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기(鄭元基 정원기 삼국지연구소 소장) 진행/정리
[진행자의 말] 선보쥔 선생의 원적(原籍)은 안후이성(安徽省) 루장(廬江). 1946년 4월 14일 중칭(重慶)에서 출생. 19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쓰촨대학(四川大學) 외국어문학과(外文科 : 러시아문학)에 입학. 1970년 졸업 후 스주현(石柱縣 : 원래는 쓰촨성에 속했으나 현재는 중경시의 일부분)에서 10년 동안 교직 생활을 하였는데, 일찍이 스주중학(石柱中學)의 부교장(副校長)을 역임하였음. 1980년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에서 주최한 연구원 선발 고사에 응시하여 쓰촨성(四川省) 문학 전공 계열 전체 수석의 성적으로 합격함. 그로부터 쓰촨성사회과학원(四川省社會科學院)에서 고전문학 연구에 종사하면서 부소장(副所長)․부연구원(副硏究員) 등의 직책을 역임함. 1994년부터는 철학문화연구소(哲學文化硏究所) 소장․연구원․연구생부 교수 등을 겸직하게 됨. 이 외에도 현재 중국『삼국연의(三國演義)』학회의 상무부회장(常務副會長) 겸 비서장․중국속문학학회(中國俗文學學會) 이사․『중화문화논총(中華文化論叢)』부주편(副主編) 등을 겸직하고 있음. 1996년 말에서 1997년 초에 걸쳐 3개월 동안은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Humboldt-Universität) 중국고대문화연구소(中國古代文化硏究所)의 초빙교수로 다녀옴.
정원기 :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이번에 한국의 중국소설학계에 선생님을 소개할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쁘군요. 먼저 근황에 대해 말씀 좀 해 주시겠습니까?
선보쥔 : 네. 최근 몇 년 사이 저는 몇 종류의 『삼국(三國)』 판본을 정리하였고 또 『삼국만담(三國漫談)』과 『삼국연의(三國演義)』 평점본(評點本)을 출판했지요. 그리고 근래에는 『뤄관중과 삼국연의(羅貫中和三國演義)』를 완성하였고, 지금은 『삼국연의통론(三國演義通論)』을 집필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원기 : 굉장히 일을 열심히 하시는 것 같군요. 그렇게 많은 일을 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텐데, 시간적인 여유는 있으신 모양이지요?
선보쥔 : 아니지요. 실제로 시간이 많이 부족합니다. 주로 밤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서 필요한 시간을 확보합니다. ‘식소사번(食少事煩)’하는 셈이지요.
정원기 : 정말 그러시는 것 같군요. 하지만 몸조심도 하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주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관한 문제만을 연구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떤 특별한 동기라도 있으셨는지요?
선보쥔 : 원래 저는 선진양한문학(先秦兩漢文學)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1981년 하반기부터는 중국 고전소설 쪽으로 연구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 중에서도 『삼국연의』 연구에 가장 중점을 두게 되었지요. 그게 벌써 햇수로는 17년이 되었군요. 제가 『삼국연의』를 연구하게 된 이유랄까, 근본적인 원인을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삼국연의』는 중국 문학사상 첫째 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할 완숙한 장편소설이며, 중화문화(中華文化)에 끼친 영향은 그 어떤 작품과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심원하므로 마땅히 중시되어야 하고 진지하게 연구되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과거 오랜 세월 동안 『삼국연의』에 관한 연구실적은 『홍루몽』이나 『수호전』 등 다른 고전소설의 연구 활동에 비해 너무도 미약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책임감과 함께 또 솔직히 『삼국연의』에 관한 진지한 연구로 공헌을 세워보자는 욕심도 생겼던 것이지요. 이러한 저의 욕심은 우리 쓰촨성사회과학원(四川省社會科學院)이 전국에서도 『삼국연의』에 대한 중신(重新) 연토회(硏討會)를 솔선하여 발기하도록 하였으며, 개인적으로도 중국 『삼국연의』 학회가 설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중요한 책임과 직책을 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위치와 의무들은 오히려 전체적인 연구 상황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게 되었고 일부 잡지사나 출판사는 『삼국연의』에 관한 저의 논저가 나오기도 전에 예약하는 사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되었던 주위 여건들은 저의 『삼국연의』에 관한 연구 활동을 부단히 촉진시켰고, 그 결과 이 방면의 연구 성과도 갈수록 많아졌던 것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수호전』이나 “삼언이박(三言二拍)”․『경화연(鏡花緣)』 또는 기타 작품들에 관한 연구를 할 기회가 있었고, 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가며 상당한 성과도 올렸다고 생각합니다만, 성취도나 영향 면에 있어서 결코 『삼국연의』 연구 결과와 비교할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국내외 학술계의 동도(同道)들은 저를 오로지 『삼국연의』 연구에만 몰두하는 사람으로 생각들을 하고 있지요.
