭했던 개혁 형세 속에서 수많은 신소설가들이 중국의 민주와 부강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애국주의 답안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저는 『만청소설사(晩淸小說史)』를 지었는데, 그 책의 핵심은 개혁개방의 시각으로 새롭게 청말소설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신소설“이란 개념으로 ”견책소설“을 대신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평가체계를 가지고서 새롭게 청말소설의 역사지위와 거대한 가치를 확인하였지요. 『만청소설사(晩淸小說史)』가 추구하는 세 가지 목표는 1. 만청(晩淸)역사의 변이와 소설 창작의 실제 진행에 따라서 청말 소설 발전의 단계성을 알려준다. 2. 전인(前人)들이 논술한 적이 있는 명저(名著)들을 새롭게 평가한다. 3. 새로 발견된 대량의 작품에 대해 공정하게 실사구시의 평가 및 소개를 한다는 것이지요.

오순방 : 선생님께서는 “신소설(新小說)”이란 개념으로 “견책소설(譴責小說)”을 대신한다고 주장하셨는데, 하지만 견책소설 개념을 사용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문학비평 표준은 바로 루쉰이 제기한 학설인데 어떤 타당치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어우양젠 : 청말소설(淸末小說)에 있어서 소위 “전통적인 문학비평표준”을 만든 루쉰 그 자신이 바로 근대(近代)의 인물이며, 그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청말소설을 논평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타당치 못한 점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지위 때문에 청말소설에 대한 루쉰의 견해, 특별히 견책소설이란 견해는 청말소설에 대해서 폄하가 찬사보다 많은 부정적인 비평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오류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후인(後人)들의 연구는 거의 루쉰의 견해를 전제와 출발점으로 삼았으므로 일부 학자들이 그 중에서 타당치 못한 점을 발견하긴 하였으나 단지 비호하거나 보충하는 작업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런 연구풍토는 발견하고 개척하는 안목을 방해하여 청말소설연구가 도약하기 어려운 근본 원인이 되었습니다. 루쉰은 당시에 청말소설의 별칭(別稱)인 “견책소설”이라 불렀고, 견책소설과 소위 “풍자소설(諷刺小說)”을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작품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유림외사(儒林外史)』와 서로 비교한 후에 도출한 견해였지요. 하지만 견책소설의 명명은 이것이 누가 누구를 향해 견책한 것이며 어째서 이런 견책이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중국 고대소설은 비록 반탐관(反貪官)의 전통이 있었지만, 그러나 청관(淸官)을 송양(頌揚)하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공부하여 관리가 된다는 것은 선비가 자신의 가치를 현실에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긍정된 것이지요. 1903년에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는 “소설의 체재로 관부(官府)의 악당들을 서술”하였는데, 이는 중국소설사상 첫 번째로 관리가 되는 것에 대해, 관부(官府)에 대해, 또한 관료제도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한 작품이었지요. 리보위안(李伯元)과 당시 대다수의 작가들은 보편적으로 일종의 숭고한 사명감을 가지고서 새로운 시대의 시각과 관점에서 우징쯔(吳敬梓)를 포함한 이전의 모든 작가들이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포부와 도량을 가지고서 “공정한 마음으로 시대의 적폐를 지적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은 중국이 전제정치(專制政治)와 쇠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민주부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더욱 큰 공심(公心)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지적 비판한 것은 중국 도처에 만연되어 있는 부패한 봉건제도 전체의 더욱 큰 적폐였지요.

오순방 : 선생님이 보시기에 청말소설의 현실적인 가치는 무엇입니까?

