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경(鄭暋暻, 이화여대 강사) 진행/정리
정민경 :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의 중문학 연구자들을 위해 먼저 선생님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해 주십시오.
둥나이빈 : 저는 1942년 8월에 상하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은 상하이의 푸단대학(復旦大學)을 1963년에 졸업하였지요. 졸업 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중국과학원 문학연구소(中國科學院文學硏究所)에 오게 되었는데, 그때에는 중국사회과학원이라고 하지 않고 중국과학원이라고 했지요. 1981년에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지금까지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 몸담고 있습니다. 지금은 문학연구소의 연구원이자 박사지도교수이며, 당대문학학회(唐代文學學會)의 부회장이고, 리상인연구회(李商隱硏究會)의 회장으로 있습니다. 저의 연구 방향은 주로 당대문학(唐代文學), 서사학(敍事學), 중국문학사와 그 이론들이지요. 리상인의 시를 연구하여 2권의 책을 썼는데, 『리상인전(李商隱傳)』과 『리상인의 심령세계(李商隱的心靈世界)』로, 처음에는 주로 당시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중국작가협의회(中國作家協議會) 회원으로 몇 편의 소설을 쓰긴 했으나 책으로 출판하지는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 쓴 것이라 좀 모자란 감이 있는데, 이후에 보길 원한다면 보여주죠.
정민경 : 소설을 쓰셨다니,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처음에는 주로 리상인의 시를 중심으로 한 당대 시가를 연구하셨는데 요즘은 서사학과 소설 연구에 더 관심을 보이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가에서 소설로 관심이 바뀌게 된 이유라도 있을까요?
둥나이빈 : 중국은 한국과는 달리 주로 문학을 단대별로 나누어서 연구를 하지요. 선진양한문학연구(先秦兩漢文學硏究), 위진남북조문학연구, 당송문학연구, 명청문학연구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그 시기 안에 있는 문학은 시가니 소설이니 하는 구분을 하지 않고 거의 아우르게 됩니다. 저의 주요 연구 방향은 당대문학(唐代文學)인데, 당대문학 하면 다 아다시피 시가를 중심으로 얘기를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리보(李白)나 두푸(杜甫), 바이쥐이(白居易) 같은 대 시인을 시작으로 연구를 했지요. 그렇게 당시를 연구하던 중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사라는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시가는 서정이 위주인 문학 양식이고 중국은 서정시의 왕국이라고들 합니다. 시가라는 문학양식이야말로 서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형식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시가를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된 문제란 바로 시가 속에서도 서사의 성분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가는 분명히 서정을 위주로 하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명을 주는 부분도 분명 서정 성분이 크겠지만, 그 서정이야말로 서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중국 고전소설의 문체 독립(中國古典小說的文體獨立)』에서 서술한 문제도 바로 문학과 서사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지요.
정민경 : 선생님, 그렇다면 문학과 서사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십시오.
둥나이빈 : 그러죠. 제가 생각하기에 서사의 방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직접 사건을 묘사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직접 묘사하지는 않지만 함축적인 서술 속에 숨겨져 있는 서사 때문에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감동은 서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바로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감정의 표현인 것이죠. 그러니, 시가 속에도 처음부터 서사 성분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경(詩經)』부터 생각해본다면 『시경』 속의 작품들은 모두 서사의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아(大雅)>의 <생민(生民)>, <대명(大明)> 등의 서사시에 가까운 시가 이외에도 남녀 사이의 애정을 묘사하거나 전쟁시에 변방에서 쓴 시들 같은 서정시들도 서사의 성분을 농후하게 지니고 있죠. 『시경』이후 초사(楚辭) 취위안(屈原)의 <이소(離騷)>에서도 구체적으로 일을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사의 성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서사적 배경을 모른다면 근본적으로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한대(漢代)의 악부(樂府)에 오면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같은 서사시도 나타나고 서사의 성분이 더욱 농후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시가를 연구하던 중에 서사라는 것이 서정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심지어는 서사라는 것을 떠나서는 문학 작품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게 생각하던 참에 80년대 서구의 서사학이 중국에 들어오게 되면서, 더욱 서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정민경 : 그렇다면 서구의 서사학이 선생님의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씀이신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선가요?
둥나이빈 : 서구의 서사학이 80년대 중국에 소개되면서 중국에서도 서사학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서구의 서사학 연구는 분명히 중국보다 많이 앞서지요. 그들은 서사 문학 작품을 비교적 세밀하게 분석하며 구조주의나 기호학, 언어학 같은 이론들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이와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주로 순서(順叙), 도서(倒叙), 역서(逆叙), 보서(補叙) 등 글쓰기 기교나 글쓰기 방법 면에 치중하여 연구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구 서사학의 방법론적인 면에 의거하여 중국의 고전 소설을 연구하면 이전의 연구자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민경 : 그렇다면, 선생님의 『중국 고전소설의 문체 독립(中國古典小說的文體獨立)』은 주로 서사학의 각도에서 고대 중국의 진정한 소설을 찾는 작업이셨겠네요.
