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어린잎을 추억하며憶茗芽/당唐 이덕유李德裕
谷中春日暖 골짜기 안 봄 햇살 따뜻하리니
漸憶掇茶英 자꾸 찻잎 따던 일 생각 나네
欲及清明火 청명 때 불로 차 달이려 했지
能銷醉客酲 취객의 숙취를 가시게 하니까
松花飄鼎泛 송화는 차 솥 안에 날아와 앉고
蘭氣入甌輕 난향은 차 사발 속에 스며드네
飲罷閑無事 마시고 난 뒤 일 없이 한가하여
捫蘿溪上行 덩굴 잡으며 계곡 가를 거닐었지
전에 어떤 분이 나에게 시를 번역해 소개하면 되지 설명을 그렇게 길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에도 가끔 내용이 좋은데 글이 너무 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한시나 산수화, 글씨, 누정 등은 그 배경 지식이 없이는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요즘에도 의미 있는 시문이나 건축물, 그림 등은 가급적 관련 지식이 있거나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야 깊은 이해가 가능하지만 전통시대의 이러한 것들은 관련 지식이 없이는 이해가 거의 어렵다고 본다. 하기야 옳고 그른 것이나 어느 것이 더 깊이 있는 것인지 분간하지도 못하고 떠드는 것이 많은 오늘날에는 이런 말이 무색하기만 하다.
내가 이 연재에서도 설명을 붙이는 것은 어디 있는 것을 슬쩍 가져다 옮긴 것들이 아니다. 기존의 학설은 최대한 참조하려고 하며 중요한 논거는 그 사람이나 책을 소개하고 있다. 의미 있는 설명은 대개 여러 고전을 찾아서 알아낸 것들이며 구절 풀이 등은 오랜 기간 한문을 다룬 공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나는 이 한시를 많은 사람들이 대강 이해하면서 자신의 치장용으로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가급적 정확하고 깊이 이해하고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간혹 설명이 긴 것은 내가 그만큼 연구를 많이 한 것이며 짧은 것은 아는 것이 적거나 내가 바빴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더 심도 있는 내용으로 수정하려고 한다. 이 시 역시 배경 설명이 필요해서 서두가 길었다.
이덕유(李德裕, 787~850)는 당나라 무종(武宗) 때의 재상으로 하북성 찬황(贊皇) 사람이다. 그는 정치 분야에서 업적이 두드러지는데 동시대의 우승유(牛僧孺)와 각각 다른 당파를 이끌며 극심한 정쟁을 이어갔다. 양계초는 이덕유를 관중(管仲), 상앙(商鞅), 제갈량(諸葛亮), 왕안석(王安石), 장거정(張居正)과 함께 봉건 시대 6대 정치가로 꼽았다. 아마 이들의 개혁적 노력을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전당시>>에는 이덕유의 전(傳)이 상당히 길게 실려 있는데 높은 벼슬을 하는 와중에도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시문에 대한 가치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덕유는 평천별서(平泉別墅)를 경영했다. 평천별서는 낙양성 남쪽 30리에 있는데 지금의 용문 서쪽 산기슭에 해당한다. 면적은 둘레가 30리 정도 되는데 그 안에 폭천정(瀑泉亭), 유배정(流杯亭), 동계(東溪), 서원(西園)등 100여 채의 누정이 있었다. 이 평천정은 ‘아침에 평천별서를 산책하기[平泉鳥游]’가 낙양8경의 하나이며 지금은 모두 폐허로 돌아갔고 평천사라는 절이 있다고 한다.
이덕유가 쓴 <초여름에 산 속에 살고 싶어[初夏有懷山居]>의 시에 딸린 자주(自註)에 이덕유는 “시종신을 지내고 변경 지역을 맡거나 재상과 장군의 직임을 맡느라 30년 동안 이 곳에 가서 살지 못하고 이 곳의 풍경에 시를 붙여 모두 돌에 새겼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추억하다[憶]’는 말로 시작하는 6수의 시가 나오는데 이 시는 바로 그 마지막 시이다.
따라서 이 시는 30년 동안 못 가본 자신의 별서에 대해 쓴 연작시의 하나로 그 곳에서 차를 따서 달여 마시던 추억을 회상하여 쓴 시이다. 이런 배경을 모르고 이 시가 번역되고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비로소 1구에 나오는 ‘골짜기’가 지금 자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바로 평천별서에 있는 골짜기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골짜기 안 봄 햇살 따뜻하니”가 아니고 “골짜기 안 봄 햇살 따뜻하리니”가 되는 것이다. 한문의 문리는 문장을 보고 단순히 읽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그 구절과 글자가 어떤 성격과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인 것이다.
3구에도 약(若) 자를 쓰지 않고 욕(欲)자를 써서 3, 4구가 도치구임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토도 ‘하면’이 아니고 ‘하니’가 되어야 한다. 숙취를 가시게 할 정도로 높은 효능을 얻기 위해 곡우 전에 차를 따서 청명 무렵에 차를 제조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에는 중춘(仲春)에 불을 피우는 것을 금하다가 청명에 버드나무, 느릅나무 등으로 새로 불씨를 만들어 보급한 국가적인 풍습이 있었다. 청명화(淸明火)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그리고 아래 5, 6구에서는 차를 제조하여 달여 먹을 때의 운치어린 경관을 묘사하여 2구의 점억(漸憶)이란 말과 연결하고 있다. 차를 달이는 솥에 주변의 소나무에서 송화가 날아와 자욱이 앉고 달인 차를 사발에 담으면 주변의 난초에서 향기가 스며든다고 말한다. 이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목석이 아닌 바에야 이런 것을 어찌 시로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너무도 바쁘지만 30년 전 당시는 한가해서 차를 마셔 원기를 돋운 다음, 계곡 옆으로 난 산길을 덩굴 등을 헤쳐 가며 거닐던 추억을 지금 더듬고 있는 중이다.
이 시가 현장에서 쓴 시가 아니라 30년 전의 일을 회상해서 쓴 시라 더욱 아련한 추억이 묻어난다. 시만 읽어도 그 분위기의 그윽함이 전달되지 않는가? 차를 다룬 시 중에 매우 뛰어난 시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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