어우양젠 : 저는 “신시기(新時期)”가 시작된 이후로 중국은 다시 한번 개혁개방의 길을 가고 있다고 봅니다.(청말시기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주동적인) 20세기가 시작되던 청말에 창작된 작품들은 20세기가 끝나는 시기의 연구자들과는 상당히 보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말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인물군상은 지금 시점에서도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청말소설에서 제기된 중대한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현실적인 긴박감과 보편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 청말소설의 연구는 당대인들의 흥미와 서로 일치하는 주파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루스어(陸士諤)의 『신수호(新水滸)』는 『수호전』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변법을 주창하고 량산회(梁山會)를 발기하여 쑹장(宋江)을 회장으로 선출한 후, 회원들을 하산시켜 각종 신사업을 경영하게 하여 각 회원이 얻은 이익을 20%는 회비로 걷고 20%는 공금으로 적립하며 나머지 60%는 본인의 급료로 주었지요. 청말시기에 민족공상기업(民族工商企業)은 아직도 갈 길이 험난한 시작단계에 불과했으니 자연히 무슨 대형 집단의 체제개혁을 거론할 수는 없었으며, “고기를 실컷 먹고 술을 진창 마시는” “종신직장”과 같은 형태의 사회집단에 대한 개혁은 20세기가 처음 시작되는 첫 10년 중에 제기되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소설이 묘사하는 이런 적립을 기본 시스템으로 하는 계약청부제와 유사한 개혁방식은 대단히 앞서 가는 선구적인 것입니다. 특히 탄복할만한 것은 루스어(陸士諤)는 량산보(梁山泊) 108인이 비록 동일 시간에 사회에 진출하지만 그들 개인의 소질과 사회 연관간계의 차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마지막으로 거둔 결과는 경영이 제대로 되었는지 여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종사한 업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멍캉(孟康)의 선박감독과 루쥔이(盧俊義)의 철도부설 등의 사업은 비결이 권력을 기반으로 하여 법률과 체제의 불건전함을 이용해서 공금을 과다 지출하고 리베이트를 받는 등의 부정당한 수단으로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후산냥(扈三娘)의 나이트클럽과 쑨얼냥(孫二娘)의 야간업소와 같은 유락사업은 설사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간단한 노동에 불과한 것인데, 상업화 정도가 대단히 높으면서도 비교적 하부계층의 시민이나 심지어 저속한 수요에 영합하여 결국은 대단히 높은 경제적 수익을 거두어 들였지요. 『신수호전(新水滸傳)』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도덕과 경쟁의 이율배반적인 실태를 드러내 보였으며, 시장경제의 발전을 따라 수익과 금전을 척도로 삼는 상업경쟁은 단지 “이익”만이 유일하게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도덕의 타락은 경제 발전의 필요한 대가인가? 루스어는 비록 그의 관점을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탐색은 대단히 실험적인 것이었습니다.

선보쥔(沈伯俊) 교수와 함께, 사진 ⓒ 조관희, 2002

오순방 :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신수호전(新水滸傳)』은 아잉(阿英)에 의해 “의구소설(擬舊小說)”이라 불리어졌던 작품이 아닙니까? 아잉(阿英)은 이런 부류의 작품에 대해 대단히 낮은 평가를 하였고, “그 내용을 살펴보니 하나도 볼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이런 작품의 출현은 “당시 신소설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며 청말 견책소설의 몰락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우양젠 : 그렇습니다. 청말소설연구에 있어서 아잉(阿英)의 권위 때문에 이 부류의 소설들은 장기간 소홀히 다루어졌고 무시되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우젠런(吳趼人)의 『신석두기(新石頭記)』를 제외하고서 지금까지 아직 구독과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신석두기(新石頭記)』․『신수호전(新水滸傳)』․『신삼국(新三國)』․『신서유기(新西遊記)』 등의 작품 중에 나오는 쟈바오위(賈寶玉)․쑹쟝(宋江)․주거량(諸葛亮)․주바졔(豬八戒) 등의 인물은 모두 원작의 등장인물이지만, 서술된 이야기는 도리어 작가가 처한 20세기 초기의 현실이었습니다. 