둥나이빈 : 그렇지요, 그래서 중국 문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신선 이야기(仙話)부터 시작하여, 서사의 요소, 형식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소설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나를 본 것이죠. 소설이야말로 문학 발전 과정 중에, 특히 인간의 서사 능력의 발전 과정 속에서 가장 무르익은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란 양식은 문학 양식 중 비교적 고급화된 것이죠. 마치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처럼 사상이 비교적 성숙되고, 사회 경험이 풍부해지고, 습득한 지식도 많아야만 비로소 상상력을 가미하여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습니다. 서사 능력이란 바로 사회의 경험이나 학습을 통해서 습득되는 것이죠. 일종의 본능 즉 어린아이가 울고 떼를 쓰는 행위들도 그 안에 배가 고프다거나 뭔가 편안하지 않다는 서사적 의미를 지니지만, 이런 본능이 발전하여 이야기를 엮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서사의 발전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이러한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소설의 문체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국의 고전소설에서 진정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당 전기(唐傳奇)가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이러한 과정을 논증한 것입니다. 신선 이야기(仙話), 시가, 산문, 사부(史部)의 어떤 서사적 요소들이 소설로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한부(漢賦)에서는 소설의 요소가 많이 증가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인물을 가설로 설정한다든가 대화를 진행시킨다든가, 배경 설명을 한다든가, 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최소화된 소설의 성분이라는 것이죠. 당 전기 이전에도 지괴 소설이나 지인 소설 같은 많은 서사 작품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소설이라도 하기에는 너무나 간략합니다. 소설이란 이야기의 발전 단계도 있어야 하고, 원인과 결과 관계도 성립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면이 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정민경 : 이 책은 제가 알기에 1994년도에 출판된 것으로 아는데, 혹시 그 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더 보충할 부분이나 생각이 바뀌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둥나이빈 :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주도면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민간문학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민간문학이 소설, 서사에 끼친 영향을 홀시 하였다는 것이죠. 민간의 전설, 민간의 이야기 등은 민간에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로, 소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민간 서사에 대한 연구가 과거에는 불충분하게 이루어졌죠. 제 책에서도 이 부분이 홀시 되었다고 봅니다. 사실상, 저는 소설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史書) 안의 기록 가운데 매우 많은 부분이 민간 서사의 성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쓰마쳰(司馬遷)의 『사기(史記)』에 기재된 것 중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을 포함한 많은 부분이 민간에서 유전되던 이야기라는 것이죠.
정민경 : 그렇다면 소설에도 민간 서사가 영향을 미쳤고, 사서에도 민간 서사가 작용을 했다는 말씀이신데요.
둥나이빈 : 저는 민간 문학 특히 민간 서사라는 부분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사서 안에도 분명히 민간 서사의 성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간서사가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통하게 해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역사를 중시하여 역사 안에 소설적 성분이 있다고 여겨왔지만, 민간 서사를 소설과 역사의 중개자로 삼는다면 이 문제를 더욱 쉽게 풀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민간 서사가 소설의 부분으로 흡수되면 소설로 변화하고 역사의 부분으로 흡수되면 역사가 되는 것이죠. 이러한 현상은 현실 생활에서도 충분히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문화대혁명만 해도 그 안에 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전설은 충분히 소설로 다시 씌어질 수도 있고, 역사 안으로 흡수되어 다시 역사로 탄생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정민경 : 질문을 바꿔서, 선생님의 「뉴썽루의 『현괴록』을 논함(論牛僧孺『玄怪錄』」이란 논문을 보면 선생님께서는 『현괴록』 안의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당대의 행권(行卷)에 대한 증거로 삼으셨는데, 제가 알기에는 요즘 많은 학자들이 소설로 행권을 행했다는 사실 자체를 대부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둥나이빈 : 행권은 자오옌웨이(趙彦衛)의『운록만초(雲麓漫鈔)』안의 기재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자오옌웨이는 송대 사람으로 당대와 시대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고, 제가 여기기에는 그의 주장이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푸옌(李復言)의 경우를 보면, 진사 시험을 보기 전에 그의 소설을 먼저 시험관에게 보였는데, 시험관이 리푸옌의 소설을 보고 나서, 소설이 국가의 대사와 무슨 관계가 있냐며 그것을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결국 리푸옌은 진사에 합격하지 못했지요. 이러한 기록은 분명히 당대에 소설로 행권하는 일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행권에 관한 더 많은 자료를 찾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자세히 『현괴록』, 『속현괴록』 및 다른 단편소설들을 읽어본다면, 충분히 행권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현괴록』속에는 자오옌웨이가 말한 시필(詩筆), 사재(史才), 의론(議論)의 재능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지요. 어떤 때는 물건을 빌어, 어떤 때는 신선의 명의를 빌어, 어떤 때는 동물을 빌어 시를 쓰는데, 그 안에서 작가의 시필을 엿볼 수 있고, 작품 안에 보이는 당조(唐朝)의 판결문, 책문 등은 모두 작가의 의론 능력을 시험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자오옌웨이가 말한 행권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하지 자오옌웨이가 꾸며낸 말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행권에 관한 더 많은 증거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문헌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 살펴보지 못한 문헌에서 행권의 일을 증명할 기록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요.
