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절반의 호화
회골을 멸한 것은 힐알사黠戛斯였다.
힐알사는 명목상으로는 철륵의 한 갈래였지만 사실은 백인이었다. 그들은 몸집이 크고 머리칼이 붉었으며 또 피부가 하얗고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인류학자들은 그것이 튜튼족(Teuton)의 체질적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게르만의 야만족이 당나라 제국에서 활약했던 것이다.
야만족은 세계의 역사를 다시 썼으며 힐알사도 그랬다.
하지만 힐알사는 회골을 산산조각 낸 이후에 어디론가 사라졌고 몽골인이 흥기하고 나서야 다시 역사의 무대로 돌아왔다. 그들의 후예는, 러시아에서는 카자크Cossack라는 이름의 용감한 기병이었고 중국에서는 카자흐哈薩克라는 부지런한 유목민이다.
할알사인이 언제 중국에 들어왔는지는 이미 고증하기 어렵다. 단지 그들이 한나라 때 견곤堅昆이라고 불렸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견곤의 풍속에 따르면 태어난 아이가 검은 머리일 때는 불길하다 여겼고 검은 눈동자일 때는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의 후예라고 간주되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진작부터 혼혈이었고, 또 그런데도 백인의 정체성을 고수했음을 알 수 있다.46
그러나 할알사인은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혼혈은 거대한 추세였기 때문이다.
그 추세는 오호십육국 시기에 시작되었고 수당 때에 와서 한층 더 심해졌다. 그 전까지는 통혼으로 인한 종족 변이일 뿐이었는데 나중에는 문화로까지 발전했다. 이민족, 즉 호인의 생활 방식이 의식주 각 방면에 영향을 미쳐 호인의 습속을 따라하는 것이 성행하였고 심지어 유행의 조류를 이끌었다.
그것은 호화胡化라고 불렸고 호풍胡風이라 불리기도 했다.
호화는 장안에서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그것은 언제나 수도가 유행을 선도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거기에 많은 호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사의 난 이후, 회흘의 장안 상주인구는 1천 명 전후였고 회흘인인 체하는 소그드인의 숫자는 또 그 배가 넘었다. 그리고 정관 연간에 돌궐인은 무려 1만 호가 넘어서 당시 장안 총인구 중 적어도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실로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46
더 중요한 것은 그들 중 부자이거나 신분이 높은 유력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페르시아의 왕자, 돌궐의 장군, 토번의 사절, 서역의 고승, 소그드의 거부, 회흘의 상인 등이 그 특수한 집단의 주류이자 중추였다. 그들은 장안과 낙양에 호화주택을 사고, 높은 누각을 짓고, 땅을 사고, 요직을 맡고, 가족을 이뤄 제국 수도의 엄연한 일원으로 살았다.
당나라의 상류사회 사람들은 황제의 친인척, 고관대작, 문인과 문객을 비롯해 모두 그 호인들과 교류했다. 그들은 국제무역의 중심이었던 장안 서시西市에 들러 정신이 쏙 빠졌고 호인들이 세운 고급 살롱에서 호화와 사치를 즐겼다. 그리고 각종 파티에 지칠 줄도 모르고 참석했는데, 거기에는 감미로운 구자악과 아름다운 호선무, 맛좋은 포도주뿐만 아니라 꽃과 옥처럼 고운 이민족 미녀가 있어 손님들의 시중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시인 이백李白은 일찍이 “가랑비 내리고 봄바람 불어 꽃 떨어질 때, 채찍 휘둘러 곧장 서역 미인에게 가서 술을 마시네.”(細雨春風花落時, 揮鞭直就胡姬飮.)라고도 했고 “떨어진 꽃은 다 밟히고 어디서 떠돌까, 웃으며 서역 미인의 술집에 들어가네.”(洛花踏盡游何處, 笑入胡姬酒肆中.)라고도 했다.
