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明史)》 〈정화전(鄭和傳)〉을 살펴보면 영락(永樂) 연간에서 선덕(宣德) 연간 사이에 정화 등이 서양과 교통하기 위해 사졸(士卒) 2만 7천여 명을 이끌고 많은 재물을 실은 채 사신으로 나가면서 수십 척의 대형 선박을 건조했다고 한다. (원주: 제1차 원정에서는 총 62척이었는데, 이는 전기에 수록된 내용이다. 제2차 원정에서는 총 48척이었는데, 이는 《성사승람(星槎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소주(蘇州) 유가하(劉家河)에서 배를 띄워 바다를 통해 복건(福建)에 이르렀고, 복건 오호문(五虎門)에서 돛을 올린 후 먼저 참파(占城國, Čampa)에 도착했고, 이후로 여러 번국(番國)들을 두루 들렀다. 영락 3년(1405)에 최초로 항해한 때로부터 선덕 8년(1433)에 경사(京師)로 돌아오기까지 28년 동안 전후로 7차례에 걸쳐서 사신의 임무를 봉행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번왕(番王) 3명을 사로잡고 총 30여 개 나라를 들렀다. 정화 이후로 해외에 사신으로 나간 이들은 모두가 정화가 그 일로 해외 번국에 중국의 위세를 과시했다고 칭송했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삼보태감(三寶太監)이 서양에 다녀온 일이 명나라 초기의 성대한 일이라고들 얘기한다. 또 정화가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인도양을 종횡하던 시기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나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와 같은 서양의 위대한 항해가들이 활약한 때보다 수십 년 이전이었다. 그러니 중국인의 이와 같은 공전의 항해 사업은 동서 교통의 역사에서 일대 사건이지만, 지금까지도 서양 역사에서 항해가에 대해 서술하면서 정화를 언급하지 않고 삼보태감이 서양에 다녀온 일도 서술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옛날 민간을 돌아다니며 희극이나 평화(平話)를 공연하던 이들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니, 이 옛날 일을 어찌 다시 제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화가 어명을 받고 해외로 나갈 때 수행한 사람으로는 회계(會稽, 지금의 浙江 紹興) 사람 마환(馬歡: ?~?, 字는 宗道)과 태창(太倉, 지금의 蘇州市에 속함) 사람 비신(費信: 1388~?, 자는 公曉), 응천(應天, 지금의 南京市) 사람 공진(鞏珍: ?~?, 號는 養素生)이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귀국한 뒤에 그 일에 대해 기록하여 각기 책을 한 편씩 저술했으니 각기 차례로 《영애승람》과 《성사승람》, 그리고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이다. 공진의 《서양번국지》는 전증(錢曾: 1629~1701, 자는 遵王)의 《독서민구기(讀書敏求記)》와 《술고당서목(述古堂書目)》, 그리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등의 서목(書目)에만 제목이 수록되어 있을 뿐 원래의 책은 이미 남아 있지 않다. (원주: 그 책의 필사본은 지금 北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데, 重版이다.) 비신의 《성사승람》은 두 가지 판본이 남아 있는데, 2권으로 된 것(天一閣本과 鄧世龍 편찬의 《國朝典故》本)과 4권으로 된 것이다.
후자는 주복준(周復俊: 1496~1574, 자는 子顬)이 일부 내용을 삭제하고 나누어 편집한 산석본(刪析本)인 듯한데, 오늘날 가장 널리 유행하는 판본이다. 다만 비신의 책은 절반 가까운 내용이 왕대연(汪大淵: 1311~?, 자는 煥章)의 《도이지략(島夷誌略)》에서 베낀 것이고 본인의 기록 또한 상당한 간략하여 사건의 서술이 상세한 마환의 《영애승람》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현존하는 마환의 《영애승람》도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장승(張昇: 1442~1517, 자는 啓昭)이 개정(改訂)한 판본이 비교적 널리 유행했다. 판각본 가운데 고증이 가능한 것으로는 장승의 《장문희공시문집(張文僖公詩文集)》의 부록으로 간행된 판본과 진계유(陳繼儒: 1558~1639, 자는 仲醇)가 편찬한 《보안당비급(寶顔堂秘笈)》 판본, 도정(陶珽: ?~?, 자는 紫閬)이 편찬한 《속설부(續說郛)》 판본, 풍가빈(馮可賓: ?~?, 자는 禎卿)이 편찬한 《광백천학해(廣百川學海)》 판본, 《천하명산승개기(天下名山勝槩記)》 판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판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장승의 판본은 삭제한 부분이 너무 많아 원문이 얼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별로 볼 게 없다.