정민경 :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작품들 속에 보이는 시들은 시필를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 전기 문체의 하나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둥나이빈 : 저도 이러한 상황을 인정은 합니다. 당대의 사람들은 원래 시를 잘 지었고, 그래서 소설을 지으면서도 그 안에 종종 시를 삽입하여 표현하였던 것이죠. 당 전기 안에서 시가 삽입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러한 상황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상황으로서는 명확히 소설 안의 시가가 행권을 위해서 쓰였다고 만은 말할 수 없지만, 만약 소설이 행권으로 쓰였다면 작품 안의 이러한 시가들은 작가의 시에 대한 재능을 엿보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행권의 목적은 바로 자신이 다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현괴록』이나 『속현괴록』 안의 시가들은 분명히 다른 전기 작품 안의 시가들과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유희의 성분이 비교적 강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단지 저의 의견일 뿐이지 결론은 아니니까, 앞으로의 연구를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민경 : 선생님이 청챵(程薔) 선생님과 함께 저술하신 『당 제국의 정신문명-민속과 문학(唐帝國的精神文明-民俗與文學)』을 보면 당대의 문학과 민속문화를 연결시켜 서술하고 계십니다. 최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중국이나 한국이나 문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이 책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죠?
둥나이빈 : 민속문화는 문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지요. 문학이란 본래 사회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래서 사회 풍조와 문학의 품격은 매우 관계가 깊습니다. 사회 동란시기에 씌어진 문학 작품과 평안한 태평시기에 씌어진 문학 작품의 품격이 다르듯이요. 그리고 문학 작품이란 작가를 통해 씌어지는 것인데 작가의 생활은 바로 민속 생활 가운데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 안에 민속 문화가 스며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소나무나 매화를 좋아하고, 복숭아꽃이나 살구꽃을 싫어하는 것도 중국인의 심미 관념이 작품을 통해 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은 문학 창조의 원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제가 지금 그 말에 한 마디 덧붙인다면, ‘민속’ 사회생활은 문학 창조의 원천이라고 하고 싶군요. 구체적으로 말해『당 제국의 정신문명-민속과 문학(唐帝國的精神文明-民俗與文學)』은 주로 당대 사람들의 정신 면모에 대해 서술을 했습니다. 세시풍속, 도시의 민속습관, 여인들의 생활과 습관, 문인사대부의 풍모, 신령숭배와 무술금기(巫術禁忌), 민간 문학과 기예 등 6개의 방면으로 나누어, 당대문학과의 관계를 밝힌 것이죠. 앞으로 계속 더 연구를 진행해 나갈 생각입니다.
정민경 : 오늘도 문학사에 대한 좌담회가 열린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도 최근에 당대문학사(唐代文學史)나 삽화 중국문학사 같은 문학사 책을 쓰시지 않았나요. 삽화 중국문학사 같은 경우, 이번에 한국에서 번역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둥나이빈 : 사실 최근 제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바로 중국문학사학사입니다. 중국문학사라는 학문 분야가 이미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중국문학사 연구 과정을 회고해보면서 중국문학사 연구에 대한 방법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마 조만간 문학사학사에 관한 책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정민경 :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둥나이빈 : 아마 당대의 시가, 소설, 그리고 중국 고대 문언소설 쪽으로 계속 연구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듣기에 중국의 몇몇 고서들이 중국에서는 이미 유실되었지만 한국이나 일본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져 준다면 중국 연구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민경 : 한국에서도 이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럼 바쁜 와중에 이렇게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둥나이빈 : 저도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기쁩니다. (2000년 9월 19일 대담)
[엮은이 주: 이 글은 원래 『중국소설연구회보』 제43집(2000년 9월)에 실린 것을 엮은이가 수정 보완했다.]