소설의 작자는 20세기 초기의 관점에 서서 원저(原著)를 다시 돌이켜보는 자각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서유기』를 지은 렁시에(冷血)는 말하기를 “『신서유기』는 비록 『서유기』의 인물과 사건을 빌려서 다시 연술(演述)하고 있으나, 『서유기』는 모두 허구이고, 『신서유기』는 모두 사실인데, 사실로 허구를 해석함으로써 작자는 실제로 미신 타파의 뜻을 담고 있다.”라고 하였지요. “다시 연술(演述)한다”라고 한 것은 번안(翻案)이나 번신(翻新)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그들은 고대 명저(名著)의 외피(外皮)를 빌어서 새로운 의경(意境)을 연출해 낸 것으로, 저는 청말의 소설가가 특수한 역사조건 속에서 찾아낸, 자기의 의도를 적절하게 표현할 새로 만든 예술양식을 “번신소설(翻新小說)”이라 부른다면 아마도 더욱 이 부류 작품의 본질과 특징을 개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번신소설(翻新小說)이란 양식은 구소설의 고사(故事)를 연속시켜 작품구조를 편조(編造)한 것은 아니고,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시간의 터널”을 뛰어 넘어 새로운 시대에서 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번신소설(翻新小說)은 한편으로는 시시때때로 원저(原著)와 밀접하게 결합하여 스토리를 전개하고 인물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장기간 독자의 마음 저변에 축적되어온 감정과 서로 결합되어 매우 빠르게 작자가 설정한 의경(意境)에 진입할 수가 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가상(假想)”의 허구수법으로 시공(時空)의 착위(錯位)를 포착하여 강렬한 예술 서스펜스를 만들어 옛날 의관(衣冠)을 차려 입은 인물들로 하여금 20세기 초 개혁개방의 신무대(新舞臺)에 올라 연출해 내는 장면은 황당하면서도 사실적인 것으로, 고전적이면서도 현재적인 것이며, 장엄하면서도 해학적인 것으로 개혁에 대해서 “말에는 모두 가리키는 것이 있고,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작가의 깊은 사고를 마음대로 표현하고 있어서 바로 번신소설(翻新小說) 예술특징의 정수를 이루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육사악의 『신삼국(新三國)』은 개혁이 성공하여 천하가 통일되었는데, 공명(公明)은 헌법이 준수되고 국회가 공고해지며 학술이 창명하고 사회가 발전된 것을 보고서 상소문을 올려 남산으로 은거하여 추이저우핑(崔州平)․쓰마후이(司馬徽)등의 옛 친구들과 왕래하는 이야기를 서술하였지요. 이런 처리는 이미 구식의 “급히 용퇴(勇退)”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데, 자발적으로 종신고용제를 폐지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이런 작품 중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심미의식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고도의 사상과 심오한 인식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순방 : 『중국통속소설총목제요(中國通俗小說總目提要)』의 편찬이 선생님의 연구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우양젠 : 저는 중국소설의 판본에 대해서 줄곧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통속소설총목제요(中國通俗小說總目提要)』를 편찬할 때에 저는 매우 많은 고대소설의 판본(草稿와 筆寫本을 포함)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제가 후에 “백호당(白虎堂)에 잘못 들어가” 『홍루몽』의 판본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오순방 : 『홍루몽』의 판본에 대한 선생님의 새로운 학설은 홍학계(紅學界)에서 매우 큰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선생님께서 연구를 하시게 된 발단과 선생님의 인생체험과는 어떤 관련이 있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어우양젠 : 저의 연구 분야는 고대소설이지만 『홍루몽』에 관한 논문은 쓰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홍루몽』이 실제로 방대하고 심오하여 일시에 그 속사정까지 살피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홍학계(紅學界)에서 줄곧 학설이 구구한데 제가 나서서 한 번의 “시끌벅적함”을 더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1990년 베이징대학의 허우중이(侯忠義)와 안핑츄(安平秋)교수가 『고대소설평개총서(古代小說評介叢書)』를 편찬하면서 저에게 『고대소설판본만화(古代小說版本漫話)』를 저술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저술과정에서 『홍루몽』의 판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에 저는 안일한 방법으로 여러 전문가들의 학설을 참조․종합하여 문장을 썼더니, “차오쉐친(曹雪芹) 작, 가오어(高鶚) 속작(續作)”과 “지본(脂本)”이 『홍루몽』의 진본이라는 홍학 ABC를 중복해서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요. 