마환의 원래 책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4가지 판본이 있는데 심절보(沈節甫: 1532~1601, 자는 以安)이 편찬한 《기록휘편(紀錄彙編)》 판본과 《국조전고》 판본, 오미광(吳彌光: 1789~1871, 자는 章垣)이 편찬한 《승조유사(勝朝遺事)》 판본, 그리고 《삼보정이집(三寶征彝集)》(원제는 《三寶征夷集》) 판본이 그것이다. 《삼보정이집》은 천일각의 서목에 처음 그 제목이 기록되었다가 나중에 심덕수(沈德壽: 1854~1925)가 편찬한 《포경루장서지(抱經樓藏書志)》(원제는 《포경루서목기(抱經樓書目記)》)에도 수록되었다. 최근의 조사에 다른 이 판본은 이미 누가 획득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으니,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겨우 세 판본뿐이다. 그리고 그 세 판본을 비교하면 《기록휘편》 판본이 가장 상세하고, 《승조유사》 판본은 원문과 번역된 명칭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일괄적으로 삭제해 버렸다. 《국조전고》 판본은 원래 간행본은 삭제한 부분이 없었던 듯하지만 지금은 필사본만 남아 있는데, 오탈자(誤脫字)가 너무 많아서 《승조유사》 판본보다도 더 간략해져 버렸다.
이 세 판본 가운데는 명나라 때의 판각본도 있고 필사본도 있지만 대개 오늘날의 학자들이 쉽게 볼 수 없다. 이에 이 세 판본을 함게 놓고 교감(校勘)하되 《기록휘편》 판본(원주: 이하 ‘원본’이라고 약칭함)을 저본(底本)으로 삼고 《승조유사》 판본(원주: 이하 ‘오본[吳本]’으로 약칭함) 및 《국조전고》 판본의 문장을 통해 실증했다. 그리고 황성증(黃省曾: 1490~1540, 자는 勉之)이 마환의 《영애승람》 원문에서 뽑아 기록한 《서양조공전록(西洋朝貢典錄)》(원주: 이하 ‘황록[黃錄]’으로 약칭함)과 《명사》 등의 문헌, 그리고 《포경루장서지》에 수록된 《삼보정이집》의 전후(前後) 서문(원주: 이하 ‘집서[集序]’로 약칭함)를 참조했다. 마환은 본래 〈기행시(紀行詩)〉를 첨부했는데 이것은 《기록휘편》 판본과 《국조전고》 판본에만 수록되어 있다. 다만 《국조전고》 판본의 〈기행시〉는 착오가 많아 해독하기 어려워서 나무등(羅懋登: ?~?, 자는 登之)의 《서양기통속연의(西洋記通俗演義)》(《삼보태감서양기(三寶太監西洋記)》 또는 《삼보하서양(三寶下西洋)》 등으로도 불림. 이하 《서양기》로 약칭함)에 수록된 것을 통해 교감했다. 《서양기》에 수록된 《영애승람》의 문장도 참고하거나 방증 자료로 쓸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으니, 소설이라는 이유로 경시할 수 없다.
마환의 원래 책에는 문언(文言)과 백화(白話)가 뒤섞여 있어서 그것을 기록한 이들이 모두들 의도적으로 깎고 다듬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세 판본에는 서로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다. 지금 이 책을 교감하는 목적은 원서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여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것이지만,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비속어나 별자(別字)들을 획일적으로 바로잡아 고치지 않았다. 또한 읽어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번역된 명칭에는 모두 그 옆에 원래 명칭을 첨부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번역 명칭은 인도양 일대의 언어가 아주 많기 때문에 지금은 전부를 완전히 해석할 수 없지만 이미 Mayers와 Groeneveldt, Philipps, Schlegel, Rockhill, Duyvendak, Pelliot 등에 의해 대부분 고증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가운데 비교적 우세한 학설을 채용하여 따를 것이다. 지명의 경우는 당시의 번역 명칭만 나타내되 같은 명칭을 옛날과 오늘날 다르게 번역하는 경우는 나중에 〈남해지명(南海地名)〉에서 별도로 모아 비교한 것을 첨부하도록 하겠다.