정원기 : 네. 저 또한 『삼국지연의』 연구에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연구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금 선생님께서는 17년 동안이나 『삼국지연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의 연구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어떻겠는지요?
선보쥔 : 좋습니다. 그러면 개괄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17년 동안의 저의 『삼국연의』 연구는 대체로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1981년부터 1986년까지로 볼 수 있는데, 즉 초기 연구단계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이 시기에 저는 비교적 체계적으로 『삼국연의』에 관한 연구자료를 수집하였고, 10여 편의 논문과 종술(綜述)을 발표하면서 『삼국연의』에 내포된 사상 및 인물형상․미학풍격․예술성취 등에 관한 다방면적인 탐토(探討)를 시도함과 동시에 더욱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다지는 작업을 병행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1987년에서 1995년까지인데, 깊이 연구에 몰입한 단계라 할 수 있지요. 이 시기 저는 각고의 노력으로 『삼국연의사전(三國演義辭典)』(譚良嘯와 合編)을 엮었고 네 종류의 『삼국연의』 판본을 정리했으며, 『삼국만담(三國漫談)』과 『삼국연의』 평점본(評點本) 등을 출판했고, 그리고 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비교적 뚜렷한 성과에다 영향도 확대되어 자신만의 특색을 형성하게 되기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세 번째 단계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전체적이고도 종합적인 연구단계로 진입할 계획입니다.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삼국연의』에 관한 더욱 전면적이고 깊이 있는 관조를 통하여 좀 더 높은 단계의 연구 성과를 도출해 낼 작정입니다.
정원기 : 그러면 이번에는 선생님의 연구 방법에 관해 의문이 생기는데, 이 문제에 대해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선보쥔 : 저의 연구 방법은 한 마디의 말로 개괄할 수 있는데, 즉 “순서점진(循序漸進), 지고구신(知故求新)”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순서점진(循序漸進)”이란 바로 과학적 규율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먼저 연구에 필요한 상세한 “자료”를 갖추고, 이 기초를 발판으로 차츰 스스로의 연구 목표와 핵심 연구 사항 및 연구 각도 등을 조정하고 선택합니다. 예컨대 단편 논문에서부터 시리즈물 논문에 이르기까지, 또는 『삼국연의사전』 편집과 『삼국연의』 판본의 정리 작업에서부터 전저(專著)의 찬술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떤 방면의 글을 쓰든 저는 이러한 자신의 방법을 고수합니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전진하여 기초가 비교적 착실해지면, 그 다음으로 얻게 되는 연구 성과는 그 수준이 높아지고 자신만의 특색을 갖추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지고구신(知故求新)”이란 “지고(知故)”의 기초 위에서 “구신(求新)”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소위 “지고(知故)”란 과거를 전면적이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삼국연의』와 『삼국연의』의 각종 판본들을 반복 정독하여 충분히 익숙토록 하는 것과, 『삼국연의』와 관계가 있는 각종 역사자료, 즉 사서(史書) 『삼국지』 및 페이쑹즈(裵松之) 주․『후한서(後漢書)』․『화양국지(華陽國志)』․『자치통감(資治通鑒)』 등과 각종 필기 소설․송원희곡 중의 삼국희(三國戱)․『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등을 숙독하는 것을 말하며, 또 기왕의 『삼국연의』 연구 성과는 물론, 각종 문학사․소설사․자료회편(資料滙編)․논문․전저(專著) 등을 전면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타산이 서게되고(心中有數)”, “과녁 없이 활을 쏘는(無的放矢)”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소위 “구신(求新)”이란 곧 “지고(知故)”의 기초 위에 창조적으로 연구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기하고 새로운 단계를 개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삼국연의』 판본 정리에 대한 본인의 성과가 비교적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제가 처음으로 『삼국연의』연구에 손을 댄 시기에는 이러한 작업을 할 계획이 없었지요. 