생각지도 않게 연관이 되었는데, 그 학설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느끼고 믿기지가 않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직접 『홍루몽』의 각종 판본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연재중평석두기(脂硯齋重評石頭記)』갑술본(甲戌本)을 보고서 가장 강렬하게 느낀 인상은 오자(誤字)가 너무 많다는 것인데, “두찬(杜撰)”을 “두찬(肚撰)”으로, “고황(膏肓)”을 “고맹(膏盲)”으로 잘못 썼고, 빠진 글자도 많아서 “시예잠□지족(詩禮簪□之族)”이란 구절은 원본의 “영(纓)” 자(字)를 비워 두었습니다. 이런 필사의 격식을 몇몇 소설의 필사본에서 끊임없이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원인은 저본(底本)이 희미하거나 좀이 먹어서 필사자(筆寫者)가 알아보지 못해서 한 칸을 띄어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판본상(版本上)의 문제는 그것이 절대로 차오쉐친(曹雪芹)의 초고(草稿)가 아니며, 심지어는 초고를 보지도 못했던 필사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특별히 필사본의 가장 관건이 되는 중요한 부분 몇 곳이 의도적으로 찢어져 훼손되었고 전편에 걸쳐 강희(康熙)황제의 휘를 피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갑자기 청조가 멸망한 지 16년 후의 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서 저는 회의가 더욱 가중되어 버렸습니다.

어우양졘 교수, 사진 ⓒ 조관희, 2002

저는 판본학(版本學)․사료학(史料學)․교감학(校勘學)․변위학(辨僞學)의 기초규칙을 운용하고 판본감정과 내용대조를 거쳐서 지본(脂本)이 후에 나온 위본(僞本)이며, 지연재(脂硯齋)와 작자의 생평, 소재내원(素材來源)과 관련된 평어(評語)도 완전히 믿을 수 없으며, 청웨이위안(程偉元)과 가오어(高鶚)가 정리한 정갑본(程甲本)이 비로소 『홍루몽』의 진본임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조건으로 보면, 청웨이위안(程偉元)과 가오어(高鶚)은 『홍루몽』의 조기 필사본을 충분히 수집할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관적인 요소로 볼 때에도 청웨이위안(程偉元)과 가오어(高鶚)은 모두 문학소양이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그들은 『홍루몽』에 대해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작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홍루몽』의 정리 출판 작업에 종사하였는데, 이런 조건은 모두 후세의 교감자(校勘者)들이 미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정갑본(程甲本)의 출판은 『홍루몽』으로 하여금 정식의 정본(正本)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민중이 『홍루몽』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근 200년에 걸쳐 사람들은 『홍루몽』을 다투어 읽고 경쟁적으로 논평하였는데, 읽고 논평한 것은 모두 정갑본(程甲本)『홍루몽』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홍루몽』에 대한 애정과 홍학(紅學)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갑본(程甲本)의 기초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모두 청웨이위안(程偉元)과 가오어(高鶚)의 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우리는 이렇게 고인(古人)을 무고(誣告)하고, 후인(後人)을 잘못 인도하는” 일을 더 이상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순방 : 선생님께서는 『홍루몽』 판본에 관한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신 이후에 생각지도 못한 “골치 아픈 일”을 수 없이 만났다고 하시는데 이 질문에 대해서 말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우양젠 : 제가 처음 자신의 관점을 갖고 난 후에 즉시 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홍학계(紅學界)의 문호(門戶)가 즐비하고 이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각가(各家) 각파(各派)는 모두가 거의 “즈옌자이비평(脂硯齋批評)”을 논지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만일 