당시의 이른바 서양이란 대개 인도양을 가리킨다. 마환의 〈기행시〉에서는 “도파(闍婆)에서 또 서양으로 갔다[闍婆又往西洋去]”라고 했으니, 자바(java) 섬에서 서쪽에 있는 바다를 서양이라고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명사》 권323 〈파라전(婆羅傳)〉에서는 “파라(婆羅, Borneo)는 문래(文萊, Brundei)라고도 하는데 동양(東洋)의 끝이자 서양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했으니, 이 또한 인도양을 서양으로 간주했음을 증명한다. 다만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바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바닷가의 육지도 서양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서양 쇄리(瑣里, 원주: 《명사》에서는 ‘Coromandel’ 연안의 ‘Cola’를 가리킴)나 서양 고리(古里, 원주: 《武備志》에서는 ‘Calicut’라고 했음), 서양포(西洋布, 원주: 《영애승람》에서는 ‘坎巴夷’ 즉 옛날에는 ‘Koyampadi’라고 불렀고 지금은 ‘Coimbatore’라고 부르는 곳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 함) 등의 명칭은 모두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을 서양으로 여기게 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양으로 찾아온 뒤의 일이다.
《독서민구기》의 《서양번국지》 조목에서는 “전후로 내려진 칙서(勅書)를 자세히 살펴보면 서양을 다녀간 것은 정화 한 사람만이 아니었던 듯하고, 정화가 다녀온 것도 한 차례에 그친 것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명나라 초기의 역사 기록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부족하여 증거를 찾기가 까마득하다.”라고 했다. 다만 문헌 기록과 최근에 발견된 자료를 살펴보면 정화가 사신으로 다녀온 회수와 수행한 이들의 성명, 그리고 다녀온 연월(年月)은 대부분 어렵지 않게 규명할 수 있다. 《명사》에 수록된 정화의 전기에서는 그가 전후로 7차례 사신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했는데, 이제부터 이에 대해 하나씩 고증해 보겠다.
제1차는 영락 3년(1405) 6월 기묘(己卯)에 출발하여 영락 5년(1407) 9월 계해(癸亥)에 경사로 돌아왔는데, 수행인은 환관 왕경홍(王景弘: ?~1464?) 등으로서 《명사》의 본기(本紀)에 이름이 나온다.
제2차는 영락 6년(1408) 9월 계해에 출발하여 영락 9년(1511) 6월 을사(乙巳)에 경사로 돌아왔는데, 이 또한 《명사》의 본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가 사신으로 활동한 때가 반드시 출발한 때는 아닐 테지만, 이번 원정에는 비신이 수행했다. 비신의 《성사승람》에 따르면 “영락 7년(1409) 가을 9월에 태창(太倉) 유가항(劉家港)에서 출발하여 10월에 복건 장락(長樂)의 태평항(太平港)에 도착하여 정박했다. 12월에 복건 오호문에서 바다로 출발하여 순풍을 타고 열흘 밤낮을 항해하여 점성국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출발 시기는 칙서를 받은 때로부터 1년 정도 뒤였던 것이다.
제3차는 영락 10년(1512) 11월 병진(丙辰, 원주: 이 달에는 丙辰日이 없으니 《명사》에서 丙戌을 잘못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됨)에 칙명을 받아서 영락 13년(1515) 7월 계묘(癸卯)에 경사로 돌아왔는데, 이 또한 《명사》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도 출발 시기가 칙명을 받은 때로부터 1년 정도 차이가 있는 듯하다. 아마 마환은 이번 원정에서 처음으로 수행한 듯한데, 영락 14년(1516)에 쓴 《영애승람》의 서문에 따르면 영락 11년(1513)에 “정사(正使)인 태감 정화로 하여금 보선(寶船)을 이끌고 서양의 여러 번국에 가서 칙명을 낭독하고 하사품을 내리게 했다. 나는 번국의 글을 통역하면서 사신의 말단에 포함되었다.”라고 했다. 이로 보건대 칙명을 받은 때와 출발한 때가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수행한 이들 가운데는 회교(回敎)를 관장하는 장교(掌敎)인 합삼(哈三)도 수행했다. 서안(西安) 양시(羊市)의 대청진사(大淸眞寺)에 있는, 가정(嘉靖) 2년(1523)의 〈중수청정사기(重修淸淨寺記)〉에 따르면 “영락 11년 4월에 태감 정화가 칙명을 받고 서역의 천방국(天方國)에 파견되었는데, 섬서(陝西)를 통해 나가면서 그 나라 말을 통역하여 사신을 성실하게 보좌할 사람을 구하였다. 이에 본사의 장교 합삼을 찾게 되었다.”라고 했다. 이것은 정화가 칙명을 받은 이듬해 4월에는 여전히 섬서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제4차는 영락 14년 12월 정묘(丁卯)에 칙명을 받아 영락 17년(1519) 7월 경신(庚申)에 경사로 돌아왔으며, 이 역시 《명사》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 출발한 때도 역시 칙명을 받고 몇 달 뒤였다. 천주성(泉州城) 바깥의 회교선현묘(回敎先賢墓)에는 정화가 번국에 다녀오면서 천주를 경유하며 사당에서 향을 사르는 의식을 거행했다는 비문의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흠차총병태감 정화가 서양 호르무즈(Hormuz) 등의 나라에 공무를 보러 가다가 영락 15년(1517) 5월 16일에 여기서 향을 사르는 의식을 거행하며 성령의 보우를 바랐으니, 진무 포화일이 그 일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운다.