[참고] 둥나이빈(董乃斌, 1942~ ) 교수 소전(小傳)
고전문학 연구가. 1963년 8월에 푸단대학(復旦大學) 중문과(中文系)를 졸업하고 동년 10월에 중국과학원 문학연구소(中國科學院文學硏究所, 지금의 中國社會科學院)로 부임하였으며 1974년 말에는 시베이대학(西北大學) 중문과(中文系)로 부임하여 가르쳤다. 1978년 10월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원 문학계(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院文學系) 석사연구생으로 입학하여 1981년 9월에 「리상인연구(李商隱硏究)」(지도교수: 吳世昌)라는 논제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년 10월에 다시 문학연구소로 돌아와 고대문학연구실에서 근무하였다. 1985년에는 문학연구소 신학과연구실(文學硏究所新學科硏究室) 주임, 1988년에는 고대문학연구실(古代文學硏究室) 주임을 역임하였고 1994년에는 문학연구소 부소장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아울러 『문학평론(文學評論)』·『문학유산(文學遺産)』 편집위원,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원 교수, 중국당대문학학회(中國唐代文學學會) 및 리상인연구회(李商隱硏究會) 부회장 등직을 겸임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李商隱傳』(陝西人民出版社, 1985), 『李商隱的心靈世界』(上海古籍出版社, 1992), 『中國古典小說的文體獨立』(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2), 『流金歲月』(香港 中華書局, 1992), 『彩色揷圖中國文學史』(공저, 祥云『美國』出版公司, 1995), 『唐帝國的精神文明: 民俗與文學』(程薔과 공저,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6)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李商隱詩歌的主觀化傾向」(『唐代文學論叢』 1981년 제1집), 「略論玉溪生詩解中的一種不良傾向」(『河北師院學報』 1981년 제1기), 「李商隱悲劇初探」(『文學評論叢刊』 1981년 제9집), 「李商隱詩歌風格分期論綱」(『西北大學學報』 1982년 제3기), 李商隱生年爲元和六年說」(『文學遺産增刊』 1982년 제14집), 「論樊南文」(『文學遺産』 1983년 제1기), 「天地間自欠此體不得: 論盧·馬異·劉叉的詩」(『中國古典文學論叢』 1984년 제1집), 「『會昌一品集』及李德裕的思想和創作」(『文學評論叢刊』 1984년 제18집), 「李商隱散文簡論」(『西南師院學報』 1984년 제3기), 「唐代新樂府和詩歌敍事藝術的發展: 兼及中國文學史上一種現象的探討」(『文學遺産』 1984년 제4기), 「中國古典詩歌硏究的現狀和未來」(『文學評論』 1985년 제2기), 「古典文學硏究的當代性和新方法」(『文史知識』 1985년 제10기), 「李德裕的詩和詩中的李德裕」(『唐代文學硏究論叢』 1985년), 「唐詩人許渾生平考索」(『文史』 제26집), 「論當代古典文學硏究的體系」(『文學評論』 1986년 제3기), 「論中晩唐邊塞詩」(『唐代文學論叢』 1986년), 「中國封建文化體系中的文學」(長沙 『中國文學硏究』 1987년 제4기), 「論中國敍事文學的軌迹」(『文學遺産』 1987년 제5기), 「闡釋者的文化意識與心靈歷程」(『福建論壇』 1988년 제1기), 「中國韻文古典形式的命運」(湘潭 『中國韻文學刊創刊號』 1988년), 「李商隱詩的語象: 符號系統分析」(『文學遺産』 1989년 제1기), 「精神自由的强烈呼喚」(『江海學刊』 1989년 제1기), 「從史的政事紀要式到小說的細節化: 論唐代傳奇與小說文體的獨立」(『文學評論』 1990년 제5기), 「敍事方式和結構的新變: 二論唐傳奇與小說文體的獨立」(『文學遺産』 1991년 제1기), 「郭紹虞先生在中國文學批評史上的貢獻」(『文學遺産』 1992년 제1기), 「唐代的節俗與文學」(『唐代文學硏究』 1992년 제3집), 「唐代的士風演變和時代迂易」(공저,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院學報』 1994년 제1기), 「唐人七夕詩文論略」(『文學評論』 1993년 제3기), 「現代小說觀念與中國古典小說」(『文學遺産』 1994년 제2기), 「俠與中國知識分子人格理想」(『中國知識分子的人文精神』 河南人民出版社, 1994), 「文學史家的定位: 關於文學史學的思考之一」(『江海學刊』 1994년 제6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