그러나 『삼국연의』를 반복하여 연독(硏讀)하는 과정 중에서 저는 계속적으로 출현하는 “기술적(技術的)인 착오(錯誤)” 부분을 책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고, 이러한 발견이 축적되어 1985년 초에 이르러서는 곧 중신교리본(重新校理本) 『삼국연의』를 쓸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1986-1987년 사이에 완성한 『삼국연의사전』 편집과정에서 저는 『삼국연의』에 나오는 인물이나 정절(情節)에 대해 대량의 고증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단지 인물 소개 부분에서만 623항목의 주해(註解)를 곁들였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삼국연의』 중의 “기술적인 착오” 부분을 지적해내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저의 중신교리(重新校理) 『삼국연의』에 대한 결심은 더욱 커져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모두 6종의 『삼국연의』 정리본(整理本) 및 『삼국연의』 평점본(評點本)이 연속적으로 출판되게 되었고, 각각의 출판 본은 모두 원본 중의 수백 군데나 되는 “기술적인 착오” 부분을 교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백 년 이래 『삼국연의』 판본에 대하여 이토록 전면적이고 세밀하게 정리 작업을 한 사람은 없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때문에 이 정리 본들은 국내외 학술계의 동도들로부터 높은 평가와 광범위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는 완전히 “순서점진(循序漸進), 지고구신(知故求新)”의 결과라 할 수 있지요.
정원기 : 선생님의 “순서점진(循序漸進), 지고구신(知故求新)”에 의한 연구 방법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군요. 평소 선생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즉흥적으로 처리하시지 않고 매사 하나 하나 꼼꼼히 챙기시며 깨알 같이 작은 글자로 또박또박 기록하시곤 하는 태도에서 이미 그러한 태도가 체질화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교리(校理) 작업이 실로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모스 로버츠(Moss Roberts), 일본의 입간상개(立間祥介)를 비롯하여 대륙의 많은 학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글을 직접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특히 천랴오(陳遼)․돤치밍(段啓明) 교수 등은 선생님의 교리본을 「심본(沈本) 『삼국연의』」라 명명했으며, 원로 학자이신 주이쉬안(朱一玄) 선생은 “마오쭝강(毛宗崗) 이후 최대의 성과”를 올린 판본이라고까지 격찬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자신의 연구 경향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이 문제에 관해 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선보쥔 : 질문하신 “연구경향”이란 말이 결국 저의 연구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면, 역시 “전면관조(全面觀照), 실사구시(實事求是), 독립사고(獨立思考)”라는 한 마디의 말로써 대답드릴 수 있습니다. “전면관조(全面觀照)”란 『삼국연의』를 하나의 전체로 보고 여러 가지 각도에서 관찰과 연구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란 모든 문제를 사실로부터 출발시켜 사물의 본래 면목에 따라 연구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주관적인 억단이나 헛된 추측을 해서는 안 되며, 잘못된 부분으로부터 시작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독립사고(獨立思考)”란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배우지만 어떠한 기성 논조에도 일방적으로 미혹되지 않고 자신의 두뇌로 독립적인 사고 과정을 거친 뒤 결론을 내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사고와 검토를 거쳐 다른 사람의 옳은 말은 받아들여 섭취하고, 틀린 말은 규정(糾正)하며, 전체적인 관점에서 나온 말이 아니면 수정하거나 보충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스스로를 풍부하게 하여 새로운 견해를 도출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삼국연의』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는 문제는 물론 하나의 작은 문제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수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글 속에서 『삼국연의』에는 400여 명의 인물이 출현한다고 하였고 이 말은 별다른 검토 없이 계속 와전되어 왔는데, 기실 이러한 견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지요. 