欽差總兵太監鄭和前往西洋忽魯謨廝等國公幹, 永樂十五年五月十六日於此行香, 望靈聖庇佑, 鎭撫浦和日記立.
이 또한 날짜의 차이를 증명하는 예이다. 이번에 수행한 이들 가운데는 승려 승혜(勝慧)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영락 18년(1520)에 간행된 《태상설천비구고령험경(太上說天妃救苦靈驗經)》의 뒤쪽에 수록된 제기(題記)에 나타나 있다. 정화는 비록 회교를 신봉했지만 불교에 귀의한 적도 있었다. 《불설마리지천경(佛說摩利支天經)》의 뒤쪽에 수록된 영락 1년(1403)에 요광효(姚廣孝: 1335~1418, 자는 斯道 또는 獨闇)가 쓴 제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제 보살계를 받은 제자 정화(법명은 복선)가 재물을 내어 장인들을 시켜서 경전을 간행하여 유통시키니 그가 얻을 훌륭한 보답은 말로 다할 수 없으리라. 복선이 어느 날 향을 지니고 나를 찾아와 제기를 써 달라고 청하기에 이렇게 고하노라.
영락 1년 계미해 가을 8월 23일, 승록사 좌선세사문 도연.
今菩薩戒弟子鄭和法名福善, 施財命工, 刊印流通, 其所得勝報, 非言可能盡矣. 福善一日懷香過余、請題, 故告以此. 永樂元年, 歲在癸未, 秋八月二十又三日, 僧錄司左善世沙門道衍.
이것도 증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제5차는 영락 19년(1521) 정월 계사(癸巳)에 칙명을 받아 영락 20년 8월 임인(壬寅)에 경사로 돌아왔는데, 이 또한 《명사》의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출발 시기는 그해 겨울쯤으로 여겨진다. 마환은 이번에도 수행한 듯하며, 그 외에도 내관(內官) 양경(楊慶)과 홍보(洪保) 두 사람도 따라갔다. 《독서민구기》의 《서양번국지》 조목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책은 첫머리에 영락 18년 12월 10일에 칙명을 기재했다. 태감 양경이 서양으로 가서 공무를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영락 19년 10월 16일에는 내관 정화와 공화(孔和), 복화(卜花), 당관보(唐觀保)에게 칙명이 내려졌고, 이제 내관 홍보 등에게 각 번국으로 돌아가는 사신들을 전송하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하사할 것들은 관례에 따라 정해진 수량과 목록을 맞추어 주도록 했다.
此冊首載永樂十八年十二月初十日勅, 太監楊慶往西洋公幹. 永樂十九年十月十六日勅內官鄭和孔和卜花唐觀保. 今遣內官洪保等送各番國使臣回還, 合用賞賜卽照依坐去數目關給予之.
이 해 10월에도 정화 등에게 칙명이 내려졌으니, 당시 정화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내 벗 샹다(向達, 자는 覺明)가 청나라 초기의 필사본의 잔권(殘卷)을 하나 소장하고 있는데, 책의 제목과 서발(序跋)이 모두 없어졌지만 아마 정화가 편찬했다는 《침위편(針位編)》의 일종인 듯한데, 그 책의 한 조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영락 19년에 성지를 받들어 삼보신관(三寶信官) 양민(楊敏, 字佛鼐)과 정화, 이개(李愷)까지 3명이 벵갈라(榜葛剌, Bengala, 원주: 원서에는 ‘傍葛據’로 잘못 표기했음) 등 번국으로 가서 36개 나라를 돌며 공무를 수행했다. 영락 23년(1425)에 오귀양(烏龜洋)을 지나던 중에 갑자기 풍랑이 사나워졌다. (원주: 이 다음에는 天后娘娘에게 기도하여 평온해졌다는 것을 서술함.)