즈옌자이판본(脂硯齋版本)과 지비(脂批)에 대해 부정과 회의를 품게 된다면 홍학계(紅學界)의 모든 분파를 하나의 진영으로 몰아넣게 되고 자신은 “홍학계(紅學界) 공적(公敵)”의 위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즉시 허우중이(侯忠義)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저의 관점을 『고대소설판본만화(古代小說版本漫話)』에 써넣어도 될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허우(侯)선생은 “학문에는 금지 구역이 없고 관점은 회피할 것이 없으며 단지 이유가 있고 논리가 성립된다면 학자들의 공통 인식을 구하기 위해 대중에게 모두 공개할 수 있지요. 제가 총서(叢書)의 편집인이니 선생님과 공동으로 책임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답하여 주셨습니다. 그의 넓은 도량은 제게 대단히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야기된 갖가지 상황을 당하면서 비정상적인 가운데서도 저는 도리어 “정상적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홍학계(紅學界) 권위자들의 잘못된 태도는 아마도 제가 제기한 문제의 중요성을 표명하여 주었고, 아마도 그들이 아직 저를 반박하여 압도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저의 신념을 굳건하게 만들었고, 제가 비록 10여 년 동안 경영해 오던 장쑤성(江蘇省)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명청소설연구(明淸小說硏究)』에서의 편집인 지위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푸젠사대(福建師大)에서 고대소설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거꾸로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역사의 변증법은 이렇게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순방 : 1990년 톈진(天津)에서 개최된 “전국중청년(全國中靑年) 홍루몽 학술회의”에서 선생님께서는 『홍루몽』 텍스트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피력하면서 『홍루몽』이 기루문화(妓樓文化)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셔서 “천지가 개벽할” 학설이라 불렸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게 되셨습니까?

어우양젠 : 『홍루몽』의 작자와 창작시기에 대해 나는 위안메이(袁枚)의 『수원시화(隨園詩話)』에 있는 기재에 근거하여 줄곧 『홍루몽』이 강희(康熙) 연간에 차오인(曹寅)의 장자(長子)의 손에서 나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위안메이(袁枚)는 “홍루(紅樓) 중의 어떤 교서(校書)는 특히 요염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교서(校書)”는 기녀에 대한 아칭(雅稱)이지만, 대관원(大觀園) 중에는 결코 어떤 기녀도 섞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차오쉐친(曹雪芹)이 지은 것은 실록식 『홍루몽』으로 소설 『홍루몽』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분명히 주장했지요. 제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발단”은 류둥(劉冬)과 류푸친(劉福勤) 두 선생 때문입니다. 1997년 10월 제가 남경을 떠난 지 2년 뒤에 다시 남경에 돌아가 이 두 분들과 함께 장시간 토론할 기회( 그 때 잊을 수 없는 대화는 『홍학연구삼인담(紅學硏究三人談)』이란 제목으로 『명청소설연구(明淸小說硏究)』1998년 제2기에 게재되었다)를 갖게 되었습니다. 류둥(劉冬)선생은 마땅히 문학적인 분위기로 『홍루몽』의 창작과정을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류푸친(劉福勤)선생은 그의 직감적인 추측에 의거하여 『홍루몽』의 창작 중에 아마도 대관원은 사실이 아니며 성격과 기품이 제각기 다른 그렇게 많은 여인들은 모두가 예술적인 허구의 소산이며 차오쉐친(曹雪芹)은 기방(妓房)의 생활경험을 서술했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위안메이(袁枚)의 말을 더욱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당시에 비록 매우 신선하다고 느꼈지만 찬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뒤에 『정사(情史)』권7 “정치류(情痴類)” <노기(老妓)>에 기록된 명말(明末) 명사(名士) (王百谷)의 “가정(嘉靖) 연간에 해내(海內)가 평온한데, 금릉(金陵)은 가장 부유하면서도 매우 평강하였다. 제희(諸姬) 중에 유명한 자로는 전에는 류(劉), 둥(董), 뤄(羅), 거(葛), 돤(段), 자오(趙)가 있고, 후에는 허(何), 쟝(蔣), 왕(王), 양(楊), 마(馬), 추(褚)가 있는데, 청루(靑樓 – 각주: 妓樓의 별칭)에서 일컫는 ‘십이채(十二釵)’가 바로 그들이다.”