아, 이래서 이백은 “천자가 오라 하는데도 배에 안 오르고, 스스로 신은 주중선酒中仙이라고 말했”(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던 것이다.47
이백 같은 명사가 앞장을 섰으니 그를 따르던 팬들도 가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호인들의 생활 방식은 꽤나 자극적이었다. 마상격구는 남성의 힘을 보여주었고 호복胡服은 여인의 섹시함을 드러냈다. 전자는 페르시아인이 발명한 것으로 지금은 폴로라고 불린다. 후자는 소매가 좁고 몸에 달라붙게 마름질을 해서 최대한 여성의 신체 곡선을 두드러지게 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 스타일을 어느 시에서는 “회골 옷을 입고 회골 말을 타는 것이, 가는 허리에 가장 잘 맞네.”(回鶻衣裝回鶻馬, 就中偏稱小腰身.)라고 개괄하였다.48
이 모든 것이 장안 소년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켰다. 이세민이 일찍이 태자로 세웠던 이승건李承乾은 심지어 돌궐인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는 돌궐어로 말하고 돌궐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동궁 뜰에 천막을 치고 늑대 머리 깃발까지 꽂아 아주 제대로 돌궐 카간을 흉내 냈다.
그 흉내는 대단히 그럴싸했다. 이승건은 또 돌궐인과 흡사하게 생긴 이들을 데려와 양가죽을 입히고 머리를 땋게 해 돌궐 무사로 분장시킨 뒤, 자기는 카간으로 가장해 천막 안에서 죽은 척했다. 그런 다음, 그 배우들에게 명해 돌궐의 풍속에 따라 얼굴을 그어 피를 내며 대성통곡을 하도록 하고, 또 말을 탄 채 천막을 돌며 묵념을 하게 했다. 그때가 돼서야 이승건은 벌떡 일어나 앉아, “정말 이럴 수만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49
태자 전하가 이러했으니 당시의 기풍이 어땠는지 짐작할 만하다.
당나라의 여자들도 지지 않았다. 그녀들은 시종일관 ‘해외 패션’만 추종했다. 페르시아의 귀고리를 흉내 내 보요步搖라 했고, 인도의 어깨걸이를 흉내 내 건피巾帔라 했고, 중앙아시아의 머리 모양을 흉내 내 계퇴髻堆라 했고, 토번의 얼굴 화장을 흉내 내 면자面赭라 했다. 당연히 그녀들은 한 가지 스타일만 고집하지 않았으니, 장안은 분명 패션의 풍향계였다.
그녀들의 모자는 더더욱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모했다. 당 고종 이전에 여자들의 모자 차양은 천이었고 무릎까지 늘어졌지만, 나중에 망사로 바뀌고 목까지만 늘어졌다. 그리고 더 나중에는 호인들의 모자가 유행해 다들 얼굴을 드러냈으며 마지막에는 아예 모자를 안 쓰고 쪽머리를 내놓은 채 외출했다.50
결국 당나라의 여인들은 옷을 갈수록 덜 입었고 몸은 갈수록 더 노출했으며 또 갈수록 더 많은 이벤트에 참가했다. 그녀들은 심지어 남자옷차림으로 말을 타고 야외 나들이를 가거나 격구를 했다. 격구장에서 늠름하고 씩씩한 여자들이 종횡무진하며 아리따운 음성으로 소리를 지르면 구경하던 남자들이 호응하여 갈채를 보냈다.51
당나라의 남녀들은 다 ‘호인의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52
그것은 당연히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 고종 함형 2년(671), 조정은 풍속을 단속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애석하게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 혼혈왕조의 신하와 백성들은 이미 문화적으로도 혼혈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토번과 회골이 흥기하자, 여자들은 중원 여자가 마땅히 갖춰야 할 용모와 거리가 멀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굳이 회골 머리 모양과 토번 얼굴 화장을 택했다.53
이런 호화胡化는 전반적인 양상이었을까, 아니면 절반의 양상이었을까?