永樂十九年奉聖旨, 三寶信官楊敏字佛鼐, 洎鄭和李愷等三人往榜葛剌等番邦, 週游三十六國公幹. 至永樂二十三年, 經烏龜洋中, 忽暴風浪.
이 조목은 제5차와 제6차 원정을 하나로 합쳐 놓았지만 사신들 가운데 양민과 이개 두 사람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고찰할 수 있다. 양민의 이름은 《명사》 〈외국전(外國傳)〉에서 볼 수 있다. 구본(舊本) 《성사승람》 권수(卷首)에 수록된 〈행정표(行程表)〉에 따르면 영락 10년에 어느 소감(少監)이 벵갈라 등의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을 천일각 판본에서는 양칙(楊敕)이라고 했고, 《국조전고》 판본에서는 양랄(楊剌)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들 모두가 양민(楊敏)을 잘못 쓴 것인지도 모른다.
제6차는 영락 22년(1424) 정월 계사(癸巳)에 칙명을 받았지만 《명사》의 본기에는 경사로 돌아온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홍희(洪熙) 1년(1425) 2월에 정화에게 ‘하번제군(下番諸軍)’을 지휘하여 남경(南京)을 수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 이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원정은 길어 봐야 1년을 넘기지 않았을 테니, 겨우 팔렘방(舊港, Palembang)까지만 갔다가 바로 돌아왔을 것이다.
제7차는 다녀온 시기가 《명사》의 본기에 밝혀져 있지 않고, 다만 정화 전기에서는 선덕(宣德) 5년(1430) 6월에 정화와 왕경홍이 다시 칙명을 받고 호르무즈 등 17개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독서민구기》의 《서양번국지》 조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선덕 5년 5월 4일에 남경수비태감(南京守備太監) 양경(楊慶)과 나지(羅智), 당관보(唐觀保), 대사(大使) 원성(袁誠)에게 칙명을 내렸다. 이제 태감 정화에게 서양으로 가서 공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크고 작은 해선(海船)들은 원래 교부하여 들여놓았던 남경 창고의 각 아문에서 정확한 전량(錢糧)과 하사품, 원래 서양에 다녀온 관원들이 매입한 물건, 그리고 수행한 선박들에서 함께 사용할 물건들을 수령하도록 했다. 칙명이 이르자 즉시 수에 맞춰서 태감 정화와 왕경홍(王景弘), 이흥(李興), 주량(朱良), 양진(楊眞), 우소감(右少監) 홍보(洪保) 등에게 방출하여 지불함으로써, 수령하여 원정을 다녀올 때 쓰도록 했다.
宣德五年五月初四日, 勅南京守備太監楊慶羅智唐觀保大使袁誠. 今命太監鄭和往西洋公幹. 大小海船, 該關領原交南京入庫各衙門一應正錢糧, 並賞賜, 並原下西洋官員買到物件, 及隨船合用等物. 敕至卽照數放支與太監鄭和王景弘李興朱良楊眞右少監洪保等, 關領前去應用.
이 또한 정화와 왕경홍 이외에 이흥과 주량, 양진, 홍보가 모두 사신으로 다녀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또 《독서민구기》의 같은 조목과 《성사승람》 권수의 〈행정표〉, 《영애승람》 〈천방(天方)〉 조목을 통해서 공진과 비신, 마환까지 3명이 함께 사신들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곽숭례(郭崇禮)라는 인물의 이름이 《영애승람》 〈후서(後序)〉에 보이니, 그 또한 수행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들이 다녀온 시기는 축윤명(祝允明: 1461~1527, 자는 希哲)의 《전문기(前聞記)》(원주: 《기록휘편》 판본 권202)에 따르면, 선덕 5년 윤(閏) 12월 6일에 남경 부근의 용만(龍灣)에서 출항하여 선덕 8년(1433) 7월 6일에 경사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정화 전기에 따르면 정화 등이 선후로 다녀온 나라들은 참파(占城, Čampa), 자바(爪哇, Java), 크메르(眞臘, Kamboja), 팔렘방(舊港, Palembang), 섬라(暹羅, Siam), 캘리컷(古里, Calicut), 말라카(滿剌加, Malaka), 보르네오(渤泥, Borneo), 수마트라(蘇門答剌, Ačeh), 아루(阿魯, Aru), 코친(柯枝, Cochin), 콜람(大葛蘭小葛蘭, Quilon), 촐라(西洋瑣里, Cola), 촐라(瑣里, Čola), 카얄(加異勒, Cail), 파단 람브리(阿撥把丹南巫里, Lambri), 코모림(甘把里, Koyampadi), 실란(錫蘭山, Ceylan), 람브리(喃渤利, Lambri), 파항(彭亨, Pahang), 켈란탄(急蘭丹, Kelantan), 호르무즈(忽魯謨斯, Ormuz), 브라바(比剌, Brawa), 몰디브(溜山, Maldives), 순다(孫剌, Sunda), 모가디슈(木骨都束, Mogedoxu), 말린디(麻林, Malinde), 두파(剌撒祖法兒, Zufar), 솔리파탐(沙里灣泥, Jurfattan), 지움보(竹步, Jobo), 벵갈(榜葛剌, Bengal), 메카(天方, Mekka), 리데(黎代, Lidé), 나쿠르(那孤兒, Battak, Nakur) 등 37곳이다.