라는 말과 청초(淸初) 『친화이견문록(秦淮見聞錄)』에서 말한 “만력(萬曆) 연간에 『십이채여교서록(十二釵女校書錄)』이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서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란 친화이(秦淮)의 청루(靑樓) 명희(名姬)들을 지칭한 것이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논자들은 대부분 『홍루몽』이 “정장(情場) 참회(懺悔)”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봉건사회에서 어디에 가서 이런 “정장(情場)”을 찾겠습니까? 차오쉐친(曹雪芹)이 소설을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고 명명한 이유는 바로 작중인물의 원형이 확실히 친화이(秦淮)의 ‘곡(曲)중 십이채(十二釵)’인 까닭이지요. “내가 지은 죄가 물론 많지만 규각(閨閣) 중에 분명히 사람이 있어 나의 불초함으로 인해 스스로 잘못을 가리려고 모두 없애 버리려고 해서는 결코 되지 않는다.”라고 『홍루몽』의 작자는 줄곧 밝히고 있는데, “내가 지은 죄가 물론 많지만”이란 말과 “규각 중에 분명히 사람이 있어”란 말은 본래 성질이 다른 일로써 어째서 반드시 “나의 불초함으로 인해 스스로 잘못을 가리려고 모두 없애 버리려고 해서는 결코 되지 않는다.”라고 했겠습니까? 이 양자는 확실히 어떤 내재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추측되는데, 기방을 출입하고 오입을 하는 것은 줄곧 바르지 못한 행실로 간주되어 왔으니 『홍루몽』의 작자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바로 “부잣집 도련님 시절 호의호식하면서 부모의 가르침을 어기고 스승친구의 규훈을 저버리”고서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작자가 만약 기루(妓樓)에서 끈끈한 정을 나누지 않았다면 “그 당시의 모든 여인들 사귀었고 일일이 세밀하게 살펴 비교해 보니 그들의 행동 견식이 모두 나보다 낫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만일 “나의 불초함으로 인해 스스로 잘못을 가리려고” 한다는 염려에서 이 일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면 “행동 견식이 모두 나보다 낫다는” “그 당시의 모든 여자들”을 모두 사라져 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순방 : 이렇게 『홍루몽』을 해석한다면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까?

어우양젠 : 세속의 편견으로 본다면 “기방문화”는 자연히 매우 저속한 것이지요. 그러나 만일 중국문학사의 실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상황이 전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명말청초(明末淸初)에는 더욱 특수하였습니다. 천인커(陳寅恪)선생은 『류루스별전(柳如是別傳)』 중에서 “금릉(金陵)은 명나라 제2의 수도로 남방 정치의 중심지이며, 사대부들이 운집하는 곳으로 친화이(秦淮) 곡원(曲院)의 제희(諸姬)들은 문필과 예술이 당대의 최고였다”라고 평하였는데, 류루스(柳如是), 둥샤오완(董小宛), 마샹란(馬湘蘭), 구헝보(顧橫波), 볜위징(卞玉京), 커우메이(寇眉), 천위안위안(陳圓圓) 등은 모두 명절(名節)을 지키고, 도의(道義)를 중히 여겼으며, 음률(音律)을 알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시사(詩詞)에 능하고, 서화(書畵)를 잘하는 “악적(樂籍)의 기녀”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녀들은 당시에 가장 출중한 여성들로써 자신들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강상(綱常)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고 당대 문인명사들과 “남녀의 정분과 시우(詩友)의 우의(友誼)”를 함께 나누었는데, 그들은 의기가 투합 되면 서로 존중하며 서로 공감을 나누면서 시(詩)를 논하고 문(文)을 담하면서 노래와 응대를 즐기며 애정을 나누어서 문학창작에서 즐겨 소재로 삼는 창작 대상이 되었으니, 『판교잡기(板橋雜記)』․『영매암억어(影梅庵憶語)』에서 『도화선(桃花扇)』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렇게 탄생한 것입니다. 『홍루몽』도 친화이(秦淮) 명기(名妓)들이 이루어 놓은 문학 분위기 속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가상할 수 있습니다. 작자의 고백에서 『홍루몽』을 창작한 창작 동기는 결코 가정이 몰락한 뒤에 “번화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회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몽환(夢幻)을 두루 거친” 뒤에 “모든 여인들”에 대한 추억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작품의 진짜 묘사대상이 가정생활의 경력이라면 “그 당시 모든 여자들”에 대한 호칭으로 자기 집 자매와 친척을 부르는 것은 확실히 타당치 않고 적절치 못한 것이지요. “일일이 세세하게 비교해보면” 특히 조석으로 함께 있는 가족의 말투 같지가 않습니다. 