우선 절반이었다고 해두자!
하지만 절반의 양상이었다고 해도 당나라를 다채로운 사회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시 장안에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이슬람 국가에서 일반화된 조반(抓飯. 양고기를 섞어 만든 육반)을 먹을 수 있었고 개원 이후에는 한층 더 호식胡食이 유행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안 내 ‘서역 음식점’의 숫자는 아마도 오늘날의 상하이에 못지않았을 것이다.54
당연히 포도주도 절대 빠지지 않았다.
맛있는 포도주를 야광 잔에 따르면 아름다운 비파소리가 마시라고 재촉을 했다(葡萄美酒夜光杯,欲飮琵琶馬上催). 포도주는 당나라인과 관계가 대단히 밀접했다. 중국에 전래된 것은 한위漢魏 때였지만 직접 제조하기 시작한 것은 고창국 정복 이후였다. 당 태종은 심지어 양조 기술자를 친히 임명하고 본래의 양조법을 개량해 8가지 새 품종을 만들게 했다.55
그런 황제는 확실히 보기 드문 축에 속했다.
사실상 당나라에서 호인의 풍속이 유행한 것은 황제의 영향이 컸다. 장안에서 마상격구가 성행한 것도 당 태종이 먼저 그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는 아예 고수 소리를 들었으며 토번의 한 격구 스타보다 자기가 실력이 뒤진다고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다. 그 후로도 선종, 희종僖宗이 격구 선수였고 목종, 경종敬宗은 격구 팬이었으니 어떻게 격구가 유행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건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당盛唐 시기(당나라 시대는 흔히 초당初唐, 성당, 중당中唐, 만당晩唐, 4기로 나뉘는데 성당은 주로 현종 개원 원년[713]부터 숙종 상원 2년[761]까지를 가리키며 당나라의 최고 전성기에 해당한다)의 건축은 서아시아의 재료와 스타일이 유행했고 혹서기에 열기를 식히는 기술을 채용했다. 건축가는 교묘하게 처마에서 물이 흘러 내려가게 함으로써 실외의 열기를 차단하는 동시에, 흐르는 물로 바람개비를 돌려 실내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면 당연히 실내가 시원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당 현종은 꼬투리 잡기를 좋아하는 한 신하를 그런 시원한 전각으로 불렀는데, 결국 그 신하는 감기에 걸리고 배탈이 나서 크게 낭패를 보았다.57
그러면 그 기술은 또 어느 나라의 것이었을까?
놀랍게도 동로마 제국의 기술이었다.58
실제로 수당 시대에 이른바 호인은 결코 중국의 북방과 서북의 소수민족만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페르시아인, 인도인, 아랍인, 로마인까지 다 포함했다. 그들은 신, 구 당서에서 고창, 언기, 구자, 소륵, 우전과 마찬가지로 서역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단지 돌궐, 회골, 토번보다는 중요성이 덜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일종의 세계적인 시각이었다.
수당이 유독 세계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혼혈왕조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혼혈아였으므로 남들이 무슨 종족인지 크게 괘념치 않았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중화임을 자처했고 또 중화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일방적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을 다 중화의 체계 안에 편입시키려 했을지라도 말이다. 당 태종은 심지어 다소 득의양양하게 “짐은 석 자짜리 용천검龍泉劍으로 사해四海를 통일했으니 진시황, 한 무제보다 못할 것이 없지 않은가?”59라고 말했다.
그것은 당연한 말이었다.
사실 진한 문명도 세계성을 띠기는 했지만 수당이 훨씬 더 세계적인 대제국으로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쳤다. 유일하게 보완되어야 했던 것은 당나라가 세계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세계도 똑같이 당나라에 영향을 끼쳐, 그 영향이 쌍방향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세계적인 문명은 결코 당 태종과 당나라의 힘만으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수 양제의 공로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