《명사》에서는 종종 한 나라에 대한 번역 명칭이 달라서 두 개로 나누어 기록하곤 했는데, 이 37개 나라들 가운데 람브리(南巫里 / 喃渤利)와 촐라(西洋瑣里 / 瑣里)는 바로 하나의 나라이다. 또 《명사》에서 ‘콜람(大葛蘭)’이라고 한 것은 바로 《성사승람》 〈대구남(大㖵喃)〉 조목을 근거로 한 것이며, 《성사승람》의 이 조목은 또 《도이지략(島夷誌略)》 〈소구남(小㖵喃)〉 조목을 옮겨 쓴 것이다. 그러므로 크건 작건 간에 콜람(葛蘭 / 㖵喃)은 모두 하나의 나라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겨우 34개 나라밖에 되지 않는다. 또 아덴(阿丹, Aden)이라는 나라는 마환과 비신, 공진의 책에 이름이 등장하니 그 역시 정화가 다녀간 곳일 테지만, 정화의 전기에는 그 이름이 빠져 있다. 《성사승람》의 브라바(卜剌哇, Brawa) 또한 보선(寶船)이 이르렀던 곳이지만 정화의 전기에서는 빠져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바로 전화 전기에서 언급한 브라바(比剌, Brawa)라고 하지만 대응하는 발음이 들어맞지 않으니 함부로 동의하기 어렵다. 이 외에도 정화 전기에 나오는 나라 이름들 가운데 마환과 비신, 공진의 책에는 없는 것들도 있으니 인도의 촐라(瑣里, Čola)와 카얄(加異勒, Cail), 파단 람브리(阿撥把丹南巫里, Lambri), 코모림(甘把里, Koyampadi), 솔리파탐(沙里灣泥, Jurfattan)까지 5개 나라이다.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켈란탄(急蘭丹, Kelantan)이라는 나라는 《島夷誌略》 〈순다(孫陀, Sunda)〉에서 말한 순다(孫剌, Sunda) 왕국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프리카 동쪽 해안의 말린디(麻林, Malinde)는 보선이 이르지 못한 곳일 가능성이 큰데, 마환의 책에서 찰리(刹利)를 촐라(瑣里, Čola)로 잘못 썼고, 다시 촐라(瑣里, Čola)가 인도 사람들을 아울러 칭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크메르(眞臘, Kamboja)도 보선이 거쳐 가지 않은 곳인 듯하다. 결국 정화 등이 다녀온 나라들 가운데 유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20개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정화가 다녀온 나라 가운데 고찰하여 규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뿐이지만 보선이 항해할 때에는 사실 인도양 연안을 두루 거쳤으니, 이것은 그 항해 노선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다.
보선의 여정에 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상세한 것은 《전문기》의 〈하서양(下西洋)〉 조목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제7차 항해 여정이지만 이 항해에서 따라갔던 옛 항로도 들어 있다. 이에 따르면 용만(龍灣)에서 출항하여 유가항(劉家港)을 거쳐서 장락항(長樂港)에 이르러 약 7개월을 머물렀다. 그리고 오호문(五虎門)에서 출항하여 참파(占城)에 도착했고, 그곳을 경유해서 자바(爪哇)의 수라바야(蘇魯馬益, Surabaya)에 이르렀고, 또 그곳을 경유하여 수마트라 동남쪽 귀퉁이의 팔렘방(舊港)과 말라카(滿剌加), 수마트라 서북쪽 귀퉁이의 아체(亞齊, Ačeh), 실란(錫蘭山), 캘리컷(古里), 페르시아 만 입구의 호르무즈(忽魯謨斯)를 차례로 거쳐서 다시 캘리컷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선단을 이룬 보선은 캘리컷을 거쳐서 바다로 돌아올 때에는 아체와 말라카, 참파 등지를 거쳐서 태창(太倉)으로 항해했다.