「홍루몽인자(紅樓夢引子)」에서 “세상이 개벽되고서 누가 정종(情種)인가? 모두가 단지 풍월(風月)의 정(情)이 농후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홍루(紅樓)”와 “풍월정(風月情)”의 내재관계를 지적하고 있는데, 대관원의 소녀들은 임(林), 설(薛), 사(史)를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여인들은 바오위(寶玉)의 자매가 아니면 집안의 하녀들인데, 바오위(寶玉)과 그녀들 사이의 감정을 “풍월정(風月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궈위스(郭預適, 왼쪽), 허우중이(侯忠義, 가운데) 선생과 함께, 사진 ⓒ 조관희, 2002

오순방 :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홍루몽』에 대한 새로운 학설은 소설연구에 있어 어떤 보편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우양젠 : 저의 견해는 단지 『홍루몽』텍스트에 대한 여러 해석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연히 보다 더 충실하게 하고, 또 다방면에 걸쳐 설득력이 있는 검토가 필요합니다. 저는 홍학(紅學)연구의 가장 이상적인 경지는 마땅히 작자와 시대, 판본, 본사(本事)에 대한 고증이 『홍루몽』텍스트의 해석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며, 마치 양자를 쪼개 놓고 심지어 대립시켜 놓는 통병(通病)을 모두 갖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일종의 착각을 일으키도록 하여 고증(考證)이건 색은(索隱)이건 간에 소설 작품을 읽는 것에 대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떨 때에는 도리어 작품의 감상을 방해할 수 있는 것으로도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을 바꾸는 것이 아마도 홍학연구(紅學硏究)를 진일보 발전시키는 관건이 될 것입니다. 나의 시도가 무슨 특징이 있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몇 가지 측면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홍학’연구의 일단을 가지고 말한 것인데, 전체 고대소설연구에 관해서 말하자면 저는 고대소설연구를 일종의 과학으로 간주하는데, 20세기 이후에 점차 형성된 것으로 소설연구를 세상에서 누구나 공인하는 학문으로 만든 것은 마땅히 루쉰(魯迅)과 후스(胡適)의 개척자적인 공로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 세기 이래로 어떤 이론 형세 하에서 몇몇 사유방식이 형성되어 일대(一代) 일대(一代)씩 반복적으로 담론되어지면서 누구나 아는 “공리(公理)”로 변하여 후인들이 연구할 때에 논리의 전제와 기초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이러한 ‘공리’는 실제로 모든 경우에 정확한 것은 아니며, 마땅히 새롭게 분석 비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농민봉기를 칭송”한 것으로 알았던 『수호전』은 중국소설사에 있어 유일 무일한 “기적(奇蹟)”이며, “반봉건적”이라는 『홍루몽』도 유일 무일한 “기적(奇蹟)”으로 알고 있었는데, 만일 우리가 『수호전』을 시민문화의 전통 속에 놓고 보며, 『홍루몽』을 청루문화(靑樓文化)의 전통 속에 놓고 본다면 모든 “기적”은 바로 역사해석을 하는 대단히 자연적인 사건으로 변해 버릴 것입니다. 소설연구에 있어서 공리의 전제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관점과 견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순방 : 선생님께서는 소설을 연구하신 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근래 후학들의 연구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후학들에게 바라는 말씀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우양젠 : 학문을 하는 학자들의 기본태도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저술을 할 때에 타인의 견해를 억지로 끌어들여 논술하는 일은 피하고 자신의 관점과 견해를 갖도록 기초학력과 자료조사, 분석 능력 등을 고루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관점과 견해를 추총하다 보면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순방 : 중국에서 보신 한국 중국소설학계와 학자들의 활동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십니까?

