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작루에 올라 登鸛雀樓/당唐 왕지환王之渙
白日依山盡 태양은 산에 기대어 지고
黃河入海流 황화는 바다로 향해 가네
欲窮千里目 천 리 멀리 다 보려 한다면
更上一層樓 다시 한 층 더 올라야 하리
왕지환(王之渙, 688~742)은 진양(晋陽), 즉 지금 산서성 태원(太原) 사람인데, 형 왕지함(王之咸), 왕지비(王之賁)와 함께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른 나이에 급제하여 기주(冀州), 즉 지금 하북성 형수현(衡水縣)의 주부(主簿)를 지내다가 남의 무고를 받아 관직을 떠나 각지를 10여 년 동안 마음대로 다녔다. 이때 황하의 남북과 서북의 변경지방 일대를 두루 돌아다녔다.
이 시는 바로 이때 그 만유가 5년 정도 되던 35세에 지은 시라 한다. 관작루는 황하가 북쪽에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트는 포주(蒲州)라는 곳의 황하 가에 있었다.
성격이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그의 시는 웅혼(雄渾)하고 장활(長闊)하며 열정적이고 분방하였기 때문에 당시 악공들의 악보로 널리 전해졌다. 변새의 풍광을 잘 그려내었는데 고적(高適), 잠삼(岑參), 왕창령(王昌齡)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세상에 전해지는 작품이 겨우 6수에 불과한데 모두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양주사(涼州詞)>와 <등관작루(登鸛鵲樓)> 2수는 가유호효(家喩戶曉), 즉 집집마다 알려진 불후의 작품이다.
신편 《천가시》의 인물 소개를 바탕으로 창작 상황을 재구성해 보았다.
예전에 한때 나는 이 시의 후반부 두 구절을 ‘내가 천 리 멀리 보기 위해 한 층을 더 올라
간다.’라는 정도로 이해를 했는데 그 이후 여러 책의 연구를 참조하고 생각을 해 보니, 이 대목은 현실에서 올라간다는 것보다는 가정해서 한 말로 보인다. 토를 단다면 ‘欲窮千里目인댄, 更上一層樓 (를/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 역시 이 시에서 인간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최대치를 담으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럴 경우 자신이 그 최대치를 본다고 하면 이는 벌써 최대치가 아니게 된다. 최대치는 허경(虛境) 속에 남겨 놓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서쪽 끝과 동쪽 끝의 시야를 아우르는 실경(實景)의 최대치를 그려낸 뒤에 다시 그 위에 허상의 한 층을 더 놓은 것이다. 앞 두 구에서 이미 극목(極目)을 드러냈으므로 뒤 2구에서 올라가는 것은 실제의 관작루가 아닌 것이다.
장려하게 해가 지고 있는 서쪽의 산과 동쪽 바다를 향해 저 멀리 흘러가는 황하의 물결을 장대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에서 웅혼하고 장활한 시인의 기백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안목을 더 확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층 더 높은 경계에 올라가야 한다는 인생 교훈을 다시 제시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다시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불굴의 기세와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시인의 삶의 자세가 더해져 있는 마지막 구절의 함축과 울림이야말로 이 시가 명시가 된 이유일 것이다.
이 시는 《당시배항방》에 4위에 올라 있다.
365일 한시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