사람들이 이러한 착오를 일으킨 까닭은 수십 년 전 어떤 개인적으로 저명한 학자가 가정본(嘉靖本)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 수권(首卷)에 있는 “삼국지종료(三國志宗僚)”의 인물표를 보고 거기 나오는 400여 인물을 곧 전체 인물로 결론을 내려 버렸고, 후인들은 진지한 고찰도 없이 그냥 간단하게 기성의 견해를 답습해 왔기 때문에 전파될수록 이 착오는 널리 퍼졌던 것입니다. 저는 연구 과정에서 이 작은 문제에서조차 착오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자면, 첫째, “삼국지종료(三國志宗僚)”란 근본적으로 『삼국연의』의 인물표가 아니라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이며, 숫자도 “400여 명”이 아닌 511명이었고, 둘째, “삼국지종료”중의 수십 명의 인물은 근본적으로 『삼국연의』에는 출현조차 않는 인물이었으며, 셋째, 『삼국연의』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많은 숫자는 “삼국지종료”중에서 찾아볼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간단한 문제조차도 만약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거나 독립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았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면 『삼국연의』에는 결국 얼마나 많은 인물이 출현할까요? 제가 『삼국연의사전』에 등재한 인물은 모두 1,256명입니다. 그 중에서 중복 출현하는 23명을 빼고 나도 1,233명이나 되지요. 곧 『삼국연의』 가운데에는 1,200여 인물이 출현하는데, 그 중에서도 이름과 성씨가 있는 인물은 근 1,000명이 된다고 말하곤 하지요. 저는 이 문제에 관하여 「『三國演義』究竟寫了多少人物?」이란 글을 써서 『인민일보(人民日報)』 해외판․타이완(臺灣)의 『중앙일보(中央日報)』 등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삼국연의』중의 기초적인 지식에 관해 사람들 사이 계속 이어지는 착오를 막자는 것이지요. 차오차오(曹操)․자오윈(趙雲)․웨이옌(魏延) 등의 인물 연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태도로 많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저의 17년 동안의 『삼국연의』에 관한 연구는 한 마디로 말해서 “ 『삼국연의』에 대한 전체적인 관조”라고 할 수 있지요.
정원기 : 네.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역시 저의 한어(漢語) 표현 능력이 시원치 못하여 알고 싶은 문제를 정확히 전달치 못한 것 같군요. 제가 질문한 선생님 자신의 “연구 경향”은 17년 동안 견지해 오신 “연구 태도”라기 보다는 『삼국연의』에 관한 연구의 전체 흐름 속에 위치하는 선생님만의 독특한 개성이랄까 경향 같은 것이었는데…, 기실 이러한 문제는 자신이 평가하기보다는 제삼자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좋습니다. 그러면 『삼국지연의』에 관한 현재 중국 학계의 연구 경향을 소개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선보쥔 : 현재 중국 학계의 『삼국연의』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종류의 경향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본체연구”의 심화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응용연구”의 확대라 할 수 있습니다. “본체연구”란 『삼국연의』를 한 부의 고전문학 명저(名著)로 간주하여 그 속에 나오는 인물․정절(情節)․미학가치 등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으로,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 그 위치를 발전시키려는 경향이며, 그리고 “응용연구”란 『삼국연의』를 지혜의 보고(寶庫)나 인생의 계시록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정치학․군사학․인재학․관리학․경영모략(經營謀略) 등의 방면으로 그 응용 가치와 당대(當代)에 상응하는 의의를 탐토하려는 경향을 말하지요. 이 두 가지 경향은 각기 그 가치와 성취가 있어서 부단히 병행하여 발전될 것으로 봅니다.
정원기 : 일본이나 구미(歐美)의 『삼국연의』연구 열기가 대단하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쪽의 연구 상황은 어떠한 지요?