어우양젠 : 저는 1991년 상하이(上海) 푸단대학(復旦大學)에서 개최된 중국근대문학국제학술회의(中國近代文學國際學術會議)에서 처음으로 오순방(吳淳邦)교수와 같은 자리에서 논문을 발표하였고 『중국통속소설총목제요(中國通俗小說總目提要)』의 번역작업으로 교류를 지속하고 있었는데, 그 후로 중국소설과 관련된 여러 학술회의에서 끊임없이 한국학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한국학자들의 학회활동과 근래의 출판활동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 한국학자들의 비약적이고 괄목할만한 연구 활동에 경의를 표하며 특히 한국중국소설학회의 다양한 출판사업과 학회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중국소설연구회보(中國小說硏究會報)』를 통해 한국소설학회의 활동상황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교류를 희망하며 중국소설연구를 공통분모로 삼아 보다 진일보한 교류가 진행되기를 희망합니다.

어우양젠(歐陽健)교수는 1941년생으로 올해가 환갑이 되는 해인데, 그는 1976년 『수호전』의 연구를 시작으로 금년까지 근 25년간 중국소설을 연구하여 『수호신의(水滸新議)』, 『명청소설채정(明淸小說采正)』, 『명청소설신고(明淸小說新考)』, 『고대소설판본만화(古代小說版本漫話)』, 『고대소설작가만화(古代小說作家漫話)』, 『만청소설간사(晩淸小說簡史)』, 『홍루신변(紅樓新辨)』, 『홍학변위론(紅學辨僞論)』, 『만청소설사(晩淸小說史)』, 『홍학백년풍운록(紅學百年風雲錄)』 등 전문서 18권과 고적(古籍) 정리 16권, 근 200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어우양젠(歐陽健)교수는 판본문헌(版本文獻)을 중시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여 『수호전』과 홍학연구, 청말소설연구 등의 여러 분야에서 독창적인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여 1985년 이후 중국소설연구에 있어 주목받는 전문가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나는 이 분과 대담을 나누면서 그가 젊어서부터 정치사회적인 억압과 제약 속에서도 끊임없이 학문의 발전과 진실의 규명을 위해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연구 자세와 인생역정에 대해 큰 감명(感銘)을 받고 이 자리를 빌어 충심(衷心)어린 경의를 표하며, 어떤 환경의 어려움도 우리의 연구에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경험의 산증인 앞에서 좀더 성실하게 학문에 임해야겠다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21세기의 소설연구는 아마도 간난(艱難)했던 지난 20세기의 척박한 연구풍토 위에서 환경과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묵묵히 연구에 정진했던 선배들의 피땀 어린 성과를 기초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데, 어우양젠(歐陽健)교수의 가시밭 길 연구역정은 그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으면서도 기존의 학설을 비판할 수 있는 식견 있는 학자는 비록 당대(當代)의 고통과 홀대를 감수해야 하지만 학계의 평가는 역사의 흐름을 뛰어넘어 그 진가를 분명히 판단하리라고 확신한다.

[엮은이 주: 이 글은 원래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6집(1998년 11월)에 실린 것을 엮은이가 수정 보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