《전문기》에 기록된 여정은 거대한 선단을 이룬 보선의 여정이지만 그들이 거친 지역 또한 두루 열거되지 않았다. 이에 《영애승람》과 《성사승람》, 《서양조공전록》, 《명사》에 기록된 침위(針位)를 종합하여 증명하도록 하겠다. 이 책들에서는 자전(字典)에는 없는 ‘종(䑸)’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는데, 이 글자는 틀림없이 당시 해상 항해에서 사용하던 용어로서 바다의 큰 선박[海舶]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종’은 ‘대종(大䑸)’과 ‘분종(分䑸)’으로 나뉜다. 마환의 책 가운데 〈팔렘방(舊港)〉과 〈수마트라(蘇門答剌)〉, 〈캘리컷(古里)〉 조목에서 언급한 ‘대종보선(大䑸寶船)’은 아마도 정사(正使)가 타고 있던 대형 함대의 선박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권수(卷首)의 〈기행시〉와 〈아덴(阿丹)〉, 〈메카(天方)〉 등의 조목에서 언급한 ‘분종’은 아마도 각지로 나뉘어 파견된 선박을 가리킬 것이다. 여러 책에서 기록한 침위를 고찰해 보면 ‘분종’이 출발한 지역은 대체로 5군데이다.
첫째는 옛날 참파[占城]의 비자야(新州, Vijaya)로서 오늘날 안남(安南) 즉 베트남 중부의 퀴농(歸仁, Quy Nhơn)이다. 그 항로는 대략 세 개인데 보르네오 섬 브루나이(文萊, Brundei)로 가는 항로와 섬라(暹羅)로 가는 항로, 그리고 자바(爪哇)의 수라바야(蘇魯馬益)로 가는 항로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항로는 카리마타(假里馬打, Karimata) 섬과 빌리턴(麻葉甕, Billiton) 섬 사이를 지난다. ‘대종보선’이 따라간 항로는 아마 이 세 번째 항로였을 것이다. 이후로 수라바야에서 시작해서 팔렘방과 말라카, 아루(阿魯)를 거쳐서 아체(亞齊)에 이르게 된다.
둘째는 아체 즉 여러 책들에서 수마트라라고 한 곳이다. 이 항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벵갈(榜葛剌)로, 다른 하나는 실란(錫蘭山)으로 가는 노선이다. 이 두 항로는 아체에서 길이 나뉘고 모두 람브리(喃渤利)와 니코바(翠藍嶼, Nicobar)를 지나지만, 이후로 길이 나뉜다. ‘대종보선’이 따라 간 항로는 바로 두 번째 항로이다.
셋째는 실란의 별라리(別羅里)이다. 이곳은 비록 오늘날 어느 곳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의 콜롬보(高郞步, Colombo) 부근에 해당할 터이다. 그 항로도 두 개인데 하나는 서쪽으로 몰디브(溜山) 군도(群島)로 향하는 항로이고, 다른 하나는 서북쪽 콜람(小葛蘭)으로 향하는 항로로서 이 역시 ‘대종보선’의 항로이다. 《명사》에서는 실란에서 아프리카 동쪽해안의 브라바(不剌哇, Brawa)로 통할 수 있다고 했으니, 아마 몰디브 군도로 향하는 항로의 연장선을 말하는 듯하다.
넷째는 콜람이다. 그 항로도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프리카 동쪽 해안의 모가디슈(木骨都束)를 경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 코친(柯枝)으로 향하는 노선이다. ‘대종보선’은 이 항로를 따라 코친을 경유해서 캘리컷에 이르렀는데, 당시 보선은 아직 더 북쪽에 있는 아랍인들의 왕국이었던 솔리파탐(沙里八丹, 원주: 지금의 Cananore)와 호노르(狠奴兒, Honore)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듯하다.