선보쥔 : 그 문제도 너무 큰 문제입니다. 설명해야 할 내용이 매우 많으므로 여기서는 그저 간단하게 줄여서 말씀드리지요. 일본의 『삼국연의』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따라서 연구 실적도 대단히 많으며, 비교적 높은 수준의 전문가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전세대 학자로는 오가와 타마키(小川環樹)․타치마 쇼우스케(立間祥介), 중견 학자로는 오츠카 히데다카(大塚秀高)․김문경(金文京), 젊은 세대의 학자로는 우에다 노조무(上田望)․나카가와 유(中川諭)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모두가 나름대로 상당한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라파 각국에도 몇몇 『삼국연의』 전문가들이 있는데, 러시아의 리프친(Riftin B.L, 중국명은 李福淸), 영국의 앤드루 웨스트(Andrew West, 중국명은 魏安) 등은 모두 독특한 연구 실적을 보여주고 있고,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전세대 학자로는 류춘런(柳存仁), 중견 학자로는 앤 매클라렌(Anne Maclaren, 중국명은 馬蘭安) 등이 있는데, 이들 또한 상당한 실적을 올린 『삼국연의』 전문가들 입니다. 미국의 사정으로 보면, 근래에는 주목할만한 『삼국연의』 학자가 없는 실정이지만 앤드루 플락스(Andrew Plaks, 중국명은 蒲安迪) 선생의 『명대소설사대기서』 중에는 『삼국연의』에 관한 독자적인 견해가 엿보입니다. 이들 학자가 내놓은 연구 실적은 이미 중국 『삼국연의』 학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우리들이 귀감으로 삼을만한 진지한 내용들이지요.
정원기 :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삼국연의』 연구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계시는지요? 알고 계신다면 말씀해주실 까요?
선보쥔 : 제가 아는 것은 한국에 있어서 『삼국연의』는 가장 많은 독자층과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진 소설 중 하나란 사실뿐입니다. 한국 학자들이 연구한 『삼국연의』논저가 얼마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한글을 몰라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이후로 많은 한국 학자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정원기 : 이번에는 『삼국지연의』 연구의 전체적인 발전 상황을 개괄해 주시겠습니까?
선보쥔 : 그 또한 매우 복잡한 문제로서 전체 『삼국연의』연구사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지 80년대 이래의 중국 학계 연구를 위주로 말씀드리자면, 대체로 3단계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1980―1985년 사이로 발란반정(拔亂反正), 정본청원(正本淸源)의 단계라 할 수 있지요. 학자들은 『삼국연의』에 관계되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다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고 많은 새로운 견해를 제기하였지요. 둘째 단계는 1986―1989년으로 보는데, 다양한 발전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삼국연의』의 본체 연구는 점점 심화되고 응용 연구도 차츰 활발해지는 시기였습니다. 셋째 단계는 1990년 이후로, 연구가 질적으로 더욱 향상되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본체연구는 더욱 깊어져 일련의 영향 있는 저작들이 출현했으며, 응용연구도 더욱 풍부해져서 그 성과는 날로 증대되고 있는 실정이지요.
정원기 :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삼국연의』와 기타 고전소설 연구와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시는지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선보쥔 : 『삼국연의』연구와 『수호전』연구․『서유기』연구․『금병매』연구․『홍루몽』연구 등등은 전체 중국소설 연구 체계에 있어서 병렬된 분지(分支)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간 동안 이들은 평행 발전해오면서 제각기 독특한 성취가 있었고 때로는 중복되는 점도 있었지요. 이후로는 더욱 많은 서로 다른 영역간의 교류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정원기 : 네에. 제가 한 질문의 범위가 또 너무 광범했던 모양이지요? 그럼,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기회에 듣기로 하고, 이번에는 간단한 질문을 한 가지 해보겠습니다. 현재 “홍학(紅學)”․“금학(金學)”․“수학(水學)” 등의 용어는 보편화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삼국학(三國學)”이란 용어는 독립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요?
선보쥔 : 당연히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이 “삼국학(三國學)”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그 영향도 대단합니다.
정원기 :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삼국연의』를 공부하고자 하는 후학들이 교훈으로 삼을만한 말이 있으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선보쥔 : 네, 감사합니다. 젊은 학자들에게는 “진성견의(眞誠堅毅), 무실창신(務實創新)”이란 말을 한 마디 선사하고 싶군요.
(1997. 10. 26 대담)
[엮은이 주: 이 글은 원래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6집(1998년 11월)에 실린 것을 엮은이가 수정 보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