다섯째는 캘리컷이다. 그 항로도 두 개인 듯한데 하나는 서북쪽 페르시아 만 어귀 호르무즈 섬으로 가는 항로이고, 다른 하나는 아라비아 남쪽 해안의 두파(祖法兒. 원주: 어쩌면 오늘날 라싸[剌撒]에 속할 수도 있음.)와 아덴(阿丹) 등의 나라로 향하는 노선이다. 당시 보선은 아직 메카를 경유하지 않았으니, 파견되었던 7명의 통역을 싣고 캘리컷으로 향한 배도 응당 이 항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가서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의 지다(秩達, Jidda)에 도착했을 것이다.
당시의 분종이 단지 하나의 함대에 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환과 비신, 공진 등은 여러 나라들을 동시에 다닐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록에 각기 상세하거나 소략한 차이가 생겼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마환은 라싸(剌撒)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영애승람》에 그에 관한 독립 조목이 없을 것이며, 비신은 메카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성사승람》에서 메카(天方)를 〈전해들은 나라들[傳聞諸國]〉 조목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이제까지 서술한 것은 단지 정화를 중심으로 서양에 다녀온 보선에 관한 것이었다. 이 외에 정화 이전 및 보선 이외의 특별 사신으로서 남해 및 인도양을 항해한 사람도 없지는 않으니, 《명사》에 기록된 내용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신 유숙면(劉叔勉)이 홍무(洪武) 2년(1369)에 촐라(西洋瑣里)에 다녀옴.
사신 탑해첩목아(塔海帖木兒)가 홍무 3년(1370)에 촐라(瑣里)에 다녀옴.
어사(御史) 장경(張敬)과 복건행성도사(福建行省都事) 심질(沈秩)이 홍무 3년에 보르네오(浡泥)와 자바(闍婆, 즉 爪哇)에 사신으로 다녀옴.
중관(中官) 윤경(尹慶)이 영락(永樂) 1~2년(1403~1404)에 자바와 말라카(滿剌加), 코친(柯枝), 캘리컷(古里) 등에 사신으로 다녀옴.
부사(副使) 문양보(聞良輔)와 행인(行人) 영선(寧善)이 영락 2년에 수마트라(蘇門答剌)와 촐리(西洋瑣里)에 사신으로 다녀옴.
중관 마빈(馬彬)이 영락 2년 이후에 촐라(西洋瑣里)에 사신으로 다녀옴.
중관 장겸(張謙)과 행인 주항(周航)이 영락 6년(1408)에 귀국하는 보르네오 국왕을 전송함.
중관 감천(甘泉)이 영락 10년(1412)에 귀국하는 말라카 국왕의 조카를 전송했고, 같은 해에 인도 자운푸르(沼納樸兒, Jaunpur)와 델리(底里, Delli) 두 왕국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같은 인물인지는 알 수 없음.
중관 후현(侯顯)이 영락 13년(1415)에 벵갈(榜葛剌) 왕국에 사신으로 다녀옴. 이 일은 《성사승람》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권수(卷首)의 〈행정표〉에서는 정화라고 잘못 씀. 이 외에 《성사승람》 〈행정표〉에서는 서감(少監) 양칙(楊敕) 등이 영락 10년에 벵갈 왕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일을 기록했음.
이런 기록들은 홍무, 영락, 선덕 연간의 성대한 국세(國勢)와 그 위엄이 얼마나 멀리 전파되었는가를 충분히 입증한다. 한(漢)나라 때에도 환관과 모집에 지원한 인물을 해외로 파견하여 기이한 물건을 구입한 일이 있지만(《한서》 권29), 명나라 초기의 엄청난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오늘날 현실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본서의 교감은 상다[向達]가 찾아보기 어려운 필사본과 판각본 몇 편을 통해 보여주고 아울러 새로 발견된 몇몇 자료 보내준 덕분에 가능했고, 명물(名物)에 대한 고증에는 Rockhill과 Pelliot의 연구(원주: 원래의 연구는 1915년 및 1933년의 《통보[通報]》를 참조할 것)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만 작년에 출판된 Duyvendak의 《마환의 책에 대한 중정(重訂)》은 아직 살펴보지 못했다. 《국조전고》 판본 《영애승람》은 비교적 나중에 구입했는데 애석하게도 오탈자가 너무 많아서 내용이 다른 문장 가운데 중요한 것만 뽑아 썼고, ‘오본’ 및 ‘황록’과 들어맞는 내용에 대해서는 두루 주석을 붙일 수 없었다. 세 번째 교정이 끝나서 고증을 통해 얻은 바를 권수(卷首)에 기록해 둔다.
민국(民國) 23년(1934) 8월 15일 펑